383. 챕터51. 뽑아먹다 (5)“
주치칸국(킵차크 칸국)을 엮자?”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음...”
이천이 은근한 말투로 되묻자, 이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춘보가 펼쳐놓은 지도 위에 은화를 하나씩 올려놓으며, 더욱더 상념에 빠져든다.
‘주치칸국을 이용한다... 흐음.’
조선은 서역에 대해서 아는 게 쥐뿔도 없었지만,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곧장 알아차렸다.
대놓고 분위기가 격양되고 뒤숭숭하니 모를 수가 있나. 만나는 상인마다 은근히 자기편을 들라고 꼬드기기도 했고.
동로마제국과 해상국가가 손을 잡고 오스만제국과 대립하고 있고, 내부정리를 하기 바쁜 킵차크 칸국과 티무르제국은 관망을 하고 있는 중.
‘그렇다면...’
“개혁이 시작된 주치칸국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게 뭐지?”
“식량입니다.”
“곡물입니다.”
이인이 묻기 무섭게, 이구동성으로 답이 터져 나왔다.
“허면 주치칸국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일에, 어느 세력이 더 도움이 될까?”
“로마국과 해상국가 아니겠습니까? 당장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이곳 앞바다와 먼 지중해라는 바다의 제해권은 해상국가가 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음 물음 또한 큰 반대의견 없이 만장일치였다.
동로마제국은 아직 콘스탄티노플과 그 일대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최후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금각만의 방어도 여전히 건재했는데, 여길 막아버리면 흑해와 지중해의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게다가 오스만제국은 아직 해군력 증강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어서, 여전히 해상국가의 해군력이 오스만제국을 압도하는 상황.
“더군다나 오스만국의 땅이 크다고는 허나, 더 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는 쪽은 해상국가 아니겠습니까? 식량 또한 더 쉽게 조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오는 식량 중에선, 아라곤 왕국이라는 곳에서 오는 식량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더군요.”
이탈리아 남부에는 지금 아라곤왕국이 기세를 떨치고 있었고, 이탈리아반도의 식량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칠리아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래의 시칠리아는 관광지 말곤 별거 없어 보이지만... 농업과 같은 1차 산업이 주류산업인 이 시대엔, 그곳이야 말로 꿀땅이나 다름없는 곳.
“해로가 그렇다면, 육로는?”
“티무르 칸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원교근공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반드시 막으려 들 겁니다.”
지금은 서로 내부정리를 하느라 소강상태지만, 티무르제국은 한 때 킵차크 칸국과 오스만제국을 둘 다 박살내버린 나라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티무르제국은 샌드위치 신세가 될 테니, 이간질을 하면 모를까 둘이 손을 잡는 걸 가만 놔둘 리가 없다.
“또한 로마국과 해상국가는 하나라도 더 자기편으로 만들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주치칸국이 움직인다면 모두가 이득이 되는 일이 될 겁니다.”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손을 잡으면, 티무르 칸국의 압박도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하나둘씩 첨언을 보탰다.
‘충분히 일리가 있어. 그들이 조바심이 난 걸 보지 않았나.’
이인도 이곳에 머물 때, 서방상인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하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킵차크 칸국이 나서면 보나마나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다.
“음... 솔직히 아국 입장에서도 오스만국보다는 해상국가와 거래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습니까?”
“응?”
“...?”
생판 연관도 없는 조선이 여기서 이득을 취한다는 말에, 모두의 눈이 상업부의 이견기에 집중됐다.
이견기도 개혁 초창기부터 의주, 호주에서 근무하던 호조관원이었는데, 그는 재정부가 아닌 신설된 상업부로 빠졌고 그간의 경력을 살려 여기까지 오게 됐다.
“다들 얼추 짐작하고 있겠지만, 아국물산과 오스만국이 취급하는 물산 중에는 겹치는 품목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니 오스만에 파는 것보단 해상국가에 파는 게 훨씬 이득이지 않습니까?”
“흐음.”
“그건 그렇긴 하지.”
“더불어 당장 이 땅도 본래는 제노바의 땅이었으니...”
익히 몸으로 경험했던 터라, 다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오스만과 해상국가가 싸우는 이유는 오스만이 지중해를 차지해 동방무역로를 장악하려고 하기 때문 아닌가.
그 수량이 얼마 되지 않지만... 오스만은 인도를 거쳐 동방물산을 수입해서 유럽에 팔아넘기고 있기 때문에, 조선입장에선 경쟁자나 마찬가지지.
그들에게 팔아봐야 어차피 유럽상인에게 되팔 텐데, 그럴 거면 뭐하려 두 번 일을 하면서 경쟁자의 배를 불려주겠는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나쁠 건 없을 것 같군.”
“옙!”
이인이 긍정의 답을 내놓자, 이천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 미소를 짓고 말았다.
“대신 수로정비는 확실히 준비를 해놔야 할 걸세. 그게 더 중요한 일이니까.”
“걱정 마시지요. 배를 한 척이라도 더 팔려고 발악하고 있으니, 베네치아 상인들이 발 벗고 나서서 저흴 도와줄 겁니다.”
“그래야겠지.”
이인은 아이처럼 좋아하는 이천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나이도 적잖게 먹은 인물이 저렇게 좋아하고 있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다음은?”
이인이 이천에서 시선을 떼자, 옆에 있던 청년이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원래 역사에서 신기전을 만들었던 박강.
어린 시절부터 화기에 관심을 보인 그는, 성년이 되기 무섭게 초창기 착호군에 들어와서 몽골원정에 참여했었다.
착호군을 전역하고 나서는 군기시로 적을 옮겨 화포개량에 힘써왔고, 그 후 공야사를 비롯한 각종 부서가 공업부로 통폐합되면서 다시 공업부로 적을 옮겼다.
이곳에 온 관원들 중에서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경력은 출중하니, 공업부 대표로서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
“이곳의 야금술과 기술력은 천차만별이더군요. 아국보다 못한 것도 많지만 한편으론 나은 것도 있습니다.”
그는 상인을 통해 구해온 여러 물건들을 풀어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서방이 동방의 문명을 뛰어넘지 못했다.
단순히 머릿수로 밀리는 걸 넘어서, 기술력자체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상황.
거기에 통합된 나라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발전을 이룩하다보니, 뭐라 한마디로 특정하는 건 너무 힘들다.
“분열의 역사가 오래 되서 인지, 아니면 종교와 문화가 달라서 인지 모르겠는데... 어째 특정지역에서만 특정된 분야가 유독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옛 대진국에 자리 잡은 해상국가들이겠지?”
“그들이 대표적이고, 오스만국이나 로마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음... 어쩌면 지금쯤 남주도에서 한창 공략하고 있을 남방소국과 사정이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하지.”
“맞는 말이야.”
박강의 의견에 다들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탈리아반도에선 도시국가가 발달됐으니, 당연히 특정 분야에 집중해 기술우위를 점하고, 그걸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경향이 많지 않나.
그렇다보니 모든 방면에서 고르게 발전한 게 아니라, 각 해상국가마다 특기별로 두각 되는 점이 달랐다.
“중점적으로 봐야할 건, 역시나 야금술입니다. 이곳의 제련기술은 아국보다 못하면서도 뛰어난 면이 있더군요.”
박강은 그리 말을 하고서 장호를 바라봤고, 호위연대병을 지휘하는 장호가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만들었다는 강철갑옷을 확인했다지?”
“그렇습니다. 확실히 아국의 갑옷보다 나은 점이 있었습니다. 무기류의 경우에는 품질이 중구난방이라서 따질 바가 못 되지만, 몇몇에서는 아국 무기를 뛰어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재료의 탓도 있겠지만 기술의 역량도 있겠지요.”
“맞습니다. 갑옷장인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배울 점이 있더군요.”
금속 제련의 전문가인 박강이 그리 못을 박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또 오스만국에서 흘러들어온 무기들 중에서 명품이라고 자랑하는 무기들이 몇 있었는데, 접쇠방식으로 만든 건 같았지만 품질이 뛰어난 게 몇 있더군요. 기술이 엄청나게 차이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아마도 철광석이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박강은 그리 말을 하고선, 다마스커스 강으로 만들어진 휘어진 단도를 내밀었다.
허나 반응은 심심했다. 눈을 어지럽히는 물결무늬가 검신에 흐르고 있건만, 다들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음.”
“흐응.”
“이건 아국도 만들 수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에도 품질이 차이가 나니, 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기술이 숨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다들 착호군 시절에 발전된 도검을 많이 봐왔기에, 박강이 말하는 바를 곧장 알아들었다.
물결무늬를 일으키는 접쇠방식은 서방이든 동방이든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고, 조선도 그걸 사용하고 있었다.
미래에는 일본도가 접쇠방식으로 만들어져서 유독 명검이라는 낭설이 떠돌지만, 이 시대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일본이 접쇠에 열을 올린 건,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사철의 품질이 워낙 떨어져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방법이었다.
사실. 들인 노력에 비해서, 품질이 엄청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
연오랑이 등장하기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은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되는데... 여기선 조금 나은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사실 연오랑이 만든 토법고로 제련소는 이 시대의 기술력을 뛰어넘는 오버테크놀로지가 아니다.
숙련된 대장장이가 피땀흘려가며 망치질한 강철은, 토법고로에서 뽑아낸 강철 못지않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게 혁명을 일으킨 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피똥 싸며 만들었어야 할 강철을 용광로에서 균일한 품질로 대량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
여기서 생산된 강철괴는 이미 품질이 좋기 때문에, 적은 노력과 시간투자로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강철괴를 다시 정련해서 물건으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사실 아국은 이들이 만든 강철갑옷을 만들지 못하지 않습니까?”
“군부에서 사용하는 강철장갑과 각반은 흡사한 걸로 보였는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흉갑에 있어서는 확실히 차이가 보였습니다.”
박강은 이인의 반문을 가볍게 물리쳤다.
연오랑은 강철기사를 꿈꾸며 지난 세월동안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 서방의 건틀렛과 흡사한 강철장갑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허나 흉갑은 무리였지.
판금갑옷은 편견과 달리 그 두께가 1.2~2mm밖에 안 돼서 기존의 갑옷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방어력이 뛰어난 건, 강철의 질과 갑옷의 구조설계, 열처리 과정이 들어가기 때문.
이건 연오랑도 알 수가 없는 거라서, 맨땅에 헤딩을 해가면서 연구해오고 있었지.
“허면 그 기술을 뽑아낼 수 있다는 건가?”
“예. 충분히 가능할 걸로 보입니다.”
“오...”
“좋군요.”
다들 착호군과 관련이 깊어서 일까? 군사에 있어서도 아는 바가 있는지, 하나같이 감탄을 토해냈다.
“다른 분야에서도 특기할 게 있습니다. 이것 보시지요.”
박강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미리 회의실에 들여 놓았던 물건의 장막을 휙 잡아당겼다.
“오...!?”
“설마?”
“이거...!?”
“헤헤.”
그는 함박웃음을 지어댔고,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지고 말았다.
이건 그들이 지겹도록 봐왔던 물건과 흡사하게 생겼으니까.
“시계!?”
“예. 전하께서 그렇게 연구하시던 그 시계가 맞습니다.”
“오...!”
세종이 톱니바퀴를 이용한 시계탑을 연구해왔던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나. 그것보다 훨씬 작고 정밀해 보이는 시계가 그들 눈앞에 있었다.
“구조는 엇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꽤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시계에 천문을 넣어서 천문시계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오차가 심해서 자주 보수를 해야 하지만, 어찌됐건 만들었지 않습니까?”
“천문시계라?”
“대단하군.”
아무리 자본유학에 빠져들었어도, 관원들에게 농사는 언제나 중요한 법.
천문학이 발달한 이유는 절기를 파악해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였으니, 그걸 시계와 결합한 천문시계를 만들었다는 말에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이인조차도 평정심을 잃을 정도였다.
“그... 천문시계라는 걸 직접 볼 수 있나?”
“무리입니다. 아국의 시계만큼 엄청나게 거대한 물건이라서, 차라리 새로 만들면 모를까 옮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박강이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훑자, 하나같이 전염되어 아쉬움을 흘려댔다.
“그럼 시계장인을 구할 수 있는 건가?”
“어렵긴 하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국으로 귀화시키는 건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구조를 배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온 관원 중에서도 시계를 만드는 일에 도전했던 이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박강은 히죽 웃었고, 모두는 그 속뜻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프로젝트에 연오랑이 내건 포상금은 엄청났고, 이건 관원들조차도 수십년은 일해야 벌 수 있던 금액 아니었나.
금속을 다룰 줄 아는 조선장인들 중에서, 시계프로젝트에 발을 내밀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방에서 시계를 만든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고 하더군요. 큰 도시마다 시계탑과 천문시계를 세우는 게 유행이라서, 시계 장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미 14세기부터 유럽 전역에 성당과 시청사를 중심으로, 공공 시계탑을 세우는 게 유행하게 된다.
물론 오차가 커서 물시계, 해시계와 겸용해서 조정을 해줘야 했지만, 어찌됐건 무섭도록 퍼져나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