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00화 (400/538)

400. 챕터53. 영위하다 (3)

“사탕입니다.”

“음. 군용사탕도 만들었고?”

“예.”

이미 다른 사탕기업이 왔다갔는지, 이런저런 붙이는 말도 없다.

관원은 연필을 휙휙 휘날리고선, 관아에서 일하는 사용인을 시켜 사장 일행을 창고 한쪽으로 안내했다.

무역관아 안쪽도 어지러운 건 마찬가지.

냉큼 발을 놀려 도착한 곳은 사탕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였는지, 비슷한 형태를 한 나무상자가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다.

“직접 거래할 건가?”

“그렇습니다.”

“음.”

창고를 담당하는 관원 또한 거침없이 서류를 만들어 넘겼고, 사장은 익숙하게 받아서 서명하고 되돌려 줬다.

“임대료는 어떻게 내겠나?”

“사탕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다들 비슷하군. 사탕값은 작년과 동일하네.”

“예.”

이 또한 이미 경험이 있는 터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군용사탕은 얼마나 가져왔지?”

“20상자입니다.”

“오. 많이 가져왔네. 반척짜리 3호상자. 맞지?”

“예.”

관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냉큼 몸을 일으켜 수레에서 내려놓은 상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미터법을 기준으로해서, 연오랑이 만든 근본 없는 도량형. 이른바 기업척이 등장하고 이게 조선척으로 발전한지 벌써 수년이 흘렀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제 조선척이 대세가 되었고, 특히나 장사를 하는 상인과 기업들은 조선척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민간의 유통,무역상인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조선에선, 대부분의 거래에 있어서 조정관아를 끼고 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

옛 도량형으로 기준을 잡으면, 조정이 정한 조선척으로 다시 바꿔서 마무리해야 하는데... 돈을 좇는 상인이 쓸데없이 두 번 일을 할 리가 없지 않나.

누구보다 빠르게 조선척에 익숙해졌지.

“음...”

관원은 1미터짜리 접이식 철자를 들고, 사장이 가져온 상자의 크기를 확인했다.

“전부다 반척짜리군?”

“그렇습니다.”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더니 관원은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연오랑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도량형의 통일은 유통과 무역에 있어서 엄청난 효율을 자랑했다.

아예 물건을 적재할 나무상자를 만들 때부터, 폭과 높이를 규정해서 반척, 1척 등의 기준에 맞춘 적재함을 정해버렸다.

미래의 택배박스마냥, 크기를 규정해서 1호,2호,3호상자 등으로 만들어버린 것.

상자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이 뭐가 됐든, 상자의 크기가 동일하니... 꼭 테트리스를 하듯, 마차와 배에 쉽게 적재할 수 있게 된 거지.

예전처럼 조금이라도 더 싣기 위해서, 다양한 크기의 상자를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고 개고생할 일이 없어진 건 당연하고.

하나하나 따질 필요 없이 상자 채로 세금을 매기고 확인할 수 있으니, 행정낭비도 훨씬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일거리에 치여 사는 관원들은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편하고 빠르게 일처리를 하기 위해선 더욱더 강경하게 조선척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규격화된 나무상자의 완성이었던 거지.

이러한 경향은 조선인의 사상과 관념과 딱히 배치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쓰다 보니 전보다 훨씬 편한 걸 깨닫기 무섭게, 민과 관에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대금은 어떻게 할 건가? 전표로? 아니면 주화로?”

“전표로 주시지요.”

“물건을 더 살 모양이군? 잡화상도 같이 하고 있나?”

“겸사겸사 해보려고 합니다.”

“음...”

사장의 속사정까지 알 생각은 없는지, 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사장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창고 반대편.

담벼락으로 막혀 있는 무역관의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웅장한 건물. 무역은행이다.

“...”

“...”

무역관아의 은행은 상대적으로 조용했지만, 침묵 속에서도 은근히 번잡스러웠다.

조선식 옷과 사뭇 다른 복색을 한 이들이 가득했는데, 강남상인 뿐만 아니라 남방소국의 상인도 찾아온 것 같았다.

얼굴 생김새가 티가 나게 다른 것도 있거니와, 머리에 터번을 둘둘 둘러맨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관원과 함께 온 탓에 사장은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접수대로 향했고, 철창으로 막혀 있는 반대편에 앉아 있던 관원이 가볍게 아는 체를 했다.

“사탕을 팔러 왔어.”

“얼마?”

“여기.”

관원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별다른 말도 없이 서류가 오갔고, 철창 안에 있던 관원은 서류를 확인하고선 쿵쿵 직인을 찍은 전표와 물표를 내밀었다.

“서명은 뭐로 할 건가?”

“직접 적겠습니다.”

“...”

관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밑으로 넓게 구멍이 뚫린 창살너머로 서류와 함께 붓과 벼루를 내밀었다.

왕실은행. 흔히 무역은행이라고 더 자주 불리는 은행은 상인을 위한 은행이었다.

이곳은 조선주화가 통용되지 않고, 중국전장의 방식을 개선해서 전표와 물표로만 거래가 진행됐다.

다만 여기에 또 하나의 보안장치를 넣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서명.

이 전표를 가지고 다니던 타국상인이 불의의 사고로 전표와 물표를 빼앗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암호나 마찬가지인 서명을 집어넣었고, 전표와 물표가 있어도 서명을 모르면 은행에선 환급을 해주지 않았다.

안전을 우선시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환급을 까다롭게 해서 무역은행이 돈을 안내주려는 꼼수이기도 했지.

이내 군용설탕에 대한 정산작업 및 세금납부도 함께 끝나자, 사장의 손엔 수북하게 전표가 쌓였다.

‘음...’

워낙 소액권 전표인 터라 물표조차 없었는데, 이 전표는 사실상 남주도 무역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종이돈이나 마찬가지.

드디어 자신의 손에도 이 전표가 들어왔다는 생각에, 사장은 왠지 모르게 감회가 새로웠다.

“점포를 보겠나?”

“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사탕창고로 돌아왔고, 또 다른 관원이 서류를 넘겨받고서 사장과 인부들을 안내했다.

무역관아를 넘어 연대병이 지키고 있는 담벼락을 넘어 완전한 무역항부지로 들어서자.

“오...”

“와...!”

수레를 끌고 온 인부들이 하나같이 감탄을 내질렀다.

담벼락 하나를 넘은 것뿐인데, 어째 다른 나라에 온 것과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넓게 트인 도로 양 옆에 세워진 전각은 전부 조선식 전각이었지만,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은 죄다 타국인이었기 때문.

무기소지가 금지된 탓에 무기를 들고 다니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번뜩이는 비단옷을 자랑하며 덩치 큰 호위와 함께 다니는 강남상인이 보였고.

두툼한 전대를 배에 차고서, 머리에 두건 비슷한 물건을 쓰고 돌아다니는 일본상인.

햇볓에 그을린 것보다 더 까무잡잡한 피부를 자랑하는 남방소국 상인과 원피스 비슷하게 생긴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터번을 쓰고 있는 인도상인까지.

남방무역의 중심지가 된 남주무역항답게, 온갖 출신이 바글바글했다.

한 때는 대만 원주민이었고, 지금은 조선백성이 되어 사탕기업 사원이 되었지만... 이들이 언제 이렇게 화려한 시장거리를 와봤겠는가.

다들 눈을 어디에 둘지를 몰라서, 수레를 끄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규칙과 무규칙 사이에서, 용케 균형을 잡고 유지되는 무역항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으차.”

‘다 됐나?’

무역은행 건물 3층 꼭대기. 누대에 올라서 무역항을 내려다보고 있던 연오랑은 눈앞에 끓고 있는 주전자에 집중했다.

구수하면서도 쓴 냄새가 진하게 흘러나오자, 얼른 손을 움직였다.

팔팔 끓여서 내린 커피를 큼지막한 찻잔에 옮겨 담고, 미리 식혀 놓은 물을 왕창 털어 넣었다.

‘이탈리아인들이 봤다면 기겁했겠네.’

그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소리를 혼자하면서, 속으로 키득키득 웃어댔다.

미래엔 이탈리아가 커피의 종주국이자 소울음료 취급을 받지만... 이 시대엔 이탈리아가 존재하지도 않고, 커피를 마시지도 않는데 무슨 상관일까.

‘앞으론 커피하면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아메리카노가 될 거란 말이지.’

연오랑은 또 다시 헛소리를 하며, 입가에 미소를 잔뜩 피웠다.

‘이게 이렇게 잘 자랄지 누가 알았겠어. 역시 미래에도 베트남 커피가 유행했던 이유가 있었다니까.’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계속 속으로 중얼거렸다.

킵차크 칸국을 통해 커피나무가 조선으로 들어왔고, 조선인들은 “이건 뭔가?” 싶으면서도 중국차에 대항하기 위해 열중했다.

뭐가 됐든, 중국에 없는 차 종류가 하나 더 늘어나면 좋은 것 아닌가.

연오랑은 혹시나 싶었는데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자 누구보다 환호했고, 당장 사제를 털어가며 조선땅 모든 곳에 커피나무를 심어 키우기 시작했지.

다만 아무래도 기후의 영향과 품종개량이 덜 된 터라, 제대로 자란 곳은 이곳 남주도와 참파의 조차지인 현항(다낭), 성항(깜라인)이었다.

미래에 베트남 커피가 유명한 걸 생각하면서, 조차지에 어울리지 않게 신품종인 커피나무를 심었는데... 천만다행이도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게다가 이젠 설탕도 있단 말이지?”

그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백설탕 막대를 쓱쓱 갈아서, 커피잔 안에 조심스럽게 털어 넣었다.

그리곤 한입.

“크흐...”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온다.

먹어본지 하도 오래 되서 잘 기억도 안 나고, 미래에서 먹던 커피와 맛도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기분은 낼 수 있지 않나.

‘살다살다 조선에서 커피를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혹시나 싶었지만 이렇게 빨리 맛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기에, 그는 미소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썬베드에 누워 달콤 씁쓸한 커피를 즐기고 있는데, 그의 평온을 방해하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어르신! 또 놀고 있습니까!”

“놀긴 누가 놀아.”

연오랑은 이젠 질리도록 들은 목소리에 손을 휙휙 내저으며, 얼른 손을 놀려 커피한잔을 다시 내렸다.

“먹어라.”

“맛도 없는 거 안 먹습니다. 쓰기만 한걸 뭐 하러 먹습니까.”

품에 보고서를 왕창 끼고 등장한 이순지는 절로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생전 처음 본 차에, 그것도 서방에서 먹는 차라고 하니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말.

허나 한입 먹고 나자마자 정이 다 떨어졌다. 연오랑은 저 쓴물이 뭐가 좋다고 끼고 사는 건지, 이해가 안갈 정도였지.

“그래도 맛을 알아야 더 잘 팔 거 아냐? 이게 요새는 일본으로도 팔리기 시작했다니까.”

“일본대명들은 아국의 신물품이라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니까 그러는 거고요. 그치들도 사실 맛이 없지만, 체면 차리려고 억지로 먹는 걸걸요?”

“뭐가 됐든 팔리면 그만 아냐? 남방소국의 회회교 사제들은 더 구할 수 없냐고 난리더라.”

“끄응...”

말로는 이겨먹을 수가 없는 터라, 이순지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커피는 원래 무슬림 사제들이 먹던 음료이니, 당연히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 사제들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다만 가져오는데 너무 오래 걸리고, 굳이 꼭 먹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라서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있었지.

하지만 이젠 바로 코앞에서 구할 수 있으니, 반대로 안 먹어야할 이유도 없지 않나. 커피가 들어온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동남아시아에선 반응이 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에 관해서 보고 드릴게 있습니다.”

“음.”

이순지는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선, 참파의 조차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내밀었다.

“참파조정에선 성항을 더 키우고 싶어 한다고 하더군요. 아국산 강철 맛을 보더니,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니까요?”

이순지는 그렇게 서두를 떼고서 간략하게 보고서를 설명했다.

연오랑이 대만섬에 머물며 교통정리 및 군정을 실시한지 벌써 3년이 흘렀다.

큰 변수가 될 만한 사안이 없었기에, 처음 계획한 대로 잘 흘러간 편이었지.

경애도(해남도) 공략은 대리의 압박을 받은 대월이 힘을 쓰면서, 큰 무력 충돌 없이 술술 풀렸다. 까놓고 말해서 조선이 대만섬에 진출하면서, 대월도 쏠쏠하게 이득을 봤으니까.

그치들이 조선 및 일본과 거래하기 위해서는 강남상인을 거쳐서 거래해야만 했기에 적잖은 손해를 보고 있었는데, 이젠 직거래가 가능해지면서 그 손해가 사라졌지 않나.

체급이 체급인 만큼 동남아시아의 소국보다도 더 큰 이득을 본 게 대월이었으니, 그들도 조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거지.

참파에 조차지를 세우는 건, 더 수월하게 풀렸다.

모두의 예상대로 조선산 강철은 참파 관원들의 눈을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그들이 생전보지도 못했을 질 좋은, 그것도 균일한 품질을 갖춘 강철이 배 한척 단위로 들어왔다.

궁궐에 있던 금은보화를 박박 긁어서라도 더 사들이기를 원했고, 조선은 마다하지 않고 강철을 팔아넘겼지.

물론 조선도 참파조정의 속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참파는 외부적으론 대월과 싸우고, 내부적으론 지방토호와 싸우고 있다.

이들도 나름 중앙집권을 원할 테니 강력한 군대를 원하는 건 당연. 더불어 조정이 소유한 강철을 지방토호에게 넌지시 팔아넘기면서, 재원을 충당하고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지.

허나 이게 조선에게 손해가 될 건 전혀 없지 않나.

조선이 지방토호를 부추겨서 쿠데타를 일으킬 게 아닌 이상, 까놓고 말해서 하나로 통일된 중심과 한방에 거래를 체결하는 게 훨씬 편하고 효율적이었다.

동상이몽이긴 하지만 어찌됐건 조차지가 건설됐고, 그 꿀맛을 본 참파조정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뭐 더 팔아서 조선산 강철을 살 수 없을까?”라고 고민하던 그들은, 다시금 땅을 팔고서 강철을 사들이기로 결심한 거지.

그리하여 만들어진 게 성항(깜라인)조차지였다.

깜라인은 미래에 베트남전쟁 시절. 미군이 주기항지로 사용했을 만큼 군항으로서의 입지가 최적인 지역이었다.

다만 이 시대엔 별 볼일 없는 어촌에 불과했고, 중부에 위치한 참파조정의 말을 잘 안 듣는 지방토호의 세력권에 위치해 있던 곳.

조선의 손을 빌려서 지방토호를 압박하려던 참파조정은 성항(깜라인)을 조선에 내밀었고, 조선은 마다하지 않고 냉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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