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 챕터56. 두드리다 (14)
사실 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조선은 혁명에 가까운 학문적 성과를 이뤄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본유학이 대세가 되면서 잡학이 유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올라와, 다양한 신학문이 주류로 떠올랐고.
개개인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조각난 지식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전문화 과정을 거쳐 진짜 학문으로 변해갔으며.
한문보다 훨씬 편한 훈민정음의 보급. 값싼 종이의 대량생산. 붓을 대체하는 연필과 같은 필기구. 향교와 연구소, 대학의 설립과 함께 전국에 세워진 장서각들까지.
이 모든 게 합쳐지니... 학문적 깊이가 깊어진 건 확실하지 않아도, 적어도 학문의 다양성과 접근성만큼은 원래 역사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된 상태였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이 미래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진행된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해서였지.
조선이 부유해지고 부강해질수록, 연유야 어찌됐건 이 모든 칭송은 결국 왕에게 돌아간다.
민심이 왕을 따라가고, 그걸 등에 업고 왕은 더욱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
또한 학문과 교육을 전처럼 기득권의 전유물로 남겨 놓을 경우. 열심히 때려 부수고 찍어 누른 양반, 지방호족, 지주들이 다른 형태로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의 기조를 꾸준히 이어가려면 새 피를 수혈하듯, 학문 및 교육의 허들을 낮춰서 일반 양민들이 기득권으로 올라올 수 있는 기회와 길을 열어주는 게 필요했고... 그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관원이 되는 기회를 넓게 열어주는 것.
특히나 지금처럼 관원이 엄청나게 불어나고, 온갖 출신이 다 관원이 된 지금 역사에선... 신흥 하급관료가 된 이들은 자신들의 후대를 위해서라도, 학문과 교육의 기회를 넓게 제공하는 게 이득이라고 봤다.
이런 세월이 십년 넘게 지속됐으니, 장혁진을 비롯한 중국호족도 자본유학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수밖에.
조차지나 무역항에서 만난 조선관원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조선이 우리가 찾지 해답을 찾은 건, 분명 놀라운 일이지. 변방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나라가 작아서 그런 걸까?’
장혁진은 과거를 더듬으며 상념을 이어갔다.
지난날 중국에선 숫하게 왕조가 바뀌어 왔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뿌리 뽑힌 적이 없다.
왕조가 바뀌면서 윗대가리들이 갈려나간다 한들, 조정의 기둥과 잔재라 할 수 있는 하급관료들은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허나 운석핵꿀밤은 물질적으로 명나라를 분쇄시켰다.
그간 명이 남경에 모아둔 모든 유물들, 역사서를 비롯해 토지대장과 같은 행정문서들, 이걸 관리 감독하던 수만명의 관료들.
조정에 진출하기 위해 남경에 머물던 대학자들과 그들에게 배우던 새내기 학자들까지.
대제국을 경영할 수 있게 해준 인적, 물적 기반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꼴이지.
중앙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날아가니, 지방의 행정조직은 남아 있어도 명분과 힘을 잃고 쓰러졌고... 그 틈을 노려 암묵적인 권력자였던 지방호족들이 지방요직을 차지하면서 진짜 권력자가 됐고, 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완전히 굳어지고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조선조차 세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사상계가 분열되어 싸워댔는데,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은 오죽하겠나.
난장판이 된 상황에 맞춰서 사상계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고, 조선이 자본유학으로 통합된 것에 반해 중국은 통합은커녕 아직도 분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도 해답을 찾긴 찾아야 한단 말이지.’
장혁진은 세태를 떠올리며,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문제는 중국호족들이 정권을 잡고 연맹을 만들었으면, 이제 이에 맞는 통치명분과 사상적 기반을 쌓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지방에도 유학자들이 남아 있으니 맥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지만, 기존의 성리학 등의 통치원리를 연맹과 같은 연합국가에 완벽히 적용할 수 없었으니까.
이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꾸준히 있어왔는데, 그 관심이 이젠 변방국가라 생각했던 조선의 자본유학으로도 뻗어나갔다.
아무래도 지금껏 문화와 학문의 중심은 중국이었으니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지금 역사의 조선은 명백한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나.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
“하지만... 조선이 조선서책을 가져가는 걸 허락하겠나? 사실 우린 뭐가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야 가서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 가져가는 건 무리더라도, 보는 걸 막지는 않겠지.”
“음...”
이들도 기술서적을 엄중히 관리할 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조선의 배를 따라 만들기 위해서 음양으로 노력을 해봤지만, 모두 실패한 전력이 있으니까.
허나 자본유학은 기술서가 아닌 사상,학문서적이니,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허나... 문제는 따로 있겠지.’
장혁진은 힐끔. 저기 갑판 위에 올라 있는 다른 가주들을 바라봤다.
“어르신들이 반길지 모르겠군.”
그는 들릴 듯 말 듯 혀를 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명나라를 기억하는 노가주들에겐, 조선이 아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여전히 변방국가라는 인식이 있었다.
원나라 시절 몽골이 한족을 지배했어도, 몽골이 한족보다 나은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보고 배운 조선의 사상과 학문을 거꾸로 받아들이는 것에... 티를 내진 않더라도 거부감은 있는 거지.
“... 뭐. 어떻게든 되겠지.”
허나 맥락을 읽어낸 추평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슬쩍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선도 세대가 확연히 구별되는 만큼, 중국 또한 운석핵꿀밤 세대가 구별되는 법.
중화사상은 아직 남아 있지만 금이 간 건 분명했고, 새롭게 가주위에 오른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유년기를 보내며 커온 이들이다.
당연히 노가주들과는 생각이 달랐고, 조선을 그리 얕잡아 보지도 않았다.
배울 수 있다면 배우겠다는 게, 신입 가주들의 생각이었지.
“음... 다만 어르신들의 반대는 둘째 치고, 자본유학을 비롯해 조선학문을 배우는 건 조심할 필요가 있네. 알고 있지?”
“물론일세.”
둘뿐만 아니라, 모두가 눈을 마주치며 한마음으로 뭉쳤다.
사상계의 분열은 곧 혼란을 야기했고, 혼란은 민란으로 이어졌다.
지금 중국이 호족중심의 연맹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이 혼란 속의 승리자가 호족이라서 그랬던 것.
허나 조선의 사상과 학문은 철저히 중앙집권에 맞춰져 있고, 더불어 민간 양민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헌데 이건 중국호족들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 아닌가.
사상적 명분을 찾아 새로운 신분제를 만들고, 양민 위에 군림하는 귀족이 되려는 게 중국호족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니 만큼... 조선이 발전한다고 해서,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거지.
“그렇다고 조선이 나아가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로 나아갈 순 없겠지. 그들은 분명 성과를 거뒀으니까. 그러니... 우리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부를 늘릴 수 있는,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건 필요할 거야.”
“문제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우리를 견제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음...”
모두는 다시금 깊게 침잠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서 정치논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무척 높았기 때문.
연맹을 이뤘으니 이 틀을 깨려는 짓은 단호히 반대하고, 심지어 징계할 수도 있다. 이들이 칭왕자를 조선의 손을 빌려 처리한 것도, 궁극적으론 이와 닿아 있었으니까.
허나 중앙집권을 강조하는 조선의 사상을 들여오면, 자기들 손으로 칭왕자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충분히 몰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맞네.”
연맹은 협의체로 운영되니, 왕조국가처럼 반대파를 숙청해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 허나 자기 파벌에 유리하게끔 정책을 짜고, 공용자금을 끌어올 수는 있지 않나.
별 것도 아닌 일을 심각한 것 마냥 부풀려서, 이걸 빌미로 물고 늘어져 주도권을 가지려고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특히나 안 그래도 조선사상과 제도를 탐탁지 않게 보는 노가주들로서는, 우리 신진들을 찍어 누를 기회로 삼겠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걸세.”
“그래야지.”
장혁진의 거듭된 당부에, 추평 또한 눈빛을 단단히 굳혔다.
동상이몽을 꾸며 서해를 건넌 쾌선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조선에 도착했다.
타국인들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선의 중심지. 한성의 입구이자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강화도를 지나치자.
“저기 보게.”
“포대인가?”
“그래. 보이는군.”
영승보 일행은 저 멀리 보이는 강화도 성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흡사 언덕처럼 생긴 성형요새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저건 모르는 사람이 봐도 딱 봐도 요새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기둥. 하얗게 회칠한 벽돌탑이 꼭대기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등대로군.”
“오...”
저건 해안도시가 널려 있는 중국에서도 보지 못한 거라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강화도를 지나쳐 한강에 다다르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번잡스럽게 돌아다니는 배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보던 배와 흡사하게 생긴 배들도 있고, 평저선임에도 덩치가 무지막지하게 큰 신형조운선도 보였다.
“돛뿐만 아니라 노도 있는 걸로 봐선...?”
“내륙에서 쓰는 배인 것 같군. 아마도 조운선 아니겠나?”
“그래 보이네.”
배에 익숙한 해안도시 호족들은, 자신들의 무역선보다 더 큰 신형조운선을 보며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다.
다만 크게 놀란 건 없었다.
조선보다 무역을 훨씬 많이 하는 곳이 중국항구도시니, 이 정도의 배가 돌아다니는 건 그들에겐 일상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음...”
“흐음...”
다만 한강변을 지나치며 구경을 이어가는데, 다들 뜻 모를 알쏭달쏭한 신음을 흘려댔다.
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수벽이 보이고, 그 수벽 너머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조선백성들이 보였다.
중국과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였는데, 그럼에도 눈에 띄는 건 있었다.
“확실히 말이 많긴 많은 모양일세. 마차도 엄청 많군.”
“후...”
그냥 강 건너를 대충 흘려 봐도, 온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말과 마차가 부지기수.
띄엄띄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줄줄이 꼬리를 물고 돌아다니는 걸로 봐선... 조선에선 저게 일상처럼 보였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모두는 조용히 조선식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부두에 도착하자 곧장 배사다리가 얹혀졌다.
“큰 부두는 아닌 모양이야.”
“그런가?”
“그럴 걸세. 딱 봐도 여긴 조선무역선이 안보이지 않나.”
항구에 익숙한 이들답게, 이곳이 항구가 아니가 포구인 걸 곧장 알아차린 모양이다.
“오...?”
“그냥 돌이 아니군?”
“그러게?”
다만 부두에 내리기 무섭게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회백색으로 굳어진 석회부두는 그들의 눈에도 특이하게 보였으니까.
다들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부두를 빠져나갔고, 다들 빠르게 눈을 굴려가며 사방을 살펴봤다.
풍문으로만 듣던 조선 내부 아닌가. 뭔가 특별한 게 있을지 탐색을 이어가는데...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군.”
“그래도 백성들의 옷차림은 퍽 좋아 보이는 군.”
“그런가...?”
“저기 짐꾼의 옷을 보게. 돌아다니는 백성들과 큰 차이가 없지 않나.”
“...”
영승보 일행은 조선 백성들을 보며, 속으로 작게 침음을 흘렸다.
중국호족은 명나라 시절에도 부를 과시하며 살던 이들이고, 지금은 대놓고 왕처럼 사는 이들이다.
중국산 물건은 안 그래도 최고로 인정받는데, 호족들은 돈을 아끼지 않고 최고만 추구하지 않나.
농담이 아니라 조선왕보다 더 사치스럽게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니 복여위나 몽골출신처럼 조선의 부유함을 보며 놀랄 건 전혀 없지만...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똑같은 부두일꾼임에도... 거렁뱅이나 마찬가지인 중국의 인부와, 눈앞에 보이는 조선의 인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조선의 일반백성들도 나름 부유하다는 말이, 마냥 거짓은 아닌 것 같군?”
“여기가 수도인 한성이라서 그런 것 아니겠나?”
“그런 것도 있고... 나라가 작고, 사람이 적어서 가능한 것도 있겠지.”
“음...”
다들 이런저런 의견을 늘어놨고, 사실 전부다 정답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은 이 시대 기준으로, 손꼽힐 정도로 복지와 구휼에 힘을 쓰는 나라였는데... 몇 배는 부유해진 지금 역사에선 더 말할 필요도 없지.
더불어 상공업의 발전을 위해선, 백성들 개개인이 부유해져서 가구소비량이 늘어야만 했고 말이다.
그렇게 나름 말끔하게 꾸민 백성들을 구경하며, 관원의 뒤를 따라 부두를 빠져나갔는데...
“호오?”
“오...?”
“흠. 이건.”
모두가 하나같이 길게 뻗은 기괴한 도로를 보며 신음을 흘려댔다.
생전 처음 보는 자갈도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잘게 부순 자갈인가?”
“그런 거 같은데? 어디... 끙.”
장혁진은 눈치를 쓱 살피면서 도로에 깔린 자갈을 매만져 봤는데... 수년간 밟히고 또 밟히면서 마모되어 바닥에 딱 달라붙은 탓에, 손톱만한 자갈은 잘 뽑히지도 않았다.
“돌로 만든 도로라...”
“음.”
다들 묘한 눈으로 감상을 이어갔다.
왕처럼 사는 이들이니, 판석과 벽돌로 만든 도로나 바닥을 못 봤을까. 허나 호족장원을 고급스럽게 꾸미는 것과 도시의 도로를 까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인력과 돈이 적잖게 들었겠군.”
“그랬을 걸세.”
과연 이게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찌됐건 이유가 있으니 깔지 않았겠나.
‘부두에 깐다고 하면...’
장혁진은 머리를 굴려봤지만,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수지타산이 맞을지 확신이 안 섰다.
이윽고 마차에 올라탄 이들은 한성을 향해 달려갔고, 순식간에 동대문을 지나쳐 한성 내부로 들어갔다.
“흐응...”
“여기가 한성이란 말이지?”
다들 마차의 차향을 젖히고 구경을 이어가는데... 전혀 다른 부분에서 감탄을 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