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 챕터52. 판을짜다 (1)
“당장 대체하는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방식에 서방의 방식을 합하면 효과가 있겠구려.”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혼합지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것이 다 들어가는데, 이게 포함되면 적어도 색에 있어서는 더 밝아질 겁니다.”
“이제 이 우중충한 공책은 그만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내뱉자, 다들 냉큼 고개를 끄덕여댔다.
혼합지는 종이를 최대한 싸고 많이 만들기 위해서 탄생한 물건. 연필로 쓰기에 적합한 종이가 된 건, 어찌 보면 부수적인 효과였지.
지금도 대마, 저마 등이 들어가고 있으니, 아마가 추가되는 건 어려울 게 전혀 없다.
“다음으로 살펴볼 건, 밀입니다.”
“음.”
“그거야 뭐...”
이 또한 마찬가지. 모두는 군말 없이 동의를 표했다.
“이곳은 밀을 주식으로 삼고 있어서, 중국이나 아국의 밀보다 훨씬 품종이 다양하고 재배방식 또한 다양하더군요. 특히나 아국의 밀에 비해 크게 자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확실히 특징이 다른 것 같아 전부 가져가 볼 생각입니다.”
“요리법도 마찬가지겠지요?”
“예. 아까 말했던 것처럼 방앗간과도 연관된 사안이니,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에서 밀은 주식에서 한참 먼 작물이었고, 북방에서 밀을 키운다고 해도 그 요리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흘러온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
허나 이곳은 밀을 주식으로 삼은 역사가 오래 되서, 당연히 온갖 형태의 빵과 제과를 만들어 먹고 살지 않나.
조선에 가져갈 수 있다면, 북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아국의 북방에서도 잘 자랄 품종이 있기를 바라야겠군요.”
“여기서 키우는 품종이 한 두개가 아니니, 그 중에 하나쯤은 성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국의 품종과 결합하면 더 나은 품종이 나올 겁니다.”
“그럴 겁니다. 얼핏 봐도 이곳의 밀은 아국의 밀보다 키가 큰 것 같아 보였는데, 개량을 하면 뭐든 나오지 않겠습니까?”
다들 본 게 있어서 그런지 한마디씩 덧붙였다.
조선의 밀은 앉은뱅이 밀이라고 해서 키가 작은 품종인데... 쓸모없는 성장 대신 낱알을 더 많이 만들고, 바람의 영향도 덜 받아서 많은 낱알을 달고도 쓰러지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수확량이 많은 품종을 교접하면 더 많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지.
물론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말이다.
“다음으론 생초입니다.”
“생초? 몽골초원의 생초와 또 다른 품종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마도 원나라 시절에 이곳의 품종이 북방으로 유입된 거 같은데, 이곳이 원류라서 그런지 더 다양한 생초가 있더군요.”
“오...!”
“하긴, 이들도 몽골처럼 생초를 많이 먹여서 키울 테니, 그간 나름 좋은 생초를 길렀겠지요!”
“맞습니다. 사람 먹기에도 부족한 곡물사료를 구하기 힘들었을 테니, 자연히 생초를 많이 먹이지 않았겠습니까?”
모두는 최만리의 설명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생초는 어차피 풀인데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나 싶겠지만, 지금 조선에게는 생각보다 많이 중요한 물건이었다.
조선은 전례 없이 많은 말과 가축을 키우고 있고, 이들이 먹어치우는 사료양도 엄청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곡물생산량을 늘리고, 백성들은 곡물섭취를 줄이고 생선 등의 대체식품을 먹었지.
그럼에도 부족해서, 초지를 늘려 북방에서 유입된 생초를 먹여서 키우는 중이었다.
이곳에는 조선에 없는 클로버 계열의 생초가 많이 있었는데, 킵차크 칸국의 유목민들도 바보가 아닌 터라 좋은 초지를 찾아서 골라 먹이고 있었다.
“더불어 생초 중에선 지력을 회복시키는 데 효과가 있는 품종도 있더군요. 이미 이곳과 서방에서도 널리 쓰이는 품종이었습니다.”
“오호라!”
“그럼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요. 안 그래도 상품작물을 많이 기르면서 휴경을 해야 하는 땅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곳의 생초를 키우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분명 그럴 겁니다.”
다들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목화나 사탕수수, 그리고 이제 슬슬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인삼밭 등은 거름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해서, 필연적으로 휴경을 해줘야만 했다.
다만 그 땅을 그냥 잡초가 번지게 놔둘 수 없는 노릇이라서, 각 기업들은 목마장과 계약해 휴경 동안 초지로 대체해서 사용하곤 했는데... 만약 휴경 중에 지력을 더 빨리 회복시켜 줄 있는 생초가 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다.
“비슷한 걸로 귀리와 호밀도 있습니다.”
“귀리는 아국에도 있는 걸로 아는데...?”
“아국의 귀리는 다른 상품작물에 밀려서, 흔히 보기 힘든 작물 아닙니까?”
“그래도 북방에서는 꽤 키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예.”
최만리는 다른 관원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선 설명을 이어갔다.
귀리는 원나라 시절에 고려에 유입됐지만, 안 그래도 벼를 키울 땅도 없는데 굳이 귀리를 키우겠는가.
허나 만주땅을 차지하고 나서는 추위에 강한 작물이 필요하게 됐고, 이에 밀, 보리와 함께 귀리도 열심히 키우고 있는 중이었지.
“호밀이라... 이곳에서 많이 키우는 곡물이지요?”
“그렇습니다. 이곳과 서방에서 밀 다음으로 많이 키우는 작물인데, 기후를 가리지 않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로, 아국의 북방에서 키우기에는 최적의 품종입니다.”
“오...”
“전에 먹었던 그 빵이 호밀로 만든 빵인 겁니까?”
“씁쓸한 맛이 강했다면, 그게 맞을 겁니다.”
이곳은 중국식 호빵이 아닌 제과와 비슷한 빵을 먹었기에, 당연히 관원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다만 이제 보니 요리법이 다른 게 아니라, 아예 품종이 다른 호밀빵과 밀빵이었던 모양이다.
“다음으론 술입니다. 서방. 특히나 로마국에서 흔히 먹는 포도주와 맥주라 이름 붙인 바다 건너 서방의 술이죠.”
최만리는 그리 말을 하고서 부하를 시켜 찻잔에 술을 담아오게 했다.
몇몇은 “또 술이야?”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들 이미 맛을 봤던 물건 아닌가.
가져오기 무섭게 냉큼 입에 가져다 댔다.
“술은 안 그래도 아국에 많은데, 이곳의 술까지 가져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뭐... 돈벌이는 확실히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아국의 술이 중국과 일본, 몽골에서 널리 팔리고 있는데, 본적도 없던 서방의 술이라면 웃돈을 주고라도 사들일 겁니다.”
“아무리 술의 보관기간이 길어도 이곳에서 만들어서 가져가는 건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아국에서 만들어야 수익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돈맛을 본 이들답게 하나같이 돈 이야기를 꺼냈고, 최만리는 삼천포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얼른 바로 잡았다.
“판매도 판매지만 일단은 이곳의 과일. 특히나 포도품종이 훌륭하더군요. 아국의 포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로마국에서는 옛 대진국 시절부터 포도주를 만들어 먹었고, 서방의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포도라...”
“하긴 이곳의 포도가 다르긴 했지요.”
“아국의 포도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열매는 많이 맺힌다고 들었는데...”
이 또한 먹어본 적이 있던 터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조선의 포도는 미래의 포도와는 완전히 다른, 사실상 야생 머루나 다래와 거의 흡사한 품종이었다.
삼국시대에 중동에서 흘러들어온 품종인 건 맞지만, 수천년간 개량을 거듭해 온 서방의 포도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과일이었지.
“중요한 건, 그 포도를 포도주로 만드는 방법에 있습니다.”
“아...!”
“오호!?”
뒤이어진 최만리의 말에, 다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정확히 깨달았다.
“아국의 과실주는 이제 막 번성하기 시작했으니, 이곳의 포도주 만드는 방식으로 과실주를 만들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서방의 모든 나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포도주를 만들고 있으니, 이미 검증된 방식 아니겠습니까? 물론 모든 과실주에 적용하진 못하겠지만, 가능한 과실주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흐음.”
“이건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요.”
다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과실주의 역사가 짧은 조선에 비해 이곳의 제조방법은 분명히 선진적일 터, 최소한 손해는 안 볼 거다.
안 그래도 다른 품종의 과일도 가져갈 예정인데, 그 또한 술로 만든다면 더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
“다음으론 이 맥주라는 겁니다.”
다시금 새로운 술이 모두의 앞에 놓였고, 서슴없이 찻잔을 들고 살펴봤다.
색은 탁한 고동색을 띄고 있었고, 한입 머금자 약한 탄산과 함께 씁쓸한 보리향과 독특한 홉향이 느껴지고, 왕창 털어 넣자 보리알갱이들이 씹혔다.
“으음...”
“탁주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맛은 꽤 다르군요.”
“보리로 만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듣기론 누룩도 다르다고 하더군요.”
다들 한마디씩 던져댔고, 최만리가 냉큼 말을 이어갔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이곳 말고 바다건너 서방과 북쪽의 포로들에게서 흘러들어온 술인데, 아국의 탁주와 유사합니다.”
“허면...?”
누군가 최만리의 속뜻을 알아차리고서, 조심스럽게 의문을 던졌다.
“예. 식량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지요.”
싱긋 웃는 최만리를 보며, 다들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말았다.
“허...!?”
“좋군요! 안 그래도 북방에서 보리를 많이 키우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탁주는 쌀이 많이 필요한데, 보리로 대체할 수 있다면 충분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이제야 최만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침을 튀겨가며 논의를 이어갔다.
조선의 술은 보통 쌀로 만들고,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게 막걸리. 이른바 탁주다. 이걸 증류하고 정제하면 청주가 되고, 한번 더 작업하면 소주가 되는 식이지.
이 시대의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미래의 황금빛 라거 계열은 있지도 않았고, 건더기가 듬뿍 담긴 원시 에일 계열의 맥주가 대부분에, 제조방법도 천차만별이었다.
이건 뭐랄까... 유럽판 막걸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는 수준에, 과장을 조금 보태면 많이 묽은 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어보니 각 지방별로 다양한 형태의 맥주를 만들고 있다고는 하는데, 중요한 건 이게 음료인 동시에 식량대용으로도 사용된다고 하더군요.”
“아국의 탁주처럼 말입니까?”
“예.”
“흐음... 그래도 술을 만들면 낭비되는 양이 있을 텐데, 그냥 생보리를 먹는 게 더 낫지 않소?”
“여긴 빵을 먹지 않습니까? 아국처럼 보리밥을 먹는 게 아니다보니, 그것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더불어 사람 사는 곳이라면 술이 빠질 순 없는데, 값비싼 포도주를 먹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다른 술을 찾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흐음. 하긴 빵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호밀빵이나 밀빵을 만들고 말지, 보리빵을 만들진 않겠구려.”
“먹을 게 없으면 보리빵이나 보리죽을 먹긴 하겠지만... 들어가는 노력과 돈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합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걸, 이 낯선 세상에 와서 세삼 느끼고 있지 않나.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코웃음을 치고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선에서도 쌀이 최고고 보리는 찬밥신세였지 않나. 서방에도 밀이 최고고, 보리는 어쩔 수 없이 먹는 곡물인가 보다.
“마지막으로...”
최만리는 또 다른 찻잔을 내놓았고, 모두는 먹처럼 짙은 차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낯선 차라서 다들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흡사 한약을 먹는 것처럼 무지하게 썼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 씁쓸한 감칠맛이 혀에 감돌아서, 다들 머뭇거리지 않고 찻잔을 들이켰다.
“회회교 사제들이 주로 먹는 흑차입니다. 카흐베(커피)라고 부르더군요.”
“나도 먹어는 봤소이다.”
“흔히 먹는 차는 아닌 걸로 보이던데...?”
“그야 비싸서 못 먹는 것 아니겠소? 보아하니 주치칸국의 귀족들도 좋다고 먹는 것 같소만.”
“흐음.”
다들 커피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시작된 커피는 이 시기에 아랍상인과 이슬람 사제들을 통해 널리 퍼진 상태였다.
수니파와 수이파 사이에 커피를 놓고 이런저런 교리 논란도 있긴 하지만, 어찌됐건 에티오피아에서 중동아랍을 거쳐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지.
커피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건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이후부터지만, 지금도 이슬람 권역에서는 야금야금 유통되고 있었다.
“이게 상품가치가 있겠소?”
“솔직히 확답할 수는 없지만, 가져가서 키워보는 게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어찌됐건 아국과 중국에는 없던 차니까요.”
최만리가 “당연한 걸 왜 물어?”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다들 할 말이 없어졌다.
“너무 써서 차처럼 음용하는 건 힘들 듯 한데...”
“그야 물을 많이 타서 먹으면 되지 않겠소? 그러면 소모되는 차양도 더 줄일 수 있겠지요.”
“듣기론 차보다도 더욱더 잠을 깨우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하니, 나름 효용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소이다.”
실제로 뜨거운 태양을 피해 밤에 움직이는 아랍유목민들 사이에선, 각성제 비슷한 용도로 커피를 음용하지 않나.
비슷한 용도로, 얼마든지 사용할 여지가 있었다.
“음. 허나 회회교 사제들이 주로 먹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아국의 차도 승려들이 자주 마시는데, 그렇다고 일반 백성들이 차를 마시는 것에 영향을 주오? 여기서도 사제들 말고도 다들 먹는 것 같던데?”
“음.”
누군가 종교가 걸려서 한마디 해봤건만, 금세 다른 관원의 반문에 막혀 쓰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