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44화 (444/538)

444. 챕터56. 두드리다 (9)

야치부르 일행조차도 이걸 제대로 본 건 처음이라서, 낯설면서도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조선의 가죽세공술이 월등히 앞선다는 걸 증명하는 예시였다.

“관에서 쓰는 물건인가?”

“그냥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입니다. 조금 있다가 시장 거리도 살펴볼 테니, 그때 보시지요.”

도모경은 야치부르의 의심을 알아차리고선, 그저 “못 믿겠지? 네가 직접 봐라.”라는 눈빛을 슬쩍 흘렸다.

이내 옷을 모두 갖춰 입자, 도모경은 이상하게 생긴 모자를 내밀었다.

“아국에서 변발을 하고 다니면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해 주시지요.”

어쩌면 자존심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그들은 머리를 말리기 무섭게, 도모경이 내민 마상건을 뒤집어썼다.

“조선인들은 상투를 트는 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요즘은 이런 모자도 많이 쓰고 다닙니다. 사실 상투가 귀찮기도 하고, 말 타는 데 거슬리니까요.”

“음...”

몽골인에서 조선인이 된 도모경이 그렇다고 말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연오랑이 착호군에 마상건을 강제한 후로, 조선 전체에 마상건 문화가 퍼진지 십수년이 지났다.

원래 역사처럼 상투는 규범이나 제도가 아닌 격식이나 멋을 내기 위해 하는 것으로 변해갔고, 마상건만 쓰고 다니는 것도 일상이 됐지.

운석핵꿀밤 세대가 전면에 들어선지 한참 됐고, 이젠 개혁세대가 주류로 올라오고 있는 지금.

이젠 남녀 가리지 않고 마상건을 패션용품처럼 활용해서, 오색찬란한 색감과 형태로 만들어 쓰는 유행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체급을 올리려고 민간 무역까지 장려하는 조정으로서는, 원래 역사처럼 온갖 것에 사치한다고 규제를 때리는 일은 절대 없었으니까.

그러니 변발을 가리기 위해 마상건을 쓰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

이들은 골무처럼 생긴 마상건을 냉큼 뒤집어쓰고, 그 위에 갓을 걸쳤다.

“갓의 형태와 모양이 다른데... 차이가 있는 건가?”

“없습니다. 다 똑같이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시장에서 이것저것 골라왔습니다.”

“음...”

야치부르는 다시금 ‘맞는 말인가? 아니면 일부러 우릴 약 올리는 건가?’라고 의심하면서도... 오면서 봤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결국 갓을 쓰고 말았다.

그들이 직접 다양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지나쳤으니까.

마상건과 함께 갓문화도 바뀐 지 오래다.

갓은 양반의 전유물이었지만 신분제가 깨지면서 아무나 쓰고 다닐 수 있게 됐고, 또 말총값이 떨어지면서 민간에서 쓰던 모자를 갓으로 만드는 경우도 흔해졌다.

더불어 기존에 없던 모직과 흔치 않던 가죽제품 또한, 기업이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법.

갓처럼 만드는 모자는 물론이고, 면포나 가죽으로 만든 온갖 제품을 이걸로 만드는 터라... 야치부르 일행으로서는 “뭐 이렇게 많아?”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후후. 보기 좋군요.”

“...”

완전히 조선인으로 변신한 일행을 보며 도모경은 활짝 웃었고, 야치부르 일행은 서로를 보면서 피식 웃거나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댔다.

자기들이 봐도 옷을 차려 입은 것만으로도, 꼭 조선인처럼 보였으니까.

“그럼 가실까요? 오늘은 황주에서 머물고, 내일 출발할 겁니다. 시간이 많으니 구경부터 가시지요?”

“음.”

“...”

‘자신만만하군. 하...’

야치부르는 도모경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애써 숨겼다.

숨길 것 없이 다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분명 복여위보다 조선이 훨씬 생활수준이 높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괜한 반발심에 ‘과연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라는 심술궂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심사관으로 변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섰지만, 야치부르 일행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어린아이처럼 눈을 이리저리 돌려대기 바빴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그들이 몰랐던, 혹은 알았어도 보던 것과 훨씬 나은 품질의 물건들이 사방에 굴러다녔다.

혹여나 “우릴 속이기 위해 미리 준비한 게 아닐까?”라는 의심도 들었지만, 더 무서운 생각에 곧장 사라졌다.

자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단기간에 도시 하나를 뚝딱 만들어냈다면, 오히려 그게 더 대단한 일이니까.

결국 해가 질 때까지 도시를 둘러보고 온 이들은, 무거운 분위기에 파묻혀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황주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들은 곧장 송주(길림)로 나아갔다.

도시를 빠져나와 한참을 달리자 익숙한 풍경이 눈을 가린다.

그들이 살던 곳에서도 봤던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고, 이내 도시 인근에 도착하자 황주에서 봤던 풍경이 반복된다.

온통 푸른빛으로 점철된 수로와 밭이 송주신도시를 둘러싸고 있고, 일행은 또 다시 제방과 이어진 도로에 올라타 걸음을 옮겼다.

이 허허발판에 도로가 웬 말인가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올라타고 보니, 흙길이라도 있는 게 확실히 나아보였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는 야치부르의 눈에 못 보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저쪽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게 보였기 때문.

“서방인이군.”

행색은 조선인처럼 보이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탓에 형형색색의 머리칼을 질끈 묶은 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 가서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도모경은 망설임 없이 이들을 이끌었고, 양지 바른 곳에 올라 그들이 뭘 하는지 시원하게 공개했다.

서방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그 수는 아무리 못 잡아도 오백여명을 훌쩍 넘었다.

뭔가 분류가 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떤 이들은 밭에 나가 밭일을 배우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목축을, 몇몇은 공구를 들고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교육부 산하의 직업교육당이라는 건데...”

도모경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상세하게 설명을 늘어놨다.

복여위가 조선의 조정체제를 알 리가 없으니 말이 점점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도모경 또한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을 거쳐서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지 않나.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말을 하다 보니, 삼천포에 빠진 것 마냥 중언부언 덕지덕지 붙은 설명을 하고 말았다.

“음...”

“놀랍지요?”

“...”

은근히 되묻는 도모경을 보며, 야치부르는 차마 거짓을 말하지 못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을 시키고, 의식주를 책임져 주는 것 등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저 낯선 외모의 서방인들도 조선백성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노예가 아니란 말이지?”

“예. 아국에는 노예가 금지되었으니까요.”

도모경은 장난스럽게 손날로 목을 탁탁 쳐가며 웃어댔다.

노예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다가는, 죄다 목이 날아간다는 뜻이리라.

“...”

시원하게 답하는 도모경의 대답은, 야치부르에게 ‘네 고민은 쓸데없는 고민이었을걸?’라고 들리는 듯 했다.

세상 어디에도 신분제가 없는 곳이 없고, 야치부르가 나름 걱정했던 부분은 “복여위가 조선에 귀화하게 되면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였다.

물론 대족장인 자신의 집안이나 부족장 집안은 모르겠지만, 휘하부족들은 처지가 다르지 않나.

허나 그게 다 헛짓거리인 모양이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대충 5년에서 10년 사이의 유예기간을 주고, 조정에서 받은 집과 땅의 비용을 되갚아야 하는데... 일만 한다면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어서, 그간 문제가 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죠. 심지어 저 먼 동쪽의 야인여진도 그러했으니까요.”

“...”

야치부르는 이어지는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말았다.

야인여진은 몽골족조차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며, “상종 못할 미개한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부족 아닌가.

말 그대로 야만인처럼 살던 그들마저도 조선에 적응을 했다면, 다른 부족과 민족은 훨씬 더 잘 적응했을 거다.

“그렇게 이 땅에 살던 여진인들도, 다 저런 과정을 거쳐서 조선인이 되었죠.”

“적응을 못한 이들도 있었을 텐데...?”

“생각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전보다 살기가 좋아졌는데 거부하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조선인이 될 자격이 없죠.”

“허면...”

“...”

야치부르는 슬쩍 매서운 눈길을 뿌렸고, 도모경은 말없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몽골도 한족 노예를 끌고 와 부렸고, 말을 안 들으면 죽이거나 되팔아버리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도 마찬가지 일 거다.

“여기까지 온 서방인들 또한 절대 다수가 조선인으로 변모해 갔는데... 그럼에도 따라오지 못한 이들은 강남과 남방으로 팔려갔죠. 그쪽에는 서방인을 보기 힘들어서 퍽 신기해하더군요.”

“...”

도모경은 싱겁게 말을 했지만, 야치부르 입장에선 무겁게 다가왔다.

만약 복여위 사람들 중에서도 말을 안 듣는 이들이 있다면, 그렇게 저 만리타향으로 팔아버릴 거라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그렇게 걸음을 이어가다가...

“오...”

“다리군!”

모두가 하나같이 걸음을 멈추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로를 건너는 꽤 큼지막한 석재다리를 짓고 있었는데, 요동벌판에선 감히 볼 수도 없었던 대역사였으니까.

물론 이들 입장에서 그런 거고, 온갖 다리를 마구 지어대고 있는 조선 입장에선 그리 큰 공사는 아니었지.

야치부르는 흡사 공성장비처럼 보이는, 생전 처음 보는 건설기계들을 보며 눈을 번쩍 떴고... 그런 놀랄 광경 중에서도 또 생경한 모습을 찾아냈다.

저기. 모자도 쓰지 않고 어설프게 상투를 틀고 있는 인물이 이리저리 손짓하며 인부들을 부리고 있는데... 그의 머리칼은 신기할 정도로 밝은 갈색빛깔을 하고 있었다.

“서방인이... 감독을 하는 건가?”

“예. 서방에서 온 건축 장인입니다. 로마국을 아시지요? 거기서 온 장인입니다.”

“오...”

비록 가보지는 못했지만 야치부르도 비단길 무역을 하니, 저 먼 서쪽의 로마국에 대해서 들어는 봤었다.

다만... 저치가 입은 옷은, 그가 창주를 오갈 때 봤던 무역관 관원들과 똑같다는 게 문제.

“저거 관복 아닌가?”

“예. 맞습니다. 온지 안 되서 조선말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관원이 되었죠.”

“오...”

“호오?”

야치부르 뿐만 아니라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방인은 어찌됐건 노예로 팔려왔는데, 그들이 조선에 오자마자 관원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물론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만큼 출중한 능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저치는 로마국에서도 건설하던 장인이라서 관원이 된 거지, 아무나 쉽게 관원이 되는 건 아니죠.”

“음...”

도모경은 그리 말을 하고선, 옛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의 인생을 가볍게 풀어놨다.

도모경은 몽골원정 당시에 조선에 귀부한 소규모 몽골부락 출신이었고, 그는 원정군과 함께 다니며 조선말과 문화를 배웠다.

그럼에도 그가 진짜 군인이 되고 연대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원정을 함께 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귀화교육당과 훈련소의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

“능력만 있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군?”

“그런 편이죠. 물론 조선말과 문화에 능숙한 조선인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게 더 쉽긴 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과거시험에만 합격하고 나면, 딱히 출신을 가리는 건 못 봤습니다.”

“...”

야치부르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도모경이라는 증거가 있음에도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조선이 과거 어떤 나라였는지, 고려가 과거 어떤 나라였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확신할 순 없지만... 그가 알던 명이나 원의 역사에서도 분명한 신분차별은 존재했으니까.

애초에 아직도 몽골에는 귀족제가 남아 있지 않나.

퍽 낯설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지.

하지만 이런 작업이 그저 미래처럼,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

운석핵꿀밤과 개혁을 연달아 겪으면서, 왕실과 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를 향해 나아가지 않았나.

이에 가장 큰 장애물은 양반,지주,지방호족들이었으니, 이들의 힘을 꺾어버리고 기업가로 변모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이렇게 기존 기득권이 아닌 기업집안 출신 관료가 늘어날수록, 조선이 자본유학을 바탕으로 한 상공업 중심의 나라로 나아갈 테니까.

출신을 무시하고 능력만 있으면, 마구 등용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기존 기득권을 견제하려면 아예 근본 없는 신세력을 끌어오는 게 좋고, 타민족일수록 그 효과는 강력해지니까.

나아가 그렇게 타민족 출신이 조정에 많이 입조할수록, 민족 간의 불만을 줄여 통합을 이룰 수 있고 말이다.

“아국에 얼마나 많은 이민족이 흡수되어 조선인이 됐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겁니다. 너무 많아서 저도 잘 모르니까요.”

“...”

“여진, 몽골, 요동, 한족, 이 땅에선 보기도 힘든 남방인과 일본인까지. 말 그대로 천하의 모든 민족이 다 조선으로 빨려 들어왔고, 지금은 저렇게 서방인까지 끌어왔죠.”

도모경은 뭐랄까 자랑하듯 말을 이어갔고, 야치부르 일행은 잠자코 귀담아 들었다.

“저들 서방인들도 따지고 보면 서방의 온갖 곳에서 흘러들어온 이들입니다. 루스인, 로마인, 코사크, 프랑크 등등. 하여간 따지고 들면 끝도 없을 겁니다.”

“...”

서방도 사람 사는 건 똑같을 테니, 나라가 얼마나 많겠나.

야치부르 일행은 대충 동방을 떠올리며 어림짐작했다.

“그런 이들이 전부 모여 조선말과 조선문화를 배워 조선인만 된다면, 출신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

눈을 시리게 빛내며 말을 끝맺은 도모경을 보며, 야치부르 일행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복여위도 조선에 귀부하게 되면 얼마든지 능력에 따라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과거는 모두 잊고 철저히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한 이들의 말로는...’

야치부르는 도모경이 말하지 않은 맥락을 유추해내고선, 작게 몸을 떨었다.

말을 안 들으면 별 수 있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저 먼 이국으로 팔아버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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