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 챕터53. 영위하다 (11)
외부에서 광석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무역항을 통해 들어오는 광석 또한 조정으로 들어간다. 따로 구하려면 밀무역을 해야 하는데... 이건 위조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그럼 시중에 도는 장신구를 구해서 주화로 재가공할까? 세공된 장신구는 이미 주화보다 가치가 높은데, 그걸 다시 녹이는 바보가 어디 있겠나.
둘째는 전에도 말했듯이, 이게 정교해도 너무 정교하다는 점.
풀린 주화만 가지고서 합금비율을 알아낼 정도의 기술력이면, 조정이 나서서 포섭해야 할 정도의 천재다.
주조틀을 만드는 기술 및 마무리 세공기술 또한 난이도가 높아서, 이 정도 능력이 되는 이들은 이미 각종 기업에서 대우받으면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거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만한 장인도 없고, 기업도 없을 거야.’
“내부는 그럼 됐고... 외부의 문제인데.”
“...?”
“어떠냐? 아국 주화가 타국으로 흘러가는 거 같냐?”
“지금은 무역항에서 주화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지만... 앞으로는 위험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은행장은 조정이 무역시장을 민간에 개방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무역은행에서 발행하는 전표는 각 무역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종이돈이나 마찬가지. 그러니 조선내부에서 도는 주화가 사용될 일이 없다.
허나 이렇게 이중체계를 유지하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게 사실이니, 화폐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무역항에서도 조선주화가 통용될 수도 있다.
“지금의 전표가 사용되는 건 무역항 내부에서 물물교환을 하는 게 불편해서인데, 아국주화를 사용하면 그 불편함이 절로 없어지는 거니까요.”
이걸 알고 있으면, 당연히 해결책도 나오기 마련.
은행장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타국 상인이 무역항에서 사용하고 남은 아국주화를 무역은행에 맡겨 놓게 강제하겠지만, 몰래 가져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 양이 많을 리는 없을 텐데요? 게다가 아국주화를 가져간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사용할 수도 없잖아요.”
“그것도 그렇거니와, 이따금씩 상품이 아닌 마제은으로 조선물산을 구입하는 타국상인이 있었습니다. 무역항에서 민간무역이 주류로 자리 잡는다면, 어쩌면 은,금의 유입량이 더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은행장의 발언에 이순지가 양념을 치며 덧붙였다.
“그래도... 어찌됐건 빠져나가긴 나간다는 말이군.”
“...”
“어쩔 수 없겠죠.”
“흐음...”
‘너무 먼 미래를 우려하는 것 같긴 한데...’
연오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굴려봤다.
조선주화가 동아시아의 무역에 있어서 기축통화가 되면 분명 좋은 점이 있다. 주화발행을 통해 무역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테니까.
허나 이걸 알면서도 포기한 건, 중국이 다 빨아먹을 것이기 때문.
조선주화의 신용도와 신뢰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외국상인들의 사용양은 더 많아질 터. 자연스럽게 은행금고의 보유금이 줄어든다.
‘그냥 줄어들면 그나마 다행이지. 자기들이 만든 마제은을 못 믿겠다고 중국상인들이 조선주화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땐 난리가 날 거야.’
만약 조선주화가 중국시장의 법정화폐처럼 쓰이는 일이 벌어진다면, 무역시장을 조선조정이 쥐락펴락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거다.
체급이 몇 배나 큰 중국시장에 조선시장이 끌려다는 수밖에 없고, 중국상인들이 단합해서 장난질을 치면 조선시장 전체가 타격을 받게 되겠지.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원래 역사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했던 것처럼, 식민지 광산에서 막대한 양의 은,금을 가져와서 시세를 유지하는 건데... 이게 될 리가 없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전에 예상했던 대로, 무역항에서 발행하는 전표를 교환하는 상인이 등장했지?”
“많지는 않지만 슬슬 나타나고 있습니다.”
‘음... 확실히 위험해.’
상품권이나 마찬가지인 전표조차도 서로 교환하기 시작했는데, 조선주화가 통용되면 그런 귀찮은 일도 필요 없을 터... 보나마나 좋다고 사용할 거다.
“차라리 지금과 같은 이중 체제를 유지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조세부와 조폐부 내에서도 그런 의견이 적지 않습니다. 해서 당분간은 지금의 방법을 고수하면서 시장을 지켜보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무역항과 조차지가 더 늘어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음.”
이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서, 지금 당장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 같다.
“다음으로 따져볼 건. 조금씩 빠져나간 주화를 위조해서, 아국에서 사용하는 문제인데...”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중국의 제련기술과 주조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아국조차도 힘들면 그들도 따라 만들기 쉽지 않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위조주화를 만드는 건 그만큼 인력과 시간, 돈을 투입해야 하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충분히 일리가 있어서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은행장은 계속 반론을 이어갔다.
“게다가 위조주화를 만든다 한들, 결국 사용하려면 아국내로 유입되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조선외부에서 조선주화가 통용되지 않으면, 위조라는 게 성립할 수가 없다. 그건 그냥 조선주화를 따라서 만든, 또 다른 화폐가 될 뿐이지.
“어찌됐건 밀무역을 통해서 들어와야 하는 데... 그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은행장과 이순지는 쿵짝을 맞춰가며 말을 늘어놨다.
‘틀린 말은 아니야...’
흔히들 관세를 피하기 위해서, 밀무역을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진짜 이유는 모든 나라가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넘쳐나서 벌어졌던 일이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몇 배의 이득을 챙길 수 있어서였는데... 지금은 무역항에서만 거래해야한다는 제한이 있어도, 그 안에서는 자유무역과 비슷하게 마음껏 물산을 사고팔 수 있다.
굳이 밀무역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지.
“게다가 밀무역을 통해 위조주화를 들여와도 문제죠. 그걸 민간에 풀어야 차익을 얻을 수 있는 데, 쉽게 될까요?”
“맞습니다. 쉽게 보기 힘든 은,금화를 일반 양민백성들이 사용하는 건 드문 일. 반대로 은,금화를 사용하는 상인,기업들은 다른 점을 쉽게 알아차릴 겁니다.”
“하긴...”
연오랑은 위조주화가 어떻게 퍼져나갈지,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납득하고 말았다.
조선주화는 동화,은화,금화으로 나눠졌고, 가장 많이 만들고 쓰이는 주화는 당연히 동화다.
금화 한 개로 작은 집 한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인데, 이걸 일반 양민백성들이 흔히 사용하는 경우가 있나.
미래를 예시로 들면, 편의점에서 천만원짜리 수표를 내미는 것과 흡사한 꼴이다.
그러니 은,금화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그런 만큼 위조주화가 기존주화와 다른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
“게다가 큰 거래를 하는 상인들은 은행에서 거래할 텐데, 그렇게 간이 부운 작자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렇죠?”
“물론입니다.”
은행장은 자신들을 의심하는 말에, 눈에 불을 켜고 답을 했다.
거래의 안정성과 공증을 위해, 은행에서 거래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헌데 하루 종일 은,금화만 만지작거리며 노는 은행관료들 앞에서 위조주화를 내민다? 이건 잡아달라고 알아서 자수하는 꼴이지.
“그렇죠. 그렇다고 사용하기 쉬운 동화를 위조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텐데... 그런 손해를 굳이 감수할 상인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특히나 밀무역을 하려면, 값비싼 특산물을 거래해야할 텐데 말이죠.”
“옳은 말입니다.”
이순지의 양념칠에 은행장은 또 다시 맞장구를 쳤다.
은행에서 거래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일반 양민과 직접 거래하면서 동화를 떠넘긴다?
이러려면 온 사방팔방을 싸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사들이고 옮겨야 하는데... 그냥 상인을 통해서 한방에 크게 거래하는 것보다 시간, 인력, 돈이 더 많이 든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거지.
“지금은 민간무역상인도 얼마 없는데, 굳이 밀무역을 하고자 하는 아국 상인이 있을까요? 티가 나도 너무 날 걸요.”
“지금은 그렇지만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지.”
“에이. 한번 그렇게 자리 잡으면 쉽게 바뀌기도 힘들 거예요.”
이순지는 연오랑의 우려를 다시금 무너뜨렸다.
“흠... 그럼 은,금 교환을 통해 차익을 노리는 이들은? 지금 조정에선 그걸로 꽤나 짭짤하게 수익을 얻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건...”
“음.”
다른 쪽으로 접근하는 연오랑을 보며, 둘은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환차익의 역사는 너무나 오래됐고, 대항해시대에는 이걸로 일확천금을 번 서방상인들이 넘쳐났다.
예컨대 중국에서 금화 1개당 은화 10개의 가치가 있고, 일본에서는 금화 1개당 은화 8개의 가치가 있는 경우.
금을 중국으로 가져가 은으로 바꾸고, 다시 일본에 와서는 은을 금으로 바꾸는 일을 반복하면서 양을 불리는 거지.
조선조정은 이런 돈 장난에 대해서 약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조차지와 무역항을 통해 온 사방에서 은,금광석을 사들이면서, 그 가격이 천차만별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으니까.
해서 조폐부와 은행은 서양의 무역상인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환차익을 얻어내고 있었다.
결국 언제가 됐건 환차익이 돈이 된다는 걸 민간상인들이 다 알게 될 터... 그럼 조선주화를 가져다가 파는 상인이 등장할 지도 모른다.
“일단... 교환 차익을 노리는 상인은 지금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거래를 많이 하는 절강상인과 일본의 구주상인들이 그렇겠지요. 허나 그걸 아국이 제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사실상 그게 아국의 화폐를 위협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맞아요. 차익을 노리려면 주화가 아니라 은,금의 함유량을 따져야 하는데... 아국의 주화가 빠져나가더라도, 주화의 가치를 흔들 순 없을 거예요.”
“음.”
허나 둘은 다시금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환차익은 주화의 가치가 아니라 은,금의 순도를 따진다.
당연히 액면 가치에 비해 실제 가치가 떨어지니, 조선주화를 내다파는 건 어쩌면 손해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차익을 노리는 민간상인은 아국주화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조정에서 하는 것처럼 일본-중국-남방소국을 오가며 교환을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얻은 이득은 다시 아국으로 들어오겠죠.”
“물산이 아니라?”
“뭐. 물산도 물산일 텐데, 은,금을 직접 조폐부에 파는 사람도 분명히 나오겠죠. 어찌됐건 은행을 통해 거래하기 위해서는, 아국 주화로 바꿔야 할 테니까요.”
“흐음...”
‘거꾸로 오히려 이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럴 듯해.’
연오랑은 이순지의 말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폐부와 은행이 만들어지면서, 법률로서 조선내부에서 통용되는 모든 은,금붙이에 대한 통제가 이뤄졌다.
설령 은, 금 덩어리가 있다고 해도, 그걸 일반 백성들이 사고 팔 수가 없다는 뜻이지. 결국 환차익을 통해 얻은 은,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은행에 팔아서 주화로 바꿔야 한다는 뜻. 은행금고의 보유량은 역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아국에 근간을 둔 민간무역상인이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결국 은행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네?”
“그렇죠.”
“맞습니다.”
‘그럼...’
연오랑은 다시금 납득할 수밖에 없었고, 토의를 통해 나온 결론은 어째 엉뚱한 대비책이었다.
“결국 주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밀무역을 막는 게 최선이라는 거네?”
“어째 그러네요?”
“근원을 따져 가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밀무역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확충이 필수일 거고?”
“뭐... 그렇게 되겠죠?”
“...”
화폐와 재정에 대한 논의결과가 어째 군비증강으로 이어지자, 이순지와 은행장은 자기도 모르게 멋쩍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고생했다. 가봐라.”
“옙!”
드디어 연오랑의 마수에서 빠져나오자, 은행장은 반기는 기색을 애써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은행장을 뒤로하고, 이순지는 슬쩍 다가와 연오랑의 옆구리를 찔렀다.
“더 보실 거예요?”
“정신 사나운데 봐서 뭐하냐. 개요만 알면 됐지. 뭐.”
“그럼 이제 뭐하려고요?”
이순지는 “또 놀러갈 거냐?”라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고,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먼저 옮겼다.
“생각난 김에 색목인이나 보러 가자. 목장에 있지?”
“옙. 흐흐.”
이순지는 괜히 신나서 흥얼거렸고,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흘기며 한소리 하고 말았다.
“너도 어지간히 일하기 싫었나 보네.”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것도 다 위정자로서 민생안정을 살피는 거라고요.”
“퍽이나 그러겠다. 넌 다리 만드느라 바쁘잖아.”
“어차피 목장 가는 길에 새로 만든 다리가 있잖아요? 잘 관리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어련히 그러겠어.”
연오랑은 고개를 살포시 내젓고선, 어느새 앞장선 이순지의 뒤를 따라갔다.
미래의 타이베이. 지금의 남주는 미래처럼 거대한 도시가 아니다. 허나 그 형태만큼은 미래의 타이베이를 예상하며 미리미리 구역을 나눠놨다.
그런 탓에 남주를 벗어나자마자, 남주강을 따라 말끔하게 베어진 전답이 눈을 가렸다.
원주민 수만명을 동원해서 치수공사를 하고 저수지를 만든 탓에, 나름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논두렁이 이어져 있었다.
‘생각보다 말끔하고 잘 자라고 있네.’
양전사업을 거치면서 논두렁의 규격이 거의 소로에 버금갈 정도로 넓어지지 않았나.
예전이라면 지게를 지고 외줄타기 하듯 걸어야 했던 논두렁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에서 물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농부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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