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 챕터53. 영위하다 (9)
이건 이번 화폐유통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였는데, 오히려 더 심각해질지도 모른다.
전에는 종이돈인 저화와 동전이었지만, 이번엔 그 주화자체가 가치를 품고 있는 은화와 금화가 풀렸으니까.
‘해결책으로 내놓은 게 은행으로 돈을 모아두는 건데... 제대로 되고 있나 보네.’
어차피 안 쓰면 똑같이 잠자고 있는 돈인데 뭐가 다르냐 하겠지만, 조정에서 얼마나 잠들어 있는지 파악할 수가 있지 않나.
누군가 돈을 쫙 빨아들이거나, 반대로 한 번에 확 풀어버리면 시장이 요동치는 건 당연.
조정은 이에 맞춰서 돈을 풀거나 거둬들으면서, 시장의 가격을 유지시키는 거지.
‘물론 조선의 체급이 커졌으니까 이런 일이 쉽게 벌어질 수가 없을 거야. 하지만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지금부터 토대를 잘 쌓아두는 건 나쁠 게 없겠지.’
“...”
‘게다가 외국자본이 들어오고 있으니까, 더욱더 경계를 하고 지켜봐야할 거야.’
연오랑은 무역은행에 앉아서 지켜본 게 있었기에, 이런 결론을 내고 말았다.
“타국상인이 예탁한 금액이 어떻게 되지?”
“음. 그게... 여기 있습니다.”
뜬금없는 주문에도, 은행장은 품에 끼고 있던 장부를 꺼내서 이곳저곳을 짚으며 말을 이어갔다.
명단은 꽤 길었는데, 남주무역항에 드나드는 규모 있는 상단이 점점 늘어나는 게 확실해 보였다.
“달마다 늘어나긴 하는 군?”
“은행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추수 때에 맞춰서 예금액이 줄어들긴 하는데, 그것도 다음번 거래에 계속 채워지고 있습니다.”
“음...”
연오랑은 연필도 아닌 세필로 빼곡하게 적어놓은 장부를 유심히 살펴나갔다.
무역항과 조차지에는 왕실은행. 무역은행이 만들어져서, 타국상인의 돈을 꽤나 적극적으로 빨아 먹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든 가져온 물건은 전부 팔아서 조선물건을 사서 되돌아가야 했다.
무역항에서 자신의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 답이 없잖나. 그냥 다시 짐을 싣고 되돌아가든가, 아니면 헐값에 파는 수밖에 없었지.
허나 이젠 아니다.
무역항에 드나드는 상인은 무역은행에서 발급한 전표로 거래를 진행한다. 전표에는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 안에 써야하는 제약이 있지만, 보관료를 내고 아예 은행에 예치하는 경우에는 그런 것도 없다.
굳이 상품을 직접 가지고 오지 않아도, 돈을 무역은행에 잔뜩 박아뒀다가 좋은 상품이 나올 때마다 쓱쓱 구입할 수 있게 된 거지.
이러니 타국상인들 입장에선 환영할 수밖에.
물론 돈을 떼어먹힐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지만, 왕실의 이름을 건 은행에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나. 개혁 이후에 진행된 활발한 대외전쟁 및 무역으로, 조선왕실은 나름 신뢰를 받고 있었다.
“이건?”
“남방소국의 상인이 예탁한 금액입니다.”
“호오...?”
“명부에 오른 인명은 상인이지만, 실상 호족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은행장은 그리 말을 하고선, 이제 긴장이 풀렸는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동남아시아의 소국은 도시국가나 마찬가지고, 호족이 곧 상인이며 지주이자 통치자다. 그러니 그 돈이 그 돈처럼 보이지만, 살짝 다른 점이 있었다.
호족이 주도해서 만든 상단자금과 호족집안의 재산이 분리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상단의 이름이 아니라, 가문의 가주 이름으로 예치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오... 벌써?”
“예.”
연오랑이 화들짝 놀라서 되묻자, 은행장 또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액수는 얼마 안 됩니다. 작은 무역선 한척 정도의 거래대금입니다.”
“그게 어디야.”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왕실은행이 설립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관심을 넘어서 직접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가문 하나가 아니잖아?”
연오랑이 장부를 보며 중얼거리자, 은행장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예.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다들 비슷한 금액을 예치했습니다. 예상대로 슬슬 호족자금이 은행으로 넘어오는 것 아닐까요?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불어나고 있는 걸로 봐선, 왕실은행을 금고처럼 사용하려는 속셈 분명합니다.”
“보관료를 받고 있는데도 그렇다는 거지?”
“예. 아마... 알게 모르게 조금씩 입소문이 퍼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흘러서 어떻게 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 정기보고를 들었을 때는 일본에서의 확장이 두드러지고 있었습니다.”
“음...”
‘빠르긴 한데... 그래도 예상대로 되고 있네.’
조차지와 무역항에 왕실은행을 만들 때부터, 이걸 노리지 않았나.
가장 분쟁이 격하고 신경전이 자주 벌어지는 일본에선, 다이묘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왕실은행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소규모분쟁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동남아시아 소국의 경우에도 딱히 다를 건 없을 거다.
첫 단추는 제대로 끼워서 동아시아의 자본흐름을 주시하고 손아귀에 넣을 암계가 착착 진행 중인데...
다만 여기에도 위험요소는 존재했다.
‘호족들이 직접 예탁하는 금액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는 건... 이놈들도 자기 돈을 떼어먹히지 않으려고 유심히 보고 있을 거고, 수작을 부려서 돈을 불리려는 속셈도 있을 거란 말이지.’
“눈에 걸리는 이들이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돈에 미쳐 사는 이들이 그렇게 손 놓고 있을 리가 있나.
연오랑이 믿기지 않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은행장은 얼른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아국의 기세가 매섭지 않습니까. 꿍꿍이를 품기에는 부담감이 더 클 겁니다.”
“하긴...”
듣고 나니 그럴 법도 하다.
지금껏 조선이 펼쳐온 확장전쟁은 저 먼 곳에서 벌어진 남의 나라 사정이지만, 대만섬과 해남도, 각지에 조차지를 만든 건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동남아시아소국 호족들에게는 피부에 바로 와 닿는 일이고, 여차하면 조선전함이 나타나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거다.
“그래서 이렇게나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서, 예치를 한단 말이지...”
“아국은 믿을 만하니까요.”
은행장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앞서 말한 조선왕실에 대한 신뢰가 높기 때문.
하지만 지금 당장이 아니라, 계속 미래를 보며 대비해야 한다.
‘왕실은행과 조선은행의 자금이 섞일 일은 없겠지만... 막연한 시장의 불안감이 이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
조선왕실이 믿을 수 있다는 것과 화폐의 유통량 부족 및 과다로 조선의 시장상황이 흔들리는 건 또 다른 문제.
그들 입장에선 조선시장의 시세가 오락가락하는 걸, 왕실은행의 보유금이 부족한 것처럼 보일 여지가 있지 않나.
그러니 이 신뢰를 유지하고, 또 외국자본이 무제한적으로 조선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은행을 통한 시장통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이 정도는 이 시대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니까... 당장은 문제될 게 없을 거야.’
조정이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하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자본유학이 이제 막 성장하며 퍼지고 있는 시기.
백성들이나 관료들 입장에선 오히려 개입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반 백성들의 불만은 없냐?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글쎄요...”
“음.”
이순지는 거기까진 잘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은행장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여러 의견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왜 자기들만 은행에 넣어야 하냐고 말하는 사장도 있고, 반대로 왜 자신들은 은행에 넣지 못하냐고 묻는 백성도 있고...”
“그렇겠지.”
“은행에 돈을 넣는 게 손해라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편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조금 중구난방이죠.”
“...”
연오랑은 직접 확인하진 않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대충 짐작이 됐다.
여러 의견이 나오는 건, 은행이 소액예금을 받아주질 않았기 때문.
이 시대는 모든 걸 수기로 작성하고, 또 직접 손으로 장부를 날라야하기 때문에, 행정처리가 시간이 걸리고 힘든 건 당연.
소액을 뺏다가 넣었다가 할 때마다 계속 장부를 고치고, 그걸 중앙은행으로 보내서 변경해야하는데... 이게 가능이나 하겠나.
결국 차별 아닌 차별이 발생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지.
그럼에도 은행장은 슬그머니 웃으며 긍정적인 답변을 이어갔다.
“그래도 큰 흐름은 조정의 뜻을 따라오고 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 일반 백성들이 은행을 이용할 만큼 큰돈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음...”
“여긴 상거래가 많지 않아서 크게 두각 되는 일이 아직 없지만, 본토의 상인들 중에서는 만족하는 이들이 꽤 된다더군요.”
“...?”
연오랑이 슬쩍 눈빛에 궁금증을 싣자, 은행장은 얼른 말을 이어갔다.
“기업이 늘어날수록 다양한 형태의 계약이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헌데 은행을 활용하면 안정성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 율법부 관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네? 저도 들어본 적이 있네요.”
“아...!”
‘이게 또 이렇게 이어지는 고만?’
연오랑은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고선, 머릿속에 본토에서 뭔 일이 벌어졌는지 훤히 그려졌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전파가 호조와 형조 관원들 사이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건, 다양한 형태의 기업이 등장해 고용계약을 진행하면서 발생한 문제 때문 아닌가.
글을 잘 모르는 백성들은 계약서를 어려워했고, 또 쉽게 믿기도 힘들었다. 이래서 검토 겸 공증을 받기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관아에 찾아와 계약서의 확인을 요청했었지.
‘초창기에도 그 정도였는데, 지금은 오죽하겠어.’
지금은 전국에 기업이 없는 곳이 없고, 조정이 담당하던 유통과 물류업무가 민간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
기업 간의 별의 별 계약이 다 등장했을 것이며, 큰돈이 오가는 경우도 흔하게 됐을 거다.
허면 이 거래계약이 제대로 지켜지고, 만약 잘못됐을 경우 누구의 책임으로 삼을지가 쟁점이 되지 않겠나. 이젠 책임소지를 명확히 하고 계약서를 쉽게 공증할 수 있는 은행이 생겼다.
“은행이 공증기관의 역할도 겸한다는 거군?”
“예. 은행에서 거래 당사자가 직접 수결을 하고 돈을 옮기면,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설령 계약이 잘 못 되더라도, 그 책임소지만큼은 명확해 지겠지요.”
“음...”
‘떠넘기기 같기도 한데... 벌써 이 정도면 뭐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지.’
연오랑은 미래를 떠올리며, 얼추 그 간격을 좁혀가는 지금 시대를 보며 그리 평가했다.
지금껏 “돈을 덜 줬네, 물건이 잘 못 됐네, 대금을 왜 늦게 주냐.” 등등의 시시콜콜하지만 빈번하게 벌어지는 실랑이가 율법부를 괴롭혀 오지 않았나.
형사의 경우에는 율법부의 뜻대로 착착 진행하면 그만이지만, 민사의 경우에는 율법부 조차도 겪어보지 못한 온갖 사례가 다 튀어나왔다.
‘지금까지는 기업도 없었고, 상거래가 이렇게 크게 진행되지도 않았고, 외국과 무역을 하는 경우도 없었을 테니까.’
이런 다양한 형태의 민사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민법과 상법, 기업법이 해가 바뀔 때마다 추가되고 수정되고 있으니, 율법부는 자기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준 은행을 환영할 수밖에.
“더불어 실질적으로도 편하고 안전하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음.”
‘맞아. 이것도 크게 영향을 미칠 거야.’
연오랑은 또 다시 십분 이해가 됐다.
그도 기업을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는 터라, 거래할 때마다 무슨 문제가 골치를 썩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진 쌀과 면포를 대금으로 치렀으니, 기업은 그걸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각각 보유하고 있었지 않나.
이걸 주화로 바꾸어 은행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쓸데없는 보관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대금을 치르는 기업 또한 쌀과 면포를 옮기기 위해서, 쓸데없는 인력과 시간낭비가 있었지.
헌데 이젠 힘겹게 돌아다닐 것도 없이 은행에서 서로 마주앉아 수결하고 계좌에서 계좌로 돈을 옮기기만 하면 끝.
더불어 직접 은화와 금화를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을 일도 없어지지 않았나.
“내 생각이 맞냐?”
“그렇습니다. 전표나 물표를 잃어버리는 것하고, 돈을 직접 잃어버리는 것하고는 천지차이니까요.”
전자의 경우에는 비용을 내고 재발급을 받으면 되지만, 후자는 답도 없다. 큰 거래일수록 은행을 끼고 하는 식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거지.
“부수적으론 효과로는, 기업집안에서도 편의를 취할 수 있을 겁니다.”
“꼼수를 쓰기 힘들긴 하겠지만 말이죠.”
“음.”
돈을 벌었으면 어쨌든 세금을 내야하고, 기업은 자발적으로 내던 국방세 대신 소득세를 내는 걸로 개편됐다.
걸리는 점이라면... 은행에 돈을 맡기면, 기업재산이 그대로 조정에 보고된다는 뜻.
소득을 조금이라도 숨겨서, 세금을 줄이려는 꼼수는 불가능해진 거지.
“하지만 기업사원의 소득을 세금을 걷기 위해선, 기업의 회계장부를 살펴야하지 않습니까? 기업 입장에선 어차피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는 부분이니, 한 번에 처리하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세금제도가 개편되면서, 기존의 모든 세금이 없어지고 소득세만 남았다.
일반 백성 사원의 소득세를 걷기 위해선 얼마를 받았는지 확인해야하는데, 기업의 회계장부는 살피는 건 둘째치고 은행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확인함으로서 공증을 받는 꼴 아닌가.
두 번 일 할 일도 없고, 괜한 송사에 휘말릴 일도 줄어드는 거지.
“논밭의 소출을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은행을 통해서 하는 게, 훨씬 편할 거예요.”
이순지가 한마디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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