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챕터53. 영위하다 (6)
“어디로 가려고?”
“일단 시장부터 보시죠?”
“거긴 사람이 많아서 피곤한데...”
연오랑은 안 그래도 한 덩치 하는 터라, 호피갑옷을 입고 다니지 않아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오랑의 명성을 생각하면, 척하면 척하고 알아볼 것 아닌가.
“에이. 어르신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요.”
“끄응...”
허나 이순지는 눈을 흘기며, 투덜거리는 그를 한방에 침몰시켰다.
거꾸로 보면 연오랑은 너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터라, 평범한 백성들이 만날 일도 없지 않나. 이순지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면서, 연신 앞장서서 발을 놀렸다.
무역은행에서 나온 둘이 향한 곳은 상점거리 중 한 곳.
무역항과 이어진 구역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계획해서 만들어 놓은 터라 품목마다 시장이 따로 형성되어 있었다.
예컨대 어시장 따로, 곡물시장 따로, 잡화시장 따로 이런 식이었지.
둘이 향한 곳은 그나마 사람이 적을 것 같아 보이는 잡화시장이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사람이 꽤 많네?”
연오랑은 북적거리는 거리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대로를 중심으로 상점이 쭉 뻗어 있었고, 이곳 또한 상점의 좌판이 길을 파먹지 못하게 가로수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삼년 만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도시백성들이 매일 같이 찾는 식료품시장이 아닌데도 이 정도면, 확실히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이순지의 눈에는 아직 한참 부족해 보이는 모양이다.
“에이. 저기 보시죠. 빈 상점이 많잖아요? 저것도 다 팔려나가야죠.”
이순지는 저편에 대로를 따라서 쭉 비어 있는 상점들을 가리켰다.
“곧 팔리겠지. 추세가 나쁘진 않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다른 기업들이 많이 생겨야 할 겁니다. 남주도는 확실히 본토에 비해서 부족한 게 많으니까요.”
조선은 고려 때 번성했던 시장을, 시대를 역행해서 없애지 않았나.
그걸 되살리면서 고려 때의 시장구조를 다시 부활시킨 게 아니라, 보다 조정이 컨트롤하기 쉬운 방법으로 바꾸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시장자체를 조정의 소유하는 것이었고, 백성들은 상점을 임대해서 사용하는 식이었지.
이순지가 말한 빈 상점들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상점거리를 너무 크게 만든 건 아니고?”
“에이. 절대 아니죠.”
연오랑이 혹시나 싶어서 되물었건만, 이순지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왜?”
“남주는 남주도 최고의 도시이자 무역항 아닙니까. 이제 기틀을 잡았으니 남주도는 성장할 일만 남았는데, 미리미리 준비를 해놔야 나중에 고생을 안 할 거라고요.”
“...”
“훗날 사람이 엄청 불어나서 시장거리를 확장하려고 하면 민가를 허물고 지어야 할 텐데, 그때 가서 두 번 일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귀찮은 일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음.”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뭐 어차피 남주에 땅은 남아도니까.’
아무래도 도시계획에 있어서는 이순지가 더 경험이 많지 않나. 무작정 미래를 빗대어 대입할 수는 없으니, 아마 그의 계산이 더 정확할 거다.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면서 시장구경을 이어갔다.
잡화거리인 만큼 가구, 농기구, 기와등과 같은 별의 별 물건이 다 있었는데, 상점의 문간 중앙에 떡하니 걸려 있는 상호들은 거의 엇비슷해보였다.
“기업들인가... 행상은 없나보군?”
“예. 행상이 굳이 점포를 임대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전부 공업지구나 도시 밖에 위치한 공장에서 만들어서 가져온 제품들입니다.”
“개인대장간이나 개인공방에서 만든 물건은 없고?”
“품질에서 상대가 되겠습니까.”
연오랑은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낯설어서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조선본토에서도 그렇지만, 남주도에서는 특히나 기업이 빠르게 자리 잡아 공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애초에 남주도 원주민이나 이주민이 뚝딱뚝딱 대충 만든 물건하고, 연구소나 직업교육당에서 연수받은 장인들이 공작기계를 구비한 공작기업에서 생산한 물건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 아닌가.
어차피 시장논리에 의해서 쓸려나갔을 건데, 조정은 원주민 장인들을 특기별로 구분해 교육을 시키면서 더욱더 심화됐다.
조선본토에서 이주한 이들은 원주민 장인들을 전부 흡수해서 기업을 꾸렸으니, 남주도에서 생산되는 모든 공산품은 기업에서 만든 물건일 수밖에 없는 거지.
“흠... 그래도 소규모 공방은 살아남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우리가 너무 잘 묶어뒀잖아요?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수리하면 그만인데, 굳이 개인 공방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진 거죠.”
“...”
‘하긴... 직접 물건을 다루는 백성들이 더 잘 느낄 거 아냐? 이거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모양이야.’
연오랑은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살짝 헷갈렸다.
조선은 남주도를 철저히 계획도시로 만들었고, 조선화교육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도시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본토에서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현이나 마을이 형성된 게 아니고, 신도시의 주거지구에 거주하면서 아침마다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 출퇴근을 하는 식이었지.
그러니 개인공방이나 대장간이 살아남을 리가 없고, 장인들조차도 어쭙잖게 사업을 하느니 그냥 안전하게 기업공방에 취업하는 걸 선호했다.
남주도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일만 남았고, 기업에 소속되어 있으면 일이 많아서 기술을 숙달시키기도 편하니까.
나중에 따로 나와서 공방을 차리든 말든 하는 건, 앞으로 수년은 지난 후에 선택할 일이었지.
“공작기업에만 국한되는 사안은 아니지?”
“예. 거의 모든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죠. 조선에서 온 장인보다 원주민 장인들이 훨씬 많잖아요? 그치들은 안 그래도 조선화교육을 받는 것도 벅찬데, 장사까지 하려면 쫓아가지도 못할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의도하기도 했고?”
“뭐...”
연오랑이 슬쩍 꼬집는 말에, 이순지는 히죽 웃으며 말을 흐렸다.
원주민을 조선인으로 받아들여 충분히 먹고살만한 일거리를 제공해주는 건 분명히 중요한 일. 허나 조정 입장에선 원주민 개개인이 전부 부자가 되게 만드는 것보단, 조선인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나.
그렇다보니 조정은 원주민들이 기업에 취업해 조선인 사장 밑에서 일하면서, 조선말과 문화를 익히는 걸 은근슬쩍 부추기고 있었다.
“그래도 불만은 없지?”
“보셔서 알잖아요? 불만이 있을 리가 없죠. 예전 같았으면 저렇게 고운 면포로 만든 옷을 입어보지도 못했을 걸요.”
이순지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거리 한쪽에 뭉쳐 있는 포목점들을 가리켰다.
연오랑 또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포목점을 지나치다가, 두르륵.두르륵. 상점 안에서 들리는 소음에 자기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졌다.
“왜요?”
“저거.”
“...?”
연오랑이 포목점 한쪽에 걸려 있는 옷을 가리키자, 이순지는 “그래서 왜?”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봤다.
‘이건 또 언제 생겼데.’
“설마 옷을 만들어서 파는 거냐?”
“예. 요새 저런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본토에 가면 더 많을 겁니다.”
“허...!?”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포목점은 말 그대로 면포나 비단을 옷감 채로 파는 곳이지, 맞춤옷을 만들어 파는 곳이 아니지 않나.
언젠가 이런 미래가 올 거라고 상상은 했지만, 일러도 너무 일러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관복을 입은 이순지가 가게 앞에 어슬렁거려서 일까? 안에서 옷감을 정리하고 있던 주인이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
뭐라고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표정이 역력했고, 연오랑의 떡대를 보며 한 번 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주인장.”
“예.예. 나리.”
연오랑은 관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딱 봐도 높은 사람으로 보였는지, 주인은 냉큼 허리를 굽혔다.
“이 옷들 말이야. 잘 팔리나?”
“어...”
그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른 점포에서 일하는 점원들 모두 자기 할 일이 바빠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결국 눈빛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답을 털어놨다.
“그게... 나름 팔리고 있긴 합니다.”
“오. 그래?”
‘와. 이게 진짜 팔린단 말이지?’
연오랑은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서 전시되어 있는 옷을 바라봤고, 이순지가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을 날렸다.
“이게 다 어르신이 만든 물건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내가 뭘?’
“...?”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자, 녀석은 냉큼 답을 알려줬다.
“재봉틀 말이에요.”
“...?”
“주인장. 밖에서 듣자하니 재봉틀을 돌리는 소리가 나던데?”
“예예. 그렇습니다만...?”
그걸 왜 묻냐는 듯 바라보자, 이순지는 씽긋 웃고선 입을 열었다.
“그거 꽤 비싸지?”
“물론입죠. 하지만 충분히 돈값을 하고도 남습니다.”
주인장은 직접 옷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자부심이 서린 눈빛을 숨기지 않고 입을 놀렸다.
‘아... 그게 또 그렇게 된 거고만?’
연오랑은 이순지가 ‘이제 알겠죠?’라고 말하는 눈빛을 알아차리고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혁이 시작되기 전. 조선에서 길쌈이나 옷을 만드는 일은 각 집안에서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
부인이나 아이들의 주 부업중 하나가, 옷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일이니까.
허나 개혁 이후 면직, 모직기업이 등장하면서 면포의 생산량이 하늘을 뚫을 정도로 치솟자, 개별 집안에서 만드는 가내수공품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집에서 짠 포목은 공장제 포목보다 품질이 떨어져서, 내다 팔기가 쉽지 않아졌고.
직접 옷감을 짜는 것보단,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을 해서 공장제 포목을 사는 게 더 효율적이었지.
헌데 여기에 재봉틀이 등장하면서, 한 번 더 변화가 벌어졌다.
지금까지도 바느질을 잘하는 부인들은, 양반집이나 부잣집의 부탁과 의뢰를 받아 옷을 대신 만들거나 수를 놔주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재봉틀을 사용하면 바느질을 할 때보다 못해도 10배, 숙련이 되면 거의 30,40배의 효율을 낼 수 있지 않나.
이러면 옷을 만들어 파는 걸, 직업으로 삼아도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수 있게 된 거지.
“내 추측이 맞냐?”
“예. 그런데 재봉틀 값이 평민가정에서 구입하기에는 꽤 벅차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맞춤옷을 만들어주는 가게가 생겨난 거죠.”
이순지가 그리 답하며 사장에게 눈치를 주자.
“맞습니다. 나리. 제 부인의 솜씨는 아마 남주 제일일 겁니다. 저기 본토의 의주에서 두정갑을 만들던 피혁기업에서 일을 했었으니까요.”
포목점 사장은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어서,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놨다.
“아...”
‘그게 또 그렇게 퍼졌네.’
연오랑은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감을 잡고서, 작게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과거. 재봉틀의 구조를 설계한 건 연오랑이고, 그걸 연구소와 공야사 장인들이 수정 개량해서 지금의 재봉틀을 완성했다.
이걸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두정갑의 규격을 통일하고,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에는 착호군을 비롯해 기존 갑사 및 토관들의 무장을 통일 및 재정비하고, 불어나는 군병의 수에 맞춰서 군수품을 빠르게 생산해야만 했으니까.
그랬기에 사장이 왔다고 하는 의주를 비롯한 평안도에는 조정의 지원을 받은 피혁기업과 공작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군수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갑옷을 만들던 기술이 옷을 만드는 기술로 넘어왔다는 거군?”
“그렇죠. 딱딱하고 두꺼운 가죽에 바느질 하는 것보다, 천에 바느질하는 게 백배는 쉽지 않겠어요? 숙달이 되고도 남았겠죠.”
“맞습니다. 나리.”
이순지는 다시금 사장에게 눈빛을 뿌렸고, 사장은 냉큼 받아 마무리 지었다.
“하루에 그럼 몇 벌이나 만들 수 있나?”
“그야 옷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긴 한데... 치수를 재는 것까지 포함해도 한 벌을 완성하는 데는 반나절도 안 걸립니다.”
사장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을 했지만, 연오랑이 옷을 만드는 시시콜콜한 작업까지 다 알 수 없는 노릇.
그가 입는 옷조차 공주가 만든 게 아니고, 그의 집에서 일하는 집사와 사용인들이 만들어 준 옷 아닌가.
“빠른 거지?”
“당연하죠.”
은근슬쩍 물어보자, 이순지는 슬쩍 눈을 흘기며 답을 했다.
“장사는 잘 되나?”
“먹고 살만은 합니다. 나리. 이제 슬슬 옷을 사 입는 사람이 늘어나서 말입니다.”
“음...”
장사꾼이 우는 소리를 하는 건 당연한 거니 대충 흘려 넘겼지만, 앞으로가 기대된다는 말은 흘려 넘길 수 없었다.
‘기성복까지 가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놀랍네. 이게 수지타산이 나온다는 말이잖아?’
그는 생각할수록 기꺼워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말았다.
면포의 생산량이 받쳐주지 않으면, 맞춤옷가게가 존재할 수도 없다.
이게 가능하다는 건, 옷을 사 입을 정도로 면포 가격이 떨어졌거나 가게수입이 늘었다는 뜻 아닌가.
뭐가 됐든 어깨춤이 절로 춰질 고무적인 성장이다.
“화폐유통에 열을 낸 이유가 따로 있었네?”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연오랑이 작게 귓속말을 하자, 이순지는 맥락을 읽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게.”
“예. 나리.”
깊게 읍을 하는 사장을 뒤로하고 둘은 시장거리를 빠져나왔다.
시장거리를 빠져나와 향한 곳은 도시 정중앙에 위치한 관아의 귀퉁이. 관아의 면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창고부지였다.
이곳은 그들이 떠나왔던 무역은행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옅은 회백색의 담벼락과 함께 묵직한 석재건물이 떡하니 박혀 있는데, 주변 가옥들이 죄다 목재로 만들어진 것과 대조되어 눈에 확 들어왔다.
“천천히 한명씩 들어오게!”
“조용히! 길 막지 말고 한쪽으로 서게!”
“여기 이쪽으로 서라고!”
다만 시장거리도 아닌데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렸고, 수레와 짐마차, 심지어 손수레를 끌고 온 사람들까지도 있어서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또 없었다.
포도군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사람들을 단속하고 있는데도, 소란은 쉽사리 가라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