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31화 (431/538)

431. 챕터55. 계획하다 (10)

‘이야...’

연오랑은 종학 건물 근처로 다가가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최신문물이 가장 먼저 적용되는 왕궁답게, 종학의 건물에는 유리창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생각보다 꽤 커서, 자기도 모르게 관심이 쏠렸다.

‘전에 만들었던 것보다 더 커진 거 같은데?’

대략 가로세로 40~50센치미터 정도 되는 유리창이 얇은 나무틀에 고정되어 이어져 붙어 있었다. 전엔 30센치미터 정도였는데, 꾸준히 기술을 개량해서 크기를 키웠나 보다.

‘흐음... 꽤 많네?’

벽면에 조용히 붙어 그림자를 만들며, 유리창 너머로 안을 살펴봤다.

입식 의자와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소년, 꼬마들이 대략 삼십여명 정도. 모르는 얼굴이 태반이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꽤 많다.

‘이것도 역사가 달라진 건가? 아니면 왕족이 자제들을 전부 여기로 보낸 건가?’

세자가 훨씬 일찍 자식을 낳은 것처럼, 다른 왕족들의 혈연관계도 원래 역사와 꽤 많이 달라졌다.

다만 원래 역사의 왕족계보도 모르는 판에, 궁과 거리를 두고 있던 연오랑이 바뀐 역사를 무슨 수로 알겠나.

더불어 원래 역사에선 조용히 잠자코 있어야할 왕족들이, 지금은 자발적으로 종학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나.

아마 사서에서도 집중하지 않은 왕족의 자제도 섞여 있을 거다.

“대감도 아시지요? 저기... 앞에서부터 진양, 안평, 임영대군입니다.”

“아...”

세자는 은근히 자랑을 하듯 동생들을 읊었다.

‘다들 많이 컸는데?’

연오랑은 소년티가 물씬 나는 왕자들을 계속 살펴 내려갔다.

그는 한성에 어지간하면 들리지 않아서, 왕실 인사들과는 인연이 얕지 않나.

수양대군도 마찬가지라서. 녀석이 아기일 때 또는 꼬마시절에만 봤었는데, 이렇게 장성한 걸 보니 감회가 또 새롭다.

‘아직은 진양인가?’

이 시기엔 수양대군을 진양대군이라고 불렀는데, 이건 원래 역사를 따라가는 모양이다.

‘그보다...’

그는 시선을 슬쩍 돌려 세자의 얼굴을 살폈는데... 세자는 꾸밈도 없이, 그저 히죽 웃으며 동생들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어릴 적엔 우애가 좋았는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지금은 퍽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만 쭉 가면, 세조가 등장할 일은 확실히 없겠어.’

수양이 언제부터 왕위에 욕심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자식을 너무 오랫동안 못 낳은 것도 영향을 끼쳤을 거다.

왕위계승서열 2순위로 십년 넘게 살면,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생겨날 수 있으니까.

허나 지금 역사에선 이미 문종이 자식을 본 상태.

설령 문종이 원래 역사처럼 일찍 죽더라도, 그때쯤 되면 세손이 성인이 되고도 남는 시간.

저 어린 수양이 왕위를 욕심내는 건, 무리도 한참 무리일 거다.

연오랑은 혼자만 아는 미래를 깔끔히 지워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종학에선 무얼 가르치고 있습니까?”

“전문대학과 비교하면 깊이가 조금 얕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합니다. 집현전 학사들이 가르치니까요.”

“음...”

‘이것저것 다 가르치나보군. 나쁘지 않아.’

연오랑은 이어지는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과 조정의 교육을 대표하는 게 종학 아닌가.

이곳에서 성리학만 가르친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잡학 모두를 가르친다는 건... 다른 대학들 모두 같은 교육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뜻.

확실히 잡학을 필두로 한 기술학문이, 문무과에 버금갈 정도로 위치가 격상된 게 맞나보다.

‘민간의 대학이 빠르게 설립되는 것도 좋고.’

대학의 뿌리는 연구소에 닿아 있고, 연구소는 개혁초창기 때부터 양전사업을 하면서 전국에 설립됐다.

지주집안이 기업으로 변모하게 위해선 기술자들이 필요했고, 그 기술자들은 대량으로 양성하기 위해선 집체교육이 필요했으니까.

이런 연구소는 자연스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또 발전시켜왔는데, 지금 와서는 한걸음 더 성장.

기업에서 파견한 일꾼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입학해서 기술을 배우는 학교로 변한 거지.

‘그런 대학과 비교되는 집현전이라... 집현전의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하겠지.’

원래 역사와 달리. 지금 역사의 집현전은 운석핵꿀밤으로 조선사상계가 분열하고 조정이 마비상태에 이르자, 그 일처리를 대신하기 위해 태종이 설립한 기관.

개혁이 진행되면서 싱크탱크 역할을 하며 계속 덩치를 불려갔는데... 이내 육조체제가 무너지고 조정이 거대화됐고, 정상화를 넘어 더욱 발전된 조직체계로 변했다.

이젠 집현전이 조정을 대신할 필요가 없으니, 집현전의 학사들은 속속 새로운 부서로 보직을 옮겼지.

그리하여 지금은 덩치가 확 줄어들어서, 조정과 별개의 싱크탱크 역할만 하고 이런저런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니 집현전 학사들이나 대학의 지도 장인이나, 큰 차이는 없을 거야. 지방 연구소의 관원이나 장인들도, 집현전 장인과 함께 배우고 연구하던 사람들이니까.’

연오랑은 상념을 멈추고, 혹시나 싶어서 마지막으로 되물었다.

“대군들께서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있는지요?”

“글쎄요... 다들 이것저것 다 배우고 있는 터라, 딱히 두드러지는 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나마 안평은 글씨와 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 같고... 임영은 말타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무예와 축산에 관심을 갖더군요. 진양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지, 회계와 택리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예...”

‘이건 원래 역사와 비슷하게 가네.’

역사가 바뀌었지만 사람의 특질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오묘한 섭리가 느껴지는 듯 했다.

“아무래도 숙부님들을 보고 배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흐음.”

‘그럴지도.’

세자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이자, 연오랑 또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망나니로 소문났던 양녕은 개과천선했다는 말이 예전부터 들려왔다.

그는 진짜로 장사에 소질이 있는지, 양주기업을 계속 번창시키며 조선의 술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지.

그가 만든 술이, 술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으니까.

물론 지금도 전국을 싸돌아다니며 기생집을 방문하고 술을 찾아다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와중에도 사업은 또 열심히 해서, 예전과 같은 지저분한 구설수는 안 나오고 있었다.

효령은 한술 더 떴다.

그는 근 삼년 가까이 일본에서 머물고 있었으니까.

무로마치 막부는 수직조직화된 조선불교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조선 왕의 형제가 친히 방문해서, 이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것보다 모양새가 좋은 건 없지.

해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지방의 다이묘들을 만나 무역항 설립에 대한 조약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중국의 명산과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중국견문기를 집필해 떼돈을 벌었는데... 이번에도 일본견문기를 집필하면, 한번 더 돈방석에 앉게 될 거다.

‘덕분에 내 돈을 아꼈고 말이야.’

그는 조용히 속으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오래전. 그는 조선불교청을 만들면서 해인사를 증축해서, 팔만대장경을 보관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약조하지 않았나.

연오랑이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걸 효령이 들었는지, 다른 일에 바쁜 그를 대신해서 효령이 직접 해인사 증축을 해줬다.

이 외에 이인을 비롯한 태종의 아들들이 외교관과 학자로서 활약하는 걸 똑똑히 지켜봤을 터... 아마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대군들 모두 각자만의 미래를 그리고 있을 거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만 가시지요.”

“예.”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알지도 못하는 왕족들과 인사를 나눠서 뭐 할까.

연오랑은 가볍게 사양했고, 세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왕실과 거리를 두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세자니까.

이내 모든 구경을 끝마칠 때쯤 되자, 내관이 달려와 연오랑을 부른다는 말을 건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하.”

“오랜만에 오셨으니 한동안 궁에 머무실 거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 따로 기별하겠습니다.”

세자는 히죽 인사를 건넸고, 연오랑 또한 마주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내관을 따라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아직도 빈터가 많은 궁궐을 가로질러 갔다.

지금 역사에서의 조선궁궐은 경복궁과 창덕궁, 그 사이의 부지를 전부 합쳐서 하나의 궁성으로 만들지 않았나.

커도 너무 커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작은 동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런 공터 중에서, 아직도 공사 중인 궁궐과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징글징글하고만. 벌써 몇 년째야.’

연오랑은 우글우글 모여 있는 인부들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 시대는 미래의 경복궁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대.

개혁이 시작될 때부터 궁궐증축이 시작됐으니, 십년 넘게 계속 새로운 궁궐이 올라가고 있다.

게다가 그냥 한옥식 궁궐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저건 또 뭐야.’

공사장 한쪽에서는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우유빛깔을 한 사각기둥과 벽채가 올라가고 있었는데, 저건 딱 봐도 대리석이다. 아직 정확한 형태를 알 수가 없는데, 얼핏 봐선 무슨 그리스 신전마냥 기둥을 건물 앞에 세우고 있다.

“...?”

연오랑이 말없이 걸음을 멈춰 서자... 내관은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본 걸까?

뭐라 묻지도 않았는데, 냉큼 설명을 늘어놨다.

“전하께서 이번에 새로 설계하신 건물입니다. 서방의 건축서적이 들어왔는데, 그걸 참고하셨다고 하더군요.”

“와...”

‘세종 형도 진짜 근성하나는 끝내주는 고만.’

지금 역사에서도, 원래 역사처럼 지적호기심이 넘쳐나는 세종 아닌가. 그는 개혁이 시작될 때부터, 새로운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기계공학과 석재건축에 관심을 보여 왔다.

그 열정이 아직까지도 식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재정에는 문제가 없나?”

“한 번에 한 채씩만 올리는 터라, 큰 문제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공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건설기업이 많아서, 심사하고 걸러내는 게 일이지요.”

“흐응.”

전에도 말했지만, 궁궐은 전각 몇 개만 달랑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수백채의 전각과 건물이 들어간다.

원래 역사에서 광해군이 경복궁을 재건한다고 했을 때, 괜히 난리가 났던 게 아니지. 수백채의 건물을 한 번에 건설하는 건, 작은 신도시를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허나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한 채가 완성되고 나면, 새로운 설계도면을 만들어서 다시 한 채를 짓는 식으로.

십년 넘게 쉬지 않고, 야금야금 짓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걸음을 옮기자, 내관은 연오랑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소로 그를 이끌었다.

새로 지은 편전과 회의실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 원래 역사의 창덕궁 뒤쪽으로 나아간다.

‘오...? 이건 못 보던 건데?’

이윽고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자기도 모르게 눈이 살짝 커졌다.

경복궁의 연회장이라 할 수 있는 경회루와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연못은 훨씬 넓어서 작은 호수처럼 보였고 주변도 뭔가 색달랐다.

처음 보는 양식의 다리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는데... 작은 호수나 마찬가지인 연못 정중앙에, 청기와로 지붕을 깔고 화강암을 깎아 만든 석재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웅장한 전각이 우뚝 서 있었다.

‘정원인가? 이런 건 못 봤는데?’

호수 옆으로는 겨울이 찾아와 바싹 마른 꽃나무들이 앙상하게 몸을 흔들고 있는데, 주위가 전부 비슷한 모양을 한 걸로 보아 정원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조선에는 없던 정원양식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서방에서 들여온 서적을 보고 따라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 옆에는 작은 유리온실이 있었는데, 역시나 몇몇 꽃들이 추위를 잊고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었다.

“...”

연오랑은 “여기가 맞냐?”라고 눈빛으로 물었고, 내관은 지체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휘적휘적 돌다리를 지나쳐 계속 나아가 전각에 다다르자, 근처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궁녀와 내관들이 냉큼 고개를 숙여댔다.

그가 왔다는 걸 알리는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연오랑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겨 전각 위로 올라섰다.

“왔느냐.”

“예.”

태종과 연오랑이 연을 맺은 게 얼마인가.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읍을 하고선, 냉큼 발을 놀려 태종의 앞에 가서 풀썩 엉덩이를 붙였다.

바닥은 온돌로 만들어 놨는지, 뜨끈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들어 태종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원래 역사의 천수를 넘긴지 한참 지났는데, 혈색도 그렇고 풍채도 그렇고... 힘이 넘치는 걸로 보아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다행이군.’

세종이 완전히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태종이 든든히 살아있는 게 나쁠 건 없지 않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히죽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의 미소를 알아봤는지, 태종 또한 입꼬리를 올리곤 입을 열었다.

“장계는 꾸준히 봤다. 남방에서 고생했구나.”

“아닙니다.”

퍽퍽. 태종은 앞에 놓인 화로를 부지깽이로 쑤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비록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서신으론 공주보다도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서 잘 알아서, 이내 곧 화제가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태종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궁에 오기 귀찮아하던 네가, 기별도 없이 직접 온 걸 보면...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지?”

“...”

본론으로 들어가자, 연오랑은 살짝 얼굴을 굳히고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을 해봤지만... 태종을 만난 이상 확신을 얻어야 할 것 아닌가.

“후...”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동을 치시려는 겁니까?”

“...”

밑도 끝도 없는 청천벽력 같은 물음이지만... 이미 예상이라도 한 걸까? 태종은 한 점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한다. 이제 때가 됐지.”

“아...”

‘역시 그런가...’

연오랑은 다시금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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