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 챕터56. 두드리다 (3)
천진은 명나라 때엔 직고라고 불렸고, 명나라 이전 원나라 시절에도 강남의 물자를 대도(북평)으로 옮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당연히 그 크기도 어마어마했고, 명이 등장해 연왕부가 생겨났을 때도 번창했으며, 북평부 시절에는 무역항의 역할은 못하게 됐지만 수군기지가 되면서 새롭게 단장됐다.
그러니 조선해군이 천진수군을 괴멸시키고 천진항을 불태웠음에도, 내륙에 위치한 천진도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허나 조선군은 강남원정을 끝내고 나서도 이따금씩 천진을 향해 무력시위를 해왔고, 요동수군이 천진을 약탈하러 오기도 했지 않나.
해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천진항은, 예전의 찬란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폐허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확실히 전보단 반응이 적어졌군?”
“하루이틀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슬슬 무뎌질 때도 됐죠.”
“음...”
둘은 망원경의 둥근 시야 너머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요동백성들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산해관을 처음 두들기고 왔을 때는, 또 다시 조선군이 대규모로 공격하는 줄 알고 난리가 났었다.
허나 지금은 뭐랄까... 도망을 치긴 치는데, 열성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눈치를 보며 미적거리는 느낌이랄까.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과연 그 말이 맞는지, 한참 후에야 몇몇 천진수군 몇몇이 부두 근처로 빼꼼 나와서 바다를 살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기. 보이십니까?”
“봤네. 중대 하나 정도로 보이는 군.”
“예.”
저게 전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병사들이, 무너져서 복구도 못한 천진성벽 위에 오르는 게 보였다.
“천진수군은 천진항구 외곽에 주둔하고 있겠지?”
“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부두를 사용할 수 없으면 항구로서 의미가 없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해안으로 나올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선발대만 남겨두고 본대는 천진도시로 이전했거나,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을 겁니다.”
“음...”
평도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갑판장을 불렀다.
“적들의 도착 시간은 확인했나?”
“예. 전에 왔을 때보다 느려졌습니다. 확실히 반응이 무뎌지는 모양입니다.”
“나쁘지 않군.”
‘답답할 거야. 아마.’
이사임은 성벽 위에 절도 없이 마구잡이로 서 있는 천진수군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산해관은 샌드백이 되어 산발적인 조선군의 공격을 얻어맞고 있는 중이다.
헌데 천진에 와선 그저 쓱. 구경만 하고 돌아갈 따름.
지금 전쟁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텐데... 그렇다고 지금까지 공격을 안했다고 해서, 천진을 그냥 무방비로 놔둘 수 없지 않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일 거다.
“산해관으로 병력을 충원했을 테니... 천진도 비슷하겠지?”
“글쎄요...”
평도전의 물음에 이사임은 다시금 자신 없는 대답을 내뱉었다.
산해관은 연신 두들겨 맞고 있으니 수비 병력을 충원했을 터,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천진도 비슷하지 않을까.
“첩자를 뿌리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쉽게 됐어.”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비집고 들어갈 구멍이 없으니까요.”
“그렇지. 쯧.”
아쉬움을 담아 평도전은 가볍게 혀를 찼고, 이사임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북평부가 거래를 하는 곳은 태행산맥 서쪽의 산서가 끝. 육로로 닿아 있는 요동,산동,하남 모두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상거래는커녕 백성들의 이동까지도 막혀 있는 터라, 첩자를 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돈으로 해결하면 좋겠지만...’
요동에 첩자를 뿌린 방법을 동원하면 좋겠지만, 천진을 비롯한 북평부가 만신창이가 된 건 조선 때문 아닌가.
돈에 굴복해 조선군의 첩자가 될 만한 이들도 적고, 설령 된다고 한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하층민이 전부일 거다.
“상륙지점은 꾸준히 살피고 있지?”
“물론입니다.”
이사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화제를 돌렸고, 갑판장은 질문을 듣기 무섭게 재깍 답을 던졌다.
애초에 이러고 있는 이유는 천진의 방어태세를 살피면서, 상륙작전을 짜기 위해서 아닌가. 가장 주요한 임무를 놓치고 있을 리가 없다.
“사실 상륙하는 건 문제가 아닐 걸세. 문제는 해하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냐는 거겠지.”
“예...”
천진항구와 천진도시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고, 둘 사이는 천진을 가로지는 큰 강인 해하강을 비롯해서 여러 강줄기로 이어져 있었다.
원나라, 명나라 시절에는 이 강줄기를 통해서, 천진항으로 넘어온 엄청난 양의 강남물산을 북평으로 옮겼으니...
‘강폭과 수심은 전함이 오르내리기에 충분할 거야.’
평도전 또한 이걸 알고 있을 터, 우려하는 부분은 다른 거였다.
“포대를 걱정하시는 것이겠지요?”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준비를 하지 않았겠나? 천진이 불탄지 벌써 몇 년인가. 저들은 아국의 공세를 대비할 방법을 찾았을 거고, 상륙을 막을 수 없다면 천진으로 오는 길목을 막으려고 했겠지.”
원래 역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2차 아편전쟁 당시 서방열강은 천진을 거쳐 북경을 공격하려 했고, 천진항에 붙어 있는 대고포대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지 않았나.
지금은 그때와 해안선의 모양이나 항구의 크기도 다르지만, 방어 개념자체는 대동소이했다.
“허나 본래 있던 천진성벽과 포대를 무력화 시켰으니, 강 안쪽에 새로운 포대를 만드는 건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
“배가 없으니 천진수군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병력보존을 위해서라도 재편을 해야 했을 겁니다. 특히나 천진을 지탱해주던 북직례 남부가 쑥대밭이 됐으니 그곳으로 병력을 옮겨 재건해야 했을 텐데... 그 일이 정쟁과 맞물려 지지부진해지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요새를 새로 쌓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럴지도.”
강남원정 당시. 조선군은 북직례 남부를 휩쓸면서 백성들은 남겨두고 호족, 지주, 관아등만 골라서 약탈하고 불태웠다.
일부러 분란의 불씨를 남겨 놓았는데... 이 무주공산은 차지하기만 하면 자신의 세력이 되니, 북평부의 관료와 장군들은 알면서도 정쟁의 불길에 손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륙을 꼭 천진으로만 해야 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전함이 워낙 커서 접안하는 게 힘들긴 하겠지만, 다른 어촌마을로도 상륙을 하려하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겠지. 그래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고 말이야.”
“...”
이사임은 대답 대신 히죽 웃었고, 평도전 또한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저들은 아국의 의도를 알 수 없을 테니... 골치 아플 거야.”
“예. 계획대로 잘 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둘은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음흉한 미소를 계속 흘려댔다.
조선해군이 북평부를 열심히 괴롭히고 있을 때.
한동안 잠잠했던 호주와 의주 일대도 번잡스러움이 늘어나 있었다.
물론 요동 및 산동과 무역을 계속 해온 호주와 의주는 언제나 시끄러웠지만, 이번의 소란은 성격이 조금 달랐다.
그간 잘 보이지 않던 조선군이 우르르 몰려와서 주둔지를 건설하고, 진짜 공사를 시작했으니까.
“...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난들 알겠나? 조용히 지나가게.”
“예.”
언제나처럼 요동반도 금주와 호주를 오가며 거래를 해온 요동상인은, 생전 처음 보는 게르 군락지를 보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호주를 오가면서 조선군을 못 본 건 아니지만, 저렇게 많은 병력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건 또 처음 봤다.
“조선이 요동반도 쪽으로 내려오는 건가...?”
“설마요. 들어보니, 저치들은 동팔참을 확장하고 있답니다.”
“음...”
상단주는 부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속으로는 불길한 마음을 날리려 애를 썼다.
동팔참은 원나라 시절부터 천산산맥을 뚫고, 조선과 요동을 이어주는 사행로이자 무역로였다.
명이 요동으로 진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명과 조선이 각을 세우고 그 사이에 낀 여진이 세력을 이루면서, 그 위용이 흐릿해졌지.
지금 역사에선 퍽 달라졌다.
명이 망하자 조선은 의주를 개방했고, 요동상인이 동팔참을 거쳐 의주로 와서 무역을 이어갔다. 다만 이때는 어느 누구의 땅도 아닌, 어쩌면 여진의 땅이었지.
이후. 조선군이 거용관을 무너뜨리고 돌아오면서, 이만주를 위시로 한 건주위 여진을 쓸어버리면서 온전히 조선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니 동팔참을 확장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는데... 문제는 왜 이제 와서 이러냐는 점.
“안 그런가? 동팔참을 확장하려면 진작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나?”
“에이. 상단주님도 참... 말이나 나귀로 짐을 날라봐야 얼마나 나르겠습니까. 배를 이용하는 게 훨씬 편하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조선이 북방으로 진출해서 도시를 많이 세웠으니, 거길 채워 넣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서,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수로를 이용하면 비록 돌아가야 하긴 하겠지만, 육로와 수로의 수송량은 비교할 수가 없지 않나.
자신처럼 소규모 상단이라면 육로든 수로든 차이가 없겠지만, 큰 상단은 큰 거래를 하기 위해서라도 수로를 선호했을 거다.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였고, 여유가 됐으니 동팔참을 보수하는 거겠죠. 사실 요양과 심양 근처에 조선의 무역도시가 생기면서, 동팔참을 통해 의주까지 오는 내륙 상단이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겠지...”
조선이 완전히 북방을 차지하기 전엔, 동팔참을 유지하고 확장해 온 건 사실 요동상인들 아닌가.
이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니... 이제 확장공사를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려가 가시지 않은 건, 처음에 들었던 불길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기 때문.
‘천산산맥 남쪽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상단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봤다.
그간 평화롭게 꿀을 빨게 해준 교역로가 어째 불길에 휩싸이는 환상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조선이 북방으로 진출하면서 얼추 요동과의 국경선이 정해졌는데... 그럼에도 애매하게 유지되고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상단주가 지나온 길이었다.
천산산맥 남쪽 해안가는 요동반도에서부터 의주,호주까지 평탄하게 이어졌고, 이곳에 살던 몇몇 여진부족, 요동인들은 조선이 죄다 흡수해서 데려갔다.
무주공산이 되어버렸는데, 요동과 조선 모두 진출하기에는 꽤나 불편했지.
요동 입장에선 굳이 사람도 없는 땅까지 영역으로 만들 여력이 부족했고, 조선 입장에선 요동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요동반도 끝자락 금주. 미래에는 대련, 여순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요동을 먹여 살리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이곳과 의주,호주는 말 타고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조선이 계속 남하하며 금주에 접근하는 건, 요동 입장에선 목 밑에 비수가 꽂히는 셈인 거지.
해서 조선도 요동의 입장을 봐주면서 조선군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렇다고 요동과 전쟁을 하려는 것도 아닐 거고...’
전쟁하려고 하는데, 요동상인이 호주로 가서 거래하는 걸 허락 할 리가 있나.
의주,호주는 물론 창주를 비롯한 북방도시에서도 거래는 계속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미래에는 전쟁 따로 경제 따로 움직여도... 이 시대는 전쟁이 시작되면, 일단 문부터 걸어 잠그는 게 기본.
상단주는 해답을 알 수 없어서, 계속 꼬여만 갔다.
“정말 모르겠군...”
“예?”
“아니다. 북평부 놈들을 패주는 것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
“...”
상단주는 혼잣말을 흘리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이어갔다.
조선전함이 처음 요동반도 금주 앞바다에 나타나서, 해안을 순시할 때 얼마나 난리가 났던가.
그땐 조선군이 금주로 쳐들어오는 줄 알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허나 허무하게도 조선전함은 그대로 지나쳐 산해관을 두들기기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이젠 요동수군조차도 조선전함을 보면, “쟤들 또 산해관 치러 가는 구나. 화약이 아깝지도 않나?”라고 생각할 뿐, 날을 세우고 경계하거나 대응하는 모습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지.
물론 조선해군이 요동반도를 돌면서 측량하고 해도를 만들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르고서 말이다.
“부장님!
“어. 왔나?”
“도착했습니다.”
“그래? 가보지.”
기존에 없던 낯선 명칭. 부장이라 불린지 벌써 몇 년인가.
나이를 먹었음에도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버린 황보인은, 부하의 부름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쪽으로!”
“그건 저쪽이다. 여기로 오지마!”
“누가 이걸 여기로 가져왔어! 옆 창고에 놓는 거 몰라!”
이젠 조선 관아의 표준처럼 자리 잡은 3층 관아에서 나오기 무섭게, 온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울려 펴졌다.
시장바닥도 이런 시장바닥이 없지만, 군수부에서는 늘 있던 일 아닌가.
최고 수장인 황보인을 앞에 두고도 다들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고, 황보인 또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걸음을 옮겨갔다.
동시에 주변을 가볍게 쓱 훑어보는데, 휘파람이 절로 난다.
전에 없던 전각들이, 새로 만든 자갈대로를 따라서 쭉쭉 올라가고 있다.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루가 달라지게 커지는 군?”
“사람이 몇입니까. 덕분에 저희 등골만 휘고 있죠.”
“...”
앓는 소리를 하는 부하를 보며, 황보인은 피식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선이 차지한 동팔참의 끝. 과거 요동의 영역이었던 연산관이 조선으로 편입되고 난 후. 이제야 제대로 빛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간 연산관은 요동-의주를 잇는 무역로의 시작점으로 사용되었지만, 조선이 북방으로 진출하자 그 효용성을 잃어버렸다.
조선은 타국인이 조선 강역으로 들어오는 걸 엄격하게 통제했기에, 무역도시가 아닌 연산관에 굳이 요동상인이 찾아올 필요가 없었으니까.
허나 연대병이 무려 1만이 동원되어 이곳을 개발하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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