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94화 (394/538)

394. 챕터52. 판을짜다 (8)

행정관료가 필요한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고, 교회와 같은 종교계에서 벗어나 권력을 쟁취하려는 권력자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다만 종교를 조정에서 떨어뜨리면 그걸 대신할 통치기조가 필요한 법인데, 그대들의 자본유학이나 동방의 유학을 받아들이는 건 힘들 것 같군.”

“...”

“오래전 중국에서 대재앙이 벌어져 명나라가 망하고, 통치기조와 사상계 전반이 흔들린 걸 알고 있네. 그대의 나라 또한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해서 자본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과 기조를 만들었다지? 사실상 지금도 미완성된 상태이고.”

바카스는 침잠한 눈으로 과거를 집어갔다.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킵차크 칸국이 부활했는데, 바카스가 중국의 사정을 모를 리가 있나.

더불어 이들은 몽골계의 후손이기 때문에, 유학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유학이 통치기조로 쓰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비록 한인과 남인이 원나라 조정의 관료가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어찌됐건 원나라는 유학을 국시國是로 삼아서 나라를 꾸려갔으니까.

같은 뿌리를 둔 킵차크 칸국이 원나라 사정을 모를 리가 없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 사정 또한 알고 있었다.

“아국의 자본유학이 기존의 유학과 확연히 달라져서 미흡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어울리는 면도 있지 않습니까? 빈자리는 칸의 뜻대로 채울 수 있으니까요. 이곳의 관습을 흡수해서 말이죠.”

“흐음...”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솔직히 말해서 확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

아까 떠올렸던 것처럼,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자본유학을 기조로 삼는 건 어려움이 너무 컸다.

“우리가 보기에 칸의 조정이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선 로마국의 체제와 제도를 끌어오는 게 나쁘지 않아 보이더군요. 그곳의 교육기관도 그렇고요. 물론 과목과 학문에 있어서는 논의가 필요할 거고, 과거제도 또한 다듬어야겠지만... 큰 틀을 따오는 건 로마국이 좋아 보입니다.”

“로마국?”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로마국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신세인데, 그들의 체제와 제도가 도움이 되겠나?”

“지금은 미약해졌지만, 그 등불은 무려 천년을 넘게 타오른 등불입니다.”

“...!”

“서방의 온갖 나라가 명멸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그 이유와 근본은 분명히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이인이 지금이 아닌 과거를 말하자, 바카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생각해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로마제국시절부터 생각하면, 동로마제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

온갖 부침을 다 겪고 살아남았다면 그만큼 경험치가 농축되었다는 뜻이고, 국가 운영에 있어서도 별의 별 사건을 다 겪었을 것 아닌가.

“뭐... 지금은 위태위태한 게 사실이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요. 적당히 필요한 부분을 찾아 이곳 사정에 맞게 변형하면 될 것입니다. 지금 분위기와도 딱 맞고요.”

“음...”

바카스는 조선인들이 이곳에 와서 한 일을 지켜봤다.

그들은 서방의 모든 것. 서적, 종자, 가축, 종교, 문화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모든 걸 수집하고 분석하고 있는 상황.

그런 이들이 동로마제국의 체제가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진지하게 논의를 해봐야겠어. 특히나 행정망구축과 과거제도가 가장 시급한데, 이걸 교육할 학자들을 수급하려면... 로마국 밖에 없지 않나.’

바카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선 화제를 돌렸다.

“동방의 소칸국들도 우리와 사정은 마찬가지일 텐데, 그들은 어찌하기로 했지?”

“그나마 이곳만큼 복잡하지 않아서, 쉽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치들은 종교에 대해서 훨씬 느슨하고 국교도 딱히 가리는 게 없지 않습니까. 필요에 따라서 거리낌 없이 개종을 반복하는 이들이니까요.”

“음...”

“동방과 가까운 소칸국 중에선 아국의 종교와 체제를 받아들이겠다는 곳도 있고, 서방에 가까운 곳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나라도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루스인 노예를 많이 흡수해도, 귀국만큼 많이 흡수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가...”

바카스는 이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면서 말을 흐렸다.

원래 유목민들은 대충 뭉쳐서 살곤 했지만, 동방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몇몇 대부족을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쳐서 서로를 구별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선사절단은 조언이자 감언이설을 열심히 날려서 소칸국들이 정체성을 갖고 서로 분리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겉으로는 칸국이지만 속을 보면 중국의 연맹과 흡사한 체제를 완성했지.

애초에 중앙집권보단 연맹체가 이들의 생태와 더 가깝기도 했고.

그렇다보니 중앙집권을 추구하려는 킵차크 칸국과는 사정이 퍽 달랐고, 체급 자체가 작기 때문에 느슨하게 해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적었다.

“허면 그대의 나라는 어찌할 생각인가? 지금까지의 움직임으로 봐선 일 년에 최소 오천, 많으면 만명까지 루스인 노예를 흡수할 텐데... 종교도 문화도 다른 이들을 어찌 처리할 생각이지?”

“우리야 뭐...”

이인은 조선은 노예가 없어서 루스인들은 죄다 조선화교육을 받고 양민이 될 거라고 말해주려다가... 이해를 못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신분제가 당연한 시대에 홀로 신분제를 깨부수고 있는 게 조선이다.

이건 종교보다도 더 민감한 문제라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그나마 쉽게 언급할 수 있는 건 종교문제. 안 그래도 이 부분에 있어서 사절단에 속한 관료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었다.

“일단... 이건 아국 조정의 뜻이 아니라, 이곳에 머무는 관료들의 의견입니다.”

“계속하게.”

바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국은 국교라는 게 따로 없고, 조선불교만 남아 있죠.”

“그렇다고 들었네.”

“조선불교 또한 조정과 완전히 분리되어 민간에만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이곳의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문제가 큽니다.”

“그렇겠지...”

바카스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이미 익숙한 이곳에서조차도 난리법석인데, 완전히 문화가 이질적인 조선에 정치권력을 행사하려는 종교가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조정의 권위에 살짝이라도 도전을 했다가는 피보라가 벌어질 텐데, 이곳 종교는 그런 위험요소를 너무 많이 품고 있다.

“먼저 토착신앙의 경우에는 그냥 밟아서 무시해버릴 겁니다. 이곳에서도 주류종교에 밀려났는데, 아국이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저 학문적인 연구대상이 될 뿐입니다.”

“...”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인을 보며, 바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선은 조선내부의 박수무당들도 다 조지고, 심지어 종묘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던 사직의 권위마저도 무지막지하게 깎아내리고 있는 나라다.

여진과 몽골, 대만 원주민의 토속신앙조차도 불교로 흡수해 밟아버렸는데, 이곳의 발트신앙을 남겨둘 리가 없지.

“회회교의 경우에도 무리입니다.”

“...?”

독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이슬람교를 믿는 바카스이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하고 말았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국에도 원나라 시절에 들어온 회회교도가 있었습니다. 허나 그들은 아국의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만의 복식과 관습을 고수하며 살더군요.”

물론 이 때는 시대상 중앙집권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찌됐건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따로 놀았던 게 사실.

“아국이 남방으로 진출을 했다고 했죠? 그곳에서도 회회교도들을 만났으나, 그들 역시도 한족과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끼리 살아가더군요. 통합을 바라는 아국에게는 그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종교의 자유 문제가 아니군...”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맞습니다. 아국은 조정의 아래에 종교가 위치해 있는데, 그들은 아국법과 체계보다 종교법을 우선시 하려는 경향이 있더군요. 이곳과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해했네.”

이인은 바카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다음으론 서방의 카톨릭인데... 이것도 극성맞은 건 비슷하거니와 더 큰 문제는 이들이 교황청이라는 단일조직으로 뭉쳐 있다는 겁니다.”

“...?”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바카스는 또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인은 종교를 교리와 신앙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자꾸 통치의 일환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나.

서방인들의 통념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게 중앙집권에는 효율적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쉴 따름이었다.

“아국에는 기존 불교의 폐단을 타파하고 새롭게 조선불교청을 완성했습니다. 허나 이것과 거의 흡사하게, 심지어 정치,행정권력을 가진 교황청이라는 조직이 존재하더군요.”

“맞네.”

“만약 카톨릭을 아국이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제들과 신자들은 아국조정보다는 교황청이라는 조직에 속해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조정이 아닌데 조정의 역할을 하고 있는 종교는 아국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흐음... 서방에선 교회의 권력이 약해지고 왕과 영주의 권력이 강해졌다고 들었는데...”

“약해져서 그나마 말이라도 꺼낼 수 있는 거지, 예전이었다면 아국은 상종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음.”

바카스는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다.

지금의 조선이 카톨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원래 역사에서 조선후기에 천주교가 전래되어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 때는 종교개혁이 일어나 카톨릭과 개신교가 분화하고, 이런 대립을 통해 온갖 교리의 발전 및 변화가 일어났다. 대항해시대에 맞춰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그곳의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아 교리가 변화한 것도 있고.

조선이 달라진 점은 더욱 크다.

운석핵꿀밤으로 근본성리학이 무너지고 자본유학이 등장했으니, 숭유崇儒정책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

유학식 제례를 비롯한 모든 것이 조선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는 조선불교청에게 완전히 자리를 빼앗긴 상태.

미래에 문제가 되는 제사의 경우는 조상을 기리는 건지, 직접적으로 조상신으로 숭상하는 건지를 놓고 문제가 되는데...

지금 역사에선 전부 불교식 제례로 대체하면서, 유학식 제사문화자체가 없어지고 있는 판국.

그 외에 문화, 관습이자 통념으로 자리 잡아야 했을 성리학은, 오히려 근본으로 회귀해 통치학문으로서만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나.

결국 시대가 한참 일러서 종교교리를 놓고 문제가 생길 일은 없는데, 정작 교황청이라는 통합조직의 존재 자체가 조선관료들에게는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마지막으로 남은 건 정교회인데... 카톨릭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으니 교리에 있어서는 크게 문제될 건 없는데, 다른 점이 있더군요.”

“...?”

카톨릭을 놓고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린 이인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던 바카스.

그는 뜬금없이 튀어나온 긍정적인 발언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쏠렸다.

“정교회는 독립된 분파가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대교구라고 하던가요?”

“아...”

이건 바카스도 아는 내용이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회는 동로마제국 시절에 새롭게 개종한 각 지역과 민족토호들에게 독립적인지위를 보장해줬고, 그 전에도 이미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교구로 분화됐다.

그 외에 총대교구는 아니지만 자잘한 대교구가 존재했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국의 입맛에 꽤 맞는 종교입니다. 독립교구이니 아국조정의 뜻대로 만들면 그만이고, 아국의 문화 및 법과 교리가 충돌하는 부분에 있으면 바꾸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

“특히나 루스인 노예들이 주로 믿는 종교가 정교회이니, 더욱더 안성맞춤이지요.”

“허...!”

바카스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말에,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오만해도 이렇게 오만할 수가 있나.

신앙을 믿음으로 접근해서 완성하는 게 아니라,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종교를 아예 새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말 아닌가.

그런 바카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인은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근본도 없는 모스크바에도 대교구가 있는데, 아국이 대교구를 못 만들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국은 불교계파를 전부 모아서, 세상 어디에 없는 조선불교청을 만들었습니다.”

자신만만한 이인을 보니, 다시금 입이 다물어진다.

“허...”

‘어쩐지.’

바카스는 속으로 놀람을 감췄다.

불교의 종파 중에 하나로 생각했던 조선불교가, 그가 들어왔던 불교와 뭔가 다르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조선조정이 아예 재창조 해버린 종교일 줄이야.

이건 정녕 상상도 못했다.

“꽤 효과를 봤죠. 조선백성들은 물론, 당사자인 불교승려들조차도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중국과 일본, 남방의 불교승려들조차도 아국승려들과의 교리논답을 바라고 또 인정하고 있지요.”

“끄응.... 그럼 그건 사실상 정교회가 아니지 않나?”

“뭐 상관있습니까? 같은 신을 믿으면 되고, 교리야 경전을 통해 얻으면 됩니다. 그 경전의 해석을 놓고 지금까지도 논쟁이 있어왔고, 그로 인해 카톨릭과 정교회가 분열된 것 아닙니까? 아국의 사정에 맞춰서, 경전의 해석을 달리하는 건 크게 어려울 게 없습니다.”

“흐음...”

‘이단의 문제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군.’

바카스는 이인이 저렇게 막나가는 발언을 하는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이역만리 떨어진 조선에서 자기 맘대로 정교회를 세운다고 한들, 다른 정교회 교구들이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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