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30화 (430/538)

430. 챕터55. 계획하다 (9)

‘아아... 공주가 말했던 게 이거군.’

설명을 들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확실히 이해가 됐다.

그가 남주도에 있는 동안에도 공주는 여전히 기계공학에 관심을 쏟고 있었고, 장영실을 비롯한 공업부 관원들과 꾸준히 서신을 교환해 왔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서방의 기술에 대해 토론을 했고, 공주는 연오랑에게 자랑하듯 그 이야기를 풀어놨었지.

그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두 눈으로 직접 보자 뭔가 감회가 색달랐다.

회전교차로의 공터에는 대리석이 잔뜩 쌓여 있었고, 거중기를 비롯한 건설기계로 탑을 쌓고 있었는데... 이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들은 색목인들이었으니까.

조선옷을 입고 갓까지 쓰고 있지만, 붉고 짙은 수염만큼은 숨길 수가 없어서 이민족인 티가 확 나고 있었다.

“저들이 로마국에서 온 장인들이군.”

“그렇습니다. 대감.”

‘천문시계를 만들었다고 하니까... 도움은 확실히 되겠네.’

조선 자체적으로 시계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수년이 지났어도 거대한 시계탑을 만드는 건 실패하지 않았나.

그래서 회전교차로의 공사가 지연됐던 건데... 이젠 그 어려움이 해소된 모양이다.

연오랑은 혹시나 싶어서 되물었다.

“북방신도시에서 조선화교육을 받고 온 건가?”

“그건 아니고. 한성으로 바로 온 후에, 관원들에게 직접 교육을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부서가 다른 금군조차 사정을 알 정도면, 확실히 예외적인 일.

저들은 노예로 팔려온 게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서 포섭되어 조선까지 오게 된 사람들인가 보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데려온 각종 전문가들이 한둘이 아닐 터... 확실히 외부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으로 변한 것 같다.

교차로를 지나쳐 육조거리로 들어섰다. 아니다. 이젠 육조거리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번화했는데...

‘이게 조선의 마천루라 이거지? 놀랍네.’

봐도봐도 놀라울 따름.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바둑판처럼 이어진 석회도로의 양 옆에는 각 부서가 위치한 3층 전각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여기에 담벼락을 넘나드는 구름다리가 죄다 연결되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거미줄에 올라탄 것 마냥 헷갈릴 지경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백성들은 깜짝 놀라겠군.”

“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고, 금군은 괜히 자기가 자부심이 생기는지 히죽 웃어댔다.

육조거리를 재빠르게 지나치자 시야를 가득 매우는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성벽만큼 높이 솟은 회색빛 담벼락이 이어지는데, 고개를 돌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이건... 원래 역사보다도 더 큰 거 같은데?’

미래의 기억은 이미 가물가물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전에 궁을 봤을 때보다도 더 크고 웅장해진 느낌을 줬다.

‘맞아. 확실히 더 커졌어.’

조선의 궁궐 담벼락 위로, 언제부터 사람이 돌아다녔던가.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금군이 담벼락을 따라 허리만 내놓고 순찰을 도는 게 보였다.

그는 슬그머니 머리 위로 스쳐지나가는 그림자를 보며, 속으로 인정했다.

옛 경복궁시절에 사용하던 궁문으로 다가가 그가 왔음을 알리자, 가볍게 소란이 벌어졌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얼추 정리가 됐는지, 금군이 아닌 내관이 그를 맞이했다.

바톤터치를 하듯 지금껏 호종해준 금군은 제자리로 돌아갔고, 다른 동료들에게 등이 떠밀린 내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전하와 상왕전하께서는 일하고 계시겠지?”

“예. 대감. 다만 대감께서 오신 걸 알리러 갔습니다.”

“바쁘실 테니까, 조금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내수사 구경이나 하자.”

“알겠습니다.”

아무리 연오랑이라고 해도, 무작정 세종과 태종을 만날 수 없지 않나.

약조도 없이 찾아왔으니 한참을 기다려야 할 터, 그는 말에서 훌쩍 내려 내관을 앞세워 궁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음...”

“...?”

그가 궁을 거닐며 신음을 흘리자, 내관은 슬쩍 불안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꼭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나?”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다.

“아니.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아... 이쪽은 완전히 내수사가 사용해서 그럴 겁니다. 대감.”

내관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인부들에게 살벌한 눈빛을 뿌리며, 얼른 대답을 늘어놨다.

“내수사가 완전히 궁 안으로 들어왔나 보지?”

“예. 밖에 놓기에는 서로 불편한 일도 많고, 궁터가 넓어서 부딪칠 일이 없어져서 말입니다.”

“흐음.”

‘생각보다 잘 돌아가는 모양이야.’

연오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는 내관의 설명을 들었다.

내수사는 왕실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이었고, 그 재산의 대부분은 사실 태조가 동북면에 있을 때부터 축적한 토지였다.

허나 조선을 대대적으로 뒤집어엎는 양전사업을 진행하려면, 그 누구보다도 왕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명분이 사는 법.

해서 그 엄청난 땅을 전부 조정과 백성들에게 팔아치웠다.

여기에 조선이 거부하던 시장경제를 형성하고, 전에 없던 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선 왕실이 또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

현물과 장부상에 남은 재산을 활용해서, 왕실기업으로 변모하게 된 거지.

그게 벌써 십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자, 내수사는 조정과 완전히 분리된 조직체로 자리 잡았다.

왕실이 직접 고용한 내수사 사원만 이천명이 넘는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자네들은 어떻지?”

“예?”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내관은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궁궐이 조정과 분리되어 궁내원이 만들어지면서, 내관들의 처지도 애매해졌잖아? 너희는 잘 지내고 있냐고.”

“아. 그게... 사실 크게 달라진 것도 없어서 말입니다. 궁을 관리하는 건 저희가 원래 하던 일이고, 내수사의 사업은 왕족분들과 내수사에서 직접 고용한 사원들에 의해서 처리되고 있어서...”

“흐음.”

연오랑은 기연가미연가해서 슬쩍 눈을 흘겼지만, 내관은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권력은 누가 권력자와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법.

왕과 하루 종일 붙어 있는 환관이, 막후의 권력자로 등장하는 건 비일비재하지 않나.

명나라가 바로 환관이 권력을 잡고 정치세력화 된 대표적인 나라였지만... 조선은 원래 역사에서도 환관의 힘이 약했던 나라다.

게다가 지금 역사에서의 조선은 한발 더 나아가, 조정과 왕실이 살짝 거리를 두고 떨어지고 있지 않나.

‘하긴. 조선에서 언제부터 환관이 힘을 썼다고...’

그러니 연오랑은 혹시나 환관들이 불만을 품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들은 원래 가진 권력이 얼마 없어서, 바뀌든 말든 큰 차이가 없나 보다.

“승정원이 완전히 정착되면서, 이젠 저희가 조정관원들과 부딪칠 일도 얼마 없고... 한편으론 체계가 확실해져서, 일처리가 더 편해진 점도 있습니다. 대감.”

환관은 혹시나 연오랑이 오해를 할까봐, 얼른 말을 덧붙였다.

승정원은 본래 왕명출납을 담당하며, 왕의 비서실과 같은 역할을 했었다. 지금은 더욱더 비대해져서, 왕실과 조정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지.

반대로 환관들은 조정관료들과의 연결고리조차 다 끊여져서, 완전히 궁내의 일만 처리했다.

한마디로 교통정리가 되어 서로 간섭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명령체계가 단일화 되어서 오히려 더 편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니 환관의 인기가 팍 떨어졌는데... 수급이 되려나 모르겠네.’

연오랑은 물어볼까 하다가, 왠지 허물을 들추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중국에선 환관의 힘이 워낙 강력해서 일부러 환관이 되려고 거세하는 사람이 있다지만, 조선은 원래 역사에서도 안 그랬다.

그저 사고로 거세를 당한 이들을 환관으로 만들어 써먹었는데... 앞으로 조선인들의 인식과 의술이 발전함에 따라 수요를 못 맞추게 될지도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환관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 내수사 전각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반가운 얼굴을 한 청년이 한걸음에 다가왔다.

연오랑이 왔다는 소식이 들어갔는지, 세자와 세자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감! 오랜만입니다.”

“세자저하.”

연오랑은 환하게 웃는 세자와 세자비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와 세자의 인연은 엄청 오래되지 않았나. 그것도 어릴 적부터 함께 해 온 세월이 있으니, 오랜만에 만났어도 어제 헤어진 것처럼 반갑기 마련.

‘이젠 다 컸네?’

연오랑은 환하게 웃는 문종을 보며, 그 또한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꼬꼬마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장성했고, 정식으로 혼인까지 했다.

문종을 제대로 키우려고 노력 했던 지난날이 떠오르자, 괜히 눈시울이 불거질 지경이다.

‘...’

그러면서도 세자비가 품고 있는 포대기에 저절로 눈이 돌아갔다.

힐끔 세자를 바라보자...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딱 봐도 자랑하려고 데려온 모양이다.

연오랑은 포대기에 감싸져 있는 아기를 차마 만져보진 못하고, 옹알이 하는 아기와 눈빛을 마주쳤다

‘이 녀석이 문종의 첫째란 말이지. 원래 역사와는 완전히 멀어지겠어.’

머릿속에선 절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미 몸으로 깨달았지만... 이렇게 극명한 증거를 눈앞에 보고 있자, 싱숭생숭한 마음이 밀려왔다.

미안한 말이지만, 원래 역사의 단종은 사라졌다.

세자. 문종의 나이는 이제 막 스무살 가까이 됐는데, 벌써 첫 아이를 낳았고 사지 멀쩡하게 잘 크고 있지 않나.

원래 역사에서 서른 가까이 돼서야 첫 아이를 낳았던 것에 비하면, 축복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거다.

‘단종만 사라졌겠어? 세조가 등장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에 가까울 거고... 내가 아는 모든 위인들이 모두 없어지게 되겠지.’

미래를 아는 유일한 사람 아닌가.

그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양전사업으로 인해 조선은 뒤집어졌고, 촌구석 변두리 마을이라고 해도 외부 이주민이 절반이 넘어간다. 그 이주민 중에서 10~15%는 조선인도 아닌 이민족이지.

원래 역사의 고립된 향촌사회 내에서, 그들만의 혼인을 통해 만들어진 후손들은 아예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역사에 족적을 깊게 남긴 이순신, 이이, 이황 등등의 위인들은 아예 태어날 수가 없어졌으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누구에게 터놓을 수도 없어서,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어찌...?”

연오랑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자, 세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고.

“아. 아닙니다. 저하. 날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찬바람을 쐬어서 좋을 거 없습니다.”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젓고선, 세자비와 세손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오랜만에 궁에 오셨지요? 안내를 해드리지요.”

“예.”

세손을 떠나보낸 세자는 내관을 대신해서 연오랑을 이끌었고, 쾌활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심히 놀려댔다.

“내수사와 궁내원 일은 잘 맞으십니까?”

“예. 생각 외로 재밌더군요. 공부해야할 것도 많고요.”

남몰래 슬쩍 눈치를 살피는데... 세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두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나쁘지 않아.’

원래 역사와 달리 태종이 아직 살아 있고, 세종의 건강상태도 훌륭하다.

이러니 세자인 문종이 굳이 세종을 도와 조정의 일을 배울 필요는 없을 터... 허나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있을 수 없지 않나.

원래 역사라면. 세종이 찔끔찔끔 던져주는 프로젝트를 해결하는 식으로 경험을 쌓았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욱 훌륭한 대안이 있다.

바로 내수사와 궁내원의 일을 세자가 총괄담당하는 거지.

‘궁내원에 속해 있는 인원도 적지 않으니까... 별의 별 사건이 다 터질 터, 그걸 해결하다보면 나름 사람 다루는 법을 익히겠지.’

내수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수사는 이 시대 기준으로 초거대 기업이고, 사업체는 조선의 모든 곳에 퍼져 있지 않나. 이걸 관리하다보면 자연스레 사람과 돈, 일이 굴러가는 흐름을 배울 수 있는 법.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이보다 더 좋은 예행연습은 찾기 힘들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겨갔는데, 어느 한 전각에 다다르자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저긴 뭔가 싶어 바라보기 무섭게, 세자가 의문을 해소해줬다.

“종학입니다.”

“아...”

‘이건 역사를 따라갔나 보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종친교육기관인 종학은 세종이 만들었는데, 지금 역사에서는 더욱 비대해지고 체계화 됐다.

“다들 잘 따라오는 모양이군요.”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고 궁에서 먹고살 수 없는 거고, 왕족인데 궁에서 나갔다고 궁색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예...”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고만.’

연오랑은 원래 역사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세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녕 몰랐으니까.

이 시대엔 종친사환금지법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고, 아예 대놓고 왕족을 외교부 관원으로 쏠쏠하게 써먹고 있지 않나.

군부에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위험요소가 있어서 금지되었지만, 다른 부서의 관원이 되는 건 문제가 없었지.

허나 그럼에도 주변의 눈치를 보긴 봐야하기 때문에, 왕족들은 관직에 나가기보단 기업을 일구거나 아예 내수사에 들어왔다.

이 탓에 원래 역사와는 완전히 거꾸로 흘러갔다.

왕위에 위협이 될까봐 무식하고 생각 없이 사는 게 아니라, 왕족일수록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했지.

지금 역사에선 왕족에게 기업을 세울 수 있는 재원은 마련해주지만, 기업이 번성할 수 있게 도와주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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