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16화 (416/538)

416. 챕터54. 살펴보다 (8)

조선은 서방의 모든 걸 다 긁어오고 있지 않나.

묘목부터 열매와 씨앗까지.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다른 부서의 관원은 뭐가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오는 길이 오죽 먼가. 오다가 말라죽는 경우도 많고, 조선에 들어왔어도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다반사.

다른 부서 관원은 충분히 모를 만하다.

‘그래도 심긴 심었을 거야. 서방에서 대표되는 기름인데, 대충 흘러 넘길 순 없었겠지. 그리고... 아참. 그게 있었네.’

연오랑은 올리브 나무를 연상하다가, 자연스럽게 다른 나무가 떠올랐다.

동남아시아에도 올리브나무만큼 유명세를 떨치는 나무가 있다.

“기름야자 나무는 어떻게 됐는지 아냐?”

“그건 알죠. 참파의 조차지에서 잘 크고 있고, 남주도와 해주도(해남도)에서도 재배 중입니다. 결과는 아직 안 나왔고요.”

연오랑의 의문을 풀어준 건 이순지. 녀석은 도시설계를 담당하면서 경작지 분리도 함께 했던 터라, 이건 알고 있나 보다.

“그래?”

“예. 어르신이 엄청 닦달했잖아요?”

“그랬냐?”

“네.”

녀석은 ‘자기가 말했으면서 벌써 잊어버렸냐?’라고 말을 하듯, 슬쩍 눈을 흘겼다.

기름야자나무에서 채취하는 기름은, 미래에 팜유라 불리는 물건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미래에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일궈서 엄청난 양을 수출하는 중요한 식용기름 중 하나가 된다.

연오랑이 이걸 놓칠 리가 없고, 남방에 진출하면서 당연히 수소문했는데... 천만다행이도 운이 좋았다.

이미 이 시대에도 흔히 사용하는 기름이라서, 재배법이나 추출법을 맨땅에 헤딩하면서 알아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참파의 조차지는 땅이 남아돌잖아요? 당연히 밭을 일궜는데, 나름 꽤 쏠쏠한 수확을 챙기고 있죠. 참파나 남방소국에서도 우리가 기름야자유에 눈독을 들이는 걸 알고서, 수출하려는 모습도 살짝 보이고요.”

“벌써?”

“참파는 우리한테 팔게 없어서 난리인데, 당연히 관심을 보일 수밖에요. 흑차(커피)는 아국이 단속하고 있어서 욕심을 못 내지만, 기름야자나무는 자기들이 쓰던 거니까요.”

“흐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다. 목재도 팔아먹는 데, 기름을 못 팔 건 뭔가.

“다만 아국에 내다팔 정도로 밭을 일구는 건 시간이 꽤 걸릴 거라서, 지금 당장 들여오는 건 힘들 거예요.”

“그렇겠지.”

‘이건 어쩌면 미래랑 비슷해 질수도 있겠네. 아닌가. 역사를 당겨오는 걸지도.’

이들도 먹고살 만큼만 재배하는 거지, 이걸로 돈을 벌 생각은 못했지 않나. 훨씬 이른 시대에, 팜유가 널리 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밥 먹다 말고, 갑자기 기름은 왜요?”

“그냥 떠올라서 말이야.”

“흐응.”

연오랑이 상념의 줄기를 잡고, 삼천포로 빠지는 걸 한두번 봤나.

이순지는 ‘또 쓸데없는 생각을 했고만?’하고서 흘러 넘겼지만,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축산부 관원은 혹시나 싶어서 한마디 곁들였다.

“그... 기름이라면, 제가 아는 것도 있습니다.”

“...?”

“요샌 면실유하고 양털기름도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곳 남주도에서도 뽑아내고 있고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여기도 면직기업이 들어섰으니까, 이제 슬슬 성과가 나올 때가 됐네요.”

연오랑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고, 이순지가 양념을 쳤다.

‘그러네? 여기서도 목화밭을 일궜잖아? 이젠 티가 날 정도로 많이 나오겠어.’

면실유는 목화씨에서 뽑아내는 기름으로, 예전부터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다만 전과 달리, 양전사업을 통해 목화밭 자체가 엄청나게 불어나지 않았나. 당연히 면실유의 생산량도 늘어났지.

물론 다른 기름에 비하면 아무 맛도 안 나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는 기름이 늘어난 게 어딘가.

양털기름의 생산량 또한, 양목장이 늘어감에 따라 덩달아 상승했다.

양털은 기름성분이 많아서 방수능력이 뛰어난데, 증기에 찌는 과정을 통하면 양털에 묻어 있는 기름을 채취할 수 있었다.

예전 조선에선 양을 많이 기르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지만, 서방에선 흔히 써먹고 있는 방법이었지.

게다가 돈이 많이 들거나 어려운 것도 아니다.

모직기업에서 양털을 실로 만들기 위해선 세척이 필수지 않나. 어차피 씻는 김에 증기로 찌는 과정을 추가하면 되니, 어찌 보면 모직기업의 부가수입이 된 꼴.

이건 식용기름도 아니고, 냄새가 고약하긴 한데... 무구를 정비하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기름이 없었다.

서방에선 이미 그런 용도로 쓰고 있었고.

‘여기에 아마까지 제대로 재배되기 시작하면, 아마씨 기름도 얻을 수 있겠지.’

이것도 이미 서방에서 써먹고 있는 기름이니, 그리 어렵지 않게 기술을 흡수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기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또 한번 변혁이 일어날 거야.’

그가 기름에 목을 매는 건, 다름 아닌 비누 때문.

우연한 발견으로 비누를 만들어냈고, 그간 연구를 거듭하면서 이젠 팔아먹어도 될 정도의 품질을 가진 비누를 완성했다. 처음 발견하는 게 어렵지,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까.

용연현에는 연구실 수준을 넘어서는 비누기업이 만들어졌고, 첫 시제품이 만들자마자 왕실에 진상.

목욕문화가 완전히 자리 잡은 왕실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잘 씻는 게 건강과 장수의 비법이라는 건, 이제 조선인의 상식으로 뿌리내린 상태. 몸을 청결하게 해주는 건 물론, 은은한 향까지 묻어나오니 이걸 싫어할 리가 없었지.

다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도, 초창기의 문제점은 해결하지 못했다.

먹을 기름도 없어서 온갖 기름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 판국에, 비누를 만들 기름이 충분할 리가 있나.

폐기름으로 만들 수 있다지만... 그것도 폐기름이 많이 나와야 수지타산이 맞는 법이라서, 지금의 비누는 비싸도 너무 비쌌다.

시시때때로 써야할 소모품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아껴 써야 했지.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기름이 생산되면 사정이 조금 바뀌게 될 거고... 비누 가격이 떨어져서 민간에서도 흔히 쓰이게 되면, 위생에 있어서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 펼쳐지겠지.’

미래에는 발에 차이는 비누라지만, 인류의 위생 상태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위대한 발명품 아닌가.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질병의 감염은 다 막아낼 수 있을 거다.

‘흐음... 그건 그렇고.’

“잠깐 딴 길로 세긴 했는데... 아무튼. 별 탈 없이, 적응한 모양이네?”

“그럴 걸요? 솔직히 말해서 아국이 낯선 곳이라는 것만 빼면, 아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몇이나 되겠어요.”

“맞습니다. 대감. 남주도에서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해주도(해남도)에서도 그렇고요. 그 대단하다던 중국도 저희보다 못한 부분이 수두룩했습니다.”

연오랑이 조용히 귓속말을 날리자, 이순지와 관원은 루스인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죽이며 대답했다.

‘내 생각과는 퍽 다르단 말이지.’

그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이들을 자기도 모르게 쓱 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세계에서 살아온 세월이 꽤 되건만, 미래의 기억이 혼재되어 있는 탓에 그 혼자 이상한 착각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이 시대의 조선과 조선인은, 그의 막연한 편견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으니까.

여진, 몽골, 일본, 한족이야 뭐... 생김새도 비슷하고 엮인 역사가 깊으니, 받아들이는 데 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허나 그게 다가 아니었던 것.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잔재 때문인지, 아니면 운석핵꿀밤으로 의식구조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외모가 다른 루스인에 대해서도 개방적일 줄은 몰랐지.

조선인들은 조선말을 쓰고 조선문화를 따르기만 한다면, 생김새에 상관없이 같은 조선인취급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속으론 오랑캐라고 내심 깔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조정의 기조와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게 결코 아니었다.

‘하긴... 애초에 관원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원주민 포로를 본토에 정착시킬 생각도 안했겠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양인들까지 그런 시각으로 볼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이놈들도 그래.’

연오랑은 다시금 슬쩍, 남몰래 루스인과 튀르크인들에게 시선이 닿았다.

많이 양보해서 조선인이야 뭐... 그간 개혁을 겪으면서 워낙 많이 바뀌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이들까지 이렇게 쉽게 적응할 줄은 몰랐다.

‘내 착오였지만 말이야.’

이런 괴리를 낳은 근본적인 차이는, 이 시대엔 사람을 사고파는 게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점이다.

그걸 노비라고 부르든, 농노라고 부르든, 나아가 노예계급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사람에게 가치를 매겨 사고파는 게, 당연시 되는 세상이었다.

이렇게 사고판다는 뜻은... 이유야 어찌됐건 고향을 떠나서, 강제적으로 낯선 곳으로 가서 사는 게 엄청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거지.

특히나 루스인과 튀르크인, 코사크들에게는 더욱더 그런 경향이 보였다.

유목의 문화가 남아 있기도 할 거고.

몽골제국이 휩쓸고 지나간 후 난장판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가 농노가 된 세월이 쌓여 있는 것도 있을 거고.

코사크는 스스로를 자유민이라 칭하며, 온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특히나 이들은 수세대 동안 약탈당하는 일을 겪었기에,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그리 크지 않았지.

‘다만 그 낯선 곳이 근처가 아니라, 이억만리 떨어진 조선까지 오는 건데... 그럼에도 반발이 크지 않단 말이지.’

허나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이것도 이들 입장에선 그리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슬람세력권으로 끌려가는 거나, 아예 알지도 못하는 조선으로 끌려오는 거나...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대부분 카톨릭이나 정교회를 믿는 이들이니, 종교가 다른 건 당연하다. 쓰는 말도, 쓰는 글자도, 법과 문화도, 생김새가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전부다 새로 배워야 하는 거지.

그러니 오히려 중요한 건 다른 곳에 끌려간다는 게 아니라, 끌려간 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사는지가 더 중요한 거지.

‘그런 면에서 보면, 조선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겠어?’

다른 모든 걸,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노예나 농노 취급을 안 하고, 자유민, 양민취급을 해주는 것부터 차이가 나는 거지.

여기에 나라에서 집과 직업까지 선택할 수 있게 해주고, 직접 교육까지 시켜준다? 물론 대출받은 거니 빚을 갚아야 하긴 하지만, 고향에서 살 때보다 훨씬 나은 미래가 펼쳐져 있다.

‘지내다보면 빈곤했던 고향 생각도 다 날아갔을 거고... 오히려 성공하고 자리 잡기 위해서, 더욱더 열성적으로 조선인으로 변해가겠지.’

막말로 영주와 지주, 기사가 버젓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기술을 익혔다고 관원이 되는 세상으로 왔는데... 이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여기에 가족이 전부 함께 온 것도 영향이 있었을 거고, 반항적이거나 불온한 자들이 미리 걸러졌다는 것도 영향이 있었을 거야.’

다 똑같은 사람이니, 고향을 떠나기 싫어서 격렬하게 반항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겠지. 허나 그런 이들은 킵차크 칸국이 약탈할 때, 이미 죽어나갔을 거다.

그치들은 최대한 빠르고 많이 납치해야 하는데, 이것저것 봐주면서 끌고 왔겠는가.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사정없이 박살냈을 거다.

누르알딘이 통제하는 군사들이야 중앙집권을 이룩하기 위해서 명령체계를 단호하게 유지하겠지만, 휘하의 호족이나 부족들은 유목민 특유의 잔혹한 손속을 마다하지 않았을 테니까.

추가로 조선까지 끌려오는 과정에서, 또 한차례 걸러졌을 거다.

이억만리나 떨어진 곳으로 왔으니, 그 와중에 온갖 고생을 다 했을 게 분명. 여기서도 참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반항하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망망대해나 마찬가지인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에서 도망을 쳐봐야 얼마나 쳤을까.

소칸국들 또한 통치의 편리함을 위해서, 본보기를 보이며 사정없이 쳐죽였을 거다.

이렇다보니, 상대적으로 기가 죽고 온순한 이들만 남아 조선으로 오게 된 것 아닐까.

‘아마 그렇지 않겠어? 게다가 이젠 조선의 사정도 알게 모르게 상단을 통해 퍼져나갔을 테니까... 루스인 포로 입장에서도 다른 나라로 팔려가는 것보단, 차라리 조선에 팔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

“...”

연오랑이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동안.

이순지의 무언의 눈짓을 받은 이들은, 하나둘씩 고깃덩어리를 올려 굽기 시작했다.

치익.치익 달궈진 불판위에서 고기가 오르자 먹음직스러운 냄새와 소리를 풍기기 시작했고, 조심스럽게 얇게 썰어놓은 고기를 뒤집어가며 구워갔다.

이윽고 노릇노릇하게 다 구워지자.

“드시죠?”

“오냐.”

연오랑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받았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에 고기를 감싸서 한입 크게 집어먹었다.

‘이야... 진짜 그 맛이 나네?’

그는 짭짜름하면서도 기름지고, 또 한편으론 알싸한 맛까지 나는 고기를 꼭꼭 씹어 먹었다.

이런 감칠맛을 구운 고기에서 느껴본 게 언젠지 모를 정도로, 대충 해먹는 밥치고는 상당히 맛있었다.

‘역시. 전에 먹던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고만.’

“어때? 입에 맞냐?”

“그야 당연하죠.”

“...”

연오랑이 넌지시 묻자, 이순지와 축산부 관원은 “당연한 걸 왜 묻냐?”라는 듯 연신 고기를 집어먹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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