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88화 (388/538)

388. 챕터51. 판을짜다 (2)

커피가 유럽으로 퍼지면서 “이건 이교도의 음료니 뭐니.”하는 말이 잠깐 나오긴 하지만, 조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아닌가.

회회교 사제들이 주로 마시든지 말든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문제는 이 차나무를 구할 수 있냐는 건데... 가능하겠나?”

“예. 비록 오스만국 상인을 거쳐야 하겠지만, 생각보다 허술하더군요. 딱히 규제를 하는 물건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그래?”

예전 중국의 차나무를 구해오려던 시도를 떠올리며 이인이 우려를 보냈건만, 최만리는 걱정 말라는 듯 확언을 내뱉었다.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아서 가능한가 보군?”

“중국의 지금 사정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오스만국에서 구하는 게 힘들어진다고 해도, 해상국가를 통해 지중해 건너의 나라에서 구하면 될 겁니다.”

최만리가 그리 말하며 비릿하게 웃자, 모두의 얼굴에 같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중앙의 통제 없이 상인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면서, 돈만 주면 뭐든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여기는 분열된 중국보다도 더욱더 심하게 분열된 상태라서, 커피나무를 구해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최만리의 보고가 끝나고도 회의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킵차크 칸국의 왕세자. 바카스의 방문을 알리고 나서야 마무리가 됐다.

“여긴 여전히 바빠 보이는군.”

“예. 듣기로 상인들과 매일 같이 거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술자도 구하고?”

“그렇습니다.”

시장관저에 도착한 바카스는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조선인들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저들이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며 뽑아낼수록, 킵차크 칸국에게 떨어지는 부산물도 많아지지 않나.

조선이 외국의 기술자들을 데려와 뽑아먹을 때, 그 옆에는 항상 킵차크 칸국의 장인이 붙어서 함께 있었으니까.

“가시지요.”

“...”

잠시 기다리며 살피기 무섭게 조선관원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고, 일행을 이끌고 관저 한편으로 안내했다.

관저 밖 정원 근처에 탁자를 펴놓고, 이인이 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조선관원이 슬쩍 눈치를 주기 무섭게, 다들 알아서 자리를 비켜서 따로 준비해 놓은 탁자로 이동했다.

“오셨습니까?”

“그대도 잘 쉬었소?”

이인과 바카스는 미소를 머금고 각자의 양식대로 인사를 하고선,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둘이 이미 진작 안면을 튼 사이였다.

조선관원들이 타나항에 오기 전에는, 사라이에서 함께 지내왔으니까.

“보고는 받았겠지요?”

“그렇소.”

이인의 물음에 바카스는 앞에 놓인 차를 알아서 따라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카스가 왕세자라지만 이인도 왕자고, 킵차크 칸국과 조선은 서로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사이 아닌가. 그렇다보니 이것저것 골치 아프게 따지지 않고, 그냥 서로 편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둘 다 몽골말을 할 줄 알아서 통역조차 필요 없었고.

“허면 앞으로 더 많은 포로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시겠지요?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겁니다.”

“...”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인을 보며, 바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노예들을 동방으로 옮길 수 있겠소?”

다만... 바카스는 수도인 사라이에서 진행된 회의결과를 이미 받았지만, 쉽게 믿을 수 없어서 다시금 되묻고 말았다.

“이 일이 아국에게만 필요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동쪽의 소칸국들 중에서, 이번 일이 목숨을 건 나라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포로를 옮길 겁니다.”

“음...”

‘자신만만하군. 허나 이게 허세는 아니지 않나.’

바카스는 조용히 차를 마시는, 그것도 조선에서 온 차를 자랑스럽게 마시고 있는 이인을 보며 속마음을 삼켰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조선은 서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서방. 특히나 킵차크 칸국은 조선에 대해서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운석핵꿀밤 이후 동방에서 파도가 밀려왔고, 그 여파로 이합집산이 격화되어 중앙아시아에는 원래 역사에 없던 소칸국들이 여럿 생겨났다.

중국이 분열되어 내부쟁투를 거쳐 고착단계에 이른 것처럼, 중앙아시아 또한 창칼로서 내부쟁투를 끝내고 얼추 여러개의 덩어리로 뭉치게 된 거지.

이러는 과정에서 동방물산이 서방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는데, 킵차크 칸국은 당연히 중국산 제품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비단길의 최종목적지가 바로 중국이었고, 동방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으니까.

헌데 뜬금없이 있는 줄도 몰랐던 조선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그 제품의 질이 그간 볼 수 없었던 고품질이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확인한 결과. 조선이라는 나라가 승천해서 중국을 두들겨 패고, 저 먼 동방의 북쪽 땅을 장악해 초원몽골과 닿아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도 접하게 된 거지.

‘그때도 놀랐는데, 지금은 더욱 놀랍구나.’

바카스는 다시금 속마음을 되삼켰다.

그렇게 풍문으로만 들었던 조선사절단이 직접 찾아오고, 그것도 동방의 소칸국 사절단을 함께 이끌고 왔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괜히 이들이 처음 보는 조선관원들을 잘 대접해주고, 조언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아시다시피... 초원이 언제나 빈 땅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비단길은 멈춘 거지, 사라진 게 아니었지요.”

“...”

이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고, 바카스는 과거를 건드리는 발언에도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름 번영을 누리던 중앙아시아가 지금처럼 사람이 없는 땅이 된 건, 몽골제국이 서방원정을 떠나면서 죄다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은 유목민족 치고도 과할정도로 잔혹해서, 눈앞에 거슬리는 건 말 그대로 전부 썰어버리면서 영역을 확장하지 않았나.

그때의 타격이 너무나도 커서, 몽골제국 이후 서방칸국이 자리를 잡았음에도 옛 시절의 영광은 되찾을 수가 없었지.

“이번에 함께 하기로 맹약을 맺은 8개의 소칸국은 다시금 번영을 바라고 있습니다.”

“헌데... 그들이 그럴 역량이 있겠소이까? 이곳과 마찬가지로 식량이 문제가 될 텐데...”

“오면서 확인해 봤는데... 생각만큼 많이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사막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막이 아니니까요.”

“음.”

직접 눈으로 봤다고 말을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더불어 사라이에 있을 때 소칸국의 사절단이 했던 말이 있던 지라, 바카스는 다시금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조선까지는 광대한 초원과 고원, 사막이 이어지고 있지만, 막연한 상상처럼 무작정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흔히들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를 생각하면, 그냥 작게 저수지만한 물웅덩이가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과거 비단길 시절에 융성했던 도시들은 전부 고산지대와 접하고 있었는데, 강수량이 부족함에도 고산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려서 강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

“오면서 여럿 지나쳐 왔는데, 생각처럼 무작정 토질이 황폐하거나 척박하지 않더군요. 몇몇 곳에서는 비와 눈이 내리는 것과 상관없이 사시사철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오히려 농사를 짓는 데에 더욱 적합한 곳도 있었습니다.”

“음...”

이런 질문을 할 걸 미리 예상했던 걸까?

이인은 어린아이 낙서처럼 보이는 어설픈 지도를 꺼내서 하나씩 짚어갔다.

킵차크 칸국이 분열될 때 떨어져 나간 동쪽의 자잘한 소칸국.

그 동쪽에는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소칸국이 있었고.

또 그 동쪽에는 옛 차가타이 칸국이 티무르제국에게 흡수된 후에 떨어져 나온 모굴칸국이 위치했다.

모굴칸국은 미래에 신장위구르 지역으로 불리는 타림분지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 타림분지 옆으로는 드디어 섬서몽골과 몽골초원 남부 쪽의 만호들이 나온다.

“이곳들이 방금 말한 그러한 곳입니다. 옛 시절엔 비단길의 경로에 위치해 번성했지만, 지금은 세를 잃어버린 곳이지요.”

이인은 하나씩 짚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지형과 기후는 몇백년만에 바뀔 리가 없는 법.

비록 과거에 비해 지구의 온도가 떨어지고 있지만 엄청나게 차이나는 건 아니었기에, 빈 땅들은 다시금 사람이 모이면 충분히 융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

‘그렇군.’

바카스는 아까 왜 이인이 발언을 조심했는지 다시금 느꼈다.

자칫 오해하면 “니들 조상들이 다 죽여서, 지금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거잖냐.”라고 들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포로를 바라는 건, 그대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라 이거군.”

“그렇지요. 지난 수십년동안 혈투를 거쳐 정리가 끝난 상태인데, 이 상황에서 사람을 더 끌어올 곳이 이곳 말고 또 있겠습니까?”

“...”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목민족 특성상 원수사이인 곳이 한둘이 아닐 터... 싸워서 납치해서 끌고 올 생각이었다면 이미 진작 그렇게 했다.

지금의 상황은 그런 과정을 다 거치고 난 결과지.

그러니 눈을 돌려 동쪽이나 서쪽에서 노예를 데려와야 하는데, 소칸국들 입장에서 동쪽을 노리는 건 어불성설.

자연히 서쪽으로 밀려들게 됐고, 그에 대한 어부지리를 챙긴 게 바로 킵차크 칸국이었지.

‘그리고 이제 이곳 또한 세력이 얼추 정리가 됐으니, 남은 곳은 더 서쪽과 북쪽에 위치한 코사크와 루스놈들 밖에 없겠지. 남쪽의 티무르 칸국은 부담스러울 테니까.’

여기서부터는 바카스가 직접 몸으로 겪은 일이라서, 쉽게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귀국뿐만 아니라 티무르칸국, 토번, 섬서몽골에서 식량을 구해올 수 있으니, 적어도 올해만큼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식량이 제공된다면... 지금도 열심히 옮기고 있는 노예들로 인해, 내년부터는 거점도시들이 식량을 자급할 수 있게 되겠지? 이미 토대가 있으니까?”

“그렇죠. 건물은 전부 무너졌다지만, 땅과 강을 부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인은 농담처럼 말을 던졌지만, 바카스는 그게 꼭 빈정거리는 것 같아서 피식 웃고 말았다.

“중국... 섬서몽골이라고 했던가. 그치들이 노예를 바라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그렇습니다. 북원잔당이 섬서를 차지하고 눌러 앉았지만, 섬서는 땅 크기에 비해 사람이 적은 곳이지요. 더불어 과거 전란때 중국본토로 피난을 간 사람들도 적지 않고요.”

“음...”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머릿속에 떠올리기가 쉽지 않지만, 바카스는 열심히 지도를 보며 상상을 거듭했다.

“그렇게 된 건, 꽤 오래전의 일 아니었나?”

“그래봐야 고작해야 십년이 조금 넘었을 뿐. 사람이 늘어봐야 얼마나 늘겠습니까.”

“...”

이건 킵차크 칸국도 똑같이 겪은 문제라서,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판을 정말 교묘하게도 짰구나. 이러면 조선으로 흘러가는 노예들을 옮기는 일이 더욱 쉬워질 것 아닌가.’

“그렇지 않나?”

바카스는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 은근히 캐물었지만, 이인은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소칸국이지 쉽게 말해 그냥 유목민 무리가 부족별로 쪼개진 게 아니라, 구심점을 잡고 하나로 뭉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색목인 노예를 중국과 조선까지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노예를 옮기는 건, 사실상 군사를 움직이는 것과 다를 게 없지. 곳곳에 보급지가 있어야 가능할 텐데, 그 역할을 거점도시가 대신 해주는 것 아닌가?”

카라반처럼 무역상인이라면 사막이든 초원이든 그냥 짐을 싣고 이동할 수 있을 거다. 허나 사람은 제발로 움직일 순 있어도, 먹을 곳과 쉴 곳이 필요하다.

결국 대규모 포로를 한 번에 옮긴다는 건, 대병의 군대가 행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

당연히 그에 대한 준비 또한 무지막지하게 늘어난다.

“이억만리쯤 떨어진 조선과 아국을 한 번에 오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쉬어가는 거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편하겠지. 포로는 물론이고 상인들도 말이야.”

하지만 해결책은 간단했다. 한번에 갈 수 없다면 나눠서 가면 그만.

“...”

바카스는 조선이 소칸국 사절단을 죄다 끌고 온 이유를 곧장 알아차리고 꼬집었다.

조선이라고 생전 관계도 없던 소칸국들이 예뻐서 그들을 지원하고, 옛 비단길 도시를 부활시키고, 칸국의 제도 및 도시 건설, 경영에 대해 조언을 해줬겠는가.

이들이 번성하고 자리를 빨리 잡을수록, 더 많은 포로를 안전하고 빠르게 조선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음... 틀리다곤 말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모두가 바라던 일 아닙니까?”

이인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게 이번 대계의 핵심이기 때문.

조선의 꼼수 아닌 꼼수에 넘어간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과 세력이 있는가? 전혀. 아무도 없다.

있다면 영문도 모른 체, 노예가 되어버린 코사크와 루스인들이겠지.

“심지어 귀국 또한 그렇지요.”

“...”

이인은 빙긋 웃으며 답을 했지만.... 바카스에게는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우리 덕에 포로를 가장 많이 챙기는 건 너희잖아?”라고 들리는 듯 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할 말이 없군.’

게다가 조선이 알아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와중에도, 전력을 다해 킵차크 칸국을 도와주고 있지 않나.

어찌됐건 이권이 서로 겹치지 않으니... 주도권을 잃고 끌려가는 게 속으론 아니꼬워도, 손해 볼 건 전혀 없다.

여기서 괜히 조선을 자극해 허물을 캐는 건 미련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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