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 챕터56. 두드리다 (4)
하지만 그래봐야 얼마나 크겠나. 얼마 가지도 않아서 자갈도로는 끊어졌고, 푸른빛으로 물든 첩첩산중이 눈앞을 가렸다.
전과 달라진 점은, 그 푸른 물결 속에서 한줄기 황토빛이 맴돈다는 점.
“여기까지 오긴 왔군.”
“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황보인과 부하는 서로 마주보며 히죽 웃고선, 냉큼 새로 넓힌 길로 다가갔다.
이젠 익숙해진 깃발. 기하학적인 문양이 박힌 소대깃발, 중대깃발이 여기저기서 휘날리고 있었고, 유독 한자리에 깃발이 모여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한걸음에 달려가니, 몰려 있던 이들이 먼저 황보인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충성!”
“충성.”
황보인은 경례를 받으며 가볍게 훑었고, 소매 끝에 수를 놓은 계급장과 두정갑 어깨에 탈착식으로 부착한 금속견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계급을 보건데, 예상대로 중대장들이 맞는 모양이다.
“길을 다 뚫었다고?”
“예. 저기 보시죠.”
다들 자신들이 한 일을 자랑하고 싶기라도 하듯, 환하게 웃으며 산길 입구를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저쪽 산길을 따라서 보급품을 실은 이두마차는 물론, 포가를 끌고 있는 화포 기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내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 구간에 걸쳐서, 못해도 전마 6마리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도록 확장했습니다.”
“고생했네.”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계획을 진행했음에도, 황보인은 입이 쩍 벌어진 나머지 공치사를 마구 날려댔다.
‘전과 비교하면 천양지차군.’
예전 동팔참은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작은 산길 아니었나. 그 산비탈을 깎아내서 도로를 확장시킨 거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대비했고?”
“물론입니다. 비스듬하게 깍은 후에 지지대를 쌓고, 관목과 잔디를 심어놨으니까... 갑자기 폭우가 내리지 않는 이상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음.”
‘하긴 이젠 더 뭐 할 수도 없겠지.’
사람의 힘으로 할 만큼 했으니, 남은 건 하늘의 뜻 아니겠나. 지켜보는 외에는 달리 답이 없다.
황보인의 들뜬 표정을 읽었는지, 중대장 중 한 명이 계속 보고를 이어갔다.
“비록 자갈도로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땅에 박혀 있던 나무뿌리와 바위를 제거해서 다져놓지 않았습니까. 지금부터 계속 돌아다니면, 저절로 굳어질 겁니다.”
“그렇겠지.”
황보인은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육군이 각 지방에 머물면서 꾸준히 산길을 확장하고 개척을 해온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겨울에 북방땅에서 산길을 만드는 게 쉬울 리가 없지.
꽁꽁 얼어붙은 땅을 녹이기 위해서 석탄과 목탄을 땅에 심어놓고 억지로 불을 지르기도 했고, 화약을 아끼지 않고 심심치 않게 사용해서 땅을 뒤집어엎었다.
그 고난의 결과가 제대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개고생만 죽도록 한 셈이 됐을 거다.
“이제 호주와 연산관이 곧장 이어졌단 말이지.”
“흐흐. 그렇습니다.”
황보인의 속뜻을 알아차리고선, 하급지휘관들 모두가 실실 웃어댔다.
산길인 동팔참은 그간 조선이 만들어 놓은 북방수로에 비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물량보다 속도가 더 중요해지는 경우가 있지 않나.
군대의 경우에는 특히나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젠 의주,호주에서부터 연산관까지 고작해야 사나흘이면 주파를 할 수 있게 됐다는 뜻. 그것도 소수병력이 아닌 대병이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진격로가 완성된 것 아닌가.
연산관에서부터 요양까지는 앞으로도 천산산맥이 계속 이어지지만, 이곳은 전부터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던 곳.
여기서부턴 전부터 야금야금 길을 넓혀왔기에, 작업속도는 더욱 빨라질 걸로 보였다.
“맞나?”
“예. 그럴 걸로 보여 집니다. 비록 회령령과 청석령의 산길이 거칠다고는 허나, 거리가 먼 건 아니지 않습니까? 충분히 기간 내에 길을 넓힐 수 있을 겁니다.”
“음...”
‘하긴 요동상인이 꾸준히 이용해 왔을 테니까...’
동팔참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회령령과 청석령은 험준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암절벽으로 가득하거나 지반이 암석으로 이뤄진 고개는 아니다.
지난 세월동안 굳이 길을 넓히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마냥 불가능하기 때문은 아닌 거지.
‘여름이 한껏 다가왔으니까, 일은 더 쉬워질 거고... 연대병들도 이제 적응을 했겠지.’
지금 조선군은 원래 계획을 변경해서, 삼남지방에 주둔하던 병력들까지 전부 압록강 위로 올려놓았다.
사람도 북방의 기후에 적응을 해야 하지만, 전마 또한 북방의 풍토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작년 겨울부터 땅만 파고 있었으니, 다들 이제 일이 손에 붙었을 터... 땅이 물러진 여름에는 더 빨리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청석령만 넘어가면, 그때부턴 광활한 요동평원이 이들을 반기게 될 거다.
‘그러니.’
“동팔참을 완전히 확장하고 나면...”
“예. 의주에서 출발한 사단병력이 10일내로 요양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겠죠.”
황보인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중대장 중 한명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이 정도 속도라면. 조선군이 의주에 출발한 걸 요동상인이 알아차려도, 그들이 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조선군이 먼저 요양에 도착할 거다.
‘좋아. 그럼 주의를 해야 하는 건...’
황보인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서,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중대장들을 바라봤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떻지? 땅만 파고 있으니 불평이 나올 법도 한데?”
“그래서 순번을 나눠서 집체교육은 따로 시키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뭐... 북방이라 추위를 타는 게 문제지, 본토에서도 해왔던 작업이지 않습니까?”
“기병지휘훈련도 하고 있으니, 문제될 건 없어 보입니다.”
“음...”
황보인은 가자미눈을 하고서, 입 발린 허풍을 내뱉는 게 아닌지 의심해 봤지만... 다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면서 “지금이라도 확인해 보든가?”라고 자신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
‘다행이군.’
저렇게 반응하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연대병이 훈련은 안하고, 몇 달 동안 땅만 파고 있으니...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허나 군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군율이고, 군율을 세우는 방법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건 명령체계를 몸에 익히게 만드는 것.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사판이나 전장이나... 손에 쥐고 있는 도구가 다를 뿐, 병사들이 움직이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장에 돌입해 난장판을 눈앞에 둔 혼란한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아군의 위치를 알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는 것.
이게 바로 지휘체계고,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도 이걸 유지하기 위해서 대대장,부대대장부터 소대장,부소대장까지 내려오는 지휘체계를 만들지 않았나.
이 지휘체계는 공사판이나 전장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거라서, 생각 외로 전투력 감소는 일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주둔지에서도 하루 종일 훈련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순번을 돌아가면서 하고 있으니... 지금까지의 작업으로 손이 무뎌지진 않을 겁니다.”
“음.”
황보인의 의심을 불식시키듯, 누군가 첨언했다.
‘맞는 말이야.’
사람은 강철이 아니다.
매일 같이 하루 종일 훈련한다고 해서, 실력이 끝없이 상승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부상을 입거나 탈이 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
해서 본토에 주둔하고 있을 때도, 사단전체가 모여서 하는 훈련은 달에 한번 정도 있을 뿐이었고, 그 외에는 연대 안에서도 소규모로 각자 훈련을 하지 않았나.
이건 미래 군대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인무기술 훈련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일과시간에는, 어차피 삽질과 괭이질을 하고 지냈으니... 병사들 입장에선 이곳에서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해서 딱히 다른 건 없는 거지.
“사실 저희보다는 북쪽에 있는 연대병들이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치들은 해야할 일이 더 많을 테니까요.”
“춥기도 더 추웠을 거고 말이죠.”
“흐흐. 거기로 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입니다.”
자신이 걸리지 않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중대장들은 저 먼 곳에 있을 동료들을 약 올리듯 헤실헤실 웃어댔다.
조선육군 일부가 동팔참을 한창 개척하고 있을 때.
북쪽. 사주(사평)일대도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조선은 북방으로 진출해 여진을 흡수했고,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두면서 신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곤 수로를 통해서 각 신도시를 이어 붙였지.
그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창주에서부터 송주로 이어지는 수로였다.
이곳을 통해 몽골과 무역을 하면서 목줄을 쥘 수 있었고, 비단길이 열린 후엔 사방의 문물이 들어오는 직접적인 관문이 되었으니까.
허나 이건 조선 입장에서 그런 거고, 요동 특히나 심양파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개원 바로 위에 위치한 사주(사평)이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당연히 무역이 활발해지기 마련, 요동상인이 가장 많이 찾는 무역도시가 바로 사평이었으니까.
헌데 번잡스럽지만 평화로운 사주에 변고가 발생했다.
2만이 넘는 조선군이 갑자기 튀어나와 사주일대에 주둔을 시작. 그리고는 거침없이 땅을 뒤집기 시작한 거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성형요새마냥 비스듬하게 기울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수벽. 그 위에 올라와 있던 조비형과 대대장.
둘은 망원경으로 파릇파릇하게 피어오른 광활한 대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주 일대는 광물자원이 많아 광산기업이 많이 들어서긴 했지만, 그래도 밭농사는 얼추 가능한 지역. 그 탓에 키가 작은 콩과 수수, 보리와 같은 작물이, 깊게 파인 이랑고랑을 따라 줄줄이 몸을 키우고 있었다.
허나 둘이 감탄을 한 건, 밭이 아니라 그 밭을 관통하며 세워지고 있는 거대한 수벽. 사주는 동요화로 이어지는 초홍취하가 흐르고 있었고, 그 강을 따라서 치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로!”
저쪽에선 갯벌처럼 발을 푹 담구고, 강 옆구리에서 연신 흙을 퍼 올리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무작정 삽을 들고 들어간 이들도 있었고, 거중기와 비슷한 기계를 활용해 협업해서 큼지막한 삽을 함께 움직이는 이들이 보였다.
“이곳으로 옮겨! 이쪽이다!”
그 옆에선 강에서 퍼 올린 진흙과 자갈을, 온통 흙투성이가 된 마차에 옮겨 실어 끌고 가는 이들이 보였다.
그 종착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는 수벽으로, 강에서 퍼 올린 흙으로 다시 벽을 쌓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강줄기를 비틀어 판 수로와 밭을 만들면서 나온 흙더미들이 수북하게 쌓여서, 나무레일을 깐 마차 위에 실려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게 보였다.
다만 특이한 점은... 이 작업을 하는 이들 중에서, 그냥 평범한 옷을 입고 뛰어든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
아니다. 오히려 연대병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사주의 백성들이 의외로 적극적이군.”
“일당을 주는 것도 있지만...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로정비는 저희보단 저들에게 더 필요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다만 지금까진 여력이 없어서 못했을 뿐이었죠.”
“그럴 거야.”
전형적인 무관의 길을 밟아 어느덧 사단장 자리에 오른 조비형이지만, 군부가 만들어진 후에 별의 별 일을 다해보지 않았나.
그중 가장 많이 한 일이 개간이었으니, 사주 백성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놀람을 감출 수 없는 건.
“저들 중 반수가 여진과 몽골출신인데... 이젠 조선백성이 다됐군?”
“그간 고생한 게 얼만데...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대장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며 이죽거렸고, 조비형 또한 그저 웃고 말았다.
‘성품과 기질도 확실히 바뀔 수 있나 보군.’
농사에 진심인 건 조선인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젠 저들도 농사에 진심이 되었나 보다.
물론 기후가 기후인터라, 사주는 광업과 목축이 대세이긴 하지만... 저 꼴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든 농업도 키워나갈 것 같다.
“여기도 이러면, 초소태하를 정비하는 것도 잘 되겠군.”
“그럴 겁니다.”
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요동땅도 조선만큼 수계水系가 복잡하게 엮여 있고, 초소태하는 동요하로 흘러가 요하강으로 합류해 요동반도로 빠져나간다.
지금까진 여력도, 필요도 없어서 치수공사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작업을 진행하는 중. 그럼에도 생각보다 꽤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차피 있던 강줄기에, 과거에도 사용하던 수로였기에, 운하를 파는 등의 대공사가 아닌 물줄기를 잡아주는 정도로 그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망원경으로 주변을 보던 조비형의 눈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광경이 걸려들었다.
콰콰쾅! 땅과 암석을 부수기 위해 화약을 터트리자, 저 멀리서 공사장을 보고 있던 요동상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새로 온 이들인가 보군?”
“폭음에 놀란 걸 보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요동군도 화포를 사용하고, 그들 또한 한족답게 춘절과 같은 명절에 폭죽을 많이 날린다곤 하지만... 이렇게 공사현장에서 시도때도 없이 화약을 터트리는 일은 없지 않나.
생각보다 화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둘은 공사를 지휘하면서 저런 꼴을 많이 봐왔다.
“확실히 우리가 거슬리긴 거슬리나 보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과 비교할 수 없는 병력을 끌고 왔으니까요.”
“음...”
‘하긴 나라도 그럴 텐데... 골치가 꽤나 아플 거야.’
조비형은 이를 드러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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