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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442화 (442/538)

442. 챕터56. 두드리다 (7)

그 정도에서 멈췄으면 그나마 낫다.

창주에서의 거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조선군이 시시때때로 순찰을 돌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터라 독점이나 거래방해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니 전사들조차도 활과 칼 대신, 지팡이와 괭이를 든 이들이 늘어나기 마련.

피맛 대신 돈맛을 보기 시작한 모든 몽골세력은 점차 약해졌고, 본래부터 체급이 약한 복여위야말로 치명타를 맞았다.

느슨한 체제로 유지되는 특성상 휘하 부족들은 언제든 다른 세력으로 갈아탈 수 있고, 복여위가 약해진 걸 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지금.

대놓고 요왕부나 제왕부로 넘어가는 부족이 나타나고 있었지.

“비단길이 열리기 전에도 다른 세력으로 넘어갔던 부족이 몇이더냐. 열에 가깝지 않더냐?”

“예...”

야치부르는 이게 꼭 자신의 실책처럼 느껴져서, 고개를 절로 숙였다.

아버지 때에는 부족민의 이탈이 적었는데, 자신이 대족장이 되고나서부터 이탈이 심해졌으니까.

“그게 네 잘못이더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쿨럭.”

그런 야치부르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안추는 고목나무처럼 마른 손으로 야치부르를 쓰다듬었다.

비단길이 열리기 전에도 복여위는 다른 세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했고, 유목민족 특성상 힘이 강한 쪽으로 붙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요왕부, 제왕부, 아자이, 심지어 조선으로 넘어가 조선인이 되길 바라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지. 그렇게 넘어간 크고 작은 부족이 무려 열부족으로, 머릿수로 치면 3,4천명 정도.

비단길이 열리고 나서부턴 무역량이 더욱 커졌고, 자연스레 이탈 또한 좌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증가하고 있는데... 해결책이 없다.

요왕부와 싸운다? 이거야 말로 요왕부가 바라는 상황.

그들은 호시탐탐 복여위를 복속시키려고 하는데, 조선과 요동의 눈치 때문에 본격적으로 손을 못 쓰고 있다.

먼저 치는 건, 복여위가 명분을 넘겨주는 꼴이지.

그 외에 조선을 비롯한 다른 세력? 이들이 비단길 연합으로 뭉쳐 있는 이상, 비단길을 건드리는 세력은 사정없이 분쇄시킬 거다.

“알겠느냐?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어. 조선이 우릴 흥안령 일대에 몰아넣을 때부터 정해졌던 일이지.”

“...”

“크큭... 케엑.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아니라 요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였을 테고, 우린 곁다리로 걸려든 것이었겠지만.”

“...”

살을 에는 것처럼 매서운 현실에, 야치부르는 안추를 따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자신의 처지가 여기까지 내몰리게 됐는지... 알면서도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보다 나은, 보다 편한, 보다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여길 따라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유목민족이든 뭐든 어쩌면 생존이 가장 우선인 유목민족일수록, 풍족한 조선의 물산과 조선과의 거래에 빠져들 수밖에 없던 거지.

‘그리고...’

야치부르는 안추의 말을 되새기며, 마음에 걸리는 말을 되물었다.

“요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는 뜻은... 조선이 이미 오래전부터 이 땅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럴 것이야. 없던 거나 다름없던 옛 명나라, 요동과의 조약을 끄집어내서 요동북부를 조선이 차지했을 때부터 준비를 해왔을 거다. 절대 잊지 마라. 조선은 이 땅의 본래 주인이었던 고려를 이어받은 나라다.”

“...”

‘고려...’

그 무겁고 진중한 말에, 야치부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역사를 정확히 기록하지 않고 제대로 배우지 못해 구전으로만 이어내려 온 몽골족 중에선,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여기는 대다수였다.

몽골만 그럴까. 중국도 엇비슷하다.

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이어졌지만, 중화사상에 빠져 있는 한족이 변방의 다른 나라 역사를 알아봐야 뭐 얼마나 알겠는가.

고구려에서 고려로 넘어오는 동안 역사와 교류가 끊어졌지만... 그때도 고려가 있었고 지금도 고려가 있으면, “아. 고려는 쭉 이어져 내려왔지만 우리가 몰랐구나.”라고 생각하게 보통이었지.

또 만주 땅을 잃어버리고 한반도로 밀려난 거나, 나라는 그대로 인데 왕조가 바뀌는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

중국에선 그런 식으로 망했다가 부활하고, 왕조가 바뀌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중국본토의 역사를 흡수한, 원과 동방3왕가의 역사관도 대동소이.

복여위를 비롯한 다른 몽골세력이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또 조선을 고려에서 왕조만 바뀐 같은 나라라고 착각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

“명이 망했으니 옛 고토를 찾으려는 의지와 열망은 분명히 강할 것이고... 조선의 왕가가 된 이가家가 어떤 집안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예...”

오래된 역사를 헤집으며 말하는 안추를 보며, 야치부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시절에 살지 않았지만, 과거 혼란했던 동북방의 정세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듣지 않았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야치부르조차 지겹도록 들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이가의 뿌리는 북방에 있고, 고려에 귀부한 후에도 꾸준히 북방땅에 욕심을 내던 집안이다. 크읍. 케엑... 지금은 왕이 됐으니, 열망이 강해지면 강해졌지 절대 줄어들지 않았을 테지.”

말을 오래해서 그런지, 안추는 마른기침을 계속 내뱉으면서도 끝까지 이어갔다.

이성계 집안은 원에 속해 있다가 동방3왕가의 지원으로 동북면의 절대자로 성장했고, 고려에 귀부하고 나선 원과 동방3왕가와 날을 세우며 고려의 영역을 넓혔다.

그 당시 만주땅의 세력가였던 나하추와도 싸웠던 인물이니, 당연히 만주땅에 대한 인식이 남다를 수밖에.

“게다가 지금껏 조선의 전쟁에 앞장섰던 연가家는 또 어떠냐.”

“으음...”

야치부르는 오래전에 봤던 연오랑의 우람한 덩치를 떠올리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원래 역사에선 없던 일이지만, 지금 역사에서 연가는 모두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가문이다.

어쩌면 몽골에게는, 이가보다 더 뇌리에 박힌 집안이 연가일 지도 모른다. 이가는 동북면에 있었다면, 연가는 요동의 노른자 위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금주 만호였던 연가는 원명교체기 시절에 명, 원, 동방3왕가, 홍건적, 고려, 여진 등. 요동반도를 탐내던 모든 세력을 살벌하게 갈아버린 전력이 있다.

그랬던 집안이 명을 피해 고려에 귀부한 후. 다시 북방으로 올라왔으니... 옛 고토를 차지하려고 노력할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

물론 연오랑이 들었다면 “뭔 개소리야!?”라고 콧방귀를 뀌고 말았겠지만, 옛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로선 이렇게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조선의 숨겨진 의도는 요동을 치겠다는 것인데... 저희에게도 영향을 주겠습니까? 시간이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요동을 치는 게 기정사실이라고 한들... 쿨럭. 우릴 빼놓고 가진 않을 것이야. 그들은 이 땅을 전부 차지하길 원할 테니,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로선 풍전등화의 처지에 몰린 건 다르지 않을 거다.”

야치부르는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안추를 부축하며, 맹렬히 머리를 굴려댔다.

‘맞는 말이야...’

안타깝게도 복여위의 전력은 요동에 비하면 한줌에 가까운 수준. 엎어치기나 메치기나 어쨌든 넘어가는 건 매한가지일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궁금증은 가시질 않았다.

“허면 조선이 산해관을 공략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기만책일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다. 케엑.”

안추는 힘겹게 목에 낀 가래를 내뱉고선, 솜 베개에 등을 젖히고 말을 이어갔다.

조선이 산해관을 공격한지 벌써 몇 개월이 흘렀고, 천하의 모든 이들이 다 알 정도로 소문이 쫙 퍼진지 오래.

“지난날 조선이 거용관을 무너뜨릴 줄 누가 알았더냐.”

“...”

과거의 일을 꺼내자, 야치부르는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살짝 돋았다.

그 시절에 조선이 감히 북평부를, 그것도 몽골초원을 뚫고나가 천하제일웅관이라 불리던 거용관을 공격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또, 뭔가 기상천외한 짓을 벌일 줄 누가 알겠나.

“크으... 이 또한 선후의 문제일 거다. 진정으로 북평부를 노릴지 어쩔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어찌됐건 요동을 공략할 거고, 우리는 전쟁의 파도에 휩쓸리겠지.”

야치부르는 이미 자신도 예측하고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확신을 더욱 얻고 싶은지 반문을 던져봤다.

“요왕부나 제왕부와 손을 잡으면, 조선을 견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

안추는 애써 억지를 부리는 야치부르를 물끄러미 보며, 히죽 미소를 흘려댔다.

눈빛으로 “답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친절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야치부르에게 확신을 심어줄 생각인가 보다.

“제왕부는 멀어도 너무 멀다. 조선이 그 땅까지 직접 차지하는 건 무리일터, 게다가 제왕부는 조선군을 피해 북쪽으로 도망칠 수 있지 않느냐.”

제왕부는 흑룡강 상류라 할 수 있는 아르군 강을 영역으로 두고 있고, 여긴 바로 위가 시베리아다.

사방이 꽉 막힌 복여위와 달리,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사람이 없는 땅으로 도망칠 수 있다. 그리곤 날파리처럼 조선의 북쪽강역을 들쑤시고 다닐 게 분명.

지독할 정도로 앞뒤 따져가며 움직이는 조선이, “과연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할까?”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부정적이다.

“게다가 제왕부는 비단길 연합에 속해 있지 않느냐. 조선은 아자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제왕부를 남겨둘 거다.”

“음...”

복여위도 비단길 연합에 한발 걸쳤으니, 몽골초원동쪽의 사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이쪽은 제왕부-아자이-몽골남부연맹이 세발 달린 솥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태.

조선은 굳이 이 균형을 깨트릴 생각이 없을 거고...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이 셋을 쪼개서,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게 굳힐 게 분명했다.

“요왕부와 손을 잡는다라... 그게 우리에게 이득이겠느냐? 나아가 제왕부와 요왕부가 손을 잡겠느냐?”

“...”

자기가 물으면서도 답을 알고 있는지,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안추를 보며... 야치부르 또한 쓴웃음을 비치고 말았다.

요왕부와 손을 잡으면, 복여위의 부족이 요왕부 밑으로 빨려들어 갈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허면 복여위 부족을 쉽게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전前 지도자인 야치부르 부족을 쓱싹 해버릴 것 또한 뻔한 일 아닌가.

제왕부가 요왕부와 손을 잡는 것도 불가능한 일.

애초에 왕가가 달라 동방3왕가 시절에도 으르렁거리던 사이였고, 제왕부는 비단길 연합에 속해 있다.

만약 제왕부가 조선과 척을 치면, 아자이와 남부몽골연맹이 가만히 있을까.

“좋구나! 기회다!”라고 외치며 제왕부를 쳐서 영역을 차지할 게 분명. 조선과 직거래를 하는 걸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테니, 명분만 쥐어주는 꼴이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예...”

야치부르는 혹시나 해서 억지로 되물었지만,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쿨럭. 우리가 생각하는 걸 다른 세력이 못할 리가 없을 테고...”

“조선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냈다면, 다른 세력에게도 이미 보냈겠군요.”

“그야 당연한 말이겠지. 그리고 만약 요왕부에도 사신이 갔다면...”

안추는 그리 말을 하고선, 차마 불길한 예상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어쩌면 조선이 요왕부와 밀약을 맺어, 복여위를 제물로 넘겨줄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산해관을 공략하고 있는 게 기만책이 아니라면... 정말로 그럴 지도 모르는 일이지.’

야치부르는 끔찍한 상상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마냥 허황된 예측이 아닌 게, 조선은 과거 거용관을 깨부술 때 비슷한 짓을 하지 않았나.

이번에도 요왕부와 손을 잡고 북평부를 노린다면... 복여위 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선의 제안이 마냥 우릴 무시하거나 굴욕적인 건 아닐 거다. 쿨럭... 왜? 아쉽더냐?”

“...”

차마 부정하지 못해서 야치부르는 대답을 삼갔고, 그런 그를 보며 안추 또한 안타까운 눈빛을 살짝 흘리고 말았다.

허나 현실은 현실인데, 이상만 추구할 순 없지 않나.

그는 냉랭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집안이 복여위의 수장이 된 건 운이 좋아서였고, 시대의 흐름을 잘 탄 것에 불과하다. 나하추 장군과 함께 따라가지 않아서, 얼떨결에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한 거지.”

“어찌 그런 말씀을...”

야치부르는 살짝 억울하다는 듯이 목청을 높였지만, 안추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녀석을 다독였다.

과거. 명은 요동으로 진출해 동방3왕가를 무너뜨리고 우랑카위 3위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일정부분 자치권을 주고서 이이제이를 통해 지배하려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려면 과거의 지도자들을 지워내야 하는 법.

명나라의 중국통일 전쟁에 나하추를 비롯한 요동의 몽골만호와 장군들이 죄다 동원된 건 우연이 아니었고, 그들이 고향땅을 밟지도 못하고 사천과 운남에서 쓰러진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명은 이렇게 정리한 요동에 우랑카이 3위를 만들며, 자신의 말을 잘 따를 법한 이들을 골라 수장으로 삼았고... 그렇게 뽑힌 이가 바로 안추였던 것.

비록 그 후 명이 망하면서 혼란한 시절에 복여위를 유지한 건 안추의 능력이지만, 어찌됐건 그의 집안이 근본 없는 집안이라는 건 틀린 말이 아니지.

안추는 재차 말을 하려는 야치부르를 손짓으로 만류하고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지난 세월 동안 휘하부족들은 우릴 믿고 따라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

“... 예.”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책임을 묻는 발언에, 야치부르의 어깨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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