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26화 (426/538)

426. 챕터55. 계획하다 (5)

고사라는 건 성주, 터주, 조왕 등의 가신家神에게 바치는 작은 제사이자 의례였으니까.

백성들은 이러한 미신을 믿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무작정 날려버릴 수 없는 노릇.

결국 조정에선 유학식, 불교식, 토속신앙식 제례를 전부 합쳐서, 기존에 없던 제례와 행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

집안에서 개별적으로 하거나 박수무당에게 맡겨 제멋대로 하던 영역을, 조정의 행사로 끌어온 거지.

이게 서방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추수감사제가 만들어진 배경이었다.

“늦게 가면 여러 사람이 피곤하겠지?”

“당연하죠. 모범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공주는 연오랑은 가볍게 때리며 다시금 눈을 흘겼다.

결국 못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고, 금세 차림새를 마무리하고 걸음을 나섰다.

귀찮아하는 연오랑의 속도 모르고, 아이들은 그저 신나서 방방 뛰었고... 그 모습을 보며 그도 결국 웃으며 나아갔다.

공주의 말대로 이미 알아서 준비를 해놓은 모양인지, 집밖을 나서기 무섭게 마중 나온 관원이 일행을 안내했다.

참새처럼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용연항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길을 따라 안내하고 있다.

“여긴 전에 못 보던 길인데?”

“대감께서 남주도에 계실 때, 향교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아아...”

이건 정인지를 시켜서 그가 지시한 내용 아닌가.

조정에서는 새로 제안한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는지, 재깍재깍 움직인 모양이다.

“용연현에 생긴 향교가 몇 개냐?”

“네 곳 입니다.”

“음...”

‘사람이 불어서 대충 이만명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네 곳이라... 전과 비교하면 많아지긴 했네.’

“항구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보내는 편이지?”

“예.”

“먼 곳에 사는 백성들은 어쩌고?”

“어지간하면 운송마차를 운용해서 데려오는 편인데... 각 현마다 사정이 다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멀어서 오가기 힘든 경우에는, 교생들이 직접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

연오랑이 얼굴을 굳히고 물어봐서 일까? 하급관원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늘어놨다.

‘현실을 반영하면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더 하면 돈이 많이 나간다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니까...’

미래의 의무교육을 생각하면 한참 부족한 수준이지만, 시대를 생각하면 전세계에서 유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체제 아닌가.

나라에서 직접 교육을 시켜주고,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거다.

나아가 이 시대의 현은 미래의 구나 군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그 넓은 땅에 향교가 몇 개 안되는데, 무작정 통학시키려다가는 오가느라 시간을 다 보낼 것 아닌가. 도시화가 덜 진행된 현에서는, 아예 날을 번갈아가며 교생이 직접 마을로 찾아간다고 했다.

‘나중에...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면 향교도 더 늘어나겠지.’

어디는 해주고, 어디는 안해 줄 수는 없을 터...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겠나.

그는 홀로 납득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을 정도로 맑았지만, 계절이 계절인터라 살짝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계속 걸음을 이어가자, 웅성거림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저쪽 살짝 구릉진 구역을 따라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관원은 혹여나 문제가 있을까 싶어서 재깍 몸을 날렸고, 근처에서 순찰을 돌고 있던 포도군사를 데려왔다.

“충성!”

“충성!”

청색 가죽코트를 입고, 장도를 허리춤에 찬 이들이 재깍 그의 앞에 시립해 경례를 올렸다.

포도청을 만들고, 포도군사를 교육시킨 게 연오랑 아닌가.

‘오... 이제 테가 나는고만.’

이들 중에서 아는 얼굴은 없었지만, 대충 훑어봐도 나름 군기가 서 있는 것 같다.

“별 탈 없고?”

“그렇습니다!”

연오랑을 처음 만나서 일까? 포도군사들은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로 목청 높여 답을 했고, 그가 눈을 슬쩍 흘리기 무섭게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가시지요.”

“오냐.”

눈치 빠른 관원이 재깍 포도군사의 옆구리를 찔러댔고, 포도군사는 조심스럽게 인파를 해치며 길을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파묻혀 계속 나아가다보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흙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흙언덕은 꼭 성형요새의 성벽처럼 생겼는데... 높이는 그보다 훨씬 낮고, 일부러 깎아 놓은 것 마냥 계단식으로 층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위에 사람들이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앉아 있는 걸로 봐선, 오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모양이다.

‘잘 만들었네.’

허나 그런 해괴한 모양새를 보며, 연오랑은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향교를 만들 때부터, 다목적으로 사용할 운동장을 만들려고 했지 않나.

그 역할에 딱 맞게, 향교는 담벼락 대신 흙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저건 관중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런 건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 금세 적응했군?”

“그...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이 알아서 좋은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관원은 멋쩍음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답을 던졌다.

보나마나 처음에는 ‘담벼락이나 만들지, 쓸데없이 이건 뭔가?’라고 투덜거렸을 거다. 하지만 돈을 최대한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

만약 운동장을 둘러싼 관중석을 건물로 지었다면, 건설비용은 물론이고 유지보수비용도 적잖게 나갔을 테니까.

잔디와 나무판이 바닥곳곳에 박힌 관중석을 따라가자, 저 앞에서 우글거리던 관원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관원들은 딱 봐도 옷부터 튀지 않나.

연오랑이 모르는 얼굴이 태반이었지만, 다들 냉큼 다가와 읍을 했다.

“대감! 오셨습니까.”

“공주자가께서도 오셨습니까!”

그뿐일까. 연오랑 옆에 조용히 붙어 있던 공주를 향해서도 눈인사를 마구 날려댔다.

“번잡하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가지?”

“예예.”

연오랑이 조용히 중얼거리기 무섭게, 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원위치를 향해 되돌아갔다.

“어째 나보다 당신을 더 신경 쓰는 거 같은데?”

“...”

살짝 농담섞인 질문에, 공주는 대답 없이 그저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굳이 답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혀진다.

‘하긴 생각해보면, 나보다 공주를 더 많이 만났을 거 아냐?’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공주는 무려 세종의 친누이고, 용연현을 대표하는 기업체를 운영해왔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윤현이 일을 도와주긴 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은 공주가 해왔을 터... 나름 공주와 용연현 관원들 사이에선 교류가 많았던 모양이다.

‘눈치를 꽤 봤던 모양이야.’

그는 괜히 공주의 손을 꾹 잡아주며 피식 웃고 말았다.

공주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나. 여장부가 따로 없으니, 상대하는 관원들 입장에선 보통 고역이 아니었을 거다.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는 이들을 헤치고 상석에 도착하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중년인이 다가왔다.

“대감.”

“오랜만이군. 현감. 듣자하니 일을 잘하고 있다던데? 고생했어.”

“예.”

집에 들를 때마다 몇 번 봤던 현감인터라, 연오랑은 가볍게 인사를 받아넘겼다.

현감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았던 인물이지만, 이미 원래 역사와 한참 틀어지지 않았나. 그간의 개혁이 효과가 있는지, 이곳에 부임한 이후로 큰 문제없이 현감직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

연오랑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엉덩이를 붙였고, 공주는 조잘거리는 아이들을 다독이며 조용히 옆에 앉았다.

‘흠...’

운동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상석에 앉아서 지켜보자, 운동장 한복판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복을 입은 이들과 회색가사를 입은 승려들, 요란할 정도로 형형색색을 자랑하는 옷을 입은 박수무당들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저치들은 아직도 저런 옷을 입는군?”

“그게...”

연오랑이 가볍게 한마디 툭 던졌건만, 현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 오래된 일이지만, 그가 박수무당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관원들 사이에서 괴담처럼 전해져왔다.

현감은 혹여나 사단이 생길까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조정에서 별말 없었냐?”

“아직 정리가 덜 된 것 같습니다. 조정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십년도 더 됐는데... 쯧.”

“죄송합니다. 대감.”

그가 가볍게 혀를 차자, 현감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박수무당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각 지방마다 다르게 남아 있던 토속적인 제례의식을 연구하게 시키지 않았나.

조정입장에선 그 일만 잘하면 되지, 박수무당이 무슨 옷을 입든지 신경을 덜 쓴 모양이다.

“...”

잠시 침묵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운동장 주변에 있던 백성들과 관중석에 앉아 있던 백성들 사이에선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만... 한편으론 재미가 없을 것도 없다.

개혁 이후 확확 바뀌긴 했지만, 조선백성들은 여전히 슬로우 라이프를 살고 있다.

당연히 이런 이벤트가 흔하게 있는 게 아니니,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노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나는 모양이다.

이윽고 준비가 모두 끝나자, 승려들과 박수무당이 함께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흐음...’

다만 뭔가 살짝 허전했다.

나무로 만든 탑을 앞에 두고, 그저 거하게 한상 차려 놓은 게 끝.

수확제이니 만큼 이번에 수확한 햅쌀로 만든 음식들. 올해 수확한 각종 과일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들을 앞에 두고서, 승려와 박수무당이 축언과 법문을 읊는 게 고작이었다.

‘거참... 묘하고만.’

“뭔가 밍밍한데?”

“...”

연오랑이 중얼거리자 현감의 시선이 다시 쏠렸고, 그는 친절히 부연설명을 늘어놨다.

“제례의식이 너무 허술해서 말이야. 솔직히 말해봐라. 대체 누구와 무엇에게 제를 지내는 거냐?”

“그...”

뜬금없는 소리 같았는데 정곡이라도 찔린 건지, 현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허나 연오랑은 타박할 생각도 없는지, 홀로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것도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문뜩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강타했기 때문.

흔히들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 하늘이 벌을 줄 것이다.”라는 말을 왕왕하지 않나.

동아시아에서 하늘은 신과 비슷한 추상적 개념이자 절대진리처럼 여겨왔다. 어쩌면 천신사상일 수도 있고.

이는 도교의 옥황상제, 불교의 제석과도 비슷했기에 서로 혼용되고 결합되었고, 민간에선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편이었지.

유학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는데... 운석핵꿀밤이 모든 걸 바꿔 놨다.

하늘의 도와 인간의 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조선의 존립자체가 부정될 수 있으니까.

조선의 기조였던 근본성리학은 이 때문에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가야 했고, 이 빈자리를 파고든 게 자본유학.

그리고 자본유학이 주장하는 내용 중에는, 연오랑이 마구 짜깁기해서 엮은 실사구시라는 항목이 있지 않나.

이건 노가다반복작업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적 탐구론으로 변형되었으니... 자본유학을 익힌 관료들 입장에선, 신의 존재와 하늘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기도 또 긍정하기도 애매했던 거지.

“그래서 저렇게 뭔가 알맹이가 빠진 모양새를 하게 된 거겠지? 옥황상제나 제석천에게 제를 드리는 건 조금 그럴 테고?”

“그렇게 간단하진 않지만... 결론적으론 그렇습니다.”

“민심을 생각하면 안 할 수도 없을 테니까? 오히려 손을 놓고 있으면 괜히 이상한 사교나 잡신이나 믿을 거고 말이야.”

“예...”

현감 또한 쓴웃음을 지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려 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조선불교청을 완성하고 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완전히 민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헌데 이러한 제례를 관이 주도하게 되면, 자가당착에 빠지는 꼴.

해서 하늘이나 신에게 제를 지내긴 하는데,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고 대충 뭉개고 넘어가는 형태로 만들어버린 거다.

더불어 관이 준비를 도와주긴 하지만... 제례의식의 주체는 엄연히 승려와 박수무당이 주축이 되어, 저렇게 입 아프게 목청을 높이고 있는 거지.

“그댈 탓하는 게 아니다.”

“...”

“사직社稷의 권위도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전에는 있지도 않던 제례를 새로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

현감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직의 권위와 의미는 계속해서 급락하고 있지 않나. 다만 이건 종교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문제였다.

기복신앙과 내세의 평안을 추구하는 건 인간으로서의 본성.

그러니 민간 영역에서의 종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지난날 조정이 해왔던 것처럼, 관의 주도하에 천신과 엮어서 토지신과 곡식신에게까지는 굳이 제를 지내고 싶지 않은 거지.

물론 이 문제는 천명사상과 엮여서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명분이 되었었기에, 이걸 해결하고자 조정관료들이 새로운 통치논리와 명분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놈들이 왜 여기 있지?’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다가 말고, 제를 치루고 있는 제단 구석에서 조용히 시립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승복을 입고 있긴 한데, 붉거나 갈색빛이 도는 머리칼을 한 이들이 눈에 쏙 들어온다.

‘루스인인데 승복을 입고 있다? 뻔하군.’

“서역의 사제들인가?”

“예.”

현감은 용케도 알아봤다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예가 되어 함께 끌려온 모양이지?”

“맞습니다.”

킵차크 칸국은 신분을 가리면서 납치하는 게 아니다. 무슬림들이니 오히려 더욱 거리낌 없이 이교도 사제들을 납치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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