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41화 (441/538)

441. 챕터56. 두드리다 (6)

조선이 비단길을 부활시켜, 소칸국들을 엮어 연합을 완성할 때. 운 좋게 복여위 또한 한발 걸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았던 게, 색목인 노예를 운송하는 수로가 복여위의 영역을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

다만 마냥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허나 어쩔 수 없었지 않나.’

야치부르는 지난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쓴물을 되삼켰다.

태녕위는 요왕부를 재건하려 했고, 당연히 뜯어진 일파인 복여위를 흡수하고자 했다.

물밑에서 알게 모르게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들의 수작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뒷배를 얻는 건 필수였지.

허나 독이든 사과였던 것이, 비단길 연합에 붙자 오히려 요왕부의 공세와 회유는 물밑에서 더욱 교묘해지고 강력해졌고... 내부적으로는 복여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단길은 길어도 너무 길어서 서방으로 직접 가서 노예를 구입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소칸국들 모두가 같은 처지이니, 알게 모르게 각자의 영역을 중심으로 시장과 상권이 형성된 거지.

해서 제왕부와 복여위는 몽골남부연맹의 상인으로부터, 색목인 노예를 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건 무력이 아닌 철저히 자본으로 움직이는 시장이었고, 복여위는 제왕부에 비해 체급이 너무 작다는 점.

해서 안 그래도 야금야금 밀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한방 먹고 말았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불길한 전망을 떠올리자, 야치부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써 미루고 지워내고 싶어도, 파국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너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노예무역은 복여위에게 부가수익을 벌게 해주는 신사업이 아니라, 구명줄이 된 거나 마찬가지가 됐는데... 이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요동조차도 조선과의 무역적자를 버티기 힘들어하는데, 그보다 훨씬 생산력이 떨어지는 복여위는 어떨까.

복여위가 색목인 노예를 사오기 위해서는, 무조건 창주에서 조선물산을 사서 되팔아야 한다.

반대로 조선에 내다팔 물건은 가축 말곤 없다시피 했으니, 색목인 노예를 구입하지 못하면 무역적자를 해소할 길이 없다.

이 상황을 타계하고자 무력을 쓰는 건 불가능한 일.

결국 돈싸움으로 흘러가니, 체급과 자본력에 밀린 복여위는 앉은 자리에서 저절로 와해가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된 거지.

‘그래도 노예무역 덕분에 이만큼까지 버틸 수 있는 건데... 이제 와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는 속마음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들을 굽어봤다.

조선과 무역을 하지 않던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저기. 시장거리 옆에 버젓이 만들어져 있는 곡물상점이 눈에 보이지 않나.

눈처럼 하얀 쌀과 그 쌀만큼이나 중요한 소금이, 버젓이 매대에 올라 있는 게 보인다.

예전 같으면 저걸 구하기 위해서 피를 보는 걸 당연시 했는데, 이제 와서 저걸 포기 한다? 휘하 부족들의 이탈은 눈에 보듯 뻔한 일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시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더욱더 확신이 생긴다.

저들이 입고 있는 옷은 몽골 양식과 요새 유행하는 조선 양식이 섞여 있지만, 어찌됐건 저 옷감들은 전부 조선에서 온 거다.

‘나도 그렇지 않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겉옷 안에 껴 입은 면직, 모직옷을 매만지고 말았다.

모직은 전에 없던 옷감이지만 순식간에 북방으로 퍼져나갔고, 복여위 또한 양털을 깎아 창주에 내다팔고 그 대신 양털로 만든 모직포를 사들였다.

면포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예 만들 수도 없는 물건이니 전량 수입을 해야 했지.

심지어 본래 입던 가족옷조차 그러했다.

무두질 기술이 떨어지는 탓에 복여위는 모피나 다름없는 생가죽을 창주에 내다팔고, 더 뛰어난 기술로 무두질과 염색이 된 가공가죽을 사들여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 판국에 다시 예전처럼, 다른 옷감의 수입을 금지하고 냄새나고 무거운 가죽옷으로 되돌아가자고? 이미 고기 맛을 본 이상, 억지로 금지를 했다가는 문제만 터질 거다.

“후...”

야치부르는 다시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족장님?”

한창 열불을 토해내던 부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선의 움직임은 달라진 게 없습니까?”

“어. 그대로다.”

“다행이긴 다행이군요...”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걸 몰랐는지, 부하는 조선에 대해 묻고선 떫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이게 더 큰 문제겠지.’

야치부르는 부하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며, 부하들끼리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말라 죽는 것도 문제지만, 조선군의 북상은 당장 직면한 문제니까.

우랑카이 3위가 이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가.

과거 몽골원정 때. 조선-요동-우량카이 3위는 서로 손을 잡고, 북원잔당을 때려잡아 이 땅을 차지해서다.

그러니 과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서, 이번엔 조선-요동이 손을 잡고 우랑카이 3위를 때려잡을지 누가 알겠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딱 맞아서, 비상사태가 터진 거나 다름없었지.

당연히 사방으로 사신을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는데...

요동은 “나도 몰라! 저 놈들 때문에 우리도 비상이라고!”라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조선은 “우린 땅 파러 왔는데? 신경 쓰지 마라.”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우랑카이 3위 입장에선 그저 발뺌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이는 탓에,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질 수밖에.

“뭐? 조선사신이 왔다고?”

“그렇다니까.”

“대체 뭔 일로?”

“그게...”

노예무역을 하러 갔다 온 부하는 그간 사정을 몰랐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고, 다른 부하들은 야치부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그저 눈빛으로 야치부르를 슬쩍 가리키며, “족장이 말해줄 거다.”라고 묵언의 대화를 나눴다.

“그...?”

“맞다. 조선사신이 머물고 있다.”

“노예무역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조선은 비단길 연합을 만들어 소칸국의 자립을 도와주면서, 아예 조선공관을 만들어 조선관료를 파견했다.

서로 재깍재깍 의사소통을 하면 편하기도 하거니와, 조선관료들은 소칸국의 조정체계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주고 있었으니까.

더불어 각 소칸국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조선이 중재자 역할을 얼추 하고 있었으니... 소칸국들 입장에서도 서로 싸우지 않고 만날 수 있는 명분과 장소가 생기는 건 나쁠 게 없었지.

다만 복여위는 공관이 들어서진 않았고, 그저 사신만 몇 번 오갔을 따름.

이 땅에 엉뚱 맞은 조선식 목욕탕이 들어선 것도 “노예를 제대로 팔려면 건강과 위생 상태를 관리해야하지 않나? 이거 만들지?”라고, 조언 겸 압박을 넣어서 만들어진 것이었지.

해서 조선사신이 오가는 건 큰일이 아닌데...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들어라. 결정 난 건 없으니까.”

“예...”

부하는 야치부르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선, 냉큼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함께 걷는 동안, 야치부르는 몽골남부연맹의 사정 및 비단길 소칸국들의 사정을 대충 보고 받았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부하들을 돌려보냈다.

발길이 닿은 곳은 익숙하지만 낯선 큼지막한 목조건물.

과거 동방3왕가가 요동에 있을 당시. 몽골과 한족, 고려의 양식이 뒤섞여 생겨난 요동양식의 건물 앞에 서서, 그는 잠시 회환에 잠겼다.

이 땅에 이 건물을 세울 때만해도,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현실의 벽은 높아도 너무 높았다.

‘후.’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선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알싸한 향냄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족장님.”

“아버님은?”

“깨어 계십니다.”

“끄응...”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선, 냉큼 걸음을 옮겼다.

생의 마지막 줄을 안간힘을 쓰고 붙잡고 있는 그의 아버지 아닌가. 그가 깨어 있다는 건, 지금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리라.

한걸음에 나아가 온기가 가득한 곳에 발을 디뎠다.

따스한 화로가 사방에서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중앙에 비단이불을 칭칭 감싸고 노쇠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흠... 쯧.’

아까의 고민이 다시금 밀려오자, 그는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죽음의 냄새를 밀어내기 위해 피어놓은 향도, 아버지의 목숨줄을 부여잡게 도와주는 약재도, 아버지가 입고 있는 비단솜이불도, 밝게 타오르는 화로와 초들도, 전부다 조선산 물건 아닌가.

복여위의 핵심 중에 핵심인 이 방안까지 조선물산이 스며들어 있는 걸 보면, 다른 곳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아버님.”

“쿨럭.”

야치부르의 아버지. 복여위의 수장이었던 안추는 마른기침을 내뱉고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한걸음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부축하며, 털가죽이 깔린 바닥에 마주 앉았다.

“고... 고민은 해봤더냐?”

“예...”

“크음...”

같이 듣고 같이 고민했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야치부르는 자기도 모르게 치솟는 분노와 모멸감에 고개를 숙였고, 안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조선은...”

“...”

“저... 절대 우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다.”

안추는 힘겹게 말을 토해내며,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야치부르를 바라봤다.

그는 꼭 아버지가 눈빛으로 “부정하지마라. 이게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듯 해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식의 반응을 보며, 안추는 “커헉.” 마른기침을 한번 더 내뱉고선, 눈이 풀린 듯 허공을 바라봤다.

안추는 병 때문이 아니라, 노환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

그런 만큼 그의 인생은 동북아의 역사와 완전히 함께 했다.

옛 시절 동방3왕가가 명나라, 고려와 싸울 때도 살아 있었고, 명으로 인해 치욕스런 우량카이 3위가 만들어질 때도 그러했고, 명이 망하고 난 후 혼란한 시절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조선이 북방으로 날개를 펼칠 때도 살아 있었지.

이 난세를 몸으로 해쳐오며 복여위의 수장을 유지했던 만큼, 안추의 경험과 경륜은 끝을 헤아릴 수 없이 깊었으니... 안추의 뜻을 야치부르가 깊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 조선이 고려의 뒤를 이은 건 익히 알고 있을 터... 그들은 절대 요동과 이 땅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 강대했던 명나라를 상대로도 이를 드러냈던 이들인데, 북방을 차지한 지금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아버님.”

야치부르는 힘겹게 말을 토해내는 안추를 만류하며 재깍 손을 놀렸다.

얼른 따스하게 데운 차를 집어 들었고, 기력이 없어 흐물거리는 안추를 대신해 차를 먹여줬다.

“크흐... 됐다.”

“...”

“...”

“허면... 아버님께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시는 겁니까?”

“... 모르겠구나. 허나 다른 길이 보이질 않는 구나. 조선과 싸울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안추는 회한이 가득 담긴 말을 힘겹게 내뱉었고, 야치부르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허나 야치부르는 과거 조선이 여진을 정벌할 때,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지 않았나.

칼날처럼 날이 바짝 선 정예기병이 수만명이었고... 십여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전보다 많으면 많아졌지, 절대 줄어들지 않았을 거다.

그 때도 물경 4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는데, 복여위의 전체 부족민을 다 합쳐도 4만이 안되지 않나.

더불어 조선은 지금까지 온갖 곳에서 풍파를 일으키며 전쟁을 지속해 왔다.

전쟁 수행능력 또한 늘면 늘었지, 절대 줄어들지 않았을 터...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조선이 걸음을 멈춘 건,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느냐?”

“예.”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

야치부르는 이야기로만 듣던 온갖 남방향신료와 남방물산이 창주에 들어와, 비단길을 타고 흘러가는 걸 몸으로 경험했다.

이 말은 조선이 남방으로 진출해 강역을 넓혔다는 뜻.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조금만 욕심내어 손을 뻗으면 얻을 수 있었음에도... 냉철하게 판단해서, 진짜 이득을 찾아 움직이는 조선왕과 조선조정의 절제력과 자제력이겠지.’

물경 40만명이 넘어가는 여진은 요동도, 우량카이 3위도, 제왕부도 감히 정복이나 흡수할 생각도 못하는 엄청난 무리였다.

허나 조선은 그걸 다 집어삼켰음에도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딱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으며 때를 기다렸다.

무려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말이다.

그런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조선군이 다시 북방으로 올라왔다는 건, 이젠 이 땅을 먹어도 된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 아니겠나.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건, 우리와 제왕부, 요왕부가 흔들려 자신들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판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거다. 지독하게 치밀한 그물이지만...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지. 쿨럭.”

“...”

안추는 힘겹게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복여위는 북쪽으로 제왕부, 남쪽으로 요왕부, 서쪽으로 아자이 및 몽골남부연맹, 동쪽으로 조선에 막혀 있다.

어디로도 힘을 뻗어날 갈 수 없게 꽉 막혀 있고, 그나마 조선이 느슨하게 관리하는 동쪽으로 겨우 진출할 수 있는데... 이건 조선이 호의 겸 관리를 위해 빈 땅으로 놔둔 거지, 결코 복여위에게 넘겨준 땅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역적자는 심해지고, 요왕부의 압박은 거세졌다.

복여위는 안추와 야치부르가 다스리는 세력이지만, 그는 대족장이지 왕이 아니다.

게다가 위대했던 안추는 매일매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고, 야치부르는 지금껏 뭔가 보여준 게 없는 후계자다.

물론 명이 망하고 나서 우량카이 3위가 요동에서 떨어져 나갈 때 실력을 보였지만... 지난 십여년간 조선이 강제로 북방에 평화를 가져온 세월로 인해, 모두는 그 때의 과거를 잊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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