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 챕터52. 판을짜다 (3)
“물론 단기간에 되는 것도 아니고, 쉽게 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
아무리 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도, 실제로 그 작업을 하는 건 보통 공을 들여서는 안 될 거다.
“허나 어찌됐건 움직이고 있고, 지금도 꾸준히 상인이 오가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문제가 생길 여지는 적어보이는 군요.”
“음...”
이 또한 바카스가 직접 눈으로 본 사실이다.
조선을 비롯한 사절단이 온 건 단발성이지만, 거래는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출발한 상인들은 소칸국들을 거쳐 거쳐서 혹은 한 번에 이곳까지 온 상인이 존재했고, 못해도 일주일 간격으로 속속 도착하고 있다.
“이게 무얼 뜻하겠습니까? 이곳에서의 화합을 뒤로 하더라도, 거래는 이미 시작됐다는 뜻이겠지요.”
못해도 4,5달 전에는 동방에서 출발해야 지금 도착했을 테니,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에도 이미 출발한 상단이 있다는 뜻.
‘그만큼 공을 들이고 사활을 걸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럼...’
바카스는 이내 납득하고선,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묻고 말았다.
이제 서로 체면을 봐주거나 밀고 당기기를 할 상황은 지나지 않았나.
이제 진짜 속마음을 말해줄 지도 모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조선에는 사람이 그렇게 부족한가? 이 먼 곳까지 와서 사람을 데려갈 정도로?”
“음...”
바카스의 표정에서 솔직담백한 호기심이 묻어나오자, 이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할 말을 다시 추렸다.
‘어떻게 말을 할까?’라고 잠시 고민을 하고선, 그가 느낀 걸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카스가 알아도 상관없는 사안이니까. 오히려 알면 다 좋을 수도 있고.
“이곳에 와서 보니 확실히 알았습니다.”
“...?”
“아국은 큰 나라입니다. 서방의 어떤 나라와 비춰 봐도 부족할 게 전혀 없는 나라지요.”
뜬금없이 자랑질을 늘어놓자, 바카스의 표정은 더욱 알 수 없게 변해갔다.
허나 이인의 막연한 감상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개혁 전의 조선도 나름 큰 나라였는데, 개혁 후에 남북으로 강역을 넓힌 조선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아국의 바로 옆엔 중국이 있죠. 비록 지금은 분열되었다고는 허나, 역사 이래로 세계최고의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 나라가 말입니다.”
“음...”
이건 바카스도 얼추 짐작이 되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비단길이 끊어졌던 시절에도 서방은 중국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단적으로 티무르가 살아 있을 시절에는 명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전쟁을 하니마니 할 정도 아니었나.
“문제는 아국이 더 이상 정복할 땅도, 흡수할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동방의 끝자락을 그대들이 다 장악하고 있으니까?”
“그렇죠.”
이 또한 자랑인지 허세인지 아니면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지 몰라서, 바카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진실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럼 큰 나라가 맞긴 맞겠군.’
바카스는 동방의 사정을 모르지만, 나름 옛 몽골제국의 후예이자 계보를 잇고 있지 않나.
몽골제국 시절의 강역을 생각하면, 조선이 어느 정도까지 강역을 넓혔는지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남쪽 바다를 건너 남방소국들을 점령하고 강역을 넓히고는 있지만, 정복한 땅에 비해 여전히 사람은 부족합니다. 오히려 그 정복지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재원이 더 많이 소모될 지경이죠.”
“남방이라...”
“초원이 가득한 이곳에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동방의 남쪽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 그것도 농사가 얼마든지 가능한 옥토의 땅이 가득하니까요.”
바카스는 다시금 조용히 남방이라는 단어를 혀에 굴렸다.
이걸 달리 말하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북쪽으로 힘을 투사하는 중에도, 해군력 또한 강력해서 바다를 주름잡고 있다는 뜻이니까.
‘해상국가보다 더 강력할까?’
비교할만한 대상은 그들 밖에 없는 터라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반대로 그보다 더 한 수 위 일거라는 예측이 더해졌다.
그가 지금껏 들은 걸 취합하면, 조선의 인구와 땅 크기는 해상국가를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니까.
“그럼 그곳을 정복하거나, 북쪽의 몽골을 공략해서 사람을 끌어오면 되지 않나?”
“그게 아국과 다른 나라의 차이입니다. 칸과 왕자님을 도와주는 것도 그에 닿아 있고요.”
“음...”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지만, 이미 마음에 날을 세운 바카스에게는 확 와 닿는 말이었다.
조선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인권에 눈을 떠서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게 아니다.
이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한 방책으로. 모든 백성을 양민으로 만들어서, 왕권을 위협할 지방호족 및 암묵적인 지배층으로 군림하려는 양반들을 끌어내리기 위함이다.
신분계급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계획으로, 하층계급을 먼저 없애서 상층계급의 존재의의를 깨부수고.
조정의 영향력을 극대화해서, 지방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통치를 원활하게 도와주는 지방호족의 필요성을 없애버리는 것.
“그러니 지난 역사나 다른 나라처럼, 무작정 정복하고 다스린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이 때문에 식민지 경영이나, 조공, 세금으로 대체하는 자치권을 인정해 줄 수가 없다.
이러면 새로운 지배계층이 등장하기 십상이니, 결국 조선이 차지한 땅에 사는 사람을 전부 똑같은 조선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
여기서부터는 수지타산의 문제가 걸리기 시작하는 거지.
“남방으로 진출해 땅을 무작정 늘린다고 해서, 백성들을 무작정 늘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땅을 늘리면 늘릴수록, 그걸 유지, 관리하는 인력과 비용, 행정소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니까요.”
조선이 대만섬과 해남도를 쉽게 정복했음에도,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곳에서 한족, 원주민등을 조선으로 잔뜩 끌어오면 뭐할까.
정작 그 땅을 유지하고 조선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재원과 인력,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흐음...”
얼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해서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긁고 말았다.
닿아 있는 모든 나라가 봉건제로 유지되고 있는 이곳과 이 시대 사람에게, 조선이 취하고 있는 체제와 제도는 살짝 낯설 수밖에 없으니까.
‘어렵군...’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지금 말하는 조선의 방식을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따라 해서, 중앙집권을 이룩하려는 게 킵차크 칸국의 칸인 누르알딘과 그의 후계자인 바카스가 꿈꾸는 대업 아닌가.
말 만들어도 보통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결국 아국은 맞닿아 있는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 사람이 필요하고... 지금의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사람을 끌어올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는 겁니다.”
“음...”
“뭐. 우리가 손을 놓고 있으면 어차피 섬서몽골로 흘러들어갈 노예들인데, 그럴 바엔 차라리 우리가 더 많이 데려가는 게 낫죠. 그들도 이득을 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
‘흠. 역시 마냥 사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군.’
그는 이인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사절단에는 동방몽골의 4개계파가 전부 포함되어 있었고, 수도인 사라이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벌이는 걸 바카스는 쉽게 목격하곤 했다.
헌데 조선의 사정도 비슷한 모양이다.
지금 이인의 말에는 “걔들보다는 우리를 더 중시하는 게 좋을 걸?”이라는 속뜻이 담겨져 있었으니까.
만약 조선이 북쪽에선 몽골을 지원하고, 남쪽에선 대리와 사천을 지원하고 있는 걸 알게 된다면... 바카스의 표정이 볼만할 거다.
“...”
“...”
바카스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인 또한 과거를 더듬으며 상념에 빠져 들었다.
‘결국 중국 때문이야.’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며, 대상없는 애꿎은 욕을 날리고 말았다.
운석핵꿀밤 이전에 조선이 보는 세계는 좁았고, 중국 말고는 딱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상대하기 피곤한 상국을 모시긴 하지만, 어찌됐건 대제국이 조선과 같은 편이니 편한 면도 있었지.
무역에 있어서도 그렇다.
조공에 있어서 무리한 요구를 한 건 사실이지만, 어찌됐건 조공을 바치면 몇 배에 해당하는 답례품을 뜯어내곤 했었지.
허나 운석핵꿀밤 이후로 자주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중화와 사대가 깨지면서 조선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립을 시작했다.
알을 깨고 나와서, 냉정 살벌한 국제정세에 발을 내딛은 거지.
조선의 강역이 넓어지고, 몰랐던 나라와 직접 교류를 시작하고, 제한되었지만 자유무역이 시작되고, 돈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됐는데...
같은 편이던 중국을 경쟁자로 보게 되자, 중국의 무서움을 세삼 체감하게 됐다.
개혁 이후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급격하게 성장해 왔음에도, 조선은 중국의 체급을 뛰어넘긴커녕 허리춤까지 닿는 것도 급급했다.
아무리 기를 쓰고 기술을 발달시키고, 교육을 장려하고, 난리법석을 피워도, 무지막지한 인구수에서 터져 나오는 생산력과 경제력을 뛰어넘는 건 어불성설.
더욱이 중국은 뒤떨어지긴커녕, 이미 많은 부분에서 조선을 앞지르고 있던 나라 아닌가.
개혁 이후에 특정부분에 있어서 조선이 슬슬 앞지른 분야가 나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대세는 여전히 중국이었다.
‘중국이 분열한 게 오히려 자극이 된 걸 수도 있고, 어쩌면 통합이 되지 못했는데도 이 정도 저력을 내는 걸 수도 있겠지.’
문제는 지금 중국이 분열이 된 상태에서도 이렇다는 거다.
물론 상인세력 및 호족이 중심이 되어서 각자 도생을 꿈꾸며, 옛 명나라시절보다 유연하고 혁신적으로 움직인 결과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제각각 따로 놀아서 성장세가 하락한 것일 수도 있는 법.
만약 하나로 통합된다면, 그 체급이 얼마나 커질 지는 상상도 못할 수준이다.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지 않나.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아국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겠지.’
이인은 중국의 사정을 떠올리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각 성별로 호족연맹으로 묶이면서, 도시별로 따로 놀던 이들이 이젠 연맹의 이름으로 뭉치며 시너지효과를 내려고 하고 있었다.
예컨대 예전에는 개봉과 소주상인회가 알아서 거래하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하남연맹과 절강연맹이 기준을 만들어서 통으로 거래하는 식으로 변하고 있는 것.
이러한 경향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연맹간의 결합은 복잡하고 다양해져서... 정치,군사적으는 몰라도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통일왕조시절처럼 변할 가능성이 보였다.
‘조정신료들도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니,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거겠지.’
이인은 사절단에 참여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운석핵꿀밤 세대가 전면에 등장해서 자리 잡고 있는 조선조정에는, 더 이상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거나 무작정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지금 이러한 상황은 매우 위협적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이대로 시간이 흘러 중국과 조선의 경제, 무역이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되면... 원나라 시절의 교초문제와 같은 특별한 사건이 터지지 않더라도, 서서히 중국에게 잠식되어 갈 거라는 위기감이 고취된 거지.
이런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서, 토끼굴을 파듯 조선은 온 사방에 손을 뻗어서 무역로를 다각화하려는 것이기도 했고.
‘아무리 북방무역을 아국이 장악했다고는 허나, 그 외의 것을 생각하면 밀리는 게 사실 아닌가. 몇몇 품목에서 아국물산의 질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 수량에 있어서는 따라잡을 수가 없지.’
이인은 속으로 다시금 욕을 내뱉었다.
물론 중국물산도 사람 손으로 만드는 거니, 착취당하는 중국백성들의 삶이 거지같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게 조선입장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찌됐건 조선이 중국에게 밀리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중국과의 거래를 끊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누구 좋으라고 이런 짓을 하겠나.
조선이 중국에 팔아넘기는 물산은 엄청나고, 반대로 중국에서 사들이는 물산도 엄청나다.
사치품 말고도 필수품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고, 무역을 통해 중국이 크는 것보다 조선의 성장세가 더 가파르지 않나.
조선 내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무역은 지속되어야 한다.
‘이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정에서 축력과 수력, 기타 기계의 발전을 꾀하고는 있지만...’
세종을 비롯해서 조정관원들이 톱니바퀴 등의 기계장치에 깊은 관심을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으니까.
이곳에 온 관원들이 서방의 문물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발전을 도와줄 뭔가가 있을지 또 누가 알겠나.
‘허나 아직 한참 부족하고... 결론은 하나밖에 없어.’
그리하여 나온 궁극적인 해결책은, 바로 조선의 체급 그 자체를 높이는 것.
엄청난 수의 이민족을 흡수했어도 조선의 인구는 아직도 육백만명을 조금 넘는 수준인데, 중국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정도 아닌가.
이래서 지난날 성리학에 근간을 둔 조선을 생각하면, 아예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지.
‘땅은 이미 충분할 만큼 넓혔으니 사람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봐도 이곳 말고는 지속적으로 사람을 끌어올 방법이 없어.’
아무리 위생 상태와 영양 상태가 좋아졌어도, 시대적 한계라는 건 확실히 존재했다.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영유아가 죽는 건 흔한 일이고, 환갑잔치를 하는 게 손에 꼽힐 정도로 일찍 죽는 시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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