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 챕터56. 두드리다 (11)
“진짜군...!”
“헙!”
“허...!”
그리곤 자기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같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저게 가능한 일이라고...!?’
야치부르는 또 다시 망치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짜릿한 두통이 밀려왔다.
보잘 것 없는 화살통조차 규격화가 되어 있다면, 진짜 날붙이 무구는 과연 어떨까.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지금껏 신도시를 거쳐 오면서 온갖 신기한 것을 봐왔지만, 말 그대로 놀랍고 신기하지 뭔가 확 와 닿는 느낌은 아니었다.
허나 군사에 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특히나 지금처럼 긴장감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
“설마... 조선조정에서 지급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설령 개별적으로 샀다고 해도...”
“대체 병기를 제작하는 곳이 얼마나 크고 많아야 저게 가능할지...”
“기업이라는 것 때문에 그런 걸까요?”
다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런저런 의견을 내놨고, 동시에 등줄기가 축축해졌다.
세상 어느 나라도 나라에서 모든 무구를 병사들에게 제공한 나라가 없고, 역사 이래로 그래 온 나라도 없다.
천문학적인 자금. 아주 세밀한 행정체계, 군수보급체계. 균등한 품질을 보장하는 기술력.
이 삼박자가 모두 갖춰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
만약 조선이 조정의 주도하에 모든 무기를 찍어내서 병사들에게 일괄 공급했다면, 그것 자체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만약 개별적으로 구입한 무구라고 치면... 모든 대장간과 무기제작소가 조정의 검사를 받으면서, 균일한 물건을 만들었다는 뜻.
이 또한 놀랍기 그지없는 일.
복여위로서는 감히 꿈도 못 꿀 일이고, 옛 명이나 원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정말 맞지?”
“예. 저기...”
믿기지 않아 혹시나 싶어서 되물어보건만, 부하들은 온 사방에 널려 있는 조선기병들을 보며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몇몇 기병들은 허리춤에 장도를 끼고 있거나 안장 앞에 얹혀 놨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다 똑같은 크기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란 눈을 숨기지 못하고 계속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동팔참과 연산관을 이어주는 산길 초입에 다다랐다.
“허. 여기가 동팔참이라고?”
“음...”
“엄청 넓어졌군.”
다들 과거의 동팔참을 기억하는지, 또 다시 혀를 내둘렀다.
공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험한 산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산길은 산길이다.
이 산길을 대병이 지나갈 수 있게 넓혀놓은 것도 놀라운데,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잘 다져놨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팔참을 이렇게 넓혀놨다는 건...’
야치부르는 말없이 보이지 않는 산길의 끝. 호주와 의주를 떠올렸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기병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면, 조선본토에서 이곳까지 오는 건 지척일 터... 게다가 굳이 저렇게 매끄러운 도로로 다듬은 까닭이 있을 거다.
분명히 마차로 실어 옮기는 보급품 때문일 텐데... 이는 즉. 공세작전과 원정작전을 위한 사전작업 아니겠는가.
‘이걸로 확실해졌어. 조선은 반드시 요동을 칠거다.’
야치부르는 이 모습을 보며, 혹시나 했던 실낱같은 의심조차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고심에 빠져 걸음을 옮기는 야치부르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이 땅이 조선땅이라는 걸 확실히 증명해 주는 증거.
연산관 관아를 향해 나 있는 대로를 따라,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자갈도로가 깔려서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야치부르 일행이 사행단이 아니라 흡사 사찰단처럼.
조선의 밑바닥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느긋하게 내려오는 것과, 조선이 숨김없이 속내를 시원하게 내보이고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은 복여위를 통째로 귀부, 귀화시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구수만 따지면, 3만이 조금 넘는 복여위는 별 거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껏 5만이 넘는 고려인이나, 수만의 남방인을 이주시켜 귀화시킨 전력이 있으니까.
허나 그들은 따지고 보면 유민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복여위는 엄연히 국가와 흡사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단일 세력이다.
그것도 야치부르를 필두로 확고한 지도자가 있는 세력이지.
더불어 동방3왕가부터 복여위까지 이어진 역사가 있었으니, 미약하지만 그들만의 정체성도 있고 말이다.
또한 체급과 관계없이, 복여위는 엄연히 동북방의 정치,군사,정세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던 세력이다.
그들이 종속이 아니라 그대로 조선에 흡수되는 건... 나름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던 관계가 완전히 깨져, 한쪽이 고개를 팍 숙이고 들어가는 모양새.
조선이 하는 짓은 무려 제국이라 칭하던 나라들도, 쉽게 하지 못할 행동이었지.
영토를 따져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복여위의 영역은 미래의 중국,러시아의 국경선에 걸쳐 있고, 조선이 복여위를 귀부시키면 이 땅이 전부 조선땅이 된다.
이러면 북쪽의 제왕부와 서쪽의 아자이가 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된다는 뜻.
동북방의 정세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대사건 아닌가.
이러니 조선으로서는 당근이라 할 수 있는 앞선 생활수준, 채찍이라 할 수 있는 군사력으로, 야치부르 일행의 마지막 심지까지 꺾어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거지.
그리고 이런 노력은 야치부르 일행이 연산관을 지나 조선본토에 발을 디딜 때까지 계속 됐는데... 저 먼 바다건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달그림자조차 어둠에 파묻혀 어둑어둑한 한밤중.
오늘도 언제나처럼 시끌시끌했던 청도의 거리는 침묵에 빠져 있었고, 이따금씩 호롱을 든 조선연대병들이 청도의 외성벽과 거리를 순찰하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 어둠에 파묻혀 도둑놈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뭔가 미리 말이라도 되었던 걸까? 순찰병과 만났음에도 일행들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계속 걸음을 옮길 수 있었고, 이윽고 청도 외성을 지나쳐 내성에 들어섰다.
“후...”
“음.”
다들 나름 긴장 아닌 긴장을 했는지, 몇몇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어 침묵을 깨트렸다.
일행의 연령대는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노련함이 묻어나는 노인들과 열정이 넘쳐나는 청년층이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건 또 처음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노인들은 조용히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고, 청년들은 어둠에 파묻혀서 뭐가 보이지도 않건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청도는 조차지이자 무역항으로 조선인과 산동인이 함께 사는 곳. 허나 내성일대는 산동인이 머물 수 없는 구역이지 않나.
이들도 무역항에 위치한 조선관아와 시장거리는 자주 들락거렸어도, 이곳에 발을 디디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청도의 내성은 조선인들만 사는 곳이라서 그런 걸까? 어스름한 달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조선식 건물들은 나름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리로.”
“...”
일행은 앞장서서 인도하는 인물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솨아악! 시원하게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짭짤한 바다냄새가 온몸을 찌르기 시작했다.
“...!”
일행의 목적지에는 횃불이 사방에 피어올라 밤을 밀어내고 있었는데, 다들 알고 있었음에도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저기. 파도에 맞춰 작게 춤을 추는 배에 올라타면,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거니까.
“가시지요.”
“아버님. 이쪽으로.”
모두는 하나같이 걸음을 멈췄다가... 청년들이 앞장서서 배사다리를 따라 올라서자, 줄줄이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올라타기 무섭게, 소리소문 없이 돛을 활짝 핀 쾌선이 어둠을 해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
“과연. 과연.”
“확실히 빠르군?”
일행들은 쾌선을 처음 타본 탓에, 함선 여기저기에 매달린 등불을 따라 구경을 이어갔다.
모두가 따로 또 같이 쾌선을 살피고 있을 때.
선미루에 올라 저 멀리 멀어져가는 청도를 보고 있던 몇몇 청년들이 있었다.
이젠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원숙함이 슬슬 묻기 시작한 후계자들.
과거 산동의 대표 중 하나였던 영기옥이 사망한 후. 영가의 가주가 된 영승보. 마찬가지로 산동 해안가 호족의 대표였던 장민이 사망한 후. 장가의 가주가 된 장혁진.
그리고... 산동이 아닌 하남 낙양의 대표호족인 추가의 추평, 서주 형가의 형홍.
기존 가주의 뒤를 이어받은 신입 가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살다살다 이렇게 도둑놈처럼, 야밤에 몰래 배를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래살고 볼 일이군.”
“그러게 말이야.”
“조선이 이러는 걸 보면, 분명 보통 일은 아닐 걸세.”
“음...”
추평의 농담은 장혁진의 진중한 발언에 가볍게 쓸려나갔고,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기 스스로 이러고 있음에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너무 뜬금없이 찾아온 조선사신의 제안은 그만큼 당황스러웠으니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고 말이야.’
장혁진은 멀어져가는 청도포구를 보며, 과거를 더듬었다.
조선이 중국을 휩쓸고 난 후. 조선과 연판장 조약을 맺고 나자 연맹체제는 순식간에 중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가장 먼저 시작된 산동은 물론, 조선이 지나친 하남, 절강, 복건등에서 연이어 연맹이 생겨났고, 내륙의 호광 등지에서도 그에 발맞춰서 연맹이 만들어졌다.
명이 망한 후로 각 성별로 따로 놀던 시절이 있었고, 상인호족들이 그토록 바라던 정치권력을 합법적이고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는 묘수였으니까.
이렇게 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상인호족들은 모두가 만족하며 번영을 일궈갔고, 조선이 비단길과 남방을 이어붙이면서 그들 또한 부수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서방과 남방의 물산은 중국내에서도 낯설고 신기했고 인기가 많았으니... 연맹을 가리지 않고 조선과의 무역이 늘어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조선군이 움직였어.’
이런 평화로운 번영에 찬물이 쏟아진 건, 조선이 갑자기 산해관을 공격하고 나서 부터다.
조선은 이미 한차례 중국을 뒤집어 놓고 지나간 전력이 있으니, 이번 일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지 않나.
허나 사신을 보내본들 “너희와 상관없는 일이다. 무역은 계속 될 거니까 걱정마라.”라는 반응만 보일 뿐이었지.
도무지 조선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아무도 모르게 조선의 밀사가 찾아왔다.
연맹이 완성된 후부턴 조선과 연맹대표회는 정식으로 교류를 시작했는데,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야심한 밤에 조선밀사가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찾아온 거지.
그리곤 사방에 소문내지 않고 연맹대표들이 한밤중에 모였고, 조선밀사는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긴히 논의해야할 사항이 있으니, 한성으로 직접 와라.”라는 제안이었다.
‘제안이라지만 거부할 수가 없으니, 사실 명령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야.’
장혁진은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꾸미기에, 이렇게 산동백성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일까.
허나 만약 제안을 거부하면, 어떤 불이익을 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명이 망한 후로. 조선은 무역관을 제외한 조선땅에 타국인이 들어오는 걸 허락한 적이 없는데, 그냥 조선땅도 아닌 수도인 한성으로 초대했다.
얼마나 심각하고 대단한 제안을 할지 모르는데, 이걸 감히 거부할 수 있을까.
당연히 조선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산동연맹 뿐만 아니라 하남연맹에도 제안이 들어갔을 줄은 몰랐다.
그 후. 여기까지 오면서 다들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봤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아 답답할 따름.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고서 시원한 밤바람을 쐬고 있는 지금도, 그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우리 말고 강남연맹도 불렀을까?”
“모르지.”
“그건 아니지 않겠나? 이번 일은 아무래도 북평부와 관련된 일 같은데 말이야.”
“나도 그게 맞다고 보네. 산해관이 공격당한지 몇 달이 흘렀고, 조선군이 북방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 않나.”
“...”
요동과 산동은 꾸준히 교류를 하고 있는 탓에, 요동 일대에서 뭔 일이 벌어지는지는 산동과 하남 출신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면, 조선이 군을 일으킬 것 같은데... 우리를 왜 이렇게 불렀을까. 설마 한손 보태라는 뜻일까?”
“적이 누군 줄 알고 손을 보태나? 그리고 그게 이득이 될까?”
추평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연맹체제가 점점 확고해지면서, 연맹의 군사 또한 호족집단군 혹은 호족연합군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건 모두의 군대인 동시에 사병이었으니, 군병을 동원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
“만약...”
“...?”
추평이 말을 흐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그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특히 두 사람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조선이 요동을 치는데 한손 보태라고 하면 어찌할 건가?”
“음...”
폐부를 깊이 찌르는 말에, 산동호족인 영승보와 장혁진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눈을 마주치며,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산동과 요동은 명이 건국될 때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오죽했으면 명 초기에는 요동이 산동의 행정조직에 편입되어 있었겠나. 당연히 요동으로 가장 많이 이주한 백성들도 산동출신이었지.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러 산동과 요동이 각자의 길로 나아갔지만, 여전히 산동은 요동에 막대한 지원을 하며 먹여 살리고 있었다.
“허나... 상황이 꽤 변했지.”
“조선 때문이겠지?”
“그렇네.”
서로 다 아는 사이에 숨길 게 뭐 있을까.
영승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동이 요동을 지원한 건 북평부의 군세가 강력하기 때문. 허나 조선이 연거푸 북평부를 두들겨 패면서, 전에 비해 확연히 군세가 줄어들지 않았나.
그럼 지원도 줄이면 좋은데...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요동이 먼저 군세를 줄이면서, 계속해서 산동에 빨대를 꽂고 놔주질 않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