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챕터56. 두드리다 (2)
그게 벌써 몇 달 전이니, 산해관에 남아 있는 화포병의 씨가 말랐을 게 분명. 훈련을 시켜서 내보낸다고 한들,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꼴인데 얼마나 실력을 쌓았겠는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는, 충분히 맞출 수 있는 거리임에도 죄다 형편없이 빗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북평군의 화포가 제일이었다지만, 이젠 아국에 미치지 못하겠지요?”
“그야 당연하지 않겠나.”
둘은 전함 옆으로 풍덩!풍덩! 물보라를 일으키는 포탄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비록 화포를 직접 만들지는 않지만, 해군장군들이 매일 같이 달고 사는 게 화포 아닌가.
포격전투함인 신형전함이 등장하고부턴, 화포야 말로 전함의 핵심이 된 터라... 화포장이 아니어도 함장들은 죄다 화포의 달인이 되고도 남았지.
반대로 재원이 부족한 북평부는 연왕부 시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지금의 우위는 당연한 상황이었다.
“함장님!”
“...?”
둘은 냉큼 달려와 혼합지를 내미는 갑판장을 동시에 바라봤다. 둘 다 함장인터라, 누굴 불렀는지 헷갈렸던 모양이다.
평도전은 히죽 웃으며 이사임을 바라봤고, 이사임은 갑판장이 내민 보고서를 받아서 읽어 내려갔다.
“특별한 건 없는 모양이군?”
“예! 시험항해 때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여기보시면...”
갑판장은 평도전의 눈치를 힐끔 살폈고, 평도전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라.”라고 말하듯 작게 손짓했다.
이미 함장으로 경력을 오래 쌓은 평도전이 이사임과 함께 있는 건, 지금 타고 있는 배가 새로 나온 함선이기 때문.
신형전함이 탄생한지 십년이 넘었고, 대만섬 정벌을 시작할 때 신형전함 2호기가 상용화됐다. 이제 3호기가 나올 때도 됐는데, 이번에는 시험항해를 끝마치기 무섭게 곧장 실전에 투입한 것.
아직은 신입 함장인 이사임이 빠트리는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르기에, 특별히 평도전이 함께 타 있는 거지.
“그래서... 지금까지는 선체복원력에선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기존에 비해 화포를 더 많이 실었는데 말이지?”
“예.”
“호오...”
설명을 듣던 평도전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물었으나, 갑판장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커지면서 확실히 중심을 잘 잡는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야.”
측면에서 일제사격을 하면 화포의 반동으로 인해 배가 출렁이기 마련인데, 배가 커지고 무거워지면서 오히려 더 안정감이 생긴 모양이다.
이번에 만든 3호기는 2호기보다 대략 5미터 정도 더 길어졌는데, 처음 만든 1호기에 비하면 1.3배 정도 큰 수준.
허나 길이가 이 정도로 길어지면 무게와 부피는 곱절로 커지지 않나. 당연히 무장할 수 있는 화포의 수도 늘어나서, 3호기에는 한측면에만 14문의 화포를 장착할 수 있었다.
“무게가 이렇게 늘어났는데, 속도는 그리 떨어지지 않았고 말이지?”
“처음에 속도를 받는 게 오래 걸리긴 하지만, 바람을 받기 시작하면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여기서 돛을 더 달아야 했으면...”
평도전은 말을 흐리면서 갑판을 바라봤다.
3개의 대형 돛대가 달린 갑판은 돛을 다루는 선원들로 가득했고,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돛줄 때문에 시야가 흐려질 지경.
안 그래도 좁은 갑판에 돛을 하나 더 달면, 얼마나 어지러울지 상상도 못하겠다.
“지금은 불가능 하고... 나중에 더 커지면 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돛 하나가 늘어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겠지.”
이사임 또한 같은 생각인지, 평도전의 말을 이어 받았다.
전각 기둥처럼 높게 솟아 있는 하나의 돛대에 달린 돛만 4,5개를 넘어간다. 전부 합치면 십수개가 넘어가는 돛을 전부 한덩어리처럼 움직여야, 배가 제 속도와 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돛대를 더 추가하면,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조작방법을 또 개발하고 익혀야 할 터... 이것만 하는 데도 몇 달은커녕 해를 넘길 지도 모르겠다.
“뭐... 나중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선원을 더 늘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죠.”
“대신 화포병은 늘었지만 말이야.”
“예.”
평도전과 이사임은 갑판장의 보고를 들으며, 계속해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산해관 병사들 입장에선 절대 그렇지 않지만... 포격은 느긋하지만 지겹도록 이어졌다.
이미 해가 바다 밑으로 모습을 감추고 달이 하늘로 떠올랐지만, 조선전함은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쾅쾅쾅! 3대의 전함은 한척씩 번갈아가며, 어둠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산해관을 향해 한발씩 장군전을 날려댔고... 이따금씩 어둠 저편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아스라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전함 뒤에서 보일 듯 안보일 듯 숨어서, 화약보급을 지원해주던 신형무역선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하음... 시간이 됐나?”
“예.”
지루하게 이어지는 포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자고 있던 이들.
온몸을 감싸는 그물침대에 누워, 누에고치처럼 흔들거리고 있던 이들이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밤중에 움직이는 게 익숙한 모양인지, 순식간에 채비를 갖추고 선창 밖으로 나갔고...
“흐암.”
“아으...”
다들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달궈댔다.
이내 곧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다들 재빠르게 그물사다리를 타고 갑판 밖으로 몸을 날렸다.
쿵. 가볍게 발이 닿은 곳은 신형무역선에 딱 달라붙어 있던 작은 나룻배.
“다들 탔나?”
“중대장님이 마지막입니다.”
“끄응... 가자.”
“옙!”
다들 작게 답을 하고선, 조용히 노를 저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째 이런 야행이 익숙하기라도 한 건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해안가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이내 곧 바위와 돌덩이가 두서없이 박힌 해안가에 닿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 알아서 움직였다.
누군가는 나룻배에 싣고 온 곡괭이와 삽을 들고, 누군가는 초를, 누군가는 망태기를 짊어졌다.
“음...”
“왜 그러십니까?”
“징그럽게 커서 말이야.”
중대장은 속삭이듯 말을 하며, 저 편에 어둠에 몸이 잠긴 산해관 성벽을 가리켰다.
미래에 관광지로 변한 성벽들은 그냥 성벽만 달랑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이 시대에는 성벽 위에 나무구조물이 존재했다.
살을 에는 비바람과 추위, 뜨거운 태양빛과 더위, 적의 투사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나무판자집 비슷한 구조물이 성벽에 쫙 깔려 있는 게 일반적이었지.
허나 지금 산해관 성벽은 하도 포격을 얻어맞아서 죄다 무너져 있었고, 어느 한 곳도 성벽 위에서 불을 피운 곳이 없었다.
‘지겹도록 얻어맞았으니, 알아서 겁먹었겠지.’
성벽 위에서 불을 피우면, 조선전함에게 “여기에 쏴주세요.”라고 표시하는 꼴 아닌가.
셀 수도 없이 얻어맞더니, 산해관 성벽 위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가자.”
“예.”
살짝 튀어나온 바윗돌에 몸을 숨기고, 첨벙첨벙 파도를 헤치며 땅에 발을 디뎠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바윗돌 틈새를 파고들어, 두서없이 쌓아놓은 판자들을 치워냈다.
“확실히 안 보이나 보네.”
“저들이 여기까지 나와서 볼 여유가 있겠습니까? 얻어맞기도 바쁠 거고... 이곳에는 상륙할 만한 지점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겁니다.”
“음.”
중대장은 소대장의 발언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신들조차도 두더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산해관 병사들이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그는 불길한 우려를 떨쳐냈다.
허리를 굽혀 개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오히려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땅굴이 넓어졌다.
이 작업을 하루이틀 한 게 아닌지, 땅굴에는 무려 나무로 만든 레일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나무수레가 올려 있었다.
“가지.”
“예.”
모두는 입을 꾹 다물고, 흔들거리는 촛불을 따라서 수레를 밀고 어둠을 개척해 나갔다.
산해관에서 살짝 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파고 들어가지 않았나.
쿵... 가까이 다가갈수록, 작은 진동과 함께 흙가루가 조금씩 떨어졌다. 포격이 이어지고 있는 터라, 여기까지 그 여파가 밀려오는 모양이다.
“잘 살피면서 가라. 무너지면 개죽음이야.”
“걱정 마시죠. 흙먼지 먹어가면서 제대로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 우린 광부가 아니니까.”
“...”
중대장이 슬쩍 주의를 주자. 다들 제 목숨이 걸린 걸 아는지, 장난스런 마음을 밀어냈다.
농담이 아니라, 이번 땅굴작전을 위해서 광산기업에 가서 직접 채굴을 배워왔지 않나.
땅조차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 이게 뭔 헌 짓거리인가 했는데... 자신들에게 이런 임무가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내 곧 땅굴의 끝자락에 도착했고, 다들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곡괭이와 삽으로 연신 흙을 파내고, 파낸 흙은 망태기에 담아서 나무수레에 싣고, 몇몇은 그 수레를 끌고 밖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땅굴을 넓히면 물그릇으로 수평을 확인해 나무레일을 새로 깔고, 광산을 팔 때 배웠던 것처럼 양옆에 지지대를 세워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켰다.
“그래도 여긴 불을 필 수 있어서 다행이군. 광산에선 올빼미처럼 손을 놀려야 했는데 말이야.”
“...”
중대장은 지상으로 작게 뚫어놓은 구멍에, 속이 비어 있는 대나무를 쑤셔 놓으며 중얼거렸다.
위장을 위해 헝겊까지 덮어놨으니, 성벽 위에서 봤을 때는 티도 안날 거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거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들키지 않기를 기도했다.
허나 한편으론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땅굴은 몇 개월에 걸쳐서 계속 파고 있는 거고, 그것도 포격을 할 때만 이어지고 있었다.
포격소음과 진동도 주의를 흩트리겠지만, 실은 밤에 쏴대는 포격 그 자체가 문제 아닌가.
안 그래도 깜깜한 밤에는 장군전이 보이지도 않는데, 심지어 그걸 많이 쏴대지도 않는다.
박자를 맞추듯 한발씩 꾸준히 쏘는 게 고작인데... 오히려 이게 더 산해관 병사들의 사기를 갉아먹고 관성에 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폭발탄이 아니기 때문에 장군전에 직격으로 맞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지만... 장군전의 무게와 위치에너지는 그대로 남아 있지 않나.
재수가 없어서 대들보나 지붕에 맞았다가는 집이 무너지기 십상인데, 어디에 어떻게 떨어질지는 완전히 복불복.
날을 꼬박 새며 포격을 이어가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성벽 밖을 감시할 여유도, 땅굴을 감시할 여유도 없어서, 연대병이 이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거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딱딱! 뭔가 낯선 소음이 곡괭이에서 들려왔다.
“오!”
“찾았다!”
“여기다!”
다들 촛불을 내밀고 달려가 땅을 살폈고, 확실히 색과 강도가 다른 흙더미와 벽돌뿌리를 발견했다.
“드디어 산해관 성벽에 닿은 모양이군?”
“예. 확실합니다.”
모두는 얼굴이 땀범벅이 된 채로 활짝 웃어댔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 아닌가. 확실한 목표가 생긴 것만으로도 그간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이제부턴 옆으로 파고든다. 새벽이 오기 전까지만 하자고.”
“옙!”
중대장의 기운찬 외침에, 다들 목소리를 줄이며 한 몸이 되어 움직였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땅굴 입구에서 초병을 서고 있던 이가 달려와 여명이 시작됨을 알려왔다.
모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왔던 것 그대로 채비를 챙기고 재깍 땅굴 밖으로 나가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쌓아온 흙더미를 챙겨온 건 당연. 미리 준비해 놓은 예비용 나룻배에 흙더미를 잔뜩 쌓아놨고, 줄에 묶어 끌고 갔다.
전함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흙을 바다에 쏟아 붓고선, 두더지들은 다시 무역선 위로 몸을 날렸다.
“산해관 성벽을 찾았다고?”
“예. 함장님.”
“고생했다.”
평도전과 이사임은 직접 보고를 하러온 중대장을 보며 공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땀에 범벅이 되어 있건만,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얼싸안고 좋아했다.
“성벽을 따라서 계속 파면, 얼마나 걸리겠나?”
“못해도... 2,3달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좋군.”
중대장은 살짝 미심쩍게 답을 했지만, 평도전과 이사임은 활짝 웃으며 우려를 날려줬다.
땅굴은 전형적인 공성방법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갈아 넣어서 단기간에 진행하는 작전이다.
지금처럼 고작해야 중대 하나로 몇 달 동안 야금야금 파는 건, 상리에 한참 어긋나는 행동. 허나 이렇게 상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산해관 병사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것 아닌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작전이 시작되려면 앞으로도 한참 남지 않았나.’
평도전과 이사임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고선, 다시금 히죽 웃고 말았다.
“가서 푹 쉬게. 정말 고생했다.”
“옙! 충성!”
해가 떠오를 때까지 포격을 이어간 전함은, 마지막 용트림을 날리고선 몸을 비틀었다.
산해관에서 벗어난 전함은 발해만을 자기집 앞마당마냥 헤집으며, 서쪽으로 쓱 훑어 내려갔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천진.
거대한 전함이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몸을 키우는 게 안보일 리가 있나.
천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나룻배들은, 비 맞은 개미들처럼 순식간에 흩어져갔다.
피라미들까지 굳이 상대해줄 필요가 있나.
고깃배들을 무시한 전함들은 위풍당당하게 천진 부두 코앞까지 다가갔다.
슬슬 속도를 줄이는 전함 위에서, 평도전과 이사임은 망원경을 들고 천진항을 샅샅이 살펴나갔다.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도 전에 비하면 한참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이제 확실히 해안과 부두 쪽으로 내려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흐음...”
둘은 아직도 반파되어 재건되지 않은 천진항을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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