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챕터55. 계획하다 (3)
“한 곳에 몰아 두진 않았지?”
“물론입니다. 대감. 다들 가호별로 쪼개서 흩어놨습니다. 그게 원칙이지 않습니까.”
“오냐. 잘하고 있다.”
칭찬을 들어서인지, 관원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댔다.
귀화인들을 조선인들 사이에 뿌려놓는 건, 여진인들을 흡수할 때부터 꾸준히 진행해 왔던 일. 이래야 자기들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조선문화에 동화될 것 아닌가.
루스인이라고 해서 달리 취급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화와 풍습이 분명히 다를 텐데... 문제는 없고?”
“말이 잘 안 통해서 사소한 오해가 있긴 했지만, 논의를 해야할 만큼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본토로 왔을 정도면 북방에서 교육을 잘 받고, 나름 적응한 이들 아니겠습니까?”
‘하긴...’
지금도 꾸준히 흡수하고 있는 야인여진과 흑룡강 일대에 사는 북방유목민들을 북방신도시에서 교육시키고 있었고, 말을 안 듣는 이들은 의주를 통해 중국에 팔아먹지 않았나.
루스인도 예외는 아니니,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이미 정리가 됐을 거다. 오히려 중국에 몇 없는 낯선 서방인이니, 더 비싼 값에 팔렸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노예로 팔려나가는 걸 봤으면, 무서워서라도 말을 잘 들었겠지.’
“삼남을 비롯해서 다른 지방으로 간 색목인들도 마찬가지겠네?”
“예.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더 잘 적응했나 보네.’
혹시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봐 걱정했는데, 괜한 우려였나 보다.
생각해 보건데... 멀리 떨어진 남주도에서도 잘 적응을 했으면, 상대적으로 더 살기 좋은 본토에선 더 잘 적응했을 것 같다.
“그치들은 뭐하고 사냐?”
“본래 있던 직업을 살려서 이것저것 다 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이들도 있고, 목장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고, 기업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죠.”
“기업은 겪어보지 못한 걸 텐데... 문제는 없고?”
“물론이죠. 기업에 대해서 모르던 아국백성들도 금세 적응했잖아요? 그치들이라고 다를 건 없죠.”
어쩌면 이들의 적응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조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만큼, 기업이라는 게 원래부터 있던 거라고 여기고서 낯설어 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윤현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막말로 멋들어진 집에 먹고살 방도까지 제공해줬는데, 불만이 있겠습니까. 배를 곪은 걱정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맞습니다. 대감. 입맛이 달라서 먹는 게 곤혹스러울 순 있어도, 맘껏 먹을 수 있는 게 어딥니까. 아마 중국에서도 아국만큼 대우해주진 못할 겁니다.”
“음...”
이건 조선인들도 똑같이 느끼는 상황 아닌가.
예전에 공노비, 사노비 신분으로 살다가 해방된 이들도 다 똑같이 취급해준 터라... 귀화한 색목인들의 반응이 다를 건 전혀 없었다.
‘그럼 반대로...’
연오랑은 이미 남주도에서 겪어봤지만, 혹시나 싶어서 되물었다.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냐? 색목인을 처음 본 사람이 꽤 많을 텐데?”
“처음에는 가서 구경을 하고 했는데... 그것도 잠깐 그랬을 뿐, 나중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더군요.”
“그래?”
“예. 옷도 똑같이 입었고, 더듬거리긴 하지만 조선말을 할 줄 알잖아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같던데요?”
윤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을 했고, 속사정을 보다 잘 아는 관원이 말을 덧붙였다.
“이곳 용연현도 그렇지만... 사실 다른 지방도 본래 터전에 살던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옛 시절에야 조선백성들도 일본인, 여진인을 낯설어 했지만 이젠 이웃이 됐으니, 색목인이 더해진다고 해서 크게 낯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오... 외모가 그렇게 달라도 말이지?”
“음...”
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더니, 이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그렇습니다. 외모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조선백성들 입장에선 여진인, 몽골인들도 사실 말이 안 통하는 이민족들 아니었습니까. 막연한 편견은 이쪽이 더 심한 편이었죠.”
여진, 몽골, 일본은 고려와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혀 왔고, 직접 부딪치진 않았어도 소문으로는 야만인 오랑캐 놈들이 쳐들어왔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듣지 않았나.
이제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 흐릿해졌지만, 악감정이라면 이쪽이 더 깊었을 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색목인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 편입니다. 색목인들도 알아서 눈치를 보면서 조심하는 편이고요.”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말.
루스인들은 북방에서 생활하면서, 고향에서 봤던 것보다 더욱 정예화되고 머릿수도 많은 연대병을 숫하게 구경했을 거다.
딴 마음을 먹고 싶어도, 무서워서라도 그런 짓을 못했겠지.
“잘 적응했다니 다행이네.”
“예.”
“그렇죠. 뭐. 함께 굴리다보면 다들 친해지는 게 인지상정이죠. 익히 겪어봤고요.”
윤현은 개혁초창기에 용연현을 개척할 때, 일본인포로와 여진인을 데려와서 부려먹지 않았나. 그치들이 순탄하게 조선인으로 변해가는 걸 봐서 그런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야기를 하며 부두를 나와 대로에 들어서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진짜 날이 갈수록 바뀌네?’
입은 옷만 봐도 생활수준을 알 수 있지 않나.
대로를 돌아다니는 이들 중에서 지저분하게 다니거나, 옷감을 아끼기 위해서 마구 짜깁기해서 바느질한 넝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흰옷 말고도 다른 색감의 옷도 많이 입었네.’
손이 많이 타는 흰옷은 이 시대에도 많이 입었는데, 그것 말고도 형형색색의 화사함이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냥 면옷 뿐만 가죽옷이나 털을 살린 모피, 심지어 익숙하지 않던 모직옷을 입고 다니는 이들도 눈에 띈다.
‘여기라고 특별할 건 없을 테니까... 진짜로 다들 옷을 맘껏 입을 수 있나 보네.’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불연 듯 남주도의 일이 떠올라 물었다.
“이곳에서도 옷을 맞춰주는 상점이 들어섰냐? 남주도에서 봤는데 말이야.”
그가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내자, 둘 모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포목점이 생기긴 했습니다. 다만 호기심에 들락거리는 백성들이 있기는 한데, 엄청나게 유행을 하는 건 아니고요.”
“호오...”
역시 아직은 “옷은 사 입는 게 아니라 만들어 입는다.”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대신 다른 부속품 상점이 몇몇 들어섰습니다.”
“...?”
그가 의아한 눈을 숨기지 못하자, 관원이 재깍 혀를 놀렸다.
“단추나 금실, 옷에 붙이는 각종 부속품, 장신구와 끈을 파는 상점이 생겼습니다.”
“아...”
연오랑은 관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세 깨달았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네? 하긴... 이건 의주에서 갑옷 만들 때부터 등장했던 사업이니까...’
각종 갑옷이나 무구의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공작기업도 있지만, 흡사 하청업체마냥 부속품만 납품하는 기업이 몇몇 생겨나곤 했었다.
대표적인 게 나무나 옥으로 만든 단추나, 허리띠의 강철 버클을 만드는 기업이었지.
이런 부품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업이 돈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으면, 당연히 다른 부속품 쪽으로도 눈을 돌리기 마련.
의복으로는 이런 경향이 확실히 번져나갔나 보다.
“단추라...”
“주머니와 함께 단추가 금세 유행이 되어 퍼졌잖아요? 그런 건 집안에서 만들어 쓰는 것보단, 사서 쓰는 게 더 편하니까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중국상인이 자주 드나들지 않습니까. 그치들도 꽤나 관심을 보이더군요.”
“음...”
‘단순히 의복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겠네. 나쁘지 않아.’
기업이라는 명칭이 붙어서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공장제 수공업 수준이 대부분이지 않나. 사원이 백 명이 넘어가는 경우는 정말 큰 사업체였고, 보통은 그 이하가 대다수였다.
그렇다보니 전문화된 기업보다는 어지간한 건 전부다 만드는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예컨대 공작기업은 보통 나무와 철을 활용한 모든 물건을 만들었는데, 가구에서부터 무구에 이르기까지 그 품목이 다양했지.
헌데 이제는 슬슬 단일품목 혹은 연관이 있는 소규모 품목만 생산하는 전문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뜻.
“덩치는 얼마 안 크지?”
“예. 기존의 기업집안처럼 가산이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작은 기업을 일구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사원이라고 해봐야 열 명도 안 되는 기업도 생겨났고요.”
“오...”
‘역시. 딱히 손을 안 써도, 알아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양이네.’
미래의 기업들처럼, 작은 중소기업이 뭉쳐서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방식과 흡사했다.
‘복잡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부품 하나하나를 따로 만들어서 조립하는 식으로 나아가면, 하나가 잘못될 경우 전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이 있지만...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법.
게다가 시대 정황상 덩치가 너무 작아서, 기업 하나가 무너진다고 해서 시장경제에는 티끌만큼의 영향도 못 미친다.
“조정에서도 나쁘게 보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기업이 많이 늘어나는 건 세수에도 영향을 주고, 그만큼 더 많은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땅에 얽매이는 사람이 줄어들고, 또 누군가 많은 토지를 독점할 일이 점점 줄어들 테니까요.”
“흐응.”
지주들을 압박하려는 조정의 기조는 여전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의견이었다.
계속 대로를 따라 나아가는데, 그럴수록 부딪치는 사람들은 더욱더 많아졌다.
관아로 다가갈수록 유독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용연현에서 사는 주민과는 살짝 달라 보이는 복색을 하고 있었다.
다들 복대와 비슷하게 생긴 가죽가방을 앞에 차고 있고, 공책과 받침대, 연필이 한세트로 묶인 작은 손가방을 손목에 끼고 있었기 때문.
“상인들이군? 왜 저렇게 많이 몰려 있는 거냐?”
“그야 어르신이 타고 온 배 때문에 그렇죠.”
“아...”
윤현은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듯이 눈을 흘겼고, 연오랑은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엄청나게 잘 팔리나 보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치들 덕분에 전국방방곡곡으로 사탕과 향신료가 퍼져나가는 거죠. 전처럼 관이 담당했다면, 곡소리가 여기저기서 났을 걸요?”
“큭...”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설탕은 남주도를 정복하기 무섭게 조선에 들어왔고, 날이 갈수록 그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었다. 당연히 설탕을 취급하려는 행상과 유통기업이 늘어나기 마련.
저들은 아예 용연현에 거점과 창고를 대여하고서, 무역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저렇게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잘 굴러가고 있어?”
“돈이 걸린 문제인데 당연하죠.”
윤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원에게 도움의 눈빛을 뿌렸고.
“맞습니다. 관이 담당했을 때보다 더 빠르고 편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저희 입장에선 관리감독과 감사만 하면 돼서, 서로 편하죠.”
관원 또한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는 관이 모든 물건을 직접 운송했지만, 개혁이 시작되고 잉여생산물이 늘어감에 따라 점점 버거워졌다.
쐐기를 박은 건 천일염전으로, 소금의 생산량이 수직상승하면서 이 물량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지. 이때부터 민간유통상단에 대한 규제가 풀렸고, 작금에 이르러선 모든 품목이 민간으로 이양된 상태.
남주도를 비롯한 다른 곳에 민간상단이 진출하지 못한 건, 함선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던 게 아니었다.
“당연히 중국에도 팔리겠지?”
“예.”
“헌데 이곳에는 미곡상만 올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미곡의 수입양이 줄어들었을 텐데... 강남상인이 그만큼 많이 오냐?”
“별로 안 줄던데요?”
“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양전사업을 했잖아요? 원주민들 십수만명을 데려왔으면, 그치들을 먹여 살릴 식량을 공급해줘야죠. 매일 같이 평양과 의주로 가는 신형조운선이 출항하고 있죠.”
“양전사업은 끝났을 텐데?”
“에이. 다 끝났어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까요.”
전에도 말했듯 양전사업은 한 번에 다 진행할 수 없고, 야금야금 진행해야한다고 하지 않았나.
평양평야를 개간했다지만... 대동강 물을 끌어와서 저수지와 보를 채우고, 그 저수지와 연결된 수로를 이어붙이는 건 물리적인 시간과 노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땅을 모두 회수해서 딱딱 쪼개진 형태로 소유권을 재분배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건 내년부터지.
“음...”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내 계산이 잘못된 건가, 기억이 잘못된건가?’
허나 연오랑은 설명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삼남지방에서의 양전사업이 모두 끝나고, 원래 역사에선 없던 철원평야 등을 비롯한 여럿 황금벌판이 만들어진 지금.
근 이백년쯤 과거인 지금이, 원래 역사의 조선중기보다 더 많은 곡물생산량을 뽐내고 있었다.
조선중기에나 보편화되는 이앙법이 이미 전국에서 시행되고 있고, 저수지와 보등은 조선중기까지 만든 양보다 더 많이 만들었다.
그 외에 인분거름, 노가다반복작업을 통해 도출한 발전된 농법, 온 세계의 기술 및 작물을 접하면서 기존에 없던 신농법 및 신작물을 들여왔고, 절인생선을 비롯한 다양한 곡물 대체품이 만들어진 상태.
시대가 훨씬 이른 지금이 오히려 더 다양한 작물을 키우고, 생산량 또한 더 많다는 거지.
‘물론 본래 농지로 사용되었어야 할 땅이 초지와 목장이 되었지만... 새로 얻어낸 땅이 있잖아?’
기존에 없던 북방땅을 개척했으니, 경작지는 더 늘어나면 늘었지 줄어들진 않은 상황.
허나 원래 역사에서 조선중기 때의 인구수는 천만명에 가까웠고, 지금의 인구수는 육백만명을 조금 넘지 않나.
변수는 대충 배제하고 단순무식하게 계산해도 사백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이 남았는데, 어째서 중국으로부터 식량을 계속 수입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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