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챕터53. 영위하다 (1)
“이쪽이다!”
우르르 도망치는 쥐떼를 향해 그물을 집어던지는 이가 있는 한편.
“월척일세! 뭐 이렇게 커?”
여기가 바닷가도 아니건만 이상한 고함을 내지르면서, 쉑쉑. 소리 내며 기어오는 뱀 머리를 몽둥이로 꾹 눌러 망태기에 담았다.
우당탕탕 난리법석이 한바탕 벌어졌지만, 이 짓도 나름 익숙해지지 않았나. 지금 이렇게 잡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걸 알고 있기에, 다들 열을 내며 돌아다녔다.
사탕수수밭이 전부 타서 불길이 절로 잦아들 때까지, 사냥은 계속 지속됐고... 이내 곧 검은 연기는 잦아들고, 작은 불씨만 남아 타닥타닥 얕은 소음만 이어졌다.
천만다행으로 불길이 엄한 밭으로 옮겨 붙지는 않아서, “후...” 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옮깁세!”
“수레 가져와!”
인부들은 낫을 들고 사탕수수밭으로 진입. 탄 가지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밑동을 잘라나갔다.
밭이 오죽 큰 게 아니라서, 동원된 수레만 무려 스무대.
사장이 가지고 있는 수레로는 한참 부족해서, 관아에서 돈을 주고 빌려야 했다.
이것도 순번이 꽉 차서, 오늘 일이 밀리면 다른 사탕수수밭도 줄줄이 밀리지 않겠나. 그게 다 돈으로 되돌아오는 터라, 사장을 비롯한 인부들은 쉴틈 없이 바삐 손을 놀렸다.
이윽고 새참까지 먹고 한나절을 꼬박 일하고 나서야 수레가 가득 찼고, 다들 어색한 조선말 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이마에 땀이 가득하건만 입가는 자기도 모르게 들린다.
이것만 옮기고 나면, 드디어 올해 농사가 끝나고 손에 돈이 들어오지 않겠나.
다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물소가 끄는 수레에 함께 했다.
“오씨네는 아직 수확을 안 하나 본데?”
“제당소 순번이 꽉 찼답니다.”
“흐음.”
수레에 올라타 있던 사장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노랗고 파랗게 물들어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남상주 평야. 뒤를 돌아보면 산맥이 아스라이 하늘에 걸쳐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황금빛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갈수록 밭이 늘어가네.”
“이게 돈이 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긴.”
사장은 부하직원의 말에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설탕이다.
남주도 개척과 동시에 시작한 사탕농사는 그 해에 바로 대박을 거뒀다. 예상대로 산동과 절강상인에게 넘기는 것만으로도, 그간 배를 빌렸던 비용을 한방에 갚아버릴 수 있었으니까.
조선에서의 반향은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귀해도 너무 귀해서 식재료가 아니라 약재로 취급하며 애지중지 다뤘던 물건 아닌가.
중국에 팔고 남은 물량을 푼 것만으로도 조선을 뒤흔들어놨지.
그 다음 해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겨울동안 사탕수수밭을 늘리면서 생산량은 배로 늘었고,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이 본토를 거쳐 북방,일본,중국으로 팔려나갔다.
당연히 그 소문을 접한 기업들이 남주도로 이주해서, 조정의 예상치를 웃도는 이주민이 생겨났지.
그 결과가 지금 이들이 보고 있는 풍경이며, 지금도 꾸준히 밭을 늘리고 있으니 계속 더 늘어날 예정이었다.
“내년에는 저희도 휴경을 해야 하는데, 밭을 더 사야하지 않을까요?”
“글쎄다. 살 수 있는 땅이 더 있는지 애매하고, 붙어 있는 밭을 사야 되는데... 그럴 바엔 새로 개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음.”
사장과 부하는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양전사업이 진행되면서 토지를 조각내서 갖는 형태는 최대한 자제되고 있었고, 조정의 정책은 유의미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땅 주인 입장에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농사를 짓는 것보단, 한 곳에서 몰아서 짓는 게 편하긴 한데... 문제는 역시나 돈이지.
‘뭐가 더 이득인지 모르겠군. 양씨네도 확장할 생각이 있을 테니, 내 밭을 사주긴 할 텐데... 그것도 가격이 맞아야 될 텐데 말이야.’
사장은 머릿속에서 주판을 튕기면서 김을 냈다.
그렇게 한참을 흙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사탕수수밭 사이에 위치한 공터.
벽을 반만 세워 놓은 벽돌집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고, 제당소 주인이 냉큼 달려와 사장을 맞이했다.
“왔나?”
“강씨네는 다 끝내고 갔나?”
“딱 맞춰서 끝냈네.”
“다행이군.”
두 사장 모두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소와 수레를 빌리는 것도 밀리면 골치 아파지지만, 제당소 또한 순번이 미뤄지면 머리 아파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사탕기업에서 제당소를 직접 운영하자니, 일 년에 한번 쓸 제당소를 유지하는 건 아무래도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이건 초기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단 말이지.’
작년에도 겪었던 일이기에, 사장은 그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바로 하겠나?”
“그래야지.”
사장이 말을 하기 무섭게.
“옮기게!”
“자자! 다들 움직여!”
인부들은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손을 놀렸다.
수레에 싣고 온 사탕수수대를 한아름씩 집어서 제당소의 압착기가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
압차기는 방앗간이나 수차에 달린 큼지막한 동력기계와 구조는 동일했다.
다른 점이라면 눕힌 원통형태의 강철롤러 두 개가 딱 맞닿아서,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물소의 힘으로 돌아간다는 점.
“이게 새로 들인 압착기인가?”
“그러네. 광동에서 쓰는 것보다 훨씬 좋더군.”
“딱 봐도 그래 보이네. 저게 다 무쇠 아닌가.”
“그렇지. 매번 기름칠을 해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제당소 사장은 앓는 소리를 했지만,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해 보였다.
이런 압착기의 구조는 특이할 게 전혀 없지만, 중국에선 이걸 보통 돌로 만들어서 썼다.
허나 돌보다는 속이 비어 있는 강철통이 훨씬 가볍고 매끈하지 않나.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 외로 차이가 컸다.
힘이 덜 들어가는 건 물론이고.
“저 요철 덕분에 더 잘게 부셔진단 말이지?”
“맞네. 워낙 잘 부셔져서, 사이에 낀 줄기를 빼내는 게 일이라니까.”
“큭.”
또 은근히 자랑하는 제당소 사장을 보며 작게 코웃음을 날려줬다.
여기에 추가로 강철롤러에 요철을 박아 넣었는데, 이러면 더 꽉 물리면서 사탕수수 진액을 더 많이 뽑아낼 수 있었다.
‘하긴, 저게 얼마짜리인데...’
그냥 강철롤러도 무지막지한 가격을 자랑하는데, 저런 특별한 주조품은 더욱 비쌀 것 아닌가.
그럼에도 구입한 걸 보면, 그만큼 돈을 쏠쏠하게 벌었다는 뜻이리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콩기름을 강철롤러에 잔뜩 바른 후에, 인부들이 사탕수수대를 롤러에 쑤셔 넣었다.
쿵쿵. 물소 두 마리가 끄는 롤러는 빠른 속도로 돌아갔고, 우드득바드득. 굉음을 내며 사탕수수대는 잘게 쪼개져서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압축기 밑에 받쳐놓은 큼지막한 통은 구리관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걸 통해 창고 밖에 위치한 큼지막한 가마솥으로 사탕수수 진액이 흘러가는 방식.
“옮겨!”
“쌓이게 놔두지 말고 얼른 치워!”
진액을 다 뽑아낸 사탕수수대도 쓸모가 있는 법.
인부들은 수수대를 작은 손수레에 실어 가마솥이 있는 곳으로 가져갔고, 거침없이 아궁이 밑으로 집어넣다.
땔감이 되어 타오르면서 가마솥을 달구는 거지.
“계속 젓게.”
“그건 여기로 넣고.”
가마솥이 있는 곳도 번잡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밥 짓는 가마솥보다 얕지만 둘레는 훨씬 큰 가마솥에 사탕수수 진액이 가득 차 끓어오르기 시작.
인부들은 그 안에 석회가루와 귤,레몬,라임껍질과 같은 첨가제를 집어넣고 계속 저어댔다.
저렇게 함께 넣고 저으면, 단백질이나 지방 등의 부유물질이 침전되어 가라않게 되어 윗부분에는 순도 높은 즙만 남게 된다.
“하나.둘.셋!”
“으차!”
그렇게 청징작업을 끝낸 진액은 다시 구리관을 통해, 다른 가마솥으로 옮겨졌다.
“계속 체로 걸러야지. 크게크게 돌려.”
이곳에서도 첨가제를 넣고 끓이면 진액에 포함된 불순물이 딸려 나오니, 끓인 거품과 불순물을 체로 계속 건져가며 농축시켰다.
그런 가마솥이 여러 개라서, 제당소는 순식간에 하얀 연기와 열기로 가득 찼다.
“잘 되는군.”
“우리 제당소가 남상주에서 가장 큰 곳인데, 문제가 있을 리가 있나. 이젠 눈 감고도 알아서 할 정도가 됐지.”
“하긴... 자네를 찾는 기업이 한둘이 아니지?”
“아마 절반은 여기로 올 걸? 올해도 또 사탕나무밭을 늘린다고 하니, 나도 확장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네.”
“음...”
사장과 제당소 사장은 작업과정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놨다.
보아하니 사탕밭 사장뿐만 아니라, 제당소 사장도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는 모양이다.
한참을 그렇게 졸인 진액은 점점 흙갈색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변한 진액을 다시금 바가지로 건져서 틀에 옮겼고, 몇몇은 따로 챙겨서 다음 작업장으로 옮겨졌다.
“백사탕은 얼마나 할 거지?”
“백분 가격이 올랐지?”
“아무래도 강남상인들이 수를 쓰는 것 같은데... 별 수 없지 않나.”
“쯧.”
사탕수수밭 사장은 슬쩍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제당소 사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가 이윤을 얻어 봐야 얼마나 얻겠다고, 이걸로 사기를 치겠는가.
“요새 그 뭐시냐. 몽골을 통해서 서방문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백분을 대신할만한 물건은 없는 건가?”
“모르지. 헌데 있다고 한들 서방에서 여기까지 가져오려면 운송비가 더 들지 않겠나? 조선에 키울 수도 없는 거고.”
“음...”
둘은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신음만 흘려댔다.
아직 당밀이 제거되지 않은 이 설탕을 하얗게 표백하기 위해선, 새롭게 백분이라 이름붙인 광물이 필요했다.
미래에는 화학첨가제로 해결하면 되지만, 이 시대엔 그게 불가능하지 않나.
헌데 이 천연첨가제는 중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광물이고, 설령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해도 조선인들은 알지 못했다.
백설탕을 만드는 기술 자체가 광주상인회가 구해준 설탕기술자를 통해서 알게 된 거니까.
이렇듯 첨가제는 무조건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기에, 중국시장의 수요에 맞춰 가격이 천차만별로 춤을 췄다.
아무리 백설탕의 수요가 높고 값이 비싸더라도, 이걸 만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주판을 바쁘게 튕길 수밖에.
“세 동만 하지.”
“잘 생각했네.”
두 사장이 결론을 내리자, 인부들은 다음 과정으로 넘어갔다.
이제 남은 건 결정화된 설탕과 당밀 성분을 분리시키는 일.
둘은 걸음을 옮겨, 제당소 한쪽에 위치한 큼지막한 원통 근처로 다가갔다.
이 물건은 예전에 장영실이 손을 봤던 탈수기를 뻥튀기 해 놓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뭐랄까... 원시적인 형태의 원심분리기라고 해야할까? 저 안에 결정화된 진액을 넣고 빠르게 회전시키면, 진액에서 당밀과 설탕결정이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방식이었다.
“다 넣었나?”
“넣었습니다!”
“그럼 돌립세! 히랴!”
음머! 물소 세 마리가 원심분리기를 중심으로 빙빙 돌기 시작했고, 동시에 원심분리기 아래에 부착된 크기가 다른 톱니바퀴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회전력을 높이기 시작.
붕붕. 기어비가 달라진 원심분리기가 바람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기 시작하자, 안에서 천둥이 치는 것 마냥 굉음이 들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돌리고 있자, 원심분리기 옆에 나 있는 구멍으로 유독 짙은 진액이 졸졸 흘러나왔다.
“음.”
“흠.”
두 사장은 냉큼 손가락으로 당밀수액을 찍어 맛을 봤다.
“괜찮네.”
“나쁘지 않군.”
당밀수액도 단맛이 나지만, 단맛이 적을수록 설탕결정이 더 많이 빠져나갔다는 뜻.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마무리 하지.”
“그럽세.”
서서히 멈춘 원심분리기에서 다시 설탕결정과 당밀을 완전히 꺼내서 또 다시 끓이는 과정에 들어갔다.
안 그래도 색이 많이 빠진 진액에 첨가제를 넣고 끓이기 시작하자, 확실히 하얀색에 가깝게 변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쪽으로 가지.”
두 사장은 백설탕 정제과정을 지켜보다가, 다시 가마솥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선 당밀이 그대로 포함된 비정제설탕을 만들고 있었는데, 크게 세 과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원뿔형태의 틀에 굳혀서 만드는 방식과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막대형태로 만드는 방식. 끝으로 수분을 더 날려서 푸석푸석한 반가루 형태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뭔 설탕이 원뿔형태냐 하겠지만, 오히려 이게 대중적인 중국식 설탕에 더 가까웠다.
이걸 흡사 야채 깎듯이 조금씩 칼로 잘라서 써먹는 거지.
“군용사탕은 얼마나 만들겠나?”
“가져온 물량의 절반을 만들 걸세.”
“그렇게나 많이?”
제당소 사장은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사탕수수밭 사장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들 아나. 관아에서 연락이 왔네. 이번에는 막대사탕을 많이 만들라고 말이야.”
“흐음...”
제당소 사장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군용사탕은 막대사탕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설탕막대에 소금을 왕창 넣어서 만드는 물건이었다.
단맛과 짠맛이 번갈아가며 혀를 때리니, 좋게 말하면 중독성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도저도 아닌 맛이었지.
그럼에도 이걸 군부에서 써먹는 건, 이것만큼 간편하게 열량을 채우고 각성제 효과를 낼 수 있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
당연히 이런 괴상한 물건은 연오랑의 제안에 의해 탄생했는데, 지금와선 이걸 싫어하는 연대병이 단 한명도 없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많이 요청했을까? 요샌 딱히 연대병이 돌아다닐 일도 없지 않나?”
“조차지를 하나 더 늘리려고 하고 있으니, 거기에 필요한 것 아니겠나? 아니면 북방의 군병들에게 필요할 지도 모르고.”
“음...”
군용품을 추가주문한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제당소 사장은 혹시나 또 전쟁준비를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야 팔면 그만 아닌가.”
“에이. 그래도 또 상행길이 막힐지 누가 아나.”
“없어서 못 파는 게 사탕인데 걱정은 무슨 걱정. 남방에 못 팔면 북방에 팔면 되고, 북방에 못 팔면 남방에 팔면 되지 않겠나.”
사탕수수밭 사장은 실없는 소리를 한다면서 가볍게 핀잔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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