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챕터54. 살펴보다 (10)
평범한 물산으로 중국물산과 경쟁하는 건 무리니까.
중국시장에 잠식되지 않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중국물산과 다른 뭔가 특별함이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선 중국에 아예 없는 신상품, 신제품을 등장시키는 게 최고 아닌가.
이래서 적극적으로 서방의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여, 앞서 나가려고 하는 것. 뭐... 언제가 됐건 중국이 모방을 하겠지만, 적어도 시장을 선점해서 선두자리를 굳힐 수 있는 거지.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식재료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건 꽤 좋은 선택이야.’
인삼, 전마, 사냥개, 사냥매 등과 같이 아예 대체 불가능한 특산물은 제쳐두고, 조선내부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수공예품은 중국에 수출하는 게 쉽지 않다.
허나 한번 사서 오래 써먹는 물건이 아니라, 소비재의 성격이 강한 식재료는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나.
조선과 중국의 음식문화는 엄연히 다르고, 호기심에서라도 조선 식재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법.
커피와 맥주처럼, 염장고기도 충분히 그 물꼬를 틀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 될 거다.
‘중국본토가 아닌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더욱 그러겠지.’
지금껏 동남아시아의 시장은 중국이 주름잡고 있었고, 조선이 남주도로 진출하면서 시장을 파고들려는 상황.
여기서도 조선특산품은 인기가 있지만 진짜 돈을 벌고 무역을 제대로 하려면, 포목, 약재, 수공예품 등과 같은 일상용품의 판매가 주류가 되어야 한다.
소수의 부자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평범한 다수를 상대로 장사하는 게 훨씬 이문이 많이 남고, 남방소국 백성들에게 조선이란 나라의 이미지와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으니까.
이러려면 거의 대부분의 품목에 있어서 중국물산과 경쟁해야 하는데... 이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지금껏 세계의 중심은 엄연히 중국이었고, 그만큼 중국산 상품에 대한 선호도와 명성은 높으니까.
해서 조선은 많은 물량을 직거래를 통해 거래함으로서 가격경쟁력을 갖춰 승부를 보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관의 주도하에 무역을 할 순 없지 않나.
결국 조선이 이득을 보기 위해선, 중국에서 생산하지 않는 혹은 판매하지 않는 신상품을 미끼상품으로 내걸어 관심을 일으키는 게 효과적인 거지.
‘이렇게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라도 서방의 문물을 계속 받아들이다보면... 나중에는 더욱더 직접적인 교류가 진행되지 않겠어? 그럼 원래 역사처럼 은자의 나라니 뭐니 하는 말은 나오지도 않을 거고, 서방에선 중국보다 조선의 이름이 더욱 알려지게 되겠지.’
연오랑은 먼 미래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이미 서방과 엮였지만, 앞으로는 서방상인이 조선까지 직접 올 정도로 긴밀하게 엮이게 될 터... 과연 미래가 어떻게 변하게 될 지는 짐작조차 못하겠다.
취조 아닌 취조를 하며 식사를 끝마쳤고, 연오랑 일행은 목장에서 나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시간은 많지 않나.
구름을 따라 느긋하게 길을 따라 나아갔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지나치자, 동쪽의 공업도시 및 남쪽의 남상주에서 남주로 오는 대로에 올라섰다.
“...”
쓱.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확 트인 대지를 굽어보며 계속 대로를 따라 남하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종기처럼 살포시 솟아 나온 산이 눈에 들어왔다.
한걸음에 다가가자, 아직도 공사 중인지 북적북적한 소음과 함께 개미떼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 되고 있냐?”
“누가 담당하고 있는데요. 문제없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순지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쿵쿵 때리며 고삐를 잡아채고선 앞서 나갔다. 꼭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재깍 따라잡아서 요새건설현장에 도착하자, 이순지는 침을 튀겨가며 입을 놀렸다.
“저기 보이시죠?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성벽을 세울 겁니다.”
“성형요새를 만드는 거지?”
“당연하죠. 이미 겪어 보셨잖아요?”
연오랑에 의해 성형요새의 개념이 조선에 선보인지 벌써 십년 가까이 지났고, 초창기부터 직접 성형요새를 설계해서 만든 게 이순지다.
이젠 전문가가 다 됐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해자도 만들 거고?”
“예. 안 그래도 요 옆에 강이 흐르고 있거든요. 저수지를 만들면서 해자와 연결해서 강까지 이어붙일 겁니다.”
이순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사현장을 가리키며 답을 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땅은 깊고 길게 갈라져 있었는데, 이따금씩 쾅쾅! 굉음이 들려오는 걸로 봐선... 화약을 이용해 암반을 깨부수고 있는 모양이다.
“해자를 안 만드는 건... 조금 그렇지?”
“당연하죠. 어차피 성벽을 세우려면 흙이 필요한데, 다른 곳에서 힘들게 가져올 필요가 있나요.”
“하긴.”
당연한 걸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어, 연오랑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성벽의 가장 강력한 방어수단은 해자다.
성벽에 달라붙어야 공성을 하든 말든 하는 건데, 해자가 있으면 성벽에 달라붙을 수도 없지 않나.
단순무식하게 만들었으니 이걸 극복하는 방법 또한 단순무식해서... 사람을 쑤셔 넣든, 흙을 쑤셔 넣든 해자를 메꾸는 수밖에 없는 거지.
‘흐음... 확실히 엄청나게 변하긴 했네.’
연오랑은 이순지의 뒤를 쫓아가면서, 조용히 과거를 더듬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단순히 성형요새라는 새로운 요새가 주류가 된 걸 넘어서, 조선군의 기조와 성향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조선군의 기존체제는 요충지에 진,군을 설치해 영진군이 관리하게하고, 비상시엔 영진군들을 모아 거점을 지키면서,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 중앙군이 지원하는 형태였다.
북방양계의 경우에는 수시로 여진족이 침입하니. 영진군에 더해 지역방위군이라 할 수 있는 토관을 추가로 만들어서, 보다 촘촘하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오면, 요새나 성으로 피난을 가서 수성을 하는 게 기본.
군호에 올라 있는 영진군이라고 해도 훈련을 뭐 얼마나 받았겠나. 그치들 데리고 야전을 하느니, 차라리 그나마 안전하게 성벽에 숨어서 활이나 쏘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거지국가였던 조선으로서는 그나마 재정압박을 덜면서, 강역을 지킬 수 있는 나름 효과적인 방법이었지.
허나 착호군이 등장해 활약하고, 조선의 강역이 북방으로 확장되면서... 문무관 할 것 없이, 모두가 과거의 조선군 체제로는 한계에 봉착했다는 걸 느꼈다.
중앙군, 영진군, 잡색군 등으로 나눠져 있던 편제는 둘째 치고, 방어에 중점을 둔 조선군의 대전략 및 전술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았으니까.
북방을 점령했고, 그 넓은 땅에는 점처럼 박혀 뿔뿔이 흩어진 신도시가 세워졌다.
조선본토에도 수만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는 몇 되지도 않은데, 이런 신도시 전부에 전처럼 성벽을 세우는 건 불가능한 일.
뭐... 가능은 하겠지만, 돈도 안 되는 성벽을 지어서 뭐하겠는가.
재정압박에 시달리던 조정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여진인들을 정착시켜 일을 하게 만드는 게 이득이었다.
나아가 성벽을 지어서, 도시별로 방어하면 뭐 할까.
조선본토라면 수백년동안 쌓아 놓은 성과 요새를 활용해서, 서로 연계하면서 방어할 수 있다지만... 북방은 신도시를 제외하면 전부 허허벌판이고, 서로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연계방어가 불가능하다.
수성을 기본으로 한 전략 자체가 망가진 거지.
여기에 조선을 말박이의 나라로 만들려는 연오랑의 의지가 끼어들었다.
세종과 태종은 중앙집권 및 왕권강화를 위해 강력한 상비군을 보유하고 싶어 했고, 이러려면 재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재정을 확보하려면 농경체제를 깨부수고, 새로운 기조와 체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이 때 눈에 걸린 게, 바로 자본유학과 기업 아닌가.
조선을 말박이의 나라로 만들려는 연오랑의 주장은 단순히 군대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 조선사회 전체를 바꾸려는 충격요법이자 첫 삽이나 다름없던 거지.
이렇게 수많은 목장 및 축산기업이 생겨나면서, 이에 파생되는 수많은 기업이 등장했고, 또 이에 영향을 받아 점점 조선군의 체제가 변해갔다.
착호군이라는 아주 모범적인 사례가 있으니, 이걸 좇아서 군부라는 전례 없던 군조직이 등장하게 된 거지.
이렇게 군부가 정리되자, 지금껏 고려 때부터 지탱해 왔던 수성중심의 대전략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착호군이 활약하는 걸 보면서 기병을 넘쳐나게 키웠는데, 이들을 성벽에 박아 넣고 수성에 써먹으면 손해 아닌가.
자연스럽게 기병을 활용하는 전략을 논의하며 연구했고, 이로 인해 조선군의 기조자체가 수성중심에서 공세 및 야전 중심으로 변하게 된 거지.
당연한 말이지만... 기병중심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선 조선이 말박이의 나라가 되어야 하니, 서로 이끌어주면서 시너지 효과가 나고 있었고.
이런 변화의 중심에, 바로 지금 지어지고 있는 성형요새가 있었다.
“이 대로가 남주로 올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지?”
“뭐...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이 많아서 그쪽으로도 올 수 있겠지만... 만약 다 개발된다고 봤을 때엔, 이 대로가 핵심이 될 겁니다. 여길 차지하지 못하면 남주를 공략할 수 없겠죠.”
이순지는 연오랑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했다.
‘흐음... 대만섬에 적이 상륙하려면 어차피 항구를 점령해야하니, 내륙 요새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 지어놔야겠지.’
그는 그리 생각하며, 물끄러미 요새와 남주, 그리고 그 둘을 이어주는 대로를 바라봤다.
‘결국 핵심은 도로 및 요충지의 장악이란 말이지.’
조선군의 전략이 야전 및 공세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건, 필연적으로 기병을 활용한 긴밀한 기동이 요구됐다.
곁다리지만, 이런 전략의 변화로 조선의 도로가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원래 역사와는 정반대로. 적이 오기 전에 먼저 아군이 좋은 전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기병이 더욱 빠르고 편하게 기동할 수 있는 도로가 필수적이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기병으로 선제타격을 하는 야전을 펼치는 건 좋은데... 적이 아군을 뿌리치고, 도시를 공략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껏 지어진, 그리고 앞으로 지어질 신도시에는 성벽이 없으니 기존의 방식으로 수성이 불가능한 상황.
뭐... 경계선을 구분 짓기 위해 담벼락이나 다름없는 성벽이 있긴 한데, 이건 수성전에는 없는 거라고 봐도 무방.
이걸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성형요새였다.
‘역사가 증명하잖아?’
공성을 하거나 행군을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도시 근방의 요충지를 점령하거나 도로를 점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 공성진을 만들어 놨음에도, 시도 때도 없이 뒤통수를 때리는 방해꾼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공성전을 할 때, 괜히 주변을 전부 소개 및 소각시키는 게 아니지.
‘도로도 마찬가지야. 매복작전과 보급로라는 게 괜히 생겼겠어.’
수차례의 원정을 진행하면서, 조선군은 몸으로 깨닫지 않았나.
지형이 변하지 않는 한, 대병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적이 어디로 올지도 모르면, 매복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보급 또한 마찬가지.
공성전은 하루이틀 사이에 절대 끝날 수가 없는 지루한 작전이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끊임없이 보급을 해줘야 한다.
허나 점과 점을 잇는 최단거리 및 최적의 길은 정해져 있어서, 효율을 생각하면 이걸 따를 수밖에 없지 않나.
결국 보급로가 생기는 건 기본인데... 이런 보급로를 노릴 수 있는 요새를 정리하지 않고 가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조선군은 이에 착안해서, 도시를 공성할 수 있는 요중지를 선점해서 성형요새를 건설했고, 보급로나 행군로로 쓰일 게 분명한 대로의 교차지점에도 같은 작업을 진행했다.
이로서 적은 무조건 요새를 점령하고 지나가든지, 아니면 무시하고 지나쳤다가 계속 뒤통수를 얻어맞을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본토에도 이런 성형요새가 많이 건설됐지?”
“아마 지금도 짓고 있을 걸요? 저기 보시죠.”
이순지는 냉큼 연오랑의 질문을 낚아채고선, 저쪽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연대병들을 가리켰다.
생김새가 묘하게 이질적인 걸로 봐선, 남주도 원주민 출신의 연대병들로 보였다.
아무리 작은 요새라지만 그래도 요새 아닌가. 한두푼 들어가는 게 아니니, 일반백성들을 노역으로 동원하는 건 꿈도 못 꾸는 일.
건설부 관원들이 설계하고, 건설기업이 건설기계를 동원하고, 연대병이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하는 방식으로 지어지고 있었다.
“불만은 없냐?”
“없는 건 아니지만... 크진 않을 걸요? 일을 안 하면 어차피 훈련을 해야 하는데, 뭐가 힘든지는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요.”
“흐응.”
“게다가 이건 자신들이 생활할 공간 아닙니까. 자기집 짓는 것처럼 열성적인 병사들도 있죠. 빨리 완성될수록 편한 건 자신들이니까요.”
“음...”
‘그럴 수도 있겠네.’
이렇듯 성형요새를 건설해 놨으면. 그걸 계속 써먹어야 유지보수가 되고, 수지타산이 맞고, 연대병들이 익숙해질 것 아닌가.
해서 성형요새마다 연대나 대대 하나를 주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요새 겸 주둔지가 된 거다.
이건 본토에서도 마찬가지.
조선본토에는 산을 넘는 고갯길이나 대도시로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서 생경한 성형요새가 마구 지어지고 있었고, 또 앞으로도 지어질 거다.
“이렇게 주둔지를 정해서 구역을 확정해 놨으니까, 본토의 연대병들은 지금도 열심히 훈련과 사냥을 하고 있을 걸요? 여긴 맹수가 없어서 덜하지만요.”
“겸사겸사 지리도 익히고 말이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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