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챕터54. 살펴보다 (11)
착호군과 군부가 활동하면서, 맹수 4종세트를 무자비하게 소탕하긴 했지만... 아직도 멀었다.
조선의 산은 더럽게 많고, 아무리 쓸어내고 쓸어내도 빈 사냥터를 노리고 산맥을 타고 이동해 오는 맹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
행상과 유통상인들이 넘나드는 산길은 정리가 되었지만, 꽤 많은 부분이 야생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연대병들은 주둔지 인근의 산을 돌면서 꾸준히 소탕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지.
더불어 이렇게 싸돌아다닐수록, 점점 실전형 야전군으로 바뀌고 있는 거고.
“뭐가 됐건 전처럼 산성을 짓는 것보단, 성형요새를 짓는 걸 선호할 걸요.”
“그건 당연한 말이고.”
산에 성을 짓는 것하고, 평지에 성을 짓는 걸 비교하면 되나.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대꾸를 하고 말았다.
조선이나 고려도 바보는 아니니까, 지금껏 수많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요충지마다 요새를 건설해왔다.
다만 그건 군사요새의 느낌보다는 피난용이라고 부르는 게, 오히려 맞을 정도의 산성이 대부분이었다는 점.
성형요새는 이 부분을 흡수해서 산성 옆에 자리 잡아, 위로는 기존의 산성을 아래에는 성형요새를 세워 이어붙이는 경우가 흔했다.
이왕 있는 걸 굳이 버릴 필요는 없고, 기존 산성들은 주변전장을 조망할 수 있는 입지 좋은 고지에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니까.
이렇게 산성과 연계되면 상대하는 입장에선 두배로 골치가 아파진다.
수비군은 산성을 활용해서 산을 타넘고 와서 언제든 유격작전을 펼칠 수 있지만. 공성군은 안 그래도 까다로운 성형요새에, 유사 이래로 그 흉악함을 증명해 온 산성까지 함께 포위공략을 해야 하니까.
‘그러니 요새 자체는 문제가 없고, 남은 문제는 병력인데...’
“크면 연대, 작으면 대대 하나라... 요새나 성치고는 작은 편일까?”
“글쎄요... 생각만큼 엄청 작은 건 아닐 걸요? 과거에 영진군을 운영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때는 군진마다 천명이 넘는 병사가 모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잖아요?”
“쓸데없이 군진이 흩어져 있어서 그런 거 아냐?”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든 예전에 사용하던 요새보단 나을 걸요. 지금까진 산성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것과 이건 활용도 자체가 다르죠.”
“...”
이순지는 그 시절에 꼬마라서 뭐 아는 것도 없을 텐데, 용케 아는 척을 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헌데... 틀린 말은 아니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백명 혹은 천명의 상비군이라는 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예전이라면 지휘관 급인 무관들 몇에, 징집병인 영진군 몇으로 구성되는 게 기본이었으니... 수는 비슷해도 질적으론 차이가 많이 나기 마련.
‘게다가 병종도 확실히 달라졌으니까... 목에 박힌 가시 같은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거야.’
지금 조선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상비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가상의 적국으로 상정할 수 있는 몽골, 중국, 일본 모두, 양은 몰라도 질적으론 조선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바... 만약 수성전이 벌어졌을 때, 소수정예의 유격전을 막아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거다.
“뭐가 됐든 결국 성형요새에서 공성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데... 공략하는 건 쉽지 않겠지?”
“그럴 겁니다. 이미 북방에 있을 때 지겹도록 시험을 해봤잖아요? 기병중심이든 보병중심이든, 심지어 포병이 있어도 성형요새를 공략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
이순지는 반쯤 지어진 성벽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하게 의견을 늘어놨다.
녀석의 설명을 들으며, 그는 성형요새를 두고 벌어지는 공성전을 상상해봤다.
애초에 성형요새는 발전하는 화포에 대항하기 위해 설계된 물건이다.
성벽이 흙으로 되어 있는 이상, 포탄에 파괴되긴 커녕 쏘는 족족 흙무더기를 파고드는 게 끝.
기존 벽돌,석재성벽에 비해 월등한 방어력을 보여준다.
‘그나마 기어오르는 게 가능하다지만...’
연오랑은 인부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성벽을 보며, 스스로 납득해서 고개가 내저어졌다.
당장 저 비스듬한 성벽을 세우기 위해서, 인부들은 밧줄에 몸을 매달고서 흙을 다지고 관목을 심고 있다.
쉽게 기어오를 수 있었다면, 만들 때부터 저런 묘기를 하고 있진 않을 거다.
‘게다가 성형요새에는 화포가 있지.’
연대에는 작지만 화기대가 편제되어 있고, 수성전에선 화포가 1문이라도 있는 게 천지차이를 가져온다.
안 그래도 해자 때문에 운제, 공성추, 공성사다리 등을 사용하기가 힘든데, 그런 거대한 공성병기를 끌고 오면 화포의 밥이 되는 건 당연한 말.
저기 성벽 위에 무덤처럼 튀어나와 있는 게 포진지이니, 아군은 적 포격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만 신나게 때릴 수 있지 않겠나.
‘사각도 없어.’
십자포화를 쉽게 할 수 있게 설계된 이상, 기존의 공성방식으로 덤벼들었다가는... 해자가 시체로 가득 찰 게 불을 보듯 뻔한 일.
‘내가 생각해도... 공략하기가 퍽 골치 아프단 말이지.’
결국 공성할 수 있는 방법은 대병을 동원해서 포위하고 묶어두는 건데... 조선에는 이런 요새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새마다 공성병력을 남겨두면, 정작 도시를 공략할 병력이 줄어드는 셈.
‘소수의 병력으로 포위하면...’
성형요새에 웅크리고 있는 건 강력한 기병대인데, 기동력을 활용해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이들을 쉽게 막을 수 있을까.
‘기병의 출격이나 지원을 막으려면 성형요새를 감싸는 포위망을 또 구축해야 하는데... 시간과 인력이 적지 않게 소모되겠지.’
바리케이트라 할 수 있는 녹각구조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공성군진을 감싸는 참호 등을 파야 하는데... 이건 애초에 소수의 병력으론 불가능한 공사 아닌가.
참...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쉬운 해답이 없다.
신발에 돌이 박히면, 딱 이런 기분이 들 거다.
‘그리고 이런 요새가 전국에 수십개잖아? 북방에서는 특히 더 그렇고.’
예전처럼 적이 쳐들어오면 백성들과 수비군이 요새로 모이는 게 아니라, 이젠 항상 성형요새에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조선을 공략하려는 적군 입장에선, 무조건 병력을 쪼개서 성형요새를 점령하거나 포위해가면서 나가야 하지.
원래 역사의 청나라기병들이 했던 것 마냥, 요새 수비군을 무시하고 도성으로 진격한다?
그랬다간 동등한 기동력을 가진 조선기병에게 뒤통수를 미친 듯이 얻어맞을 거고, 보급로는 완전히 작살나는 거다.
더불어 남방에 있을 병력들 또한 기병이니, 훨씬 더 기민하게 지원을 올 수 있게 될 터... 왕의 목을 한방에 따버리는 전격전을 했다가는, 오히려 독안에 든 쥐처럼 알아서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는 꼴이 되는 거지.
상비군이 주둔한다는 건. 예전 조선처럼 병력을 소집시켜서 편제 후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언제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뒀다는 뜻이니까.
‘반대로 하나하나 점령하고 온다고 치면...’
이러면 성형요새 하나를 점령하는 동안, 다른 모든 요새에 주둔하던 기병들이 한걸음에 지원 올 거다.
애초에 그러려고 조선군 체제를 바꾸고, 공세작전으로 기조가 바뀌었으니까.
결국 조선 영토로 깊게 들어오기도 전에, 한바탕 대규모 회전을 벌여야 하는데... 화포를 앞세운 조선기병과 싸운다?
결코 쉽게 승리하지 못할 거다.
이렇게 시작부터 질질 끌리게 되면, 남방에서 올라온 지원군이 속속 도착해 오히려 수적 우위를 빼앗기는 셈.
그때부턴 역으로, 조선의 역공을 막아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겠지.
‘확실히 북방의 방어체계는 잘 유지만 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남방은... 해군이 있으니까 뭐.’
혹시 모를 북방보다 남방사정은 훨씬 낫다.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화포를 주력병기로 사용하고, 완전히 전투를 위해 설계된 전함을 운용하는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
서방세력이 동방으로 진출하지 않는 이상. 해상전투에서의 우위는 절대 깨지지 않을 거고... 그 말은 바다로 부터의 본토공격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설령 해군을 피해서 조선본토에 도착해도 문제다.
군항으로 쓰이는 해군사령부나 무역항. 기타 고려,조선때부터 활용했던 수군진에는 성형요새가 건설되어 있고 또 지금도 건설하고 있다.
이 좋은 물건을 굳이 육군만 쓸 이유는 없으니까.
헌데 육상에서도 더럽게 공략하기 힘든데, 바다를 건너와 상륙작전을 펼치며 공성전을 한다? 농담이 아니라 지옥도가 펼쳐지게 될 거다.
‘특히나 해군은 육군보다 화포를 훨씬 많이 보유하고 있고, 그걸 요새마다 짱박아 뒀잖아?’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배를 해안으로 붙여 상륙하기도 전에 물고기 밥이 될 거다.
연오랑이 상념을 끝마치기 무섭게, 이순지가 마지막 설명을 풀어놨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유지보수비용이 기존 성벽에 비해서 현저히 적게 든다는 점이죠. 배수로를 만드는 것도 쉽고요.”
“음...”
‘아마 조정관원들은 이걸 가장 좋아했을 거야.’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조선에 없던 성형요새가 이렇게 성행하게 된 건, 어쩌면 이 이유가 가장 클 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으면 멀쩡한 집도 삭기 마련인데, 성벽은 더 말해서 뭐할까. 비바람이 몰아치고 세월의 풍파를 맞으면 알아서 허물어지기 마련.
지난날 조선백성들이 가장 하기 싫어했던 노역 중 하나가, 성벽보수였지 않나. 애초에 돌이나 벽돌을 깎고 옮기고 쌓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다.
그에 비해 이건, 속에 돌로 심을 채워 놓은 흙언덕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배수로만 잘 파놓고 그냥 가만히 놔둬서 시간이 흐르면, 성벽에 심어놓은 관목과 잡풀이 단단히 뿌리내리면서 더욱더 튼튼해진다.
억지로 때려 부수지 않는 이상, 그냥 지형지물이 되어 천년만년 이어갈 수 있는 거지.
수백년 후의 먼 미래에는 이게 성벽인지도 모르고, 그냥 가파른 언덕쯤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들어가시죠.”
“오냐.”
먼 미래를 상상하며 계속 걸음을 옮겨, 도개교로 나아갔다.
‘음. 역시 살벌하고만.’
슬쩍 고개를 돌려 도개교 옆을 살펴보는데... 성문에서부터 사선으로 성벽이 뻗어나가고 있고, 어딜 봐도 성벽 꼭대기의 요철무늬가 시선을 가리고 있다.
이 말은 적이 이 자리에 서 있다면, 양쪽에서 투사공격을 받게 된다는 뜻.
‘성문이 이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성문이 이런 식으로 방어가 되니까... 진짜 상대하기 답답하겠네.’
사지라는 걸 지형으로 표현하면,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되지 않을까.
“충성!”
“충성! 오셨습니까.”
그와 이순지 일행이 왔다고 미리 연락이 된 모양이다. 도개교를 건너 성문을 지나치기 무섭게, 일단의 일행이 달려와 경례를 날렸다.
쓱 훑어보니... 같은 계급장을 단 하급장교들만 몰려왔다.
“연대장은?”
“기마훈련을 나갔습니다.”
“원주민 연대병들?”
“예.”
연오랑이 묻기 무섭게, 다들 냉큼 고개를 끄덕여댔다.
남주도에서도 연대병을 모집했고, 이들은 각자 해군과 육군을 골라서 훈련을 받았다.
초창기에 남주도의 유력 촌장이나 부족 자제들을 인질삼아 끌고 다니지 않았나. 다만 원주민들이 보기에도 조선군은 퍽 괜찮은 직업으로 보였고, 신도시 개발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모집이 시작 됐다.
“훈련상태는 딱히 달라진 게 없겠지?”
“예. 뭐...”
이건 연오랑이 이미 보고서를 봐서 아는 사안.
장교들은 살짝 부끄러운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는 끄덕여댔다. 기마 훈련이 하루 이틀 사이에 안 되는 건, 당연한 거니까.
기존에 남주도에 살던 몽골계, 고려계 원주민이 있다지만 극소수다.
말을 탈 줄 알았던 그들조차도, 수백명이 한덩어리처럼 움직이는 기병훈련은 해본 적이 없고, 조선군처럼 철저하게 개인무기술을 익혀본 적도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한참 멀었지.
“그나마 해군은 사정이 나을 거고?”
“아마...”
“듣기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이들은 육군인 터라 해군 사정은 잘 모르는지, 애매모호한 대답을 늘어놨다.
‘뭐... 본토와 마찬가지겠지.’
전에도 해군을 모집할 때, 여진이나 몽골계보다는 일본계나 한족출신이 많이 모여들지 않았나.
여기도 딱히 다를 건 없을 거다. 해안가와 강가에 살던 이들은 쪽배를 타고, 낚시하면서 먹고 살았던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오냐.”
척하면 척. 누가 눈짓을 하기도 전에 장교 중 선임이 앞장서서 요새 안을 안내했다.
성벽을 쌓는 건 오래 걸리지만, 요새 안에 들어갈 부속건물을 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
해서 밖은 공사판이지만, 안은 이미 공사가 다 끝나서 우뚝 선 전각들이 뒤쪽의 산허리를 가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덩치가 크면서,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떨어진 전각군이 눈을 사로잡았다.
“화약고?”
“예. 화약제조청 본관이 이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태종이 만들었던 화약제조청은 개혁 이후 날개를 달고 덩치를 왕창 불린지 오래. 아예 육조에서 떨어져 나와서, 군부의 부서중 하나인 군수부 휘하로 자리를 옮겼다.
“남주도와 남방군의 화약을 여기서 충당하려는 거군?”
“그렇습니다. 대감. 지금 당장은 본토의 지원을 받아야 하지만, 오물수거기업이 슬슬 성과를 내고 있으니까... 내년이나 내후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화약을 생산할 수 있을 겁니다.”
“음...”
‘좋네. 본토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화약은 크게 문제될 게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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