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챕터54. 살펴보다 (5)
방금 말했듯 유럽은 목축업이 발달한 지역이니, 당연히 나라를 막론하고 가축시장도 발달해 있을 터.
온갖 종류의 가축을 가져와서 선을 보였겠지.
여전히 각궁을 만드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조선이니, 관료들은 물소보다 더 우람한 뿔을 가진 롱혼을 보고서 눈이 뒤집혔을 거다.
게다가 물소보다 추위를 잘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견딘다고 하니, 이걸로 물소를 대체할 수 있지 않나. “이건 못 참지!”라면서, 어떻게든 대량으로 구매해서 조선으로 보낸 걸 테다.
“맞냐?”
“예. 저 녀석들만 온 게 아니고, 다른 품종도 들여왔습니다. 여섯 품종을 들여왔는데, 각기 다른 지방에서 개량한 품종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김새도 확실히 다르다고 하더군요.”
“오...”
‘잠깐. 이 시대에 젖소가 있던가?’
연오랑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뜩 떠오른 생각에 되물었다.
“혹시 젖이 많이 나오는 소도 있었냐? 칡소처럼 얼룩무늬를 한 소 말이야.”
“글쎄요... 얼룩무늬를 한 소는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젖이 더 많이 나오는 소는 모르겠습니다. 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많이 나오는 품종이 있다고는 했습니다.”
“그런가.”
‘역시 아직은 아닌가 보네.’
연오랑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미래에는 홀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젖소 품종이 따로 존재하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그렇게까지 품종개량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
그렇다고 해도 작게나마 차이가 난다는 건, 앞으로 조정이 관심을 갖고 개량을 거듭하면 젖소가 나올 확률이 있지 않겠나.
“헌데... 젖소라는 게 있긴 합니까?”
허나 축산부 관원은 연오랑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답을 하면서도, 의구심을 숨기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
이 시대의 상식으론, 말이 안 되기 때문.
소젖은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나오는 건데, 송아지가 먹고도 남을 정도로 젖이 많이 생성되는 건 이상하지 않나.
더불어 젖이 나오기 위해선, 쉬지 않고 새끼를 계속 낳아야 한다는 말인데... 그럼 소를 가지고 일을 못할 것 아닌가.
이 시대의 조선인들에게 소는 곧 농우라는 관념이 깊게 박혀 있어서, 다른 쪽으로 생각하는 건 쉽지 않았다.
“개량을 하다보면 나오지 않겠냐? 사시사철 수유를 하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 양을 조금이라도 늘릴 순 있겠지.”
“예...”
연오랑의 말에 뭔가 큰 숙제를 받은 것 같아, 축산부 관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말이 쉽지. 저게 쉽게 될 리가 있나.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감도 안 잡힐 거다.
“걱정마라. 당장 하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아마 수십세대는 거쳐서 개량을 해야 되지 않을까? 언젠지 모를 미래에는 그렇게 될 거라는 거고, 지금은 그냥 전처럼 농우로 쓰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관원은 그제야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분위기를 풀겸, 연오랑은 축사를 쓱 훑어보고선 화제를 돌렸다.
“긴뿔소 말고 다른 품종은 없는 것 같은데?”
“일단은 본토와 북방에서 키우고 있습니다. 조선소와 교배도 함께 하고 있고요. 다만 이곳에는 혹시나 물소와 교배가 될까 싶어서, 긴뿔소만 몇 마리 보내왔습니다.”
“아...”
‘하여간.’
역시나 활에 미친 민족답게, 이렇게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는 모양이다.
“소를 데려왔으면, 말도 데려왔겠지?”
“덩치가 우람한 농마와 짐마를 데려오긴 했는데, 아직 이곳으로 보내진 않았습니다. 본토에서 먼저 시험을 하는 중입니다. 애매한 면이 없지 않아 있어서요.”
“어떤?”
“그게...”
그의 반문에, 축산부 관원은 열심히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농법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일인데, 동아시아에선 소를 보통 농사에 쓰지 않나.
그렇다보니 짐마까지는 이해해도 농마는 솔직히 낯설었고, 말은 소에 비해서 발목이 약한 편이라서 힘을 쓰는 일에 쓰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괜히 농마의 덩치가 전마에 비해서 큰 게 아니다. 녀석들은 뼈대 자체가 굵고 힘을 쓰기 좋게 개량되었기 때문이지.
허나 그래도 소보다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게 사실. 해서 “소가 더 낫나? 농마가 더 낫냐?”를 놓고, 본토에서 시험하는 모양이다.
“땅이나 지형에 따라서도 쓰임새가 달라질 테고?”
“물론입니다. 먹이풀부터 차이가 나니까요. 하지만 또 범용성은 농마가 나은 부분도 있어서... 제 사견이지만, 앞으로는 둘 모두 키우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전을 하는 남방에선 소를 더 키우고, 밭을 많이 일구는 북방으로 갈수록 농마를 더 키우고?”
“아마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일리가 있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곳에 굳이 농마를 보내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겠네?”
“그렇습니다. 더불어 남주도에선 어차피 물소를 많이 키워야 하지 않습니까? 굳이 농마에게 물소의 자리를 넘겨줄 필요가 없지요.”
“음.”
물소뿔은 각궁의 재료가 되니, 무조건 많이 키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차피 키울 거, 말이 할 일도 물소로 대체해서 수지타산을 맞추겠다는 계획이지.
‘말은 됐고. 다음으론 양이나 염소 인데... 이건 문제가 덜 되겠네.’
지금 조선에 들어온 양이나 염소는 대부분 몽골에서 유입된 가축들이다. 중앙아시아나 유럽산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거고, 설령 난다고 해도 그 쓰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거다.
‘양털이 더 많이 나오는 품종도 있겠지만, 어차피 데려와서 키우다보면 알아서 되겠지.’
마사를 넘어 계속 걸음을 옮겨갔고, 두서없는 상념도 부유물처럼 이리저리 떠다니기 시작.
‘이젠 깊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려나?’
생각을 하다보니, 문뜩 이런 결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개혁 초창기에 몽골과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급성장을 이룩한 이후부턴, 그가 딱히 앞장서지 않아도 조선관료들이 알아서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의 기술과 문화를 뽑아먹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서 눈에 띌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이걸 거부할 백성과 관료가 몇이나 될까.
‘전통문화를 고수하려는 이들도 분명히 있지만... 조정이 나름 잘 거르고 있는 것 같고.’
무분별하게 외국문화를 받아들이면 문제가 터지겠지만, 지금 조선은 조정의 지도하에 이미 한차례 걸러내서 체내화 시킨 기술과 문화를 민간에 퍼트리는 상황.
사회가 혼란해질 정도로 무절제하게 퍼져나갈 일은 없어보였다.
애초에 중앙집권을 위해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기 발등을 자기가 내리찍는 무식한 짓을 하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사실 전통문화라고 해봐야... 이 시대에 다른 점이 뭐 얼마나 있겠어.’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웃고 말았다.
열병기가 주력이 되고, 농사를 비롯한 1차산업에서 벗어나고, 기술력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야 문화의 차이도 크게 벌어지는 거다.
사실상 조선이나 중국, 몽골이나. 별세계에 떨어진 것마냥 엄청난 차이가 나는 건 아니고, 그게 설령 중앙아시아나 유럽으로 가도 마찬가지.
최고위층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먹고 살길을 걱정하는 게 보통 아닌가. 저들의 낯선 문화와 기술이라고 한들, 부정되는 것보다 긍정되는 부분이 훨씬 많지.
‘게다가... 근본성리학이 완전히 무너지고 자본유학이 기조가 되어가고 있잖아? 앞으로는 더욱 개방적으로 변하게 되겠지.’
흔히 생각하는 조선문화라는 건, 대부분 근본성리학에서 출발했고 조선왕조가 유지되면서 수백년동안 축적되어 뿌리박힌 거다.
허나 그 출발점 자체가 이미 비틀렸으니, 원래 역사의 조선처럼 변해갈 일은 절대 없다.
오히려 자본유학으로 말미암아 돈과 기술이 중심이 되어간다면, 멈추는 순간 도태된다는 건 모두가 알 게 될 터.
결국 성장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화 시키는 기조로 나아가지 않을까.
‘그러니...’
이렇게 물꼬가 트인 이상.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 그가 개입한다고 해서 뭔가 엄청나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 놀고먹겠다는 속편한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계속 옮기자, 드디어 이곳에 온 목적을 만나게 됐다.
저기 축사와 떨어진 막사 근처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으니까.
땅에 무지개가 핀 것 마냥, 머리칼이 형형색색을 하고 있어서 못 알아보기도 힘들다.
“저기로 가자.”
“...?”
식사라도 하는 걸까?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닥불 근처에 모여 있는 관원들 쪽으로 걸어가자, 축산부 관원은 화들짝 놀라서 먼저 발걸음 옮겼다.
“대감!”
“...!”
연오랑이 들이닥치자, 축산부 관원이 미리 말을 해줬는데도 가볍게 난리가 났다.
철푸덕.철푸덕. 색목인 셋은 흙바닥에 아랑곳 하지 않고 넙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고, 몇몇은 허리가 접힐 듯이 머리를 숙였고, 또 몇몇은 작게 목례를 했다.
‘이게 뭔 개판이야.’
“...”
“크큭.”
그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이순지를 바라봤고, 녀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과거. 연오랑이 착호군을 막 만들던 시기.
그 시절엔 윗사람을 대하는 예법이라는 게 명확하지 않았고, 군례로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연오랑은 근본도 없는 미래의 경례방식을 군례로 만들었다.
신분, 출신, 고향, 재산유무 등을 전부 무시하고, 오롯이 계급에 대해서 예를 취하는 방식을 밀어붙인 거지.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가 이에 대한 편리함과 간편함에 홀려 급속도로 전파됐고, 결정적으론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됐다.
군부에 들어온 이상. 양반자제도 천민에게 경례를 해야하는 데, 이 여파가 없는 게 말이 되나.
이러한 여파는 고스란히 조정으로 흘러들어갔다.
태종과 세종은 안 그래도 신분제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고, 조정관료들이 신분, 출신별로 파벌을 만드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더불어 관원들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고, 지방향리 및 천민출신인 잡직관원까지 정식관원이 되는 상황.
관료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어색할 수밖에 없고, 기존의 예법은 품계마다 제각각이라서 복잡해도 너무 복잡하다.
그러니 군례의 방식을 불러와서, 그냥 가볍게 목례만 하는 방식으로 모든 예법을 통일시켜버린 거지.
헌데 이들은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 난리법석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순지 입장에선 웃길 수밖에.
저렇게 오체투지를 하는 걸 얼마 만에 본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빨리 일어나라. 밥상 앞에서 먼지 날리게, 이게 뭔 짓이야?”
그가 축산부 관원에게 가볍게 핀잔을 주자, 그는 엎드려 있던 이들을 황급히 일으켜 세웠다.
“교육 제대로 안 시키냐?”
“죄송합니다. 아직 익숙해지지 못해서 말입니다.”
축산부 관원은 송구함을 담아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색목인들에게는 눈을 부라렸다.
‘하긴... 생각해보면, 저러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네.’
그는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에게 손짓하곤, 간이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조선은 신분제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약해졌지만, 전세계의 모든 나라는 정반대 아닌가.
색목인이라고 해서 다를 건 전혀 없고, 오히려 이쪽이 더 살벌할 지도 모른다. 여긴 무력을 가진 기사나 무사, 영주가 권력자이니, 수틀리면 영지민과 농노를 갈구는 게 일상이니까.
그들 입장에서 보면 연오랑은 부마고, 부마는 곧 왕족. 감히 쳐다보지 못할 높은 신분이니,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단 눈을 내리깔고 본 모양이다.
“다들 앉아라.”
“...”
어색하게 다시 엉덩이를 붙이자, 호위기병이 얼른 몸을 날려서 이순지와 연오랑 앞에 밥그릇과 수저를 대령했다.
“...”
‘흐음.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그러는 동안, 연오랑은 마주보고 앉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색목인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다들 잘 먹고 잘 지냈는지 낯빛도 좋고, 뼈마디가 튀어나온 곳도 없어 보인다. 피부병도 딱히 없는 것 같고, 이곳에 와서 억지로라도 열심히 씻었는지 고약한 체취도 풍기지 않았다.
‘상태는 괜찮아 보이네.’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전체적으로 살펴봤다.
머리칼은 갈색과 붉은빛이 도는 흑색도 있었지만, 옅은 금발을 한 이도 있었다.
‘생김새로 봐선 어디서 왔는지 구별도 못하겠네. 슬라브족도 금발이 있던가.’
미래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하도 옛 기억이라서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는데, 이들도 살짝 낯설다. 검은 머리칼을 하고는 있었는데, 생김새는 색목인을 더 닮았으니까.
“너흰 어디서 왔냐?”
“저흰...”
연오랑이 옆을 지목하자, 아까 허리를 굽혔던 이들이 떠듬거리며 조선말로 답을 했다.
‘오? 중앙아시아 출신도 오나보네?’
손짓발짓을 하며 대답을 들어보니, 저들은 루스인이 아니라 킵차크 칸국으로 여기저기서 흡수당한 튀르크 인이었다.
“너흰 어디서 왔냐? 루스 출신이냐?”
“예.”
“노바로크에서 왔습니다.”
“저는...”
이들 또한 아직 조선말에 능숙하지 않지만, 단어를 이어붙이는 정도는 할 수 있는 법.
더듬거리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풀어놨다.
‘허?’
헌데 답을 듣고 보니 놀랍다.
“키예프 근처라고?”
“그... 그렇습니다.”
연오랑이 무심코 되묻자, 답을 한 색목인은 화들짝 놀라서 다시금 고개를 넙죽 숙였다.
“호오...”
‘이야. 이거 봐라?’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홀로 턱을 쓰다듬으며 작게 감탄을 표했다.
미래에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되는 키예프는, 과거에 루스국의 중심이었던 도시였다.
다만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박살났고, 지금은 킵차크 칸국을 몰아낸 리투아니아가 관리하는 도시가 되어 회복중인 상태였지.
연오랑이 놀란 점은, 키예프는 드네프르 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도시고 우크라이나 지역의 한복판에 위치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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