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 챕터52. 판을짜다 (5) >
“그러니 코사크들을 보다 밀집해서 정착시키고, 그들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겁니다.”
“음...”
“가서 정확히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서쪽의 평야지대에는 드네프르 강이라는 큰 강이 있다고 하더군요.”
“맞네.”
“적어도 거기까지는 차지해서 강을 경계로 리투아니아와 맞닿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강폭이 무척 넓고, 격류가 흐르는 지점도 많아서 도하할 수 있는 구역이 한정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드네프르라...”
바카스는 의자를 당겨 앉고선, 이인이 펼쳐놓은 조잡한 지도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어떤 지형지물보다도 강을 국경으로 삼는 게 가장 편리한 법. 드네프르 강은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드네프르 강은 우크라이나를 남북으로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길고 강폭도 넓은 강.
미래의 드네프르 강은 댐과 보를 건설해서 수위를 높여 격류지대를 없앤 거지만, 지금은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워낙 험해서 물길을 아는 숙련된 선원이 있지 않은 이상, 흑해와 닿은 하류에서 상류까지 한 번에 갈수조차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이를 활용한 수운로는 유명해서, 북유럽에 위치한 다우가바 강과 연계해 동로마제국과 북유럽이 교역을 할 정도였지.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맞네. 정세가 불안정해서 교역양이 많지는 않지만... 우리나 리투아니아가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코사크와 루스국의 소공국들이 무역을 하고 있지.”
“그러니 그들을 전부 흡수하고, 교역도시를 차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코사크마을과 루스국의 지주농장도 함께 정리를 하고요.”
이인은 수십,수백만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제안을 서슴없이 풀면서, 지도를 손으로 쓱 훑었다.
조선이 킵차크 칸국에 한 제안은 우크라이나 동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크림반도 인근의 남쪽으로 이주시켜서 밀집생활을 하게 만들고.
드네프르 강과 붙어 있는 교역도시들을 그대로 집어삼켜서, 국경의 요충지로 삼는 한편 거점도시화 하겠다는 계획.
그렇게 정리하고난 후에 생겨난 빈 땅은 계속해서 루스인 노예를 잡아와 경작지를 늘려가고, 궁극적으로는 드네프르 강 동쪽의 평야지대를 전부 개간농지로 바꿔버리는 거다.
“어렵고 힘들 일처럼 보이겠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만큼 막연하진 않을 겁니다. 아국도 비슷한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효과는 꽤 탁월했습니다. 물론 이곳과 아국의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죠.”
“음...”
이인은 자신의 경험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자신감 있게 말을 던졌다.
이건 지난날 조선이 만주땅에서 여진족을 흡수하던 작업과 똑같지 않나.
민족과 종교, 문화가 달라서 어려움은 분명히 있겠지만... 이 이주 및 개간 작업의 방법과 절차만큼은, 조선의 것을 그대로 따라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이인은 자신하고 있었다.
다만 바카스가 느끼기에는 “이 정도는 해야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이것도 못하면 중앙집권은 때려 쳐야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사활을 걸고 덤벼들라는 뜻이겠지.’
바카스는 속내를 읽고서,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허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임에는 틀림없다. 설령 남쪽평야를 개간하는 일이 지지부진해지더라도, 강에 닿아 있는 교역도시를 점거하는 것만으로도 리투아니아와 루스국을 압박하는 효과를 발휘하겠지.’
“...”
‘더불어 수운로를 차지하게 되면 북쪽과 이어지는 교역 또한 우리가 장악할 수 있을 거고.’
드네프르 강을 이용한 교역은 바이킹이 동유럽에 진출했을 때부터 이어져온 무역로다.
설령 일이 꼬여서 킵차크 칸국이 써먹지 못하더라도, 리투아니아와 루스국의 무역을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그렇겠지?”
“그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물질에 익숙한 코사크와 교역도시인들을 활용해서, 돈강, 불가강, 릭(마니치)강을 이어주는 수로망을 더 빨리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호오...”
바카스는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감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릭강은 돈강의 지류로, 남서쪽으로 이어져 카스피해까지 닿는 강이다.
흑해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돈강. 북쪽의 우랄산맥까지 이어지는 불가강.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릭강을 전부 활용할 수 있다면, 킵차크 칸국의 중심지이자 칸의 직영지 통치가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을까.
“아국의 조직체계와 그들의 경험이 결합되면, 효과는 더욱 커지겠지요.”
“...”
‘지금까지의 활동을 보면, 결코 거짓은 아니야.’
바카스는 이미 조선인들이 수로망을 계획하고 연계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나.
이게 마냥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역사의 조선도 수로망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지금 역사의 조선은 세계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주땅을 집어삼키고 난 후. 심지어 짧은 운하까지 파면서 만주의 자잘한 강을 전부 이어 붙였다.
그 결과. 만주벌판 한복판에 위치한 창주(송원)의 눈강에서부터 송화강-목단강-해란강-압록강을 거쳐 동해와 닿아 있는 경원까지 수로망을 연결했지.
이곳에서의 작업은 조선에서 했던 작업을 그대로 답습하는 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마냥 이들에게 퍼주는 건, 절대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수의 노예를 빠르고 안전하게 그리고 비용을 최대한 적게 들이면서 운송하려면, 무조건 배로 옮겨야 하지 않나.
이들의 수로망이 빨리 완성되는 건, 조선과 소칸국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사안.
당연한 말로. 이곳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소칸국들 또한 노예 이송을 위한 수로망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을 최대한 온건하게 데려오는 게 중요합니다. 기왕이면 지주들만 죽이고 데려오는 게 효과적이겠지요.”
“...”
“앞으로 코사크와 루스인이 섞여서 밀집해서 정착하게 될 텐데, 그들이 반란이나 불만을 품으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흐음... 그대들이 가족단위의 노예를 선호하는 것처럼 말이지? 흡사 인질처럼 말이야.”
“뭐. 꼭 인질로 삼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냉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바카스를 보며, 이인은 떫은 표정을 슬쩍 흘리고 말았다.
“아국이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건, 어릴수록 조선인으로 만들기가 더 쉬워서입니다. 민족과 종교, 문화가 다르더라도, 어릴 때부터 조선식으로 교육받게 되면 커서도 조선인이 될 테니까요.”
“음...”
“여기서는 아국처럼 쉽지 않겠지만... 어찌됐건 여러모로 더 효과적인 건 분명합니다. 식량을 비롯한 재원이 더 들어간다고 해서, 부모자식을 생이별시키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계속 품고 있어야 하는데, 그 원망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이인은 단호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가축과 다르지 않는 농노가 아니라, 칸에게 충성을 바칠 백성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바카스는 한번 더 꼬집는 이인을 보며,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 약탈을 하는 경우에는 젊은 여자나 남자만 데려오고, 나머지는 그냥 다 죽여 버리는 게 일반적인 행태였다.
당연한 말로. 어차피 죄다 팔아버릴 노예들인데, 돈도 안 되고 밥만 축내는 아이,노인들을 뭐 하러 끌고 오겠나.
하지만 정착시켜 백성으로 만들려면 이래서는 안 된다.
“지주들만 골라 죽이라는 것도 같은 이치겠지?”
“농노들은 지주들에게 핍박받으며 살던 이들 아니겠습니까? 귀국이 그들을 대신 처단해주면, 말은 하지 않더라도 적잖게 환호할 겁니다.”
이인도 여기 와서 직접 지켜본 바. 서방 농노의 삶은 조선의 노비보다 훨씬 열약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마음에 응어리진 것도 더 많을 터, 대리보복을 해주는 건 분명한 효과가 있다.
“거기에 우리가 지주들보다 착취를 더 했다가는, 그 고생이 모두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거고?”
“그렇죠.”
‘골치 아프군. 어려운 숙제야.’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외줄타기를 통해 급격하게 성장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냥 자랑 섞인 허풍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허나 이들이 하는 꼴을 보면, 목에 칼을 밀어 넣고 “바뀌지 않으면 어차피 망할 걸.”이라고 협박하는 꼴 아닌가.
빠른 정착과 개간을 위해 노예들을 모아놓으면 관리는 편해지겠지만, 그들의 처우를 개선해주지 않으면 감당치 못할 수준의 대반란이 터질 거다.
창칼로서 반란을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다 잡아 죽이면, 개고생해서 노예를 끌고 온 이유가 없어지지 않나.
양자택일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조건 킵차크 칸국의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압박하는 거지.
“그리고 이러한 방향으로 가는 게, 무조건 칸께 부담이 되는 건만은 아닐 겁니다.”
“중앙조정의 강화를 말하는 거겠지?”
“그렇지요.”
이인은 “우리가 했던 말을 잊어먹지 않았구나?”라고 기특하다는 듯 눈빛을 뿌렸고, 바카스는 더욱더 밝아진 눈빛을 빛냈다.
봉건제 하에서는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방토호나 부족은 필요할 때 군사를 차출해서 보내고, 세금만 꼬박꼬박 바치면 그만.
밑에서 지지고 볶든 말든 중앙조정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허나 그래서는 백성들이 칸을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토호를 따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있나.
킵차크 칸국이 개판이 되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고, 에디구의 뒤를 이어 누르알딘이 칸이 된 것도 자기만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자와 지도자는 항상 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해야 인식되는 법. 다른 부족 사정은 둘째 치고, 칸의 직영지에서만큼은 칸이 임명하는 관료가 파견되어 관리를 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의 체제로는 감당하기 힘든 노예가 밀려들면, 어쩔 수 없이 중앙조정의 체제가 잡힐 수밖에 없다는 거군.”
“지금의 느슨한 방식으로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요.”
“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이야기인데... 결과적으로 해내기만 한다면, 칸의 권력 강화로 이어지게 될 작업이다.
그 말인 즉.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목숨 걸고 해내야 한다는 뜻이고.
“그 시작점은 우리가 제안한 과거제도가 될 겁니다. 물론 시험과목에 대해서는 이곳의 사정에 맞춰서 정해야 하겠지만, 그 절차와 운용방법만큼은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바카스는 낯설지만 하도 지겹도록 들은 과거제도를 혀에 굴렸다.
이 시대 서방에는 시험을 통해 능력을 검증해 임용하는 제도가 없었다. 신분제에 따른 세습이나 인맥으로 인한 추천 등으로 관직에 임명됐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제도를 실시해야할 만큼, 행정조직이 고도화되지 못한 것도 있었고.
원래 역사에서도 대항해시대 이후에, 중국의 과거제도가 서방으로 전래되어 큰 충격을 주지 않았나.
그러니 시대가 훨씬 이른 지금시대에 조선의 과거제도를 킵차크 칸국에 이식하려는 시도는 꽤나 급진적이었는데... 한편으론 중앙집권을 이룩하려는 누르알딘과 바카스의 입맛에는 딱 맞는 제도이기도 했다.
“뭐 과거제도를 실시하는 건 어려움이 많겠지만, 이것도 몇 번 하다보면 얼추 체계가 잡힐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코사크나 루스인 중에서도, 과거에 합격해 칸의 신하가 되는 이들도 등장할 것이고요.”
“음...”
남 일이라고 히죽 웃는 이인이 꽤나 얄미웠지만, 바카스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단단히 확답을 받아 놓지. 책임을 물어 처벌을 할 정도로 말이야.”
“그럼 다행이고요.”
북쪽으로 향하는 원정은 누르알딘이 직접 담당하겠지만, 서쪽을 향해 이어지는 약탈은 바카스가 책임지고 있지 않나.
아무리 따로 노는 부족과 토호가 있더라도, 바카스의 명령을 막무가내로 무시할 순 없을 거다.
“코사크와 루스인은 그럼 됐고... 남쪽의 조지아 왕국에 대해서는 다른 조언을 했다면서? 아버지께서도 받아들이셨고 말이야.”
“그렇습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이인은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면 실망인데...”라는 눈빛을 슬쩍 흘렸다. 바카스는 그걸 알아차렸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지금은 굳이 그들을 건들 여유가 없지.”
“귀국의 결단에 대해서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건 아니지만, 우리가 보기에 조지아 왕국과 캅카스인들을 건드리는 건 무조건 손해가 날 일입니다.”
“그런가...”
“예.”
이인이 너무도 확신에 차서 말을 하자,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말았다.
“캅카스인은 성정이 거칠며 사납고, 그 땅은 척박한 산맥으로 이뤄져 있고, 정세 또한 혼란스럽습니다. 대체 거길 차지한들 뽑아낼 수 있는 게 있기나 합니까? 강역을 무조건 넓히는 게 이득이 아닌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세상 일이 쉽게 풀렸다면, 아국은 진작 몽골초원과 남방소국을 다 점령했을 겁니다.”
“흐음.”
캅카스 산맥 일대는 미래에 체첸,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곳.
지금은 조지아 왕국이 있긴 한데, 분열돼서 내부사정이 조금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곳은 동서양을 나누는 기준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으로,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이었다. 달리 말하면 요충지라는 뜻.
허나 그만큼 차지하기도 힘든 곳이었는데. 몽골제국이 서방을 휩쓸 때조차도 캅카스인들은 산맥으로 도망가서 끈질기게 저항했고, 티무르가 사방을 두들겨 팼을 때도 결국 버텨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앞으로의 미래에도 난장판인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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