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챕터52. 판을짜다 (4)
개혁 세대가 태어나면서 인구가 늘긴 하겠지만, 그래도 외부에서 수혈해 오는 효율을 따라잡는 건 요원한 일.
‘그렇다고 남방을 더욱 공략한다? 그게 쉽게 되겠나.’
땅을 차지해 조선화 시키는 것과 남방소국을 털어서 사람을 데려오는 건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조선은 나름 동방의 맹주 아닌 맹주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해적들이나 할 짓을 하면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차라리 정복이 낫지, 약탈은 절대 금물.
안 그래도 남방무역의 주도권을 두고 중국과 경쟁하고 있는데, 그런 짓을 했다는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에는 사람이 몇 명 살지도 않고, 조차지라면 모를까... 고작 사람을 얻겠다고 들쑤시고 다니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아.’
이미 다 주판을 튕겨보고서, 색목인 노예를 데려오는 게 더 이득이라는 계산이 서지 않았나.
아무리 되새기고 고민 해봐도, 이곳에 집중하는 게 지금 당장은 최선이었다.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어떤 의도에서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는 이해했네.”
“다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국은 귀국이 더욱 번성해서, 이곳에 단단히 자리 잡기를 바라고 있지요.”
“...”
이인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고,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히죽 입술이 들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여기부터 잘 키우라고. 덤으로 우리가 도와준 거 알지? 잘 좀 챙겨줘.”라는 아부가 담겨 있었으니까.
사실 이인이 굳이 속사정까지 털어놓은 이유는 바카스가 미래의 칸이 될 인물이기 때문.
미리미리 좋은 관계를 맺어둬야, 나중에 이득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 노예 이송과 무역로에 대해서는 더 논할 게 없을 것 같고...”
“예.”
바카스도 수도인 사라이에서의 회합결과는 이미 보고 받아서 알고 있었고, 혹시나 싶어서 이인에게 다시 확인하려 했던 것 아닌가.
그는 본격적으로 다른 안건을 꺼냈다.
“다른 토호들은 일단 제쳐두고 코사크와 카잔인들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고 했던가? 물론 겸사겸사 루스국도 처리하고.”
“그렇습니다. 지금 딱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까? 군량은 충분하고, 사기도 높고, 군사도 많고, 거슬리던 카잔인을 정리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이득이 크기도 하고.”
“그렇지요.”
이인이 히죽 웃자, 바카스 또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원래 역사에서 킵차크 칸국이 분열된 후. 카잔인이 주축이 된 카잔 칸국이 등장한다. 나름 세를 일으켜서 모스크바 공국을 두들겨 패기도 했던 나라지.
이들은 모스크바 공국 동쪽에 살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로, 부활한 킵차크 칸국과 모스크바 공국 사이에 껴 있는 형국이었다.
결국 불가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킵차크 칸국에게 카잔인을 복속시키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이유가 더 덧붙여졌다.
“루스국을 공략하는 발판이 되어주고, 카잔을 정리하면서 북방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으니까?”
“맞습니다.”
루스국은 원래 킵차크 칸국의 속국이었고, 모스크바 공국은 루스공국들의 세금과 조공을 대신 걷는 임무를 맡았었다.
세금징수원이 되어서 야금야금 부스러기를 주워 먹더니, 끝내는 공국 중에서도 가장 큰 대공국으로 발전하게 됐지.
지금은 “이제 조공 안 바친다!”라고 싸움을 벌였다가 두들겨 맞았고, “다시 조공을 바치겠습니다! 한번만 봐주시지요!”라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상태였다.
허나 누르알딘은 중앙집권을 추구하면서, 예전의 관계를 되살릴 생각이 없지 않나.
모스크바 공국을 비롯한 루스국을 모조리 박살내서 노예로 끌고 올 작정이었다.
‘이게 모두의 이득이라면, 우리의 이득은 모피겠지.’
바카스는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내린 아버지. 누르알딘을 떠올렸다.
킵차크 칸국은 동방무역을 통해 엄청난 이득을 얻겠지만, 그래도 자생할 기반은 있어야 하는 법.
모피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고, 모피를 얻으려면 결국 북쪽. 우랄산맥이 있는 시베리아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을 떡하니 막고 있는 게 카잔인들이고, 지금도 카잔인들은 모피무역을 통해 루스국과 킵차크 칸국에 팔아넘기면서 돈을 벌고 있지 않나.
당연히 두들겨 패서 복속시켜야 하는 거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귀국이 식량을 쥐고 있고, 불가강의 수로를 착착 연결해서 써먹고 있지 않습니까? 한 번의 싸움으로 기를 꺾어 놓기만 한다면, 알아서 굽히고 들어올 겁니다.”
“그 후로는 다른 부족처럼 흔들고 다독이면 넘어올 거라는 거군.”
“그렇게 되겠지요.”
“음.”
유목민족 특성상 세가 강한 곳에 붙는 건 당연한 이치.
원래 역사와 다르게 카잔 칸국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전대 칸 울루그 무한마드는 누르알딘이 일어설 때 이미 쓸려나간 상황.
구심점이 없어졌으니, 원래 역사처럼 카잔 칸국으로 뭉치지도 못하고 쉽게 흡수될 거다.
“다음으론 코사크인데... 저희가 보기엔 카잔인들보다 이들을 더 빨리 정리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치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위협이 된다는 건가?”
바카스는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이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그들은 참 묘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강제할 주체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별 볼일 없으니, 루스국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처리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하긴...”
“특히나 아국이나 귀국이나, 그들을 털어서 약탈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필요한 거니, 약한 세력일수록 더 빨리 처리해서 흡수하는 게 낫겠지요.”
“흐음...”
이인의 말도 일리가 있는 터라, 바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서 러시아제국의 경기병대로 유명해지는 코사크. 미래에는 러시아 동방개척의 선봉이 되는 이들.
“사실 그들은 민족도, 종교도, 체제도 없이 그저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 유랑민이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자유민이라고 칭하면서 말입니다.”
“그렇지.”
이건 바카스가 더 잘 알고 있는 터라, 얼른 맞장구를 쳤다.
코사크는 민족이 아니고 뭐랄까... 일정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에 가까웠다.
이들은 농노제가 실시되는 리투아니아나 루스국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과, 본래 그 땅에 살던 유목민들, 종교의 박해를 피해서 도망친 이들, 기타 여러 이유로 모여든 이들이었다.
생활양식 또한 농사도 짓고 유목생활도 하는 등, 일률적이지 않고 두서없었지.
이들은 리투아니아,루스공국과 킵차크 칸국의 국경이 닿는 공백지역에서 각자의 마을을 일구고 살고 있었는데.
원래 역사나 지금이나 꾸준히 다른 세력들의 공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각 마을끼리 연대가 증가함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코사크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허나 지금은 코사크라는 정체성의 싹이, 이제 막 피어오르려는 시기였다.
“안 그래도 크림인들이 코사크 마을에서 포로를 데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근본이 없다는 건 한마디로 그만큼 다른 색을 묻히기도 쉽다는 뜻이니, 귀국에 정착시키는 건 분명 유용한 정책일 겁니다.”
“하긴 크림인들이 약탈에 재미를 들리긴 했지.”
바카스는 가볍게 혀를 차고선, 이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역사에선 크림 타타르인들이 크림 칸국을 세우지만, 지금 역사에선 누르알딘에게 크림 칸국의 칸이 되어야 했을 하즈 게라이 또한 일찌감치 갈려나간 상황.
리투아니아의 도움을 받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린 일이었고, 크림인들은 그대로 킵차크 칸국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달라지지 않은 점이라면, 수세기 동안 크림 칸국은 리투아니아, 루스공국, 러시아제국을 무자비하게 약탈해서 오스만제국에게 노예를 팔아먹었는데... 그게 벌써부터 시작됐다는 점.
노예를 오스만제국이 아닌 킵차크 칸국으로 데려오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허나... 주의를 주긴 해야 할 겁니다.”
“...?”
“이제 그들은 노예인 동시에 칸국의 백성들 아닙니까? 약탈을 하더라도 뭐랄까... 온건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끄응...”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바카스는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기 때문. 특히나 다음 대에 칸이 될 바카스라면, 더욱 가슴에 새겨들어야할 조언이었다.
“약탈을 하긴 하더라도, 봐가면서 해야 한다는 말이군.”
“예. 약탈이라기보다는 강제 이주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럴듯하군. 나아가 이곳에 와서도, 그들의 처우를 개선해줄 필요가 있다는 거고?”
“이곳에서 아국의 제도를 무작정 따르라고 할 순 없지만, 받아들일 부분에 있어서는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전처럼 농노로 취급하면 쉽게 융화되기 힘들 겁니다.”
“음...”
스스로를 자유민이라 외치는 코사크는 한마디로 농노가 싫어서 도망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다시 잡아다가 농노처럼 부려먹으면, 그들이 온전히 복속되겠는가.
적어도 코사크인들이 도망쳐 온 리투아니아나 루스국보다는 대우를 좋게 해줘야, 코사크로 사는 것보다 칸국백성으로 사는 게 더 낫다고 여길 것 아닌가.
“흐음... 쉽지 않은 문제야.”
“저희도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해결책을 찾긴 찾아야 할 겁니다.”
조선이라면 가리지 않고 그냥 싹 다 양민으로 만들어버리면 되겠지만, 이곳에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당장 부족과 토호, 호족조차도 정리하지 못해서, 봉건제와 전제정이 혼합된 상태를 취하고 있지 않나.
노예를 무작정 없애버리는 건 결코 쉽지 않을 일이다.
“적어도 농노가 아닌 자유민노예 정도로 처우를 개선해 줘야 할 거고,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길을 넓게 열어놔야 할 겁니다.”
“음...”
“바다건너의 서방국가들, 로마국이나 해상국가, 아니면 오스만국의 제도를 참고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루스국이나 리투아니아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겠지.”
이건 이 땅에 살면서, 그들과 접해본 바카스가 더 잘 아는 사실이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이후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농노의 처우가 개선되고 자유민 농부가 등장하는 등의 변화가 생겨났지만... 동유럽은 전혀 아니었다.
유럽의 역사는 로마제국 이래로 꾸준히 동쪽의 야만인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면서 정복해 나가는 것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이 요새 힘을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막말로 그들도 제대로 된 나라가 형성된 건 몇백년 되지도 않았다.
당연히 알아서 잘 살고 있던 마을과 도시를 정복해서, 지주가 되어 농노로 부려먹는 게 흔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
심지어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러시아와 동유럽에는 지주,농노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지금 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동방 칸국은 이미 그러한 길로 나아가고 있겠지?”
“예. 그게 효율적이니까요.”
이인은 슬쩍 바카스의 눈치를 보면서 답을 던졌다.
동방의 소칸국들에게 조언을 해준 것 또한 조선이었으니까.
온통 사막과 초원 밖에 없는 곳에서, 노예가 도망쳐봐야 얼마나 도망치겠는가.
허나 소칸국들은 하루라도 빨리 무너진 거점도시를 재건하고, 경작지를 늘려서 식량을 생산하고자 한다.
그러려면 농부로 삼기 위해 끌고 온 노예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자극이 필요한 법.
그러니 몽골계와 튀르크계가 지배층으로 군림을 하고, 서방인 노예들은 굳이 농노취급할 필요 없이 그저 하층민으로 남겨만 둬도 충분한 거지.
중요한 건 그들의 신분이 아니라, 어떻게든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생산하는 거니까.
“물론 그들이 그런 정책을 취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이권이 부딪치는 일도 적고 머릿수도 적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음...”
바카스가 어렵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애초에 그 넓은 땅에 몇 명 살지도 않던 소칸국과, 온갖 민족과 부족이 뒤엉킨 이곳 킵차크 칸국은 사정이 전혀 다르니까.
“그래도 위안거리가 있다면, 귀국에게는 빈땅이 많다는 점이겠지요.”
“서쪽 말인가?”
“예.”
미래의 우크라이나 서쪽일대는 리투아니아가, 동쪽일대는 킵차크 칸국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차지하고 있다는 뜻은 국경이 명확하게 정해져서 도시가 연계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대충 영향권에 속해 있다는 뜻이지.
그러니 이 영향권이 부딪치는 공백지에 코사크가 몰래몰래 살고 있는 거고.
“서쪽이라...”
“불가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농지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고,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지역을 발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곳은 칸의 명확한 영지이자 무역로의 핵심이니, 발전시키면 발전시킬수록 나쁠 게 없겠지요.”
“그렇지.”
봉건제가 결합된 킵차크 칸국이니, 당연히 칸의 영지가 있기 마련.
누르알딘은 이걸 이용해서 직영지를 끊임없이 넓혀서, 자잘한 부족과 호족들을 힘으로 누르고 중앙집권을 이룩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이건 흡사 서유럽의 대영주와 왕들이 하는 짓과 비슷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칸께서 넓혀나갈 땅은 주인 없는 땅이 최고인데, 서쪽은 비어있는 건 물론이고 토질 또한 무척 뛰어나지 않습니까? 이건 아국관원들이 확인한 사안이니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코사크인들이 농사를 쉽게 짓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예.”
우크라이나 흑토지대는 워낙 유명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는데, 그건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막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지주농노제가 괜히 흥했겠는가. 여기서 땅만 파먹어도,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어서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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