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 챕터52. 판을짜다 (7)
‘정말 곤란하군...’
바카스의 머리가 점점 아파가는 와중에도, 이인은 다시금 입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곳에 와서 보니 더욱 문제가 되는 게 있더군요.”
“...?”
“귀국에도 성문법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제대로 지켜지는 법이 적더군요. 심지어 사제들이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봤습니다.”
“음.”
바카스는 “그게 왜?”라는 생각을 품으면서도, 이인의 반응을 보면서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라는 의심을 품었다.
킵차크 칸국에도 법전으로 명시된 성문법이 있긴 했는데, 조선이나 중국만큼 조밀한 법조항을 가진 건 아니었다.
유목민들의 관습법, 역사와 함께 축척되어온 이 땅의 관습법, 각 종파의 율법에 따른 종교법이 우선순위 없이 뒤죽박죽으로 적용이 됐고.
그 법집행의 주체마저도 자치권을 가진 귀족토호나 종교사제에 의해 진행됐다.
한마디로 권력자의 입맛대로였다는 거지.
그나마 외국상인이 껴 있는 분쟁의 경우에는 재판이 열리기도 했지만, 이 또한 인맥과 뇌물 등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
이인은 그렇게 말을 하고선, 자기도 모르게 콧김을 내뿜었다.
고려의 폐단이 극심했던 시절에도, 감히 승려들이 판관의 역할을 대신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것조차도 엄청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인으로서는,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기가 막힐 따름이지.
“앞으로 종교와 문화가 다른 루스인 노예들이 계속 늘어날 텐데, 지금처럼 법집행을 계속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종교사제들이 보기에는 온갖 것이 전부 법을 어기는 행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
“자치권을 위임받은 귀족토호라면 그나마 납득할 수 있지만, 종교사제가 사법권을 행사하는 건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끄응.”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고, 이인은 주먹을 불끈 쥐며 목청을 높여갔다.
“법집행이야 말로 칸의 귄위와 명분을 백성들에게 극명하게 체감시켜주는 수단입니다. 이걸 종교사제에게 넘겨주면, 백성들이 종교사제의 눈치를 보겠습니까, 아니면 칸의 눈치를 살피겠습니까?”
“...”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에, 바카스는 다시금 할 말이 궁색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처벌하는 것에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안정이 보장된 생활, 질서유지, 공공의 이득 등이 법의 필요성으로 거론되고 그게 맞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거다.
칸의 힘이 강하니까 칸이 정한 법을 따르는 건데, 그걸 종교사제가 대신한다? 당연히 칸의 힘이 강해지는 게 아니고 종교의 힘이 강해지는 법.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누르알딘과 바카스가 꿈꾸는 중앙집권과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행보였으니까.
“물론 단기간에 신법을 만드는 게 힘든 건 사실입니다.”
법이라는 건 문화와 관습에 깊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걸 하루아침에 뒤집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니 기존의 관습법과 종교법을 성문법으로 끌어와 똑같은 법조항을 만든다고 해도, 그 법집행만큼은 칸이 임명한 관료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는 거죠.”
“주체가 중요하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결과는 똑같더라도 법집행의 주체에 따라서, 백성들이 바라보고 충성을 다해야할 대상이 바뀌는 거니까요.”
“음...”
종교와 사법을 따로 띄어놓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바카스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다 내려놓고 곰곰이 고심하면 이인의 말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걸 느끼고 말았다.
이걸 실제로 행하고 있는 나라가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니까.
“그대의 나라에선 사법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했지?”
“우리도 우여곡절이 많긴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됐습니다. 중앙조정의 율법부에서 파견한 관료가 각 지방으로 내려가 재판을 담당하고 있지요.”
“흐음.”
바카스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조선이 희한한 나라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나에게는 더 좋아 보인다는 점이겠지만...’
“귀국이 아국처럼 행정,군사,사법이 완전히 분리되는 건 힘들겠지만, 적어도 사법에 관해서만큼은 칸의 조정이 중심을 잡고 진행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직영지에 한해서만 집행될 수 있겠지만, 머지않아 지방토호들에게도 칸이 임명한 판관이 파견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판관을 통해 귀족토호의 권리를 제한하게 될 거고?”
“그렇게 되겠죠. 그게 시작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인은 대꾸를 하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고, 바카스는 그 속내를 깨닫고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를 배제해 루스인 노예를 대우해준다는 명분을 활용하면, 지방권력자의 팔 한쪽을 뜯어낼 수 있는 암계였으니까.
“신법을 만드는 건 여러모로 중앙집권에 도움이 될 거고, 루스인 노예를 다스리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종교가 달라 충돌이 발생한들, 그게 칸이 정한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문제가 안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반발하면?”
“그때야 말로 명분을 등에 업고, 종교사제들을 찍어 누를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요. 그들은 법집행의 주체로서 나름 이권과 권위를 보장받고 있는데, 그걸 빼앗기는 걸 잠자코 두고 보겠습니까.”
“결국 한판 붙을 수밖에 없다는 거군...”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누가 그들의 편을 들어주겠습니까. 루스인 노예가 많이 풀리면 풀릴수록, 칸뿐만 아니라 지방토호들도 이득을 보는 건 마찬가지일터... 그들 또한 자신의 영지가 종교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건 원치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때가선 칼을 빼들어도 되겠군.”
“예.”
이인은 냉큼 고개를 끄덕여댔다.
유목민 관습이 깊게 배어 있는 이곳은, 나쁘게 말하면 약간의 명분만으로도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거침이 없다.
말을 안 들으면 거리낌 없이 쳐죽일 수 있는 곳이니, 조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두의 눈치를 봐가며 살얼음판을 걷듯이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더불어 이 신법을 만들면서 루스인의 관습과 정교의 율법을 적당히 버무리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칸의 직영지에서 법적으로 종교와 신분을 보장받는 루스인 노예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방영지와의 불평등은 심해질 겁니다.”
“그럼...!?”
바카스는 다시금 눈을 번쩍 뜨고서, 기대감 섞인 눈으로 이인을 바라봤다.
“상황이 격화되면 지방영지의 루스인 노예들은, 지방토호보다 칸의 직접통치를 더 바라게 되지 않겠습니까?”
“지방토호를 압박할 명분을 얻게 된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설령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방토호는 불만을 잠재우고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칸의 직영지 법을 따를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이인은 히죽 웃으며 답을 했다.
“직영지와 같게 되는 거니, 결론적으로는 칸의 권위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는 말이군.”
“한번 따르기 시작하면, 지방토호의 권위보다 칸의 권위가 위에 있다는 걸 모든 백성들이 느끼게 될 겁니다.”
“좋군.”
짝!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종교를 이용해 중앙집권을 꾀하는 방책을 서슴없이 내놓는 걸 보며, 다시금 이인이 만만한 인물이 아닌 걸 느끼고 말았다.
더 정확히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이질적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종교를 건드리지 않고도 일단 사법권을 뜯어내서 사제들의 권위를 약화시킨다... 나쁘지 않아.”
“여기에 추가로 행정관료를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행정권까지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정교분리란 말이지.”
“엄밀히 말하면 칸과 조정의 권위를 종교 위에 올려놓는 거죠. 듣기로 서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몇 번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서에 기록된 사건을 분석해 이점을 취하면 충분히 가능할 일입니다.”
유럽에서도 교황청과 왕의 권력다툼은 꾸준히 있어왔고, 이로 인해서 카노사의 굴욕이라든가 아비뇽 유수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나.
지금은 교황의 권위가 더 떨어져서 세속군주화 되어가고 있었기에, 사서에 버젓이 남아 있는 이 사건들을 분석한다면 바카스와 누르알딘이 해야 할 일을 추려낼 수 있었다.
“더불어 행정권을 장악해야하는 필요성은 또 있습니다. 이곳에는 십일조나 자카트와 같은 종교세가 있더군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
갑자기 발끈하는 이인을 보며, 바카스는 눈을 빛내고 귀를 기울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돈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세금을 걷는 건 나라의 일이지, 신의 뜻을 따르는 사제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감히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딜 감히 종교계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어?
고려 때도 이런 짓은 대놓고 하지 못해서 온갖 꼼수를 썼었고, 그 폐단이 어마어마하지 않았나.
이인이 보기엔 서방의 나라들이 망하지 않고 멀쩡하게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세금은 백성들이 나라의 존재와 칸의 권위를 가장 가깝게 느끼는 수단입니다. 이건 간간히 벌어지는 법집행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죠. 이걸 관료가 아닌 사제와 종교계가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인 겁니다.”
“음...”
사실 유럽에서도 이런 문제는 똑같이 벌어졌고, 지금은 교회의 권위가 많이 추락해서 십일조를 영주가 대신 거둬들이고 있었다.
“니들이 왜 가져 가냐! 다시 돌려줘!”라는 교회의 요청은 그냥 씹어버리고 내놓지 않고 있지.
종교세가 사실상 세속세금이 된 셈이다.
이슬람의 경우에도 빈민구제 등을 이유로 자카트를 걷고 있지만, 그게 어떻게 쓰이는지 누가 어떻게 알겠나.
“그 세금을 걷는 주체가 어떻게 되든 종교세라는 것 차제가 이미 문제입니다. 귀국과 같은 상황에선 어떻게든 돈이 종교계로 흘러들어가는 건 막아야 하고, 지방토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겁니다.”
“그들이 종교세를 이유로 중앙조정에 바쳐야할 세금을 유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도 머리를 굴려가며, 세금을 덜 내려는 토호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이건 굳이 말을 안 해도 뻔한 것 아닌가.
보나마나 종교계와 토호가 손을 잡고, 칸에게 내야할 세금을 뻥튀기해서 부스러기를 주워먹고 있을 거다.
그만큼 과중해진 세금에 대한 불만은 칸에게 돌려서, 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은 칸을 욕하고 있을 거고.
“종교세를 없애버리면 싫어할 백성은 그 누구도 없을 거고, 돈줄이 막힌 종교계는 자연스럽게 칸과 조정의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한 번 더 굴복시킨다는 거군.”
바카스는 이인의 표정에 물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헌금이나 기타 등등으로 교회나 사원등지를 운용할 수는 있겠지만, 명시적이고 합법적으로 세금을 걷는 것과 그렇지 않는 건 분명한 차이를 보여줄 거다.
“역시나 만약 이를 거부하고 반기를 들면?”
“이번에도 또 명분을 등에 업고 밟아줄 기회가 생기는 거죠. 세금을 적게 내는 건, 백성들 모두가 바라는 일 아닙니까. 루스인 노예든 기존 백성이든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흐흥.”
바카스는 빛나는 미래를 상상하곤, 콧바람을 흘리고 말았다.
“군사에 대해서는 그나마 신경 쓸 게 없어서 다행입니다. 종교계가 군대를 거느리고 있진 않으니까요.”
“...”
“이렇게 사법,행정,군사에 있어서 전부 종교의 영향력을 떨어뜨려 칸의 발아래에 놓게 되면, 아까 말했던 국교 문제나 종교의 자유문제 또한 대하기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칸과 조정의 결정에 이래라 저래라 할 힘이 없어질 테니까요.”
“그렇겠군!”
중앙집권을 꾀하기 위해 암계를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정교분리가 일어나 칸의 권위를 높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만큼 칸과 조정의 선택지도 많아지게 되는 셈이고, 종교법보다 칸이 제정한 성문법을 위에 올려놓으면 시시콜콜한 온갖 문제 또한 함께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종교가 아닌 법으로 해결한다. 이러한 경향이 커지면 커질수록 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테니, 당연히 칸의 권위 또한 올라가겠군.”
“그렇습니다. 그때가 되면 국교를 굳이 정하지 않더라도 나라가 휘청거릴 일이 없고, 칸과 왕족의 종교가 뭐가 되든 백성들은 신경쓰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차별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그대들의 종교. 조선불교가 끼어들 수도 있고 말이야.”
“뭐... 그것도 나쁘게 볼 건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적극적인 포교를 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다만 구속과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불교가 칸의 조정에 가장 덜 영향을 끼친다는 건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음...”
“종교의 자유가 법으로 보장된다면, 조선불교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인은 “어떤 종교가 더 백성들에게 편할지는 두고 봐야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듯 빙긋 웃었고, 바카스는 그걸 알고서도 히죽 웃고 말았다.
“좋아. 좋은 방책이야... 문제라면 역시나 행정관료를 어떻게 양성하느냐는 거군. 그대의 나라에 있는 대학이나 연수원과 같은 교육기관을 대대적으로 키워야하겠군?”
“물론입니다. 이미 서방의 다른 나라에도 대학은 여럿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의 제도와 아국의 제도를 적당히 결합하면 그럴싸한 교육기관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음...”
이건 바카스가 더 잘 아는 사안.
동로마제국은 물론이고 온갖 나라에는 명칭은 달라도 대학과 유사한 고등교육기관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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