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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443화 (443/538)

443. 챕터56. 두드리다 (8)

비록 무소불위의 왕은 아니지만 어찌됐건 대족장으로 복여위를 이끌어 온 건 사실이고, 다른 세력으로 이탈할 수 있었음에도 그를 믿고 따라온 것도 사실 아닌가.

지금이야 처지가 절벽 끝으로 몰려 심지가 흔들리고 있다지만, 지금까지의 충성과 인연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지.

“우리의 이런 사정 또한 조선이 모를 리가 없을 터...”

“...”

“조선이 너를 직접 한성으로 불러들인 건, 우리의 불안과 의심을 깨부수기 위해서 일거다.”

“...”

야치부르는 할 말이 없어서,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라고 모를 리가 있나. 다만 현실을 뿌리치고자 했으나, 뿌리칠 수 없어서 번민했을 따름.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확신을 더해주니, 흔들리던 마음이 한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또한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너를 부른 건, 적어도 지금은 너를 그만큼 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

명이 망한 후로. 조선은 그 어떤 나라의 사신도, 조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무역관이 열렸다지만 그건 일부 구역만 열어둔 거지, 아무나 조선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지.

그렇게 몰래 조선으로 숨어들어갔다가 붙잡혀서, 그대로 조선인이 되어버린 이들이 부지기수이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보면, 조선이 야치부르에게 직접 한성으로 오라고 제안한 건 분명 특혜 아닌 특혜.

“저보고 직접 와서, 조선이 얼마나 풍족하고 앞서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라는 뜻이겠지요?”

“그럴 거다. 더불어 조선에 조선인 말고 몽골인이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도 확인하라는 뜻이겠지.”

“예...”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다.”

“...”

칼을 빼어들 듯 단호한 말에, 야치부르 또한 원치 않아도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요동이 됐든 뭐가 됐든 분명 전쟁을 일으킬 거다.

승패가 얼추 정해질 때쯤 돼서, 얌체처럼 숙이고 들어가면 푸대접을 할 게 분명.

판이 깔리지 않았을 때. 확고히 한편이 되어야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건, 인생사의 모든 일에 적용되는 이치 아닌가.

미적거리며 간을 보면,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밉보일 여지가 있는 거고, 저를 이렇게 불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쟁이 불씨가 피어올랐다는 뜻이겠군요.”

“그럴 것이야. 네가 한성에 갔다 돌아와서 결정을 했을 때쯤 되면, 분명 조선은 군을 일으킬 거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나... 올해를 넘기는 건 힘들지 않겠느냐?”

“그렇겠지요... 모두가 조선군의 북상에 쓸데없는 힘을 소모하고 있으니까요.”

“...”

“...”

야치부르의 낮은 읊조림과 함께, 잠시 침묵에 찾아왔다.

작년 겨울에 조선군이 북상함에 따라, 요동과 요왕부는 활 시위에 화살을 올린 꼴이 됐다.

그걸 곧장 쏘아내지 않고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데... 이 상태가 지속되면 시위가 끊어지거나, 손힘이 빠져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거다.

끝없이 소모되는 군비와 긴장상태로 인해, 결국 참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 텐데...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올해 안으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난다.

그렇게 요왕부든 요동이든 움직이게 되면, 그땐 복여위의 운명은 자신들의 손이 아닌 다른 세력. 특히나 조선의 선택에 달릴 터... 기회가 없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게다가 계속 미적거리면, 조선이 직접적으로 수를 쓸 수도 있겠지.”

“비밀스럽게 저와 나눈 이야기를, 모든 부족민들에게 소문내는 걸 말하는 것이지요?”

“쿨럭... 그래.”

안추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고, 야치부르 또한 같은 예측을 했기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제방이 무너지는 건 작은 구멍하나가 시작 아닌가.

조선이 밑에서부터 복여위의 휘하부족들을 직접 회유하기 시작하면, 야치부르로선 절대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힘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나의 몸값과 우리 부족의 몸값은 떨어지겠지.’

“알겠느냐? 시간이 없다.”

“...”

“네 눈으로 직접 조선을 보고 판단해라. 조선이 진정 우리가 귀부를 할 만한 곳인지, 또 우리 가문과 우리 부족이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곳인지 말이다.”

“...”

흡사 유언처럼 들리는 안추의 말에, 야치부르는 힘없이 안추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심은 오래했어도, 결정을 내렸다면 번개처럼 움직여야 하는 법.

야치부르는 계속 눈에 밟히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수하들과 함께 조용히 몸을 날렸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아버지를 믿을 수밖에 없지 않나. 그가 돌아올 때까지 별 탈 없기를 기도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야음을 틈타 눈강을 건너 창주 근처에 다다랐고, 약속한 장소에는 조선기병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오랜만이군요.”

“아...!”

야치부르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인물을 보며,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국 누군지 알아차리고 입을 벌리고 말았다.

사실 그가 만나본 조선군 장군이 몇 되지도 않으니, 옛 기억임에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전에도 창주에서 한번 뵌 적이 있지요? 도모경이라 합니다.”

“아아...”

오래전. 조선이 해서위 여진을 때려잡을 때. 원래 역사에서 해서여진의 시초쯤 되는 나치부루와 그의 아들 도르호치를 처단했다.

그때 복여위 영역으로 도망쳤던 도르호치를 쫒아갔던 연대장이 바로 도모경이고, 도르호치를 놓고 야치부르와 처음 만난 인물이기도 하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터라, 야치부르는 도모경이 자신을 소개하자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함께 오신 분들은?”

“나의 형제들이자 주요 부족장 후계자들이네.”

“아아.”

도모경은 야치부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냉큼 알아듣고서, 환하게 웃으며 한명씩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몽골에는 안다라고 해서 의형제 비슷한 개념이 있었다.

서열과 나이를 엄밀히 따지지 않는 의형제 관계였지만, 어찌됐건 복여위의 핵심 인물들이라는 뜻.

공손히 대하는 게 어떤 면에선 당연하고, 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도 없지 않나.

몽골 출신인 도모경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아서, 공손하게 대하며 그들을 이끌었다.

소대 밖에 안 되는 병력과 복여위에서 온 십여명의 인물들은 거침없이 벌판을 내달리며 남하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황주(장춘).

창주와 수로로 곧장 이어지는 송주(길림)만큼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보나 지금의 발전상황으로 보나... 만주신도시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번화한 곳이다.

“오...”

“음...”

‘이곳이 내가 알던 그곳이 맞던가?’

야치부르는 감탄을 숨기지 않는 수하들처럼, 그 또한 황망한 눈길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조선이 북상하기 전에 이 땅은 복여위와 여진이 함께 살던 지역이었기에, 이 땅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헌데 그때의 허허벌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고, 도시는 물론이거니와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벌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럴 수가.”

“허허...”

바둑판처럼 곧게 그어진 수로 옆에 낮게 솟아 있는 제방을 따라 걸으면서, 모두는 경악과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뿜어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밀밭, 보리밭, 수수밭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간 여길 개간하느라 고생하긴 했죠. 수로를 정비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어서 말입니다. 뭐... 날이 추워서 본토만큼 농사를 오래지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해낸 게 어딥니까?”

“...”

도모경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을 늘어놨고, 이들 모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땅에 이렇게 대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자신들이 엄두도 못했던 대업을 해낸 조선에 대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많은 인력을 동원했을지... 감도 안 잡히는 군.’

야치부르는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몽골족이 유목민족이라지만, 만주땅에 살던 이들은 여진,한족,고려의 문화가 뒤섞여 반농반목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지 않나.

이 땅에 농사를 짓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는 터라, 조선의 저력이 피부로 느껴진다.

한참을 밭을 지나쳐 가는 동안, 낯설면서도 눈에 익은 모습들도 들어왔다.

날이 풀리는 여름에만 반짝 자라는 과실수를 키우는 과수원도 있고, 목장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다른 점이라면 목장에는 복여위가 키우지 않는 특이한 가축들도 꽤 많이 있었다는 점.

“저건...?”

“서방에서 들여온 가축들입니다. 특이하게 생긴 게 많죠? 요샌 서방의 가축을 키우는 목장이 늘어나고 있지요. 특히나 서방의 양이 유행하고 있죠. 털이 많이 나와서 말입니다.”

“아...”

야치부르는 무슨 뜻인지 재깍 알아차렸다.

비단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조선이 유독 온갖 서방물산을 수입하긴 하지만 소칸국이라고 안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만한 가축과 물산은 받아들였는데, 복여위에서도 서방의 양을 데려와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놀란 건 규모가 차이나기 때문.

눈에 깔려 있는 목장만 셀 수가 없을 정도니, 조선 전체로 보면 얼마나 많을지 감히 상상도 못하겠다.

‘이게 감당이 되나?’

야치부르는 불연 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유목민이 괜히 유목을 하던가. 목축으로는 가축먹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땅의 풍토와 기후는 변하지 않았는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가축을 키울 수 있다는 건... 뭔가 비결이 있다는 뜻.

“맞습니다. 보통 여름에는 가축을 끌고 북쪽으로 가서 풀어놓고 키우고, 날이 추워지면 데려와서 사료곡물을 먹이죠.”

“사료곡물이라...!”

“처음부터 이렇게 바로 풀린 건 아니고, 천하의 모든 곳에서 가져온 종자와 작물로 이룩한 결과죠.”

“...”

‘하...’

야치부르는 좀처럼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애써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댔다.

황주(장춘)북부는 조선으로서는 여력이 없어 관리하지 못한 미개척지지만, 그렇다고 버려두는 건 아깝지 않나. 해서 흡사 반유목반목축마냥 왔다갔다 하면서 가축을 키우고 있었다.

다만 야치부르 입장에선 사료곡물을 키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생경했다.

사람이 먹을 곡물을 키우는 것도 벅찬 조선조차도, 사료곡물을 키우는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야치부르에겐 완전히 새로울 수밖에.

“아무래도 이 땅에선 벼를 키울 수 없고, 밀 밖에 못 키우는데... 사람이 먹기에는 맛이 없는 작물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사료곡물로 쓰고 있지요.”

“오...”

“끄응...”

이어지는 설명에, 다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또한 자신감의 발로다.

사료곡물도 어쨌든 농사를 지어야 얻을 수 있는 건데... 복여위는커녕 요동과 요왕부도 못했지만, 조선은 해냈으니까.

“저기 보시면...”

도모경은 지나치는 목장마다 각기 다른 가축을 키우는 걸 보며 설명을 이어갔고...

“제왕부에서 판 가축일 겁니다. 저흰 수익이 적어서 건들지 않았죠.”

야치부르가 놀란 눈을 이어가자, 수하 중 한명이 조용히 귓속말을 날렸다.

아무래도 조선에 파는 서방물산 중에서 가장 수지타산이 맞는 품목은 색목인 노예 아닌가.

복여위는 거기에만 집중했던 터라, 비단길을 타고 온갖 게 넘어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론 정확히 모르고 있었나 보다.

황주신도시에 완전히 발을 디디자, 야치부르 일행은 절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광활한 평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소란과 번잡이 온몸을 강타했기 때문.

복여위의 도시도 나름 도시라고 할 수 있다지만, 수만명이 모여 사는 황주와 비교할 수가 있나.

벌떼가 우는 것 마냥 도시 전체가, 사람들의 발걸음과 목소리로 웅웅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경하게 생긴 가옥들, 나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마차와 말들 등등.

시골 촌놈이 도시를 처음 보고 놀란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고, 도모경은 연신 미소를 숨기지 않고서 이들을 이끌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검은색 기와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3층 관아. 그 구석에 위치한 목욕탕이었다.

“다들 씻을 줄 아시지요?”

도모경은 거암괴석처럼 우뚝 서 있는 3층 관아를 보며 압도당한 이들에게 물었고, 다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몽골인들이 잘 안 씻는 건 물이 귀해서였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나름 수계가 있는 곳에 자리 잡은 복여위 출신들은 씻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고, 이치들은 색목인 노예를 위해 만들어 놓은 목욕탕을 궁금해서라도 몇 번 드나들지 않았나.

그들은 “설마 이런 것도 모르는 야만인들은 아니지?”라고 생각할까봐, 냉큼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씻고 한증막에서 땀까지 흘리고 나온 이들 앞에 놓인 건, 조선식 의복들.

“조선땅을 지나갈 텐데, 그간 입던 옷을 입고 있으면 이상하게 보지 않겠습니까. 이번 사행이 비밀이라는 걸 잊지 않으셨겠지요?”

“걱정 말게.”

도모경이 협박 아닌 협박을 날리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소곤소곤 귓속말이 이어졌다.

“이거 보게. 면포군.”

“아니야. 면포와 비단을 섞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야... 전에 샀던 것보다 훨씬 질이 좋은 것 같은데?”

이들은 생경한 조선 의복보다도, 그 품질에 더욱 놀란 모습을 보였다. 솜털처럼 가볍고 매끈한 속옷과 덧신의 감촉이 낯선지, 연신 매만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신발도 특이하군. 통짜 가죽으로 만든 모양이야.”

“그러게.”

연오랑이 만든 기병군화와 보병군화는 나름 조선 신발계에 혁신을 가져온 물건.

단화처럼 생긴 기존의 가죽신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것 외에도 군화를 본떠서 발목을 감싸거나 혹은 정강이를 감싸는 가죽신도 등장한지 오래.

이건 기존에 신던 목화木靴와는 퍽 달라서, 발에 딱 달라붙는 미래의 가죽부츠에 더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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