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 챕터55. 계획하다 (11)
그가 이런 결론을 낼 수 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유였다.
각 도에 주둔하고 있는 연대병은 단순히 효율과 유지비 절감을 위해서 퍼져 있는 게 아니다.
전에도 말했듯. 양전사업이 끝났음에도 조선에는 아직 미개척된 산지가 많고, 때려잡아야할 맹수4종세트가 남아 있다.
훈련은 기본이고, 사냥을 하고, 만능 일꾼이 되어 도로건설 및 개간작업도 함께 하고 있었던 거지.
결국 평안도의 개간,개척사업을 하려고 다른 지역의 연대병을 불러온다는 건,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어놓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한자리에 모아놨다는 건, 미리미리 원정준비를 시험해 보겠다는 뜻이겠지.’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의 병력에, 착호군까지 합치면 무려 4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이 병력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서 개척 및 사냥을 한다?
창칼을 휘둘러 싸우는 것만 빼면... 지휘관은 대병을 지휘하는 훈련을 하는 거고, 연대병들은 다른 부대와 함께 기동 및 전투훈련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지.
‘전투병력만 그럴까. 실은 군수부의 역량을 확인하려는 성격이 더 컸을 거야.’
그냥 맨몸뚱이의 사람들만 저렇게 모여 있어도 먹고 지내는 게 문제가 되는데, 막대한 군수품을 소모하는 군대가 모이면 어떻게 될까.
군수부는 전국의 수로, 도로 및 역참을 이어 붙여, 원활하게 군수보급품을 연대병에게 전달해줘야 한다. 이걸 확장하면, 원정을 준비한다는 뜻이지.
이렇듯 육군의 태세를 정비한다는 건, 육군이 주가 될 거라는 건데... 육군이 노릴 곳은 한 곳 밖에 없다.
바로 요동이지.
또한 강남에서 수입하는 미곡이 줄어들지 않은 것도, 의심의 여지를 줬다.
조선은 식량자급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고 결실을 거뒀다.
특히나 은행을 설립하기 위해서 막대한 양의 비축미를 쟁여놨는데, 이 상황에서 식량을 더 들여오면 곡물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화폐를 유통시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런 무리수를 둘까.’
아직은 조선에 미곡상이 많이 등장하지 않아서, 거의 대부분의 생산물을 조정이 사들이고 있다.
이건 은행의 신뢰도를 높이는 한편, 쌀과 면포의 수량을 통제해서 화폐가치를 안정시키고 기준점을 잡기 위해서였다.
헌데 곡물수량이 늘어나면 당연히 곡물가격이 떨어지고, 동시에 쌀과 화폐의 교환비율이 달라져서 화폐가치가 흔들릴 것 아닌가.
조선에 화폐를 쫙 풀고 추이를 지켜보면서, 조폐부에선 화폐를 더 풀지 아니면 빨아들일지를 결정해서 가격을 형성해야 하는데... 이 전제 작업 자체가 늦어지면 화폐유통이 질질 끌리게 되는 법.
화폐유통에 사활을 걸고 있는 조정 입장에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지.
‘그뿐일까. 아직도 농업과 축산업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리진 않겠지.’
같은 땅을 놓고 농지와 초지는 여전히 경쟁하고 있는데, 곡물가격이 하락하면 초지로 눈길을 돌리는 이들이 더 많을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단순히 농지가 줄어드는 걸 넘어서, 불어난 가축에게 먹이기 위한 사료곡물이 필요하게 될 터... 또 다시 사람이 먹는 곡물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져들게 된다.
둘의 균형을 맞추려는 조정입장에선, 어느 한쪽으로 쏠리도록 조정이 의도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처사지.
‘하지만... 지금껏 화폐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어.’
이 말인 즉. 강남에서 수입한 곡물은 시장에 풀리지 않고, 고스라니 창고에 짱박혀 있다는 뜻 아닌가.
수십만명이 몇 년은 먹을 수 있는 곡물은 비축해 놨는데... 이건 군량으로 치기에는 많아도 너무 많다.
‘요동백성들을 먹일 식량을 비축해 두는 거겠지.’
“제 추론이 맞는 것입니까?”
“맞다.”
연오랑이 슬그머니 되묻자, 태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
‘다들 아주 제대로 작정을 했네. 후...’
허나 그는 오히려 태종의 느긋한 반응에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록 그가 고급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곤 하지만,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가 재깍 알아차릴 정도면... 지방관료라면 모를까 중앙관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소문을 내지 않고 쉬쉬하고 있는 건, 다들 심정으로 동의하고서 요동을 차지하길 바라고 있다는 뜻.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조선관료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진심이었던 모양이야.’
연오랑은 슬쩍 태종의 안색을 살피고선, 남몰래 고개를 내저었다.
미래의 기억이 혼재해서 그런지, 이 시대에 오래 살았음에도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말았다.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아직은 고려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시대. 조선은 고려의 모든 걸 계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요동땅에 대한 고려인, 이 시대 조선인의 인식이다.
과거. 몽골제국이 무너지자, 원나라를 중심으로 각 칸국이 득세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북방에는 동방 3왕가와 고려가 있었는데, 원나라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동방 3왕가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어 전쟁을 했던 사이고, 고려 또한 몽골제국과 싸웠던 나라니까.
그러니 동방 3왕가와 고려가 힘을 합치는 걸 막아야 했고, 또 고려왕이 원에 반기를 드는 것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절묘한 수를 냈는데. 바로 요동을 다스리는 심왕작을 만들고, 그 자리를 고려왕이나 왕족이 겸직하게 내려준 거지.
물론 실질적인 왕으로서, 봉토를 다스리지 못하는 허수아비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됐건 이로서 원나라는 요동을 놓고 동방 3왕가와 고려가 대립하게 만들었고, 또 심왕을 활용해 반항적인 고려왕을 견제하기도 했다.
원래 역사에선 명이 등장해 다 박살이 났으니 심왕작 또한 의미가 없어졌는데... 지금 역사에선 사정이 달랐다.
살짝 억지를 부리면... 심왕작을 고려왕이 겸직했다는 뜻은, 요동이 고려땅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까.
명이 없는 지금 역사에선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이 없지.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주화로 인해 정체성도 강해졌으니, 고토를 되찾겠다는 열망이 원래 역사보다 훨씬 강렬할 수밖에.
“하오나...”
“...?”
“요동을 차지하기 위한 작업을 지난 수년 동안 진행해 오지 않았습니까? 지난날 산동과 남직례의 칭왕자를 제거하면서 요동에도 손을 썼고, 효과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건방지게도 연오랑은 살짝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강남원정을 진행할 당시. 조선군은 천진을 박살냈고 산동 북부와 닿아 있는 북직례 남쪽해안을 초토화시켰다.
까닭인 즉. 북평부의 군력이 약해질수록,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비대하게 덩치를 불린 요동의 군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진은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고, 금주의 요동수군은 병력을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
이게 얼마나 큰 효과를 거뒀냐 하면... 북평부 수군이 완전히 전멸해서, 병력을 줄였음에도 요동수군이 거꾸로 천진 인근에 상륙해서 약탈을 할 정도였지.
수군만 줄었을까. 지금 역사에서의 조선은 미래 중국의 동북삼성 중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를 전부 장악한 상태다.
요동 입장에선 여진과 몽골의 위협이 줄어들고, 우랑카이 3위만 서쪽에 남게 됐으니... 자연스레 육군의 병력 또한 감축할 수 있게 된 거지.
허나 조선이 요동을 차지하기 위한 술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또한 창주를 비롯한 북방신도시에 무역시장을 열어둠으로서, 요동의 시장을 장악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
연오랑은 형형한 눈빛을 뿌리며 말을 이어갔다.
요동의 군력을 줄였으면, 다음 수순은 경제력을 깎아내는 것.
요동의 생산력은 별 볼일 없고, 식량을 비롯한 꽤 많은 생필품을 산동과 강남상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허나 조선이 요동과 바로 맞닿으면서, 보다 싼 가격에 비슷한 품질의 조선물산을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반대로 요동은 우랑카이 3위 및 여진으로부터 북방물산을 사들여 중국본토에 팔아왔는데, 이 시장을 조선에게 빼앗기지 않았나.
요동은 조선과 중국본토에 팔게 없는데, 조선물산은 요동으로 계속 넘어가니... 자연스럽게 시장에서의 조선의 입김이 강력해지고, 요동상인들이 친조선파로 기울 수밖에 없는 거지.
“그리고... 창주의 보련사寺와 요양의 선화사, 심양의 운화사 등이, 어떤 활약을 하고 있는지 익히 아실 거라 사료됩니다.”
“...”
군사, 경제를 잠식해 들어갔으면, 문화적으로 조선의 영향력을 확장할 차례.
요동의 각 도시에 건립된 조선사찰들은 절인 동시에 사교의 장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공작원들이 활동하는 근거지이기도 했다.
스파이라 할 수 있는 조선관료들이 사찰에 머물면서 요동의 정보를 수집해 꾸준히 넘겨왔고, 친조선파 상인과 관료들을 회유하고, 조선불교의 교세를 확장시켜 요동백성들의 마음을 훔쳐나갔지.
“그리하여 어찌되었습니까? 요동인들 중에서 아국의 말과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있고, 아국의 식문화와 복식을 따라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상인들 중에선 옛 명나라의 척관법이 아닌 조선척에 맞춰 거래하는 이들도 상당수지요.”
요동정권이 멀쩡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조선문화를 모방하는 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이 괜히 나왔을까.
이렇게 민간에서부터 조선을 닮아가기 시작하면, 언젠가 조선이 요동을 정복해 통치할 때. 요동백성들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을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거지.
“...”
“...”
허나... 태종은 흡사 한풀이와 같은 연오랑의 발언을 잠자코 들으며, 고개만 까닥거렸다.
녀석의 발언은 꽤나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연오랑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요동에 대한 모략은 조선이 북방에 진출할 때부터 시작됐고, 이 계획의 입안자가 바로 연오랑 아닌가.
연오랑 입장에선 이미 계획대로 착착 잘 진행되고 있는데, 뜬금없이 대계를 비틀어 무력을 쓰겠다고 하니... 이렇게 반론이 나올 수밖에.
그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왜 굳이 지금이냐?”라고 따져 묻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태종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연오랑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남방에서의 일이 급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남주도와 해주도(해남도)에도 아직 힘을 쏟아야 하고... 특히나 새롭게 차지할 남방조차지에 힘을 집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연오랑이 말하는 남방조차지는 미래의 남베트남 사이공 일대.
크메르 제국과 참파왕국이 모두 힘이 빠진 지금은 통치의 공백지라 할 수 있으니... 조선군이 진출하기만 하면 쉽게 복속시킬 수 있고, 땅을 집어삼키기 무섭게 곧장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거둘 수 있는 땅이다.
이모작을 넘어 이기작을 해도 될 정도로 기후가 좋고, 기타 온갖 남방산 특산물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
“어차피 군을 동원해야 한다면, 쉽게 차지해서 쉽게 이문을 거둘 수 있는 남방에 집중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남방에서 얻은 물산과 자원을 활용하면, 요동정벌은 더욱더 쉬워질 겁니다.”
“...”
연오랑은 확신을 담아 말을 토해냈다.
같은 병력과 시간을 투자했을 때. 요동을 정복해서 이문을 뽑아내는 것보단, 남방을 정복하는 게 훨씬 이득이지 않나.
남방 향신료와 특산물만 팔아 넘겨도, 요동정벌에 필요한 전비는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을 거다.
“다 맞는 말이다.”
“...”
연오랑은 ‘그런데 왜 갑자기 전쟁이냐?’라고 말하듯 슬쩍 불퉁스러운 눈빛을 흘렸고, 태종은 그 모습조차 웃음으로 넘기고선 말을 이어갔다.
“허나 변수가 생겼다.”
“...?”
조정관료도 아닌 연오랑이 모든 정보를 받는 건 아니지 않나.
그는 의아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네가 입안한 계획이 너무 잘 들어 먹혀서 문제다.”
“그게 무슨...”
그가 당황스런 표정을 짓자, 태종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요동은 비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세력이다.
명나라 시절에도 중국본토의 지원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군사구역이었는데, 완전히 떨어져 나간 지금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이렇듯 안 그래도 살기가 팍팍한 지역이었는데, 바로 옆에 천국 같은 나라가 등장했다.
“아... 설마?”
연오랑은 태종의 설명을 듣기 무섭게 뭔가가 떠올랐는지,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요동백성들의 이탈이 좌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심해진 겁니까?”
“그렇지.”
“아...”
‘이런...’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기겁해서, 한탄을 흘리고 말았다. 자기 발등을 찍은 꼴이니까.
조선은 거침없이 이민족을 받아들이고 있고, 요동인들은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사찰 및 북방신도시와 무역을 하면서, 발달하는 조선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데... 요동인들에게 동요가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해서 요동인들 중에선 몰래 도망쳐서 조선으로 귀화하려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게 요동의 권력자들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수가 많아졌다는 뜻.
“여러 이유가 있을 거다. 네가 계획한 암계가 성공한 것도 있을 것이지만... 결정적인 건 비단길이 열리고 나서 부터지.”
“아... 요동상인들을 통해서 서방인 포로가 들어오는 걸 본거군요.”
“맞다.”
앞서 말했듯 몰래 도망치는 요동인이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건, 생각만큼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귀화를 생각할 만큼 빈한하게 사는 요동인들은 대부분 농부들이고, 이들 또한 조선인들 만큼 땅에 대한 애착이 깊으니까.
자기 고향을 버리고 아예 말이 안 통하는 다른 나라로 가는 건,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움직이는 거지.
허나 생전 처음 보는 서방인들이, 수천명씩 조선으로 이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상인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이걸 달리 말하면... 조선은 저렇게 많은 이주민을 받아도, 나눠줄 땅이 넘쳐난다는 걸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더불어 요동인이나 서방인이나 이방인인 건 마찬가지니, 저들의 틈에 섞여서 묻어가려고 마음먹은 이들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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