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챕터54. 살펴보다 (6)
‘한마디로 킵차크 칸국의 약탈대가 우크라이나 중부까지 휩쓸고 다녔다는 말이잖아? 교류가 시작된 지 몇 년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래?’
그는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놓고서, 속으로 작게 혀를 내둘렀다.
킵차크 칸국은 노예무역의 맛을 보더니, 미친 듯이 들쑤시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지주와 영주는 죽이고, 마을과 도시민은 전부 이주당한 거냐?”
“예...”
“그렇습니다.”
연오랑이 아픈 기억을 헤집어서 일까? 그들은 살짝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학살은 없었을 거고... 가족들 모두 함께 끌려갔겠지?”
“대부분 그렇습니다.”
“저희 마을도 마을주민 전체가 이... 이주 당했습니다.”
“음.”
그들은 조선말과 함께 몽골말을 섞어가며 더듬거리며 답을 늘어놨다.
‘흐음. 확실히 땅 욕심을 버린 모양이야.’
우크라이나 중부지역에 위치한 키예프는 킵차크 칸국에서 멀어도 너무 멀고, 리투아니아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다.
여기를 정복해서 통치하려고 하면, 혼자 너무 돌출되어 전선이 중구난방이 되기 십상. 아무리 그들이 기병 위주의 편제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전쟁과 통치는 엄연히 다른 법 아닌가.
거긴 차지해서 유지하는 게, 오히려 손해인 지역이지.
‘그 말은 소규모 약탈대를 사방으로 보내서, 도시와 마을을 정복하지 않고 그냥 사람만 죄다 잡아오고 있다는 뜻이겠지.’
“누르알딘이 우리의 조언을 퍽 귀담아 듣나 본데?”
“예? 누구요?”
연오랑이 작게 혼잣말을 하자, 이순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귓속말을 날렸다.
“주치칸국의 칸 말이야. 우리의 조언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내륙 한복판에 살던 저들이, 저렇게 몸 성히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말이지.”
“아아...”
이순지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한두해만에 전례 없던 성과를 냈잖아요? 돈강과 드네프르강 일대를 새롭게 개간해서 수확을 거두어들였을 거고, 그걸 팔아서 재미를 꽤 봤을 테니까... 우리의 제안에 더욱더 확신을 가졌겠죠.”
“그렇겠지...”
‘전혀 겪어보지 못한 체제인데도 잘 적응하는 걸 보면, 확실히 역사에 남을 정도의 인물은 맞는 것 같네.’
연오랑은 저 멀리에 있을 누르알딘을 떠올려봤다.
사실 조선의 제안은 기존 킵차크 칸국 및 유목민족이 대대로 추구해오던 가치와는 매우 달랐다.
예전이라면 도시나 마을을 공격해서 저항의지를 꺾어놓고, 그들로부터 세금 및 조공을 뜯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간접통치 방법을 택했기에, 무한정으로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영향력을 넓혀갈 수 있었지.
허나 조선은 정반대로, 땅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고.
그들을 한 곳에 밀집시켜,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행정체계를 구축해 농업사회로 나아가는 게 중앙집권에 좋다고 조언했다.
그 결과가 바로 연오랑의 앞에 있는 이 색목인들이다.
만약 전처럼 행동했다면, 이들은 여기에 오기도 전에 죽었거나 혹은 고향땅에 그대로 살면서 고된 세금에 착취를 당했을 거다.
‘애들이나 노인까지 살려서 잡아온 걸 보면, 더욱 확실하겠지.’
“흐음...”
“...”
연오랑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이순지는 호위기병들에게 눈짓해서 식사거리를 준비하게 시켰다.
얼떨결에 밥상머리에 끼게 된 이들이지만, 밥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나. 다들 기민하게 움직여 이런저런 반찬을 꺼내왔다.
“올해에 색목인 포로들이 몇이나 왔다고 했지?”
“글쎄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매달 천에서 이천명정도가 온 걸로 아는데요.”
“천에서 이천이라... 너희. 출발할 때 어땠지? 마을주민 별로 모여서 이주했냐? 아니면 마구잡이로 섞여서 이주했냐?”
“으음...”
그의 물음에 모두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이곳에 함께 있지만, 이들이 조선에 온 순서는 천차만별이었다. 북방신도시에서 조선화교육을 받고, 가장 적응을 빨리한 이들부터 추려서 본토와 남방으로 보냈으니까.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들이, 더듬거리긴 하지만 조선말과 몽골말을 얼추 할 줄 아는 이유가 이거였지.
“저희 가족의 경우에는 마을 전체가 함께 움직였습니다.”
“저희는 모굴칸국에서 합류했습니다.”
“저는...”
이내 곧 기억을 가다듬었는지, 연오랑의 눈빛을 받고 한사람씩 자신의 사연을 풀어놨다.
아니나 다를까. 통일되지 않고 전부 제각각. 그나마 공통점이라면 가족단위로 이주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는 점이다.
“소칸국들도 우리 제안을 잘 따르는 군?”
“그야 당연하죠. 주치칸국이나 모굴칸국은 덩치라도 크니까 눈치를 적게 봐도 되지만... 소칸국은 자생하는 게 힘드니, 사정이 전혀 다르죠. 아국과 거래하는 상인이 한둘이 아니니, 밉보이면 자신들만 손해죠.”
“그럼 말이야. 창주에 도착한 인원이 그 정도면... 출발할 땐 몇이나 됐을까?”
“전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대충 6배수 정도가 출발했다고 했을 걸요? 다만 소칸국에서 얼마나 이탈했는지 알 수 없어서, 정확한 건 아닐 겁니다.”
이순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신 없는 투로 답을 내놨다.
“개별적으로 보내서 그런 거지?”
“네. 주치칸국에 나가 있는 아국 관원들은 장인을 비롯해서 특별한 이들만 관리하고 있잖아요? 일반 농노출신까지 전부 파악하는 건 힘들 거예요. 사실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흐음...”
‘애매하네.’
킵차크 칸국과 조선은 멀어도 너무 멀어서, 상단을 이끌고 직거래하는 상인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칸국의 거점도시를 개발하고, 거점 기반의 지역상인을 성장시켜서, 하나의 유목민족국가로 통합되는 걸 막는 것이 숨겨진 대계 아닌가.
그렇다보니 동방물산을 색목인 노예와 교환하는 건, 지역 상인끼리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거기에 소칸국도 색목인 노예를 흡수해서 백성으로 삼고 있으니, 얼마만큼의 노예가 빠져나가는지는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섬서몽골로 흘러가는 인원도 적지 않을 테고?”
“그쪽은 우리와 경쟁하고 있잖아요? 지역 상인들은 입맛대로 움직일 테니까... 정확히 파악하긴 힘들겠죠. 그래도 아국물산이 뛰어나니, 아국으로 더 많이 오지 않을까요?”
“음.”
섬서몽골과 오이라트가 성장하기 위해선 사람이 필요한데, 중국내륙의 한족을 약탈하는 건 힘들어지지 않았나. 헌데 약탈전쟁을 하자니, 비단길을 따라 소칸국들과 전부 손을 잡은 상황.
그들 입장에서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선 색목인 노예를 사들이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고, 나름 호객행위를 하며 상단을 하나라도 더 끌어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주치칸국이 흡수하고 있는 인원도 파악하기 힘들지?”
“예. 그것까진 저희가 조언할 순 없으니까요. 주치칸국의 조정은 지방호족과 부속부족들의 약탈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했잖아요? 그치들이 조정에 팔아넘기는 인원도 있겠지만, 자신의 영지로 데려가는 인원도 적지 않을 텐데... 그것까지 파악하는 건 힘들죠.”
“그렇겠지.”
“그리고 티무르 칸국을 통해 팔리고, 사들이는 인원도 빼놓으면 안 되죠.”
“끄응.”
또 튀어나온 변수에, 연오랑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조선이 킵차크 칸국과 티무르 제국의 화친을 제안한 후. 둘은 큰 신경전 없이 손을 잡았다.
모두가 이득이 되는 방향이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추측과 예상대로 확실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예상보다 커진 시장이 있다면, 바로 노예시장.
티무르 제국도 인도물산을 사오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킵차크 칸국에서 사들인 노예를 파는 게 상대적으로 돈이 적게 들었으니까.
‘듣기론 이것 때문에 일이 살짝 꼬였다고 들었는데... 잘 해결되는지 모르겠네.’
연오랑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보고서를 떠올리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봤다.
킵차크 칸국이 노예를 사들인다는 소문은 쫙 퍼져나갔는데, 진짜 노예시장의 터줏대감은 중동과 인도 아닌가.
북인도의 소국들은 오스만제국이나 중동으로부터 카톨릭을 믿는 유럽노예를 사들여서 티무르 제국에 팔았고, 거꾸로 티무르 제국 또한 킵차크 칸국에서 사들인 노예를 인도에 내다팔기 시작했다.
어차피 노동력으로 써먹을 똑같은 인력을, 쓸데없이 이리저리 옮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예들이 쌍방향으로 많이 돌아다닐수록, 노예상인과 노예시장은 돈을 벌 것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상인이 많이 돌아다닐수록, 그들을 뒷받침해줄 다른 업종 또한 성장하는 거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파악하기 힘든, 애매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스만제국으로 흘러갈 노예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일 거다.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기는 한데...”
“...?”
“이 모든 변수를 다 합쳐서 대충 계산하면, 킵차크 칸국으로 끌려오는 루스인이 몇이나 될까?”
“글쎄요... 가장 최근에 들어온 장계에 따르면, 아무리 못해도 작년에만 4만명쯤 흡수했다고 했으니까... 실제로는 더 많겠죠.”
“음.”
‘그럼... 올해에만 최소 10만명쯤은 뜯어냈다는 거군. 재작년, 작년까지 합치면... 장난이 아니겠네.’
연오랑은 그리 계산을 하고서,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이 추세가 십년만 유지 되도, 백만명이 넘는 되는 인구유출이 벌어진다. 비단길이 안정화될수록 그 수는 더욱 늘어나겠지.
안 그래도 인구밀도가 낮은 루스국인데, 그쯤 되면 나라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지지 않을까.
‘러시아제국이 등장하는 건, 확실히 막을 수 있을 것 같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조선의 번영을 위한, 숨겨진 목적 중 하나가 완성되고 있으니까.
러시아제국이 성장한 건, 앞으로 백년도 훨씬 지난 후. 개인화기가 보편화되고 나서부터다. 거기에 그때쯤 되면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일대는 큰 세력이 없는 무주공산이 된다.
반대로 유럽에선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지.
한 마디로, 쓸모도 없는 동토의 대지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 빈집털이를 해서 성장한 건데... 애초에 사람이 없으면 뭔 수로 성장을 하겠나.
‘결국 킵차크 칸국이 루스인을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가 될 거고, 모스크바 공국은 껍데기만 남은 지방소국으로만 남게 되겠지.’
이렇게 끝없이 루스국을 약탈하더라도, 킵차크 칸국은 모스크바 일대를 직접 점령해서 다스리긴 힘들 거다.
옥토가 넘쳐나는 우크라이나 일대도 개발이 안됐는데, 뭐 하러 동토의 대지까지 올라갈까. 아마 모스크바 공국은 먹잇감으로 삼아서, 빈사상태로 남겨두겠지.
결국. 세력의 중심지가 모스크바가 아닌 흑해일대로 내려오게 되는 거니,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유럽의 판도를 뒤바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 여기까진 좋고...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건, 킵차크 칸국이 원래 역사의 러시아제국처럼 동진을 하는 건데...’
연오랑은 김이 날 정도로 바쁘게 머리를 굴려봤다.
다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럴 가능성은 적어보였다.
‘킵차크 칸국은 무한정 성장할 수 없을 거야. 티무르 제국과 오스만 제국과 너무 깊게 엮여버렸어.’
아까 말했듯 러시아제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다른 나라들의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힘을 키웠기 때문인데... 킵차크 칸국은 거꾸로 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킵차크 칸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어찌됐건 오스만제국을 향한 포위전선에 합류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원래 역사처럼 동로마제국이 망하는 건 없던 일이 됐고, 오히려 끝도 없이 오스만제국 및 이슬람세력과 경쟁해야하는 상황.
이 판국에, 동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상태로 계속 개발을 이어간다면, 필연적으로 우크라이나 일대를 먹게 되겠지.’
씨만 대충 뿌려도 알아서 잘 자라는 옥토를 놔두고, 뭐 하러 척박한 북쪽과 동쪽으로 진출할까.
킵차크 칸국은 북쪽의 루스인들을 납치해서 꾸준히 우크라이나를 집어삼킬 거고, 결국엔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와 부딪치게 될 거다.
이렇게 동유럽세력과 한번 부딪치기 시작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되는 꼴.
옥토지대는 절대 포기할 순 없으니, 꺾이든 꺾든 양자택일의 문제만 남을 거다.
‘그리고... 발칸반도도 문제가 되겠지.’
호재 아닌 호재는 하나 더 있다.
지금의 발칸반도 왕국들은 오스만제국의 속국이지만, 대포위망이 유지될수록 분리 독립을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결국 이들도 손을 잡아야 할 세력이 필요해질 거고, 아마도 동로마제국을 비롯한 동유럽세력 혹은 위에 붙어 있는 신성로마제국과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반대로 동쪽의 킵차크 칸국과 이어질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잖아?’
어찌됐건 킵차크 칸국이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순간, 이 또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꼴.
역시나 동쪽에는 관심을 접을 수밖에 없다.
‘그럼 이 상태는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겠네. 좋아.’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서 짝! 가볍게 박수를 쳤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들이 괜히 놀라서 몸을 떨었다.
“여기 생활은 어떠냐? 전보다 나아졌지?”
“...”
연오랑이 뜬금없이 화제를 돌려 묻자, 모두는 다시금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뭐라 말을 하긴 해야 하는 데 어떤 의도로 묻는지 몰라서, 서로 눈알을 굴려대며 눈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