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97화 (397/538)

397. 챕터52. 판을짜다 (11)

‘놀랍군.’

무역로를 이어붙이는 것만으로, 오스만제국을 압박할 포위망이 완성되어 버린 꼴 아닌가.

모두가 이득을 보기 위해선 오스만제국을 두들겨 팰 수밖에 없고, 오스만제국을 패면 팰수록 이득이 늘어나는 형세가 만들어진 셈.

이젠 누구도 발을 빼지 못하고, 무역을 열심히 하면서 오스만제국을 패야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티무르 칸국이 로마국의 방패가 된 셈인데... 그들 또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라면, 결코 우리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뭐라도 해서 이득을 취하는 게 낫고, 그럴 거면 잠재적인 적국의 국력을 깎는 게 최선이겠죠.”

킵차크 칸국이 자신의 편으로 돌아서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는 로마국과 해상국가인데, 이젠 전면에 서서 대신 싸워줄 대리자가 등장했다.

보나마나 물심양면으로 티무르제국을 지원해 줄 테고, 그게 오스만제국의 돈줄을 막는 일이라면 더욱더 열을 내겠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역량이 폭등할 거야. 그리고...’

“덕분에 로마국은 명줄이 늘어나겠군?”

“뭐... 그쪽 내부사정이 어지러워서, 얼마나 갈지는 솔직히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허나 못해도 십년만 지나면 귀국은 얼추 중앙조정을 만들고 중앙집권을 이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로마국의 생사는 알아서 하라고 하고, 귀국은 열심히 로마국의 기술과 학문을 뽑아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바카스는 동의를 하면서도, 이인이 말하지 않은 비밀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모든 판을 짠 건, 결국 더 많은 노예를 동방으로 보내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 작업에 관심을 덜 쏟게 된다면, 당장 동방칸국과 조선의 눈길은 킵차크 칸국에서 멀어질 거다.

‘티무르 칸국이 본래 가지고 있던 초원길을 부활시키려는 의도가 여기에 있겠지. 여차하면 갈아타버리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바카스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조선과 동방칸국이 티무르제국에게 손을 내밀면, 그걸 마다할 리가 있겠나.

킵차크 칸국만 사라진다면, 티무르제국은 인도와 동방, 서방을 전부 연결하는 중심지가 된다.

‘티무르 칸국이 우리의 역할을 못할 리가 없지.’

뭐 엄청난 대적과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매일같이 두들겨 패고 약탈하고 있는 코사크 및 루스국과 싸우는 일이다.

티무르제국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얼마든지 맡겨 두라고!”라고 외치면서 신나게 노예를 잡아올 거다.

아예 한술 더 뜰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지금 노예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곳은 북아프리카-중동아랍-인도다.

이러니 루스인 노예를 인도에 팔아넘기는 건, 또 다른 노예시장이 열리는 셈.

티무르제국은 조선을 비롯한 이들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루스국을 작살내 놓지 않을까.

‘무섭도록 치밀하군. 숫제 우릴 손바닥 위에 올려놓겠다는 건데... 이게 아버지와 나에게 너무나 큰 이득이라는 게 문제다.’

그냥 킵차크 칸국을 유지하는 것도 이득이 될 정도인데, 지방토호를 찍어 누르고 중앙집권을 이룩하려는 둘 입장에선 결코 손을 놓을 수가 없는 바.

상처를 회복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아무도 건들 수 없는 수렁 안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꼴.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건, 일단 크고 나서 생각할 다음 단계였다.

바카스가 침묵을 고수하며 상념에 빠져들었을 때. 이인 또한 상념에 접어들었다.

‘보아하니 확실히 넘어온 거 같고... 이만하면 이곳에 온 성과는 충분히 거둔 걸로 보이는데?’

그는 조용히 분위기를 맞춰가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번 사절단은 사서에 남을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한반도 왕조 중에서 중국과 몽골초원 넘어서, 서방과 직접적으로 교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연오랑의 조언은 필수였다.

그는 조선관원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이미 개혁을 통해 그 능력과 안목을 증명하지 않았나.

조정관원들은 물론이고, 친분이 깊은 이인 또한 비공식적으로 연오랑의 조언을 구했지.

‘형님이 바라는 것도 얼추 된 것 같네.’

그는 저 먼 남방에서 고생하고 있을 연오랑을 떠올렸다.

조선조정이 사절단에 내린 임무는 서방의 문물을 수집하고, 친조선파 나라를 지원하며, 색목인 노예를 꾸준히 수급할 방책을 마련하는 것.

운이 좋아 누르알딘 및 바카스와 손을 잡으면서, 이 모든 게 한 번에 해결 된 상태.

남은 건 연오랑의 조언을 따라 대계를 완성하는 거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도 충분히 성과를 거둔 셈이겠지. 형님이 서방세력을 왜 이렇게 견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지금까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여기에 와서 확인한 바로, 이인은 솔직히 연오랑이 왜 그렇게 서방을 견제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땅 덩어리도 크고, 사람도 많고, 여러 방면에서 조선이 받아들일 학문과 기술이 있는 건 맞지만... ‘조선에게 군사적으로 위험이 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고개가 내저어진다.

조선은커녕 킵차크 칸국과 소칸국을 넘어오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어찌됐건 대계를 진행해서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오스만제국과 루스국을 압박하는 건 나쁠 게 없다.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건 초원의 소칸국이었는데... 오히려 이쪽이 더 잘 풀릴 것 같단 말이지.’

조선사절단이 소칸국들을 지원해서 나라의 기틀을 만들 게 도와주는 건, 그게 오히려 초원을 안정화 시키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들불처럼 일어나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가게 만드는 것 보단, 하나둘씩 방화선을 그어 놓는 게 좋지.’

초원 유목민이 정착해서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하면, 같은 유목민이라도 쉽게 하나로 합쳐지는 건 힘들지 않을까.

지금도 동방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제멋대로 살던 이들이 얼추 비슷한 민족과 부족으로 묶인 상태다.

이 상황에서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운집생활을 시작하고, 서방인 노예가 들어와 하위계층을 형성. 기존의 부족들이 귀족이나 상위계층을 형성하면, 얼추 정주국가의 나라형태가 완성될 거다.

이제 명확한 국경과 국명과 민족과 정체성이 다른 나라로 쪼개지기 시작하는 거지.

실제로도 이러한 상황이 펼쳐졌다.

미래의 신장위구르 지역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오이라트나 섬서몽골과 다른 자신들만의 소칸국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이것만 봐도 이미 원래 역사와는 비틀어진 상태였다.

‘그 뿐일까. 이들이 자생력을 갖추려면 농지뿐만 아니라, 다른 무역품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 척박한 땅에 사는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건, 사실상 모피 밖에 없을 거야.’

이인은 물끄러미 지도를 더듬으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킵차크 칸국은 특산품을 챙기기 위해서, 북쪽의 시베리아로 진출해 모피무역에 한발 담그려고 하고 있다.

처지가 똑같은 소칸국이라고 다를까.

그들 또한 현상유지를 넘어 성장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중앙아시아의 초원에 사는 이들이 챙길 수 있는 특산품 중에서, 팔아서 돈이 되는 건 역시나 모피밖에 없다.

‘그 결과. 결론적으로 모든 소칸국이 동서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북방으로 뻗어나가는 정책을 취하겠지.’

이렇게 모피를 찾아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소칸국끼리 경쟁도 붙고 충돌도 벌어질 터...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영역을 규정해 국경선이 만들어질 거다.

시베리아를 잘게 토막 내서 나눠 갖는 거지.

동시에 시베리아 남부에 사는 온갖 토착민족들을 소칸국들이 흡수해서, 자신의 백성들로 만들게 될 거다.

‘이러면 형님이 말한 서방의 위험을 막을 방패막이들이 생긴 것 아니겠어?’

연오랑이 우려하는 건, 러시아제국이 발호해 동방개척에 나서는 것.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예 루스국을 박살내서 러시아제국이 탄생하는 걸 막거나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고, 그 다음 해결책은 텅텅 빈 시베리아에 세력을 심는 거였다.

소칸국들이 시베리아를 쪼개서 뜯어먹으며 남쪽에서부터 잠식해 나간다면... 훗날 러시아제국을 대체하는 서방세력이 등장하더라도, 조선이 차지한 동시베리아까지 오려면 소칸국들을 전부 무너뜨려야하지 않겠나.

소칸국들을 흡사 서방의 파도를 막을 방벽으로 만든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초원이 안정된다면... 아국이 서방과 동방을 이어주는 큰 톱니바퀴가 되어, 무역을 우리 손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겠지.’

이인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멀고먼 남방을 머릿속에 이어 붙였다.

연오랑이 남주도 개척에 나선 이상 보나마나 성과를 냈을 터, 이제 남방무역을 조선이 얼추 주름잡을 수 있게 됐을 거다.

사절단으로 인해 킵차크 칸국과 소칸국이 안정화되면, 북방무역과 비단길 무역 또한 주름잡게 될 터...

앞으로는 향신료를 비롯한 온갖 동남아시아의 물산이 조선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지나 유럽에 닿지 않겠나.

‘오스만국이나 티무르칸국, 이집트를 통해 이어지는 무역로는 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초원길 무역량은 증가할 수밖에 없겠지.’

이렇게 되면 조선이 중간에 껴서, 동,서양의 문물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을까.

‘이거면 중국의 물량에 대처할 방책이 될 거야. 굳이 중국시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펼쳐질 테니까.’

상상은 계속해서 이어져갔다.

조선이 발버둥치는 궁극적인 이유는 중국시장 때문인데, 이렇게 동서양의 시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 중국시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중국물산과 품목이 겹치지 않는 서방물산을 조선이 독점하는 꼴이 될 테니, 안 그래도 독점하고 있는 북방물산에 날개를 다는 꼴.

아무리 중국물산이 양이 많고 질이 좋아도, 대체할 수 없는 품목이 많아질수록 중국시장에 잠식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유일한 변수라면, 조선물산 못지않은 중국물산이 초원길을 타고 유럽으로 흐르는 것.

지금도 섬서를 차지한 몽골이 중국물산을 생산해 조금씩 팔아넘기곤 있지만, 조선에 미치지 못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섬서몽골이 중국내륙연맹과 화친을 맺고 무역을 하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글쎄. 힘들지 않을까?’

이런 불길한 상상을 해보지만, 고개가 절로 내저어진다.

섬서몽골이 경쟁자인 오이라트, 초원몽골과 손을 잡고 초원길 개척에 나선 건, 섬서에는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

조선만큼이나 노예를 간곡하게 원하는 이들이 바로 섬서몽골이다.

이들이 노예를 바라는 건, 여전히 중국내륙을 차지하려는 꿈을 접지 않았기 때문.

더욱이 비단길 무역으로 서쪽과 북쪽의 정세가 굳어진 이상, 그들은 성장하고 패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중국내륙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옛 명나라 시절이라면 돈에 눈이 먼 상인들이 등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절대 불가능하겠지.’

남 일이라고 생각하는 절강이나 복건상인들이 섬서몽골과 거래하고 싶어도, 바로 코앞에 붙어 있는 하남,호광상인들에게 막혀서 손도 잡아보지 못할 거다.

호족연맹으로 분열됐다는 건. 상인 또한 영역에 기반을 둔 연맹에 구속된다는 뜻이자, 대륙규모의 대상인이 등장할 수가 없다는 뜻.

섬서몽골과 거래하면 곧 자신의 기반이 파괴당하게 되는 꼴인데, 어떤 정신 나간 상인이 이런 거래를 하겠는가.

‘결국 강남의 연맹들도 비단길 무역에서 한몫 잡기 위해서는 우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거야.’

일이 이렇게 진행되면, 중국시장을 견제할 또 하나의 패가 생기지 않을까.

“잘 되겠지?”

이윽고 침묵에서 빠져나온 바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고.

“잘 될 겁니다.”

동상이몽에 빠져 있던 이인 또한 히죽 미소를 지으며 답을 던졌다.

*****

*****

조선 41년. 세종 14년.

“거. 빨리빨리 치워!”

“길에서 얼른 거적때기들 치워라!”

“불씨 조심하고! 옆으로 잘 밀어.”

키 만큼 훌쩍 자란 사탕수수들 사이로 인부들이 요란하게 움직이고, 바둑판처럼 칸칸이 쪼개놓은 길 사이로 모래를 실은 수레가 부산스럽게 자리했다.

몇몇 수레에는 물독이 참방거리고 있었고, 가을 잠자리가 사람들을 피해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내 모든 준비를 끝마치자, 인부 중 한명이 달려와 소리쳤다.

“사장님. 다 준비됐습니다.”

“잘 되겠지? 옆 밭에 불이 옮겨 붙으면 큰일 나.”

“에이. 작년에도 했는데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길 옆에 방화제를 준비해 놨으니 문제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

사장이라 불린 인물도 큰 밀짚모자를 써서 행색은 똑같아 보였지만, 그는 유독 발을 떨면서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올해 농사가 지금 이 작업 한방에 달렸는데, 긴장을 안 할 수가 있나.

사원인부들이야 망하든 말든 월급을 꼬박꼬박 받았으니 상관없겠지만, 사장은 이번 한 번의 실패로 기업이 휘청거릴 수 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러게.”

“불을 붙여라!”

“다들 빨리 나와! 불 붙인다!”

꽹과리를 두들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사탕수수밭에 있던 인부들이 줄줄이 밖으로 나와 대기. 인원파악을 모두 끝마치자 횃불을 들고 수수대 밑동을 태우기 시작했다.

화락! 안 그래도 더운 날씨가 더욱더 더워지며, 검은 연기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밀려들었다.

사탕수수를 손으로 전부 거둬들이는 건, 품이 너무 많이 드는 법.

수수대 내부는 수분이 많아서 안 타기 때문에, 이렇게 통째로 태워서 잔가지를 털어내는 게 일반적인 수확방법이었다.

화르륵. 화르륵. 타오르는 수수밭을 보면서도, 어째 인부들은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물 어딨냐. 그물!”

“사냥개들 목줄 풀어놔!”

오히려 불타는 벌판보다 더 난장판이다.

사방에서 각자 몽둥이와 괭이, 몇몇은 그물까지 들고 대기를 하는 게 아닌가.

대체 왜 저러나 싶었는데... 이내 해답이 밝혀졌다.

“나온다!”

“다 때려잡아!”

불길을 피해 밭에 숨어 살던 쥐들과 뱀, 두더지 같은 들짐승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기 때문.

컹컹! 조선본토에서 흘러들어온 사냥개는 그 명성을 확인시키듯, 혼비백산해서 튀어나온 두더지 한 마리를 쫓아가 냉큼 물어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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