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92화 (392/538)

< 392. 챕터52. 판을짜다 (6) >

“더 중요한 건, 그 땅을 차지하는 게 과연 칸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

바카스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말을 하는 이인을 보며, 그 또한 편견을 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바라봤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야.’

개고생을 해서 차지한다고 치자.

그 땅을 칸의 직영지로 만들어 관리한다고 하면,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반란은 물론 넓어진 강역으로 인한 행정낭비가 엄청날 거다.

예전의 방식대로 토호에게 자치권을 넘겨준다면, 그 거친 이들을 등에 업고 더 큰 권력자가 탄생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조지아 왕국의 왕이나 귀족을 속국대리인으로 삼는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전쟁을 벌이겠는가.

얼마 되지도 않는 세금과 군사를 걷겠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무래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흐음...”

나라의 위신이나 위엄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돈만 생각해서 생각해보면... 이곳 사람인 바카스가 봐도, 거길 건드리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꼴처럼 느꼈다.

하지만 아쉬워서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그래도 캅카스 산맥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지.”

“그건 맞습니다만... 귀국이 정벌하기 힘들다면, 남쪽의 오스만국이나 티무르 칸국 또한 정벌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동서양의 교차점이자 요충지에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온갖 나라의 침략에 시달렸던 캅카스인이다.

이들은 북쪽이든 남쪽이든 어디서 오든, 자신들의 땅을 밟으려는 자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만약 오스만국이나 티무르칸국이 남쪽에서 올라온다면, 산맥을 넘어왔을 때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곤 평야지대에서 귀국군대를 맞이하게 되겠죠. 좋은 자리를 찾는 건 전략의 기본인데, 굳이 산맥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야.”

유목민이 근간이 된 나라답게, 킵차크 칸국은 기병이 주력이다.

산맥을 넘느라 지친 적이 알아서 확 트인 사지로 내려오면, 그때 가서 쓸어버리는 게 최선의 방책 아닌가.

“또한 왕국으로 통합되었다고는 허나 실제로는 제대로 통합되지 못한 캅카스인들 아닙니까? 그치들은 지금처럼 그냥 내버려둬도, 거대한 세력이 되어 산맥 밖으로 뛰쳐나와 귀국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흐음.”

“차라리 조지아 왕국과 친교를 맺고 지원해서 남쪽을 견제하는 게, 돈과 인력을 아끼는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싼값에 그들을 방패막이로 삼자. 이 말이군.”

“그렇죠. 냉정하게 봤을 때, 귀국이 견제해야할 상대는 조지아 왕국이 아니라 오스만국과 티무르제국이니까요.”

어째 감언이설 같아보였지만, 바카스는 이인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다른 할 일이 급하고... 나아가 앞으로도 다른 토호를 억누르고 흡수하는 일이 더 급하지 않겠나. 조지아 왕국은 그 후에 신경 써도 되겠지.’

과연 중앙집권화 작업이 언제 끝나게 될지, 봉건귀족과 토호들을 어느 세월에 다 때려잡을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때까지 남쪽은 조용히 있는 게 최선.

‘굳이 필요도 없는 전선을 여러 개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킵차크 칸국의 내정이나 마찬가지인 대정책이자 대계획에, 조선을 비롯한 동방칸국이 관심을 갖고 회합의 안건으로 삼은 건 간단한 이유였다.

이들은 킵차크 칸국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고, 오롯이 노예 수급전쟁에만 열중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

공급자이자 수혜자인 킵차크 칸국으로서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라고 해도 그들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나 조선의 조언은 각골난망해도 아깝지 않은 수준이었지.

“그럼...”

북쪽, 서쪽, 남쪽의 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 확인했으니, 이젠 그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야 할 터.

사실 진짜 골치 아픈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코사크와 루스인 말인데... 그들의 종교를 어찌하는 게 좋겠나? 서신으로 받긴 했는데 그대의 의견을 듣고 싶군.”

“음. 후...”

이인은 바카스의 물음을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조선출신인 이인으로서는 솔직히 말해서 이곳의 종교문제는 어려워도 너무 어렵고,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다.

이곳의 종교는 동유럽에서 흘러들어온 다신교적인 발트신앙이 토착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오래전 이슬람 세력의 북상으로 인해 이슬람교가 들어왔다.

한때는 짧게나마 유대교가 국교가 되었던 적이 있고, 동로마제국 이후로는 정교회가 루스국으로 흘러들어갔고, 서유럽에선 동방의 야만인과 이교도를 개종시키자며 카톨릭이 밀려들었지.

여기에 몽골계 서방칸국이 들어서면서, 몽골이 믿던 텡그리 신앙까지 더해졌다.

부족, 민족마다 믿는 게 죄다 제각각이라서 뭐라 함부로 정의를 내릴 수가 없고, 지금 킵차크 칸국의 주류 종교는 이슬람교라지만 “이교도는 다 죽여라!”라고 외치는 중동아랍에 비하면, 굉장히 느슨하고 가벼운 신앙을 띄고 있었다.

“코사크와 루스인 노예들이 늘어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세.”

“그럴 겁니다.”

문제는 이거였다.

지금 당장은 이슬람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루스인 노예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정교의 입지가 커져갈 거라는 것.

“거기에 우리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서방과 로마국의 체제와 기술을 받아들여야 하네. 아까 그대가 말했던 과거제도를 실시하기 위해서라도, 서방학자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 하니까.”

“그렇죠.”

“그리고 서방학자들 대부분은 카톨릭과 정교의 사제들이지.”

“회회교 사제들의 반발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우린 그렇게 심하진 않지만... 그러한 우려는 분명히 있고, 또 충돌하는 관습도 적지 않으니까.”

“음...”

이들 종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인이지만, 조선은 불교를 때려잡던 역사가 있던 나라 아닌가.

마냥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종교가 그렇게 문제가 되나 싶겠지만, 이 시대에 종교는 곧 문화이자 관습, 법을 만드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당장 조선의 예를 들면. 다른 나라와 달리 조선에 목욕탕문화가 급속하게 퍼져나간 건, 몸을 씻는 불교식 제례가 민간에 퍼져 있었기 때문 아닌가.

이슬람교의 율법으로 돼지고기를 금지하자, 킵차크 칸국에선 돼지농장을 일구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

이 외에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이 죄다 문화로 파고들어서, 충돌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지금까지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 그들이 뭘 믿고 따르든, 칸의 명령을 잘 듣고 세금만 잘 내면 그만이었으니까.”

아까 말했던 봉건제의 특징 아닌가.

물론 국교에 따라서 눈치를 봐야하는 건 맞지만, 할 일만 잘하면 신경을 안 썼다.

“아국은 국교라는 게 없어서 딱히 신경쓰지 않지만... 이곳에선 불가능하겠지요?”

“그렇네.”

바카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의 종교가 곧 문화와 관습이라고 말했듯이. 종교를 갖는 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지성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교나 카톨릭이나 “이교도보다는 무신론자가 더 악한 존재다!”라고 괜히 외치는 게 아니다.

그들 눈에 무신론자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가치가 없는, 말 못하는 가축과도 같은 존재로 바라봤으니까.

이인은 함께 따라온 승려들을 통해 각 종파의 사제들과 나눈 대담을 전해 들었고, 이에 대한 결론을 나름 내린 상태였다.

그들 눈에 조선인들은 불교신자인 동시에 뭐랄까... 종교 같지 않은 종교인 유학신자처럼 느껴졌을 거다.

조선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념이자 가치로서 유학을 내세우고 있었으니까.

괜히 훗날 유학이 유교로 변해간 게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나... 단호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

바카스는 눈을 반짝이며 이인의 입술에 집중했다.

“아국의 역사에 대해서 얼추 들으셨겠지만, 아국은 불교를 믿던 전조의 폐단을 깨부수고자 건국된 나라입니다. 고려라 불리던 전조가 어째서 망하게 됐는지 아십니까?”

“...”

이인은 열변을 토하며, 고려 때의 폐단에 대해서 줄줄이 읊어갔다.

바카스는 낯설면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사건을 들으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이어갔다.

“해서 아국이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신을 믿고 따르는 것, 현재의 기복을 위해 무언가에게 기도하고 염원하는 것, 내세의 안식을 찾는 것. 이걸 위해 종교를 믿는 건 좋다 이겁니다.”

“...”

“헌데 현실정치와 행정에 있어서, 대체 어째서 사제들이 관료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들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지, 백성들의 생활을 이끌어내는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음...”

바카스는 매섭게 현실을 꼬집는 이인을 보며 배가 아팠지만, 한편으론 “이게 진짜 맞는 건가?”라는 의심도 숨기지 못했다.

“물론 이곳에선 현실적으로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인은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고려 때에만 해도 유학자들에게 맞서 정치토론을 할 정도로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불교승려들 밖에 없었다.

이곳도 마찬가지.

글을 능숙하게 읽고 쓰고, 행정과 정치를 할 수 있는 계층은 학문을 익힌 사제들이다.

특히 유럽의 경우. 무력을 바탕으로 권세를 유지하는 기사들이 지배층으로 있으면서, 무식해야 더 용맹하다는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서 글도 모르는 귀족이 허다하지 않나.

물론 영주를 도와줄 행정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작은 마을이나 소도시의 행정은 이미 체계가 잡힌 카톨릭, 정교회 사제들이 대신 해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슬람 세력권도 대동소이했다.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흡사 춘추전국시대마냥, 뛰어난 주군과 권력자를 찾아 떠돌면서 조언자로 활약하는 게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지.

“그렇지만 힘들다고 손을 놔버리면, 칸과 그대가 꿈꾸는 중앙집권을 이룩하는 건 힘들어질 겁니다.”

“...!”

지금까지의 개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될 거라는 말에, 바카스는 번개라도 맞은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을과 도시를 다스리는 인물이 칸이 임명한 관료가 아니라 그 지역의 사제들이라면, 만약 칸의 명령과 사제의 신념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십니까?”

“...”

“마을에 사는 백성들이 매일 같이 보는 사제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뜬구름 같은 존재인 칸. 현실의 문제가 닥쳤을 때, 백성들이 누굴 더 의지하고 따르겠습니까?”

“끄응...”

바카스는 할 말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답은 나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귀국이 국교를 어떤 걸로 정하는 걸 떠나서, 어떤 식으로든 중앙조정을 바로세우기 위해선 종교계를 정치와 행정에서 뜯어낼 필요가 있는 겁니다.”

독실한 신자들이 들었으면 게거품을 물 발언이지만, 바카스는 약간 가벼운 이슬람 신자에 조선인들에게 나름 매혹된 상태 아닌가.

이인의 말을 결코 허투루 흘려듣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허면...”

“결국 답은 하나의 종교로 통합을 해버리든가, 아니면 모두 인정하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양자택일을 던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후자 밖에 선택지가 없다. 전자를 택하면 중앙집권을 이루기도 전에 무수한 피로 얼룩지게 될 테니까.

그래도 기존의 관념을 바로 벗어던지지 못해서, 바카스는 한마디 하고 말았다.

“루스인을 개종하거나, 반대로 토호들을 개종하는 건 힘들겠나?”

“그게 쉽게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서방에서는 종교의 이름을 걸고 수차례 전쟁도 벌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후...”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묵직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먹고 살기가 바쁘면 아무렇지 않게 종교를 버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목숨 걸고 신앙을 수호하려는 사람도 있는 법.

미친 듯이 밀려드는 노예들을 어떻게 다 추려내고 신앙을 확인할 수 있을까.

종교 문제라 자칫 피라도 봤다가는, 그냥 반란이 아니라 종교와 결합한 괴상한 성전 같은 반란이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대들의 종교를 아버지께 꺼낸 거군?”

“예. 국교를 정하는 건 사실상 힘들 테지만, 칸의 종교에 따라서 기존 종교의 위상이 달라질 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만약 칸이 이슬람교를 믿는다면, 당연히 이슬람신자들이 더 요직을 차지하거나 이득을 볼 상황이 생기지 않겠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그럴 바에는 칸께서 아예 이곳과 연관이 없는 조선불교를 받아들이는 것도 나쁠 게 없겠지요. 적어도 조선불교는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고, 땅이나 노예를 소유하지도 않고, 타종교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으니까요. 특히나 개종하라고 압박을 주지도 않죠.”

“흐음...”

이건 바카스도 이미 조선승려를 만나봐서 아는 이야기였다.

몽골계의 후손이니 불교에 대해서 마냥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더욱 거부감이 적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허무맹랑한 말처럼 들리지만, 신앙을 떨어뜨려놓고 통치의 일환으로만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무섭군.’

바카스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인을 무슨 괴물 보듯이 바라봤다.

신앙은 가치관이자 이데올로기의 문제인데, 이걸 오롯이 현실통치에 따라서 취했다가 버렸다가 할 수 있는 문제던가.

헌데 조선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니, 왠지 모를 껄끄러움이 밀려왔다.

‘차라리 그들이 따르는 유학을 받아들이는 게, 어쩌면 조정을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건 더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얼른 지워냈다.

유학이 통치체제인건 맞지만, 일견 종교처럼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학문이기도 하지 않나.

이걸 받아들이면 카톨릭이나 정교회로 갈아타는 것보다, 더 큰 혼란이 일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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