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챕터53. 영위하다 (10)
자영농의 소득을 산출하는 것과 기업세금을 걷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은행을 통해서 조정이 가격을 매겨서 전매하면, 환전 및 세금납부도 한방에 다 해결되어 버리니까.
“물론 지금이야 거래규모가 작아서 이게 가능한 거고, 미곡상과 같은 민간의 거대상단이 등장하면 조금 복잡해질 거에요.”
개혁 이후 조선은 자영농이 대다수고, 얼마 없던 지주들도 농산기업으로 갈아탄 게 태반이다.
예전처럼 일률적으로 전세, 그것도 현물인 쌀과 곡물을 직접 걷는 게 없어진 탓에, 세금을 내려면 일단은 생산물을 팔아야 돈이 생길 것 아닌가.
지금은 이 작업을 조정과 은행이 대신해주고 있지만, 민간상인이 직거래를 시작하면 세금문제는 분명히 복잡해 질 거다.
“그것도 맞긴 맞는 말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세금을 매기는 문제가 아니라 화폐를 유통하고 정착시키는 일 아닙니까? 지금처럼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음.”
연오랑은 은행장의 속마음을 읽고, 피식 가볍게 웃어줬다.
그가 은행과 조폐부 소속이라서 저렇게 속 편한 말을 하는 거지, 조세부 관원이었다면 열불을 올렸을 거다.
“대출은 어떠냐? 그건 어차피 장부를 작성해야하는데, 그럴 거면 소액예금을 하는 것과 다를 게 뭐냐는 말도 나올 거 같은데?”
“음... 일부 있기는 하지만 큰 반향은 없습니다. 말이 대출이지, 백성들이 느끼기에는 사실상 환곡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흐음.”
연오랑은 은행장의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곡제도는 춘궁기에 백성들이 굶어죽는 걸 막기 위해서, 이자를 받고 곡식을 빌려주는 제도다.
이 시대치고는 나름 선진적인 제도고, 고려의 폐단을 기억하는 탓에 개혁 전까지도 나름 잘 운용되어 왔었다.
허나 비축미와 군량을 늘리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시장으로 돌아야할 쌀이 전부 창고에만 박혀 있어서 시장경제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이건 개혁의 발목을 잡는 일이니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는데... 연오랑과 세종은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기술 및 제도의 개선으로 조선의 생산량을 늘리는 건 당연.
더불어 그냥 중국에서 무지막지한 양의 곡물을 수입해서, 공창을 비우지 않고도 시장에 곡물이 남아돌게 만들어 버린 거지.
“헌데 환곡을 해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먹거리가 부족해서인데... 이젠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굳이 전처럼 환곡제도에 목을 매는 백성들의 수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그건 그래.”
이건 연오랑이 직접 발로 뛰면서 만들어낸 거니,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이곳 남주도를 비롯해서 본토의 양전사업이 모두 마무리 되면서, 중국의 수입곡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장한 상태.
더불어 곡물 말고도 생선, 육류등의 대체먹거리가 꽤 등장했다.
가장 중요한 건. 조선의 인구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곡물생산량과 대체 품목은 몇 배로 늘어난 상황.
백성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벅찰 순 있어도, 적어도 먹고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태평성대가 찾아온 거지.
그러니 환곡자체를 이용하려는 백성들의 수가 대폭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는 이도 얼마 없었다.
“게다가 대출과 환곡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환곡은 은행지점과 연계된 게 아니라 각 지점과 현청이 연계해서 관할하는 업무이고, 일반 양민백성들은 다른 지역에 가서 굳이 환곡을 받을 일도 없으니까요.”
“접근성도 떨어지고, 굳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대출과 환곡의 가장 큰 차이점은, 환곡이 수취제도와 비슷하게 운영된다는 특징이 있다는 점.
환곡을 한다고 해서 이게 다른 지점의 은행장부와 연동되는 게 아니라, 단일지점의 은행 및 지방관아의 장부에만 남아 있는 거지.
빚을 갚는 데, 굳이 다른 지방에 가서 갚을 필요가 없지 않나.
공창의 비축미가 모자라서 다른 지점에서 가져오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그건 일반 백성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 조정과 은행이 신경 써야 할 일이다.
“게다가 진짜 큰돈을 빌리려는 상인들은 보통 개개인의 계약으로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은행에서 빌리는 경우에는, 담보를 꽤 보수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큰 금액은 대출이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고리대를 금지했는데도 말이지?”
“그... 공증된 계약서에 따라서 고리高利를 받지만 않으면, 조정이 관여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충분히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은행장은 왠지 할 일을 회피하는 핑계처럼 들릴까 싶어서, 연오랑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놀렸다.
과거. 민간사채시장은 양반이나 지주가 자영농에게 사채를 빌려주는 편이었다.
이는 백성들이 뭔가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 종자돈을 빌리는 경우보다는,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서 빌리는 경우가 절대다수였지.
헌데 양전사업으로 양반,지주들은 다 박살났고, 토지제한법으로 무작정 땅을 소유할 수도 없다.
고리대금법으로 인해 조정과 똑같은 이자만 받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이 먹고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나.
구조적으로 일반 양민백성을 상대로 하는 민간사채시장은 완전히 붕괴할 수밖에 없는데, 시대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사채시장이 떠오르고 있었다.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 돈을 빌리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말이지. 꼭 벤처투자처럼 말이야.’
이젠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사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으니, 촉이 좋고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기업에 도전할 기회가 열리지 않았나.
헌데 은행과 조정 입장에선, 무일푼인 사람에게 뭘 믿고 큰 금액을 대출해줄까.
자연스레 담보를 적게 잡는 민간사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지금과는 성격이 다른 사채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부자라도 그런 식으로 돈을 빌려주면, 망하는 경우가 허다할 텐데? 기업을 세우는 게 돈을 버는 지름길이라곤 허나, 겁 없이 덤벼들었다가 망한 집안이 한둘이 아니잖아?”
“그들도 알아서 검토하고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니 빌려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열 중 하나라도 성공하면, 기업지분을 받거나 이자비용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음...”
‘하긴. 그건 그렇네.’
먹고살기 위한 고리대출은 금지하는 게 맞지만, 투자목적의 대출까지 금하는 건... 자본유학을 받아들인 조정의 기조와는 맞지 않는 일.
저렇게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과 기업에 뛰어들어야, 나라의 경쟁력도 커지고 기술발전도 일어나는 것 아닌가.
실제로도 이렇게 기존에 없던 기업을 만들어서, 떼돈을 번 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큰 흐름에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는 거군.”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흐음...”
연오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까지 친히 접어가며 하나씩 화폐유통에 있어서 문제되는 점을 하나씩 집어갔다.
‘종합해 보자. 먼저...’
“화폐의 보유수량은 문제가 없겠지?”
“물론입니다.”
“지금은 당연하고,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거예요. 본토의 광산을 계속 늘려가고 있고, 일본과 대리, 참파의 광석도 계속 들어올 테니까요.”
시장경제가 성장하고 화폐가 많이 유통될수록, 자연스럽게 은행금고의 비축량도 늘어나야 하는데... 금고를 빵빵하게 채우는 건, 역시나 문제가 안 되나 보다.
‘일본은...’
연은분리법을 모르는 탓에 일본입장에선 자기들의 기술력으로 은,납을 분리해 조선에 파는 것보단, 그냥 광석채로 파는 게 더 이득이었다.
제주에 무역항이 생길 때부터 그랬는데, 일본 본토에 조차지와 유사한 무역항이 생긴 지금은 더욱더 늘어난 상태.
원래 역사에서 중국이 은을 빨아들였던 걸, 지금 역사에선 조선이 대신하고 있는 꼴이다. 물론 그 절대수량에 있어서는 상대도 안 되지만 말이다.
‘참파는...’
참파나 대월, 기타 동남아시아의 소국에서 수입하는 광석의 양도 줄어들진 않을 거다.
참파는 조선산 강철을 비롯해서 모든 물건에 손을 내밀고 있고, 이들은 대금을 지불할 능력이 부족해서 땅까지 팔려는 작자들이다.
지금 상황을 유지하고 싶을 테니, 어떻게든 특산품을 만들어 팔 거고 제련하지 않은 광석은 여전히 최우선순위다.
대월이나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제련기술이 부족한 이들은 자신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순은,금을 뽑아서 파는 것보다, 그냥 광석채로 조선에 파는 게 더 이득인 셈.
조선이 중국시세보다 조금 더 쳐주는 기조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조선과 거래를 이어가겠지.
‘대리까지 광석을 팔 줄은 몰랐지만... 이쪽도 거래가 끊어지지 않을 거야. 오히려 반기고 있을 지도 모르지.’
대리와의 조약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이미 해주도(해남도)의 무역항에 대리의 상선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까닭인 즉. 대리가 위치한 운남지역은 은,금을 비롯한 온갖 광석이 넘쳐나는 땅. 그들 입장에선, 광물이 부족한 조선에 내다 팔기만 하면 무조건 이득이 나는 장사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걸 포기할 리가 없다.
‘게다가 무작정 광물을 푼다고 해서,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잖아?’
대리내부에서 광물을 제련해서 은,금을 풀 수도 있지만, 그건 자기 스스로 은,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 아닌가.
그게 싫다고 광산개발에 주저하면, 대리의 국력 및 생산력을 끌어 올리는 계획이 흔들린다.
어차피 광산개발에 열중해야 한다면... 창고에 쌓아두는 것보다는 웃돈주고 팔아서 조선물품을 사오는 게, 시장활성화 및 번영을 위해선 좋은 선택인 거지.
‘게다가 대리는 남방비단길을 열겠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 그 일에 끼지 못한 호족들을 다독여줘야 하잖아? 그걸 위해서라도 무역이 끊길 일은 없을 거야.’
연오랑은 대리의 상황을 떠올리며, 미래를 굽어봤다.
대리는 조선처럼 완벽한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했고, 백족이 중심이긴 허나 기타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있는 나라다.
중국내륙만큼은 아니지만 민족이 다른 호족의 입김이 강력한 곳이니, 그들을 어르고 달래서 끌고 가려면 그만한 당근을 쥐어줘야 하는 법.
그 당근은 호족들이 진행하고 있는 집안사업을 융성하게 해서 돈을 벌게 해주는 일이니, 어찌됐건 무역이 끊길 일은 없어 보인다.
‘대리만의 중앙집권이 완벽해지기 전에는 이 상태가 지속될 텐데... 걔들은 계속 남하하면서 호족들을 복속시키고 있잖아? 그게 될까 모르겠네.’
운남지역의 호족도 다 통합을 못한 상태에서,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의 지역에 살고 있는 토착호족까지 대리조정 밑으로 들어오게 될 텐데... 과연 대리조정이 그 불협화음과 불순분자를 다 정리하고, 중앙집권을 이룰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 다음은 민심. 이건 문제없겠군.”
“그렇죠. 일반 양민백성들 중에서도 화폐가 생기길 바라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요.”
“맞습니다.”
손가락을 접으며 다음 조건을 꺼냈지만, 이순지와 은행장은 냉큼 동조를 표했다.
민심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시장이 활성화 된지 벌써 십년이 훌쩍 지났다. 모든 백성들은 이제 시장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또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파는 것에 익숙해졌다.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모두가 체감했고, 오죽했으면 본토에서 세금을 쌀,면포가 아닌 주화로 받는다고 공표를 했는데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는가.
“그럼 다음 조건은 백성들의 신뢰 및 업무체계인데...”
“그것도 문제 없겠죠. 그러려고 은행을 만든 거 아닙니까.”
이순지는 은행장을 힐끔 보며 입을 열었고, 은행장은 냉큼 말을 이어받았다.
“은행뿐만 아니라, 조폐부, 조세부 관원 모두가 달라붙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방관아마다 은행금고와 곡물창고를 완공해 놨으니, 이번 화폐는 백성들이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음.”
‘맞는 말이야. 이렇게 보여주려고 지난 오년동안 보일 듯 안보일 듯 손을 쓴 거니까.’
화폐에 대한 신뢰를 주기 위해선, 나라의 보증이 필요한 건 당연한 말. 이걸 보여주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과 증명은 은행금고와 은행원들이다.
이번 사업은 지난날 태종이 관원들에게 저화를 녹봉으로 나눠줬던, 어설픈 방식과는 비교조차 불가다.
은행과 곡물창고를 각 현에 건설하는 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건설작업 및 완공된 모습을 모든 백성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뭣도 모르는 백성들조차도, 이 정도로 조정이 투자를 했으면 뽕을 뽑아 먹을 거라고 보는 거지.
흐지부지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고, 그럴수록 화폐에 대한 신뢰도 또한 높아질 거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내,외부에 의한 충격인데...”
“...?”
“너희가 보기엔 어떠냐. 이거 위조할 수 있을 것 같냐?”
연오랑은 쥐고 있던 은화를 가볍게 내밀며 흔들었고, 둘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되겠습니까?”
“이런 정교한 주화를 위조할 수 있는 장인이라면... 이미 기업에서 다들 한자리씩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겠습니까?”
“...”
둘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듯이 단언했고.
‘하긴... 쉽진 않을 거야.’
의심의 눈빛을 뿌리던 연오랑조차 결국 승복당하고 말았다.
화폐유통에 있어서 위조문제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허나 지금 조선은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다.
가장 첫 번째로. 조선 내,외부에서 채굴 및 유입되는 은,금은 전부 조정이 사들이고 있다.
공작기업에서 만드는 각종 귀금속 장신구들조차도, 광산기업에서 광물을 사는 게 아니라 조정에서 푸는 광물을 사서 재가공하는 방식이다.
위조업자들은 광물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난관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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