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챕터51. 뽑아먹다 (6)
이유야 뭐 별 게 있나.
누가 봐도 알아서 돌아가는 기계식 시계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심어줬고, 그걸 그대로 성직자와 권력자에게 권위를 넘겨주는 흐름을 만들어줬지.
그 외에 흑사병이 돌고난 이후로 인구가 급감해서, 인력을 대체할 기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것도 있을 거다.
어찌됐건 시계탑을 만들 줄 아는 장인을 수소문하는 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시계기술은 곧 수학 및 공학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이론적으로도 조선의 신학문을 발전시키는 거름이 되어줄 거다.
“맘껏 지원할 테니 반드시 성공해야할 걸세. 이건 전하께서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사안이니까.”
“물론입니다.”
박강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 다음으로 살펴야할 건, 풍차와 방앗간. 음... 이들이 길드라 말하는 것입니다.”
“길드에 대해선 들어봤네. 아국의 조합과 비슷하다지?”
“음.”
“흐음.”
이인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길드와 조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이 많아서, 일률적으로 판단하기가 애매했기 때문.
“아국의 조합에 비해 권한이 많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도시권력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끄응.”
“이러고도 나라가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지요.”
“그만큼 중앙집권이 되지 않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들 한마디씩 토를 달았다.
명확하게 구분된 조정조직에서 생활한 조선인들에겐, 해양국가의 도시는 좀처럼 익숙해지기가 힘들지 않나.
유럽에선 봉건제가 조금씩 깨지려고 하고 있었으니,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는 자유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쉽게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정보가 부족해서 정확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사실상 길드는 아국 기업의 하위단계로 보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러하오.”
“맞는 말씀이외다. 길드라고 불러서 그렇지, 사실상 상인, 수공업자 무리가 힘을 합친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지 않소이까. 그에 비하면 명확한 주체가 있는 기업이 더 나아보입니다.”
“물론 개별기업과 비교하면 덩치와 크기에 있어서 차이가 나겠지만, 아국 또한 동종 기업이 여럿 존재하니... 크게 보면 차이가 없지 않겠소?”
다들 한마디씩 덧붙이며, 박강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게 마냥 조선에 대한 우월감에 차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절대왕정이 성립되어 중상주의 정책이 진행되고, 거대 자본 세력이 등장하면서 길드의 입지는 확 줄어들지 않나.
조선은 어떤 면에선, 길드 단계를 건너 뛴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국이 길드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연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기술을 뽑아내려면 길드와 직접 거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듣기로 길드도 아국기업과 흡사한 분업화를 이뤘다고 들었습니다.”
“예.”
누군가 한마디 덧붙이자, 박강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분업화라고는 하지만 조직과 제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테니 배워야 할 테고, 길드라는 건 결국 도제식 방법을 확장한 것 아닙니까? 아국이 도제로 들어갈 순 없으니, 그들의 기술을 빼오려면 직거래를 하는 게 가장 편할 겁니다.”
“그 길드라는 것도 어찌됐건 돈을 쫓는 상인일 테니까?”
“그렇습니다. 돈을 쫓기 때문에 길드는 기술을 독점하고 장인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길드에 속하지 않는 장인을 구하는 건 쉽지가 않은 일이니, 상인들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길드와 손을 잡는 건 어찌 보면 필수적인 수순일 겁니다.”
“상인들 또한 상인길드라는 걸로 묶여 있다고 하는데, 쉽게 가능하겠나?”
“듣기론 길드마다 독점하고 있는 분야가 다르다고 하더군요. 어차피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니, 아국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소개비를 받는 쪽을 택하지 않겠습니까?”
“음.”
“하긴...”
“일 리가 있네.”
이인이 먼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이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건, 박강이 밀라노의 갑옷상인을 이미 만나봤기 때문.
강철갑옷은 밀라노의 갑옷길드에서 대량생산한 물건이었으니, 그들을 통해 다른 길드의 조직과 사정 또한 알아낼 수 있었다.
“풍차와 방앗간을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건 아국에게도 유용하고, 주치칸국에게도 필요한 작업입니다.”
“방앗간이라...”
“거대수차와 비슷한 풍차가 사용된다는 말은 들었소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한마디씩 덧붙인다.
풍차와 방앗간이 중요한 건, 서방의 주류식량이 밀이기 때문.
쌀은 도정 후에 알아서 가마솥에 밥을 지어먹으면 끝이지만, 밀은 밀가루로 만들어서 빵을 구워먹어야 한다.
밀가루를 만드는 일, 빵을 구울 수 있는 화덕을 만드는 일.
이건 일반 가정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유럽 영주들이 방앗간을 쥐고서 권력을 행사했고, 제과사나 제빵길드라는 해괴한 길드가 등장할 정도였지.
“아국이 이들이 기술을 받아들여하는 이유는 다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박강은 그리 말을 하고서 농업부의 최만리를 바라봤고, 최만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던졌다.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도 평양 이북, 함흥 이북에선 이앙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품종개량 및 농업기술이 부족한 이 시대엔, 벼농사를 짓는 건 한계선이 있었다.
아예 벼를 재배하지도 못하니 쌀밥을 먹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고, 함길도나 평안도 사람들은 물론 귀화한 여진,몽골인들이 괜히 조선에 빨리 흡수된 게 아니지.
“아국도 북방에서 밀의 재배가 늘어가고 있으니, 당연히 이곳 기술을 뽑아내야 하겠지요.”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조선이니, 쌀농사가 안 되면 기존처럼 보리,수수,조,콩 등을 심어야 하는 건 당연.
그런 와중에 수확량이 많은 밀에 집중하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일 거다.
“그래서 방앗간과 풍차 기술이 중요하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더불어 주치칸국 입장에선 아국보다 더욱 시급하겠지요.”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기술을 익힌다면, 더욱더 칸의 호의를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모로 필요한 일입니다.”
다들 확신을 더해 말을 내뱉었다.
킵차크 칸국에서도 밀을 주식으로 삼는 건 마찬가지.
루스인 노예를 통해 밀밭을 엄청나게 개간했으면, 당연히 이걸 밀가루로 만들어 배분해야하지 않겠나.
유럽영주가 방앗간을 독점해 권력을 유지한 것처럼, 이곳에서도 방앗간은 칸의 권력과 행정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또 다른 건?”
“기타 수공예기술이 있는데, 이 또한 장인을 수급해 배우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주치칸국 관원들도 관심을 갖는 사안이라서 쉽게 될 것 같습니다. 오스만국의 수공예기술이 뛰어난 편이긴 한데, 장인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아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음...”
“아마 지금쯤이면 바다 건너의 서방에도 우리의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상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기술도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박강의 희망찬 의견에 다들 같은 마음을 품었다.
이 땅이 비록 지금은 유목국가가 되었지만, 몽골제국이 휩쓸기 전에는 알아서 잘 굴러가던 곳이었다.
나름 잘하는 게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은,금으로 만든 수공예품.
몽골제국에 의해 다 박살나서 옛 기술을 복원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킵차크 칸국 입장에선 비단길무역 말고 주 먹거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모피에 관심을 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들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는 중이지.
박강의 뒤를 이어 말을 받은 건, 옆에 있던 장호.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조정관원이 끼어들 틈이 없지만, 그래도 이건 기술에 관한 회의 아닌가. 더불어 대부분이 착호군을 경험했던 터라, 딱히 이상하지도 않았다.
“어떤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국에 비해 우월한 점은 찾지 못했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습니다.”
“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흐음. 당연한 건가?”
장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이런저런 의견이 흘러나왔다.
개혁 전과 후의 조선은 완전히 다른 나라고, 군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애초에 상비군으로 기병을 4만 넘게 굴리는 나라는 전 세계를 통틀어 조선밖에 없으니, 비교하는 게 웃기는 일이지.
중화와 사대를 떨쳐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국이라 생각했던 중국을 사정없이 두들겨 팬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터라, 관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감을 드러내고 말았다.
땅 넓고 사람 많은 중국에 비하면, 냉정하게 말해서 잘게 찢어진 서방은 체급이 뒤떨어지는 게 사실이니까.
“그간 지나온 소小칸국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장수준이나 훈련수준, 생활수준 모두 올량합3위나 북원잔당과 크게 다를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겠지.”
“맞는 말이야.”
이 또한 오면서 눈으로 똑똑히 봐서 안다.
“이곳. 주치칸국, 티무르칸국, 오스만국, 로마국, 해양국가, 루스인이라 불리는 포로들이 끌려오고 있는 루스국과 그 옆의 서방왕국까지. 모두가 다양한 병종과 편제를 운용하고 있지만, 특이점이 있는 개별무기류에 대해선 뽑아낼 게 있어도... 다른 부분에서는 나아보이는 점이 없었습니다.”
“오...”
“과연. 과연.”
장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다들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장호는 과거 무과에 합격해 내금위에 들어갔다가, 착호군이 창설될 때부터 기사대에서 쭉 머물다가 지금은 금군에 들어간 인물.
조선의 군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니, 그의 평은 틀리지 않을 거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 시대에 상비군을 굴리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
그럼에도 연오랑이 군부창설을 감행한 건. 이런 미친 짓을 감당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체질개조를 이어가 조선의 체급을 억지로 끌어올리려고 했기 때문 아닌가.
그럼에도 안도의 눈빛을 자제한 이인이 질문을 던졌다.
“화포는 어떻지?”
“화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의 화포는 중국의 화포보다도 떨어지더군요.”
이걸 또 용케도 구해왔는지, 그는 밖에 있던 부하를 시켜서 큼지막한 청동통을 들고 오게 했다.
“이게 이곳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소형 화포입니다.”
“화포치고는 너무 작은데?”
“총통이라고 보기에는 또 너무 크고.”
관원들의 말처럼 어중간한 크기를 가지고 있던 터라, 다들 비슷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장호가 보여준 물건은 핸드캐논으로, 말 그대로 대포를 축소화 시켜서 만든 물건이었다.
야전에서 사용하기 보다는 보통 성벽에 걸어놓고 수성용으로 쓰는 물건이었지.
“모두 맞는 말입니다. 듣기로 바다 건너 서방에선 공성포를 만들어 사용한다고도 하는데, 아국의 야전화포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야전화포야 당연히 그렇겠지. 공성포는?”
“실물을 보지 못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정보로 봐서는 아국의 공성포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황소를 이용해서 끌고 다니고, 포탄 또한 돌이며, 제대로 된 포가도 없다더군요. 이 또한 상인이 구해오기로 했으니, 곧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이인은 설명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몽골제국에 의해 화기가 본격적으로 유럽에 전파됐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개인화기는 총통과 흡사한 핸드캐논으로 발전했고, 화포는 초창기엔 별 볼일 없다가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공성포로서 제 역할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
하지만 조선의 야전화포는 시대를 거스른 물건이다.
기병대의 속도에 맞춰서 야전에서 사용하게 만든 물건이니, 당연히 서방화포와 비교하면 안 된다.
“어떤가?”
이인이 박강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속뜻을 알아차리고서 냉큼 입을 열었다.
“화포 실물을 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물건 정도라면 아국의 화포주조기술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청동주조기술은 원래 조선이 뛰어났으니 화포제조기술이 뛰어난 건 당연. 철제화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화포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다.
“그럼 공성포도 마찬가지겠군?”
“그렇습니다. 애초에 사석포로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지요.”
공성포는 야전화포보다 크기가 크니, 당연히 주조기술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법.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조선은 일찌감치 돌탄을 포기하고 철탄과 장군전을 쓰고 있지 않나. 사석포는 솔직히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이다.
“그래도 우리가 모르는 기술이 있을지 모르니,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화포장인을 구하는 게 쉽게 되겠나?”
“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긴 아국과 사정이 많이 달라서 말입니다.”
박강은 긴가민가하면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던졌다.
유럽은 아직 봉건영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서, 지들끼리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백년전쟁조차 아직 끝나지 않아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고.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각국 간의 교류가 활발해서 화포장인들도 돈을 받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고 하더군요. 상인을 통한다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용병처럼 말인가?”
“장인이니 직접 전장에서 싸우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걸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화기장인을 국가기밀로 취급하던 조선입장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요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