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 챕터56. 두드리다 (10)
“...”
그렇게 침묵 속에 공사현장을 벗어나 송주신도시로 다가갔으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일행은 넋을 놓고 걸음을 멈춰 섰다.
지금 역사에선 어쩌면, 조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건물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으니까.
“오...”
“크군.”
“저건 대체...?”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차와 거대수차를 보고선, 모두가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역시...’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도모경은 피식 속으로 웃고 말았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질 않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간 북방에서 수많은 유목민을 귀화시켰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이런 모습을 보였었다.
저게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건지 몰라도, 꼭 어린아이마냥 넋을 놓고 구경하곤 했지.
거대수차는 등장하기 무섭게, 그 효용성을 인정받아 조선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동시에 북방을 차지해 밀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풍차방앗간 또한 늘어만 갔지.
수차와 풍차는 구조적으로 거의 유사했으니, 만드는데 어려울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서방인들이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이지.’
조선보다 훨씬 못 사는 서방인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기에, 언제나 그랬듯 자랑삼아 풍차를 구경시켜줬는데...
그들은 “이건 고향에서도 보던 건데, 뭐 어쩌라고?”라는 표정을 지었고, 도모경은 애써 민망한 표정을 숨겨야만 했었다.
이렇게 북방 전역에 널리 퍼진 풍차와 수차는, 비단길이 열린 후로 서방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발전 및 개량이 이뤄지고 있었다.
물론 시대를 거스를 정도로, 마냥 우월한 건 아니다.
물이 꾸준히 흘러야 하니 터를 잡아야하는 제한이 있고,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제약이 있지만... 이걸 감안해도, 이 시대 기준으론 꽤 효율 높은 물건이었지.
이렇듯 원래 역사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개혁 이후 조선에서 잡학이 두각을 나타내고, 기술의 발전에 조정이 힘을 기울이고 있는 건...
솔직히 말해서 꼭 근본성리학이 몰락하고, 자본유학이 주류가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무역의 단맛을 본 조정입장에서, 최대의 우한거리는 중국시장 아닌가.
사람을 무한정 갈아 넣을 수 있는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인력을 최대한 줄이면서 비슷한 질과 양을 만들 수 있어야 했기 때문.
결국 조정이 기를 쓰고 기술발전에 목을 매는 건, 사실 돈 문제가 가장 컸던 거지.
질릴 때까지 구경하게 내버려두고, 심지어 방앗간 내부를 구경시켜준 후에야 송주신도시에 발을 디뎠다.
황주와 크게 다른 건 없지만, 송주는 창주와 이어지는 무역거점답게 훨씬 더 번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시도 더 크고, 사람도 많고,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북적거렸지.
“오...”
“호오?”
그런 와중에도 일행의 눈길을 유독 사로잡은 건, 대로 옆길을 따라서 줄줄이 늘어서 있는 객주들이었다.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거리를 따라 흐르고 있으니,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다.
애초에 취식과 숙박을 할 수 있는 가게는 유동인구가 많아야만 생겨날 수 있지 않나. 몽골에선 극히 보기 힘든 광경이라서, 시선이 쏠렸나 보다.
“생선도 드시지요?”
“그렇네.”
몽골초원의 몽골인은 생선을 먹을 일이 없지만, 요동에 터 잡은 동방3왕가 출신 몽골인은 요동문화를 받아들여 가리지 않고 잘 먹지 않나.
다들 허기가 밀려왔는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도모경은 앞장서서 객주거리로 안내했다.
혹시나 아직도 의심할까 싶어 야치부르에게 슬쩍 눈치를 주니... 속내를 냉큼 알아차리고서 그가 먼저 나서서 널려 있는 객주 중 하나를 골랐다.
단체손님이라서 그런지 환하게 웃으며 일행을 반긴 주인을 향해, 도모경은 이런저런 음식을 주문했고... 이내 얼마 기다리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들이 앞에 놓였다.
“이건...?”
“절인 생선을 구운 겁니다. 아. 이건 절인 생선이 아니라 말린 생선이군요.”
“오...”
“이게 그건가?”
도모경이 가볍게 설명을 풀자, 다들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셨다.
조선의 식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절인생선은 북방에 널리 퍼진 지 오래. 민족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선호하는 음식 중에 하나가 됐다.
또한 값나가는 상품이 아닌 터라 비단길을 타고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에 못이긴 몽골상인들이 창주에서 절인생선을 사가는 경우가 있었지.
그 탓에 야치부르 일행도 절인생선을 먹어보긴 했는데... 이렇게 조선땅에서 보니, 뭔가 또 달라보였다.
“동해에서 온 생선입니다. 이 객주거리를 지나면 시장이 나오는데, 그곳엔 어물전이 있지요.”
“음...”
“...”
야치부르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윤기가 흐르는 생선살을 젓가락으로 발라 먹었다.
‘동해라...’
짭조름한 맛이 일품인 생선살을 우물우물 씹으며, 야치부르는 도모경이 한 말을 되새겼다.
동해에서 잡은 바다생선이 이 먼 내륙까지 와서 시장좌판에 깔릴 정도라면... 결코 적은 수량이 아닐 게 분명.
이것 하나만으로도 조선의 어업생산량과 수로운송 등이 얼추 짐작이 됐다.
평범한 백성들이 아무렇지 않게 바다생선을 사먹을 수 있는 건, 지난날 잘나갔던 동방3왕가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생선을 마구 분해하며 먹는 동안, 제대로 된 한상이 모두의 앞에 착착 놓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나물무침과 뽀얀 국물을 자랑하는 탕, 쌀이 절반쯤 나머지는 각종 잡곡이 들어 있는 잡곡밥이다.
“음?”
“오...! 아 뜨거.”
다만 야치부르 일행은 음식보다도, 그릇에 먼저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개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그릇에 손이 먼저 가서, 호들갑을 떠는 이도 있었지.
고작 한 끼 식사를 할 뿐이건만... 시사하는 바가 너무 많아서, 야치부르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자기그릇을 이렇게 흔하게 쓴단 말이지...’
그는 왠지 모를 패배감에 속이 살짝 쓰려왔다.
낙후되긴 했지만 어쨌든 도시에 살고 또 부족장인 탓에, 야치부르 일행도 자기그릇을 가지고 있지만... 일반 부족민이 자기그릇을 소지하는 건 극한의 사치 아닌가.
게다가 조선이 서방에 값비싸게 파는 주요 수출품 중 하나가 도자기인데, 여기선 아무렇지 않게 밥그릇으로 써먹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흐음... 종류도 다양하군.’
재빨리 쓱 살펴보는데, 밥이 담긴 자기그릇은 제각각이었다.
보급형 양산품인 탓에 민무늬를 하고 있지만... 백자, 청자, 토기와 비슷한 자주빛을 띄고 있는 것도, 먹처럼 어두운 검은빛 밥그릇도 함께 있었다.
야치부르가 묵묵히 밥그릇만 보고 있어서 일까? 그가 속으로 품은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도모경이 입을 열었다.
“특이하지요? 자기는 흙에 따라서 빛깔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이 흑요석을 닮은 자기는 산동 출신의 장인들이 만든 물건일 겁니다.”
“산동의 한족 말이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야치부르는 되묻고 말았다.
지금은 강남의 자기가 대세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건 강북의 자기 아닌가.
과거 강남원정 당시. 산동의 공청일파를 제거할 때 온갖 장인들을 회유해 조선으로 데려왔는데, 그 중에선 자기장인도 있었다.
“뭐... 한족이 아국에 귀화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중국본토도 시끌시끌하지 않았습니까.”
도모경은 ‘다 알지 않나?’라고 묻듯, 의뭉스런 표정을 지으며 답을 늘어놨다.
“음...”
명이 망하면서 중국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바다 건너 요동까지 심심치 않게 들려왔었고, 야치부르 또한 숫하게 들어왔었다.
다만 그 여파를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나 보다.
‘이렇게나 널려 있단 말이지...’
그는 잡곡밥을 숟가락으로 푹푹 퍼서 집어먹으면서도, 상념은 가시질 않았다.
북방에서 쌀을 먹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아무렇지 않게 객주에서 팔 정도라면... 조선의 식량사정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됐기 때문.
더불어 콩,보리,조,수수 등이 다 섞인 잡곡밥이라곤 해도, 이렇게 다양한 곡식을 이 땅에서 키우는 것 자체가 퍽 놀라웠다.
‘적어도 원 없이 곡물은 먹을 수 있겠군.’
야치부르는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라,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도시탐방을 계속 이어갔고,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송주의 명물장소.
“어떻...?”
도모경이 활짝 웃으며 묻기도 전에, 모두가 그의 말을 끊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헉!”
“헙!”
“무슨...!”
일행들 모두는 긴 그림자를 그리며, 자신들을 가리는 거대한 산을 보며 기겁을 금치 못했다.
고개를 하늘 끝까지 치켜 올려야 한눈에 보일 정도로 거대한 선박. “저게 어떻게 뜰 수 있는지?”라는 의심이 절로 드는 배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역시... 제대로 먹히는군.’
의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잘 먹히는 꼴을 보며, 도모경은 다시금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송주(길림) 바로 옆에는 송화호가 있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이 가득했다.
원래 역사에서의 명나라조차 이곳에 조선소를 건설해서, 요동에 필요한 배를 찍어내던 곳이었지.
수로에 진심인 조선이 이런 좋은 입지를 놓칠 리가 없고, 송주신도시 건설을 시작할 때부터 조선소가 함께 건설됐다.
그 세월이 벌써 십년 가까이 흘렀고, 작금에 이르러선 요동땅을 돌아다니는 조운선, 수송선의 대다수가 이곳 송주조선소에서 만든 배들이었다.
“...”
“허...”
모두는 넋이 나간 표정을 숨기지 않고, 새끼오리마냥 도모경을 따라 조선소 외곽을 따라 걸었다.
몽골 출신이 이렇게 거대한 배를 언제 보기나 했겠나.
풍문으로 듣긴 했어도, 실제로 보고 있자니... 이 위압감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바윗돌이 얹힌 것 마냥, 숨쉬기가 힘들 정도다.
“저기. 생김새가 다른 배가 여러 척 있지요? 지금 막 만들어지고 있는 배들입니다. 이곳에선 꽤 다양한 배를 만들고 있죠.”
일행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오뚝이처럼 고개만 끄덕여댔다.
이곳엔 서방의 조선기술자와 조선소설계사들이 들어오면서, 요 몇 년 사이에 다시금 도약의 날개를 편 상태.
베네치아 조선소의 체제와 제도를 가져와 송주조선소의 실정에 맞게 변형했는데, 큰 틀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일사분란하게 장인들이 달라붙어, 용골에서부터 선체를 조립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흡사 고래를 해체해서 뼈만 남겨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저건...”
도모경은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지만, 일평생 제대로 된 배를 구경해본적도 없는 야치부르 일행이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그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전율에 몸을 떨어댔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은 지금 만들어져서 정박하고 있는 배가 전함. 그것도 새로 설계한 신형전함 3호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전함과 무역선, 신형조운선을 구별할 안목도 없겠지만 말이다.
야치부르 일행이 강렬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사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졌다.
이들은 수로를 타고 남하.
석주(무순)에 도착해 광산기업들을 둘러봤고, 다시 배에 올라타 본주(본계)에 도착. 여기서부턴 육로로 이동해, 중간 기착지라 할 수 있는 연산관에 다다랐다.
“저기 보시죠.”
“저들은...”
강렬했던 전함의 기억이 다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이들에게도 익숙한 연산관에 도착하자... 또 다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처럼 얼얼해졌다.
과거. 조선이 북상하기 전엔 우랑카이 3위도 의주를 직접 찾아와 무역을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봤던 연산관과 동팔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한적했던 연산관은 온 사방이 공사판이 되어, 도시수준으로 확장되고 있었는데... 이들이 특히나 놀란 건, 공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조선군이었다는 점.
이미 창주에서 지겹도록 봐오지 않았나.
검은두정갑은 조선군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어서, 못 알아보는 게 더 힘들다.
그리고 그런 검은색 덩어리들이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연산관 일대에 잡초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엄청나군요... 북쪽에 올라와 있는 조선군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부하 중 한명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목소리를 줄였고, 야치부르 또한 절로 눈이 아래로 깔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대충 눈에 보이는 병력만 해도 수천명이 넘어가는데, 여기에 주둔하고 있는 총병력이 얼마나 될지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운집되어 있다는 것자체가 그 의도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지.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지만, 묵묵부답 침묵만 이어졌다.
“...”
그간 친절히 안내하며 궁금증을 풀어줬던 도모경이지만, 이곳에선 어째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금까진 복여위와 조선의 생활수준의 격차를 알려줬다면, 이곳에선 군사적 격차를 몸으로 실감시켜 줄 요령인가 보다.
도모경은 다 알아들으면서도 살짝 떨어져 걸었고, 야치부르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곤소곤 귓속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전부 두정갑을 입고 있군요... 창주와 그 일대를 돌던 조선기병들이 특별한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음...”
야치부르는 티내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여진정벌 때 조선 대병을 본지 십년 가까이 흘렀다. 그냥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그때보다 무장상태가 훨씬 나아진 게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저기 등에 매고 있는 화살집이 보이십니까?”
“...?”
공사하는 조선군 외에, 돌아다니는 기병들은 하나같이 등에 활과 화살집을 끼고 있었다. 이건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보였는데, 부하는 그 와중에도 특이점을 찾아냈나보다.
“전부 다 똑같은 모양과 크기를 하고 있습니다.”
“...!”
“저 특이하게 생긴 말안장에 꽂아 놓은 기창도 그렇고요.”
누군가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참새처럼 머리를 돌려가며 재빨리 조선기병들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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