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챕터56. 두드리다 (5)
사주를 신도시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조선군이 주둔해 있었다.
다만 그 수는 많아봐야, 성형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연대 두엇 정도였지.
허나 지금은 무려 2만이 넘는 기병이 왔고, 그들을 보조할 군수부소속 보조군도 수천명이 딸려왔다.
문제는 사주와 개원, 심양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점.
이곳은 어딜 봐도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평원이니, 말을 타고 질주하면 사나흘이면 심양에 도착할 수 있다.
당연히 요동으로선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고, 조선군이 처음 진출했을 때는 이곳 또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지.
‘일부러 보여준 것도 있었으니, 더욱 우리의 의중을 알 수 없었을 거야.’
2만이 넘는 병력이 한자리에 모여 지휘체계를 하나로 통일 했다면, 흔히 말하는 합을 맞춰봐야 할 것 아닌가.
해서 처음 모였을 땐, 광활한 대지를 대상으로 신나게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돌아다녔었다.
그때 화들짝 놀란 기억이 있을 테니, 사주의 조선군을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숨길 수 없을 거다.
문제는 조선군이 이렇게 보란 듯이 움직여 놓고서, 정작 전쟁은커녕 땅파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점.
“우리의 의도를 알까?”
“헤아리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전쟁 아닌 전쟁은 정작 산해관에서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저희가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이 많을 겁니다.”
“...”
조선이 산해관을 공격한지 벌써 몇 달이 흘렀지 않나.
처음에는 다들 “조선이 북평부를 또 공격하나?”라고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지금은 관심도 시들해졌다.
대규모 공성전도 아닌 전함을 동원해 포격만 하고 있으니, “대체 지금 뭐하자는 거지?”라는 의문만 증폭됐지.
이런 와중에 조선군이 요동북부로 진출하자, “어디를 치는 거지? 전쟁을 하긴 하는 건가?”라는 선택지만 더욱 넓어진 것.
‘계획대로 잘 되는 군.’
조비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를 더듬었다.
변경에 대군을 배치했다는 건 언제든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위협인데... 조선군은 여기서도 상리에 벗어난 움직임을 보였다.
자잘한 신경전은커녕 조선은 “우린 너희와 안 싸운다. 우린 공사하러 왔는데?”라는 명분을 내세워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고, 실제로도 공사를 하고 있는 거지.
헌데 조선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중국본토의 다른 세력처럼 요동이 강 건너 불 보듯 볼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말했듯 사주와 심양은 너무 가까워서, 미리 대비를 해놓지 않으면 뭐 해보기도 전에 조선군이 개원과 심양을 포위할 테니까.
게다가 사주에만 조선군이 있을까.
찾아가서 볼 수 없으니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호주를 비롯한 다른 신도시에도 조선군이 모여 있다는 소문은 들었을 거다.
‘문제는...’
“이제 슬슬 요동은 피로가 쌓였겠지?”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주에 오는 요동상인이나, 심양에 있는 첩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들고 일어설 정도는 아니지만, 삼삼오오 모여서 대놓고 불평할 정도는 된다고 하더군요. 제때 씨를 못 뿌린 지역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음...”
‘역시.’
조비형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렇게 피 말리는 대치 아닌 대치 상황을 유지하면, 결국 체급 싸움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조선 또한 대병을 모아뒀으니 군비가 마구 소모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상비군이라서 민간에 주는 영향은 적고, 원래 소모하는 유지비가 있지 않나.
거기에 이것조차 아까워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고 있고 말이다.
지금은 군사작전을 위해서 이러고 있지만, 나중에는 이게 다 민간에서 쓰일 인프라를 깔고 있는 거니... 마냥 돈을 땅에 버리고 있는 건 아니지.
반대로 요동은 군호제를 유지하고 있으니, 병력을 동원하려면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을 붙들어 놓아야 한다.
허나 지금처럼 병력이 열세이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와서 대비해야 하지 않나.
이러면 할 일 없이 밥만 축내는 병력의 유지비에, 그 인원이 생업에 종사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곱절로 사라지는 꼴.
안 그래도 인구가 턱없이 적은 요동으로선, 지례 겁먹고 스스로 말라죽는 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지.
‘작년 겨울부터 주둔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순번을 정해 돌린다고 해도, 올 봄에 씨를 뿌릴 농부들이 요새에 붙들려 있었겠지.’
차라리 산해관처럼 직접 공격이라도 당하고 있으면 불만이 수그려들 텐데, 지금 요동은 전운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다.
조선군은 땅만 파고 있고, 요동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꼴.
요동군 지휘관이라면 몰라도 요동백성은 “조선과 사이좋게 지낸 게 수십년인데, 쓸데없이 이게 뭔 짓인가.”라는 생각이 피어오를 수밖에.
“계속 둘러보지.”
“예.”
조비형은 생각을 가다듬고,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수벽을 타고 내려와 걸음을 옮겼다.
발길이 닿은 곳은 서주 신도시를 벗어난 서쪽. 나지막한 산세와 계곡이 함께 어울러져 있는 산맥 지류의 끝자락이었다.
요동은 말이 벌판이지, 실상 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죄다 산세로 이어지는 지역 아닌가.
이 산맥은 요동의 많은 산맥 중 하나였고, 사주를 관통하는 강을 비롯해 다른 강들의 본원이 되는 호수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산속 저편에서 부산스러움이 느껴졌고... 한걸음에 달려가자, 숟가락으로 파먹은 것 마냥 움푹 밀려 있는 공사장이 눈을 사로잡았다.
“호오... 벌써 그럭저럭 집들이 만들어졌군? 해군이라서 걱정했는데 말이야.”
조비형은 흡사 화전민 마을처럼 엉성하게 만들어진 제재소와 조선소를 보면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해군이 어쩌면 저희보다 삽질과 망치질은 더 잘할 겁니다.”
대대장은 실없이 웃으며 대꾸를 늘어놨고, 조비형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되묻고 말았다.
“설마...”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짜로 그렇던데요? 저치들은 신병도 아니고요.”
“그래?”
“예.”
대대장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가볍게 이야기를 풀었다.
해군이 배가 부족해서 육상훈련에 주력하는 건 익히 퍼진 사실.
또한 필연적으로 항구와 요새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해군으로서는, 자신의 주둔지를 자신의 손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더군다나 아무리 국영선소의 장인들과 군수부 보조군이 배를 만들어준다지만... 해군도 배를 수리하고, 유사시에 사용할 예비 부품은 만들 줄 알아야 하지 않나.
그렇다보니 해군병은 자연스레 목수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톱질과 삽질에는 이골이 나기 마련이었다.
“저희는 개간과 개척을 주로 했지만, 저들은 그 땅을 활용하는 걸 주로 했으니까요.”
“그럴 수도...”
조비형은 동의를 담아 말을 흐리고선, 망원경으로 제재소 인근을 쓱 훑어봤다.
이미 만들어 놓은 배들이 땅 위에 올려 산처럼 쌓여 있는데... 그 정체는 작은 나룻배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 옆에는 바싹 말린 나무판자들이 겹겹이 쌓여 밧줄에 묶여 있었고.
이 둘을 하나로 합치면, 순식간에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가 만들어질 거다.
“계획대로 부교는 충분히 만들 수 있겠어.”
“그럴 겁니다. 북방에 있으면서 매번 해왔던 작업이니까요.”
“좋아.”
조비형은 만족스런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요동에 해군이 웬 말이냐?”라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요동땅은 조선본토 못지않게 산과 강이 많은 땅 아닌가. 수로를 통해 본토의 물자를 옮길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개혁이 시작되기 전엔. 수로를 관장하는 건 공노비와 노역에 동원된 기선군이었지만, 지금은 수로운송의 대다수가 민간으로 넘어간 상태.
그럼에도 수로를 통한 관의 업무는 엄연히 존재했고, 기선군을 이어받은 해군이 내륙수로 또한 관장하고 있었던 거지.
저들은 그저 장소만 바뀌었을 뿐, 하던 일을 계속하는 거니... 큰 문제도 생기지 않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걸 요동이 알까?”
“음. 사주백성들도 뭐하는지 모르니, 그들 또한 모를 가능성이 높고... 설령 의심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대규모로 하고 있는 건 모를 겁니다. 분명 겨울에 쳐들어올 줄 알고 대비했을 테니... 지금쯤이면 맥이 풀리고도 남았죠.”
“날이 더 풀려 여름이 되면 더욱 그렇겠지?”
“예. 강의 수위가 더 높아지면,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이 또한 기책 아닌 기책인데...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겠어.’
조비형은 연오랑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본래 조선군은 작년 겨울에 요동을 치려했으나, 연오랑이 개입하면서 한 해 뒤로 미뤄졌다.
그는 요동이 아닌 동북방 전체를 놓고 판을 새로 짰으니까.
그 탓에 육군은 북방으로 올라와 땅만 팠지만, 그것만으로도 정세를 흔들어 놓고 있었지.
요동이 그 때 거품을 물고 기겁한 건, 지난날 요동의 역사에선 항상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큰 전쟁과 약탈이 벌어졌기 때문.
겨울철에 유목민족은 먹을 것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강과 땅이 단단히 얼어붙는 겨울이야말로 기병이 활개치고 다니기에 좋은 조건이니까.
몽골이나 여진은 요동의 수로를 활용할 능력이 없었으니 더욱 그러했지.
해서 기병으로 구성된 조선 또한 비슷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찾아오면, 관성적으로 요동군의 긴장이 풀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기동력을 얻을 거냐, 아니면 추위와의 전쟁을 할 거냐의 선택인데... 아국은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나.’
조비형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더욱이 요동군은 몽골원정 때 이후로 큰 싸움을 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더욱더 준비가 미흡할 거야.’
명이 망한 후로, 요동은 몽골원정을 제외하면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다. 있다고 한들 자잘한 몽골 및 여진부족의 약탈에 대응하는 정도였지.
명나라가 있던 시절에도 요동군은 회전을 생각지도 않고, 거점요새를 건설해 수비하는 데 급급했는데... 명이 망한 후에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 제대로 의표를 찌를 수 있을 거야.’
조비형은 스스로를 다시금 다독이며, 흥미진진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과연 전에 겪어보지 못한 공세를 받으면, 요동이 어떻게 반응할지 꽤나 궁금해졌다.
사주를 비롯한 북방신도시에서, 요동을 찌를 비수를 갈고 있는 동안.
저 먼 서쪽에서도 풍파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다. 풍파 수준을 넘어서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할 거다.
광활한 평야와 초지. 그 사이에 군데군데 서 있는 게르들. 그 게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작고 허름한 도시.
초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나름 큰 도시지만, 제대로 된 고층건물도 없이 그저 목재로만 지어진 도시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왔더냐?”
“그게...”
우랑카이 3위 중 복여위의 수장. 야치부르.
그는 부하가 곧장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대답도 듣지 않고 앞장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음...’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는 재빠르게 눈을 굴려가며, 사람들의 안색과 눈빛을 훑어 내려갔다.
다들 알게 모르게 그의 눈빛을 피했고, 그가 지나치기 무섭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는 게 걸려들었다.
“...”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싸요! 싸!”
“조선산 면포요!”
두서없이 뒤죽박죽으로 이어진 시장거리를 걷고 있자, 사방에서 목청을 높이는 상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생을 들어온 낯익은 몽골말이건만, 어째 다른 나라 말을 듣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상인들이 팔고 있는 물건의 절대다수가, 죄다 조선에서 흘러들어온 물건이었기 때문. 반드시 필요한 생필품부터, 유목민에겐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까지.
저 중에선 중국에서 넘어온 물건도 있겠지만, 어찌됐건 그걸 구매한 곳은 조선의 창주였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시장거리를 지나쳐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판자촌.
겉보기엔 거지들이나 살법한 곳처럼 생겼지만, 생각보다 깔끔하고 악취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저걸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 줄은 상상도 못했지.’
야치부르는 애써 속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말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창주에서 본 조선식 목욕탕이었으니까.
유목민족 도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건물이 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조선문화가 얼마나 깊숙하게 파고들었는지 극명하게 증명하는 증거였다.
어울리지 않는 저 건물을 조선관원이 직접 관여해서 지은 이유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지떼들 때문.
야치부르는 마차에서 내려,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는 색목인들을 바라봤다.
지겹도록 봐왔건만, 그럼에도 볼 때 마다 놀랍다.
두려움, 호기심, 자포자기한 마음이 마구 뒤섞인 푸른 눈동자는 황망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어째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알고 있는 것 마냥, 온순한 양처럼 사람들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딱히 창칼을 들고 떠밀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걸로 봐선, 역시나 이번에도 오면서 익히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색목인 무리를 보고 있자, 이들을 데려온 부하들이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달려왔다.
“족장님!”
“문제가 있다고 들었다.”
“빌어먹을 제왕부 놈들이 선수를 쳤습니다.”
부하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발을 쿵쿵 밟아댔고, 야치부르는 속에서 쓴물이 피어올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격은 나쁘지 않게 쳐줬을 텐데?”
“제왕부가 조금 더 비싸게, 그리고 더 많이 구입했습니다.”
“얼마나?”
“이번에만 일천 가까이를 끌고 가더군요.”
“끄응...”
‘허... 그렇게 많이?’
야치부르는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색목인 노예들을 훑어봤다.
노예장사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니, 마차의 숫자만 세어도 노예의 수를 파악할 수 있는 바.
‘삼백... 적어도 너무 적군.’
그는 다시금 이를 갈고 말았다.
저번보다 배는 줄어든 숫자이니, 제왕부가 작정하고서 이번 거래를 주도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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