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 챕터57. 진군하다 (1)
이 시대의 한성은 전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거대한 도시지만, 중국에는 이런 대도시가 넘쳐난다.
한성시가지가 새롭게 재개발 되었다고 해도, 고층건물이 넘쳐나는 중국의 대도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그랬기에 이들이 놀란 건, 도시가 번화해서가 아니라...
“악취가 없군.”
“그러게 말일세.”
“...”
모두는 체면도 잊어버리고, 코를 벌렁거리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조선인들이 유독 잘 씻고 다니기는 한데...”
조차지에도 목욕탕과 한증막이 있어서, 조선인들의 풍습은 이들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도시 전체가 이렇게 깔끔할 정도면 그거로는 부족할 걸세. 아마도 하수도가 있거나...”
“오물을 재깍재깍 치우는 거겠지.”
“음...”
다들 이게 뭘 뜻하는지 금세 깨닫고, 잠시 침묵에 잠겼다.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중국이니 만큼, 대도시에는 하수도가 있는 곳이 여럿 있었다. 물론 미래의 하수도 시설과 비교하면 안되지만, 어찌됐건 오물을 치우는 시설은 존재했지.
더불어 조선처럼 완벽한 인분비료를 만드는 방법은 모르지만, 퇴비의 존재는 일찍이 알고서 써먹고 있었다. 그러니 오물을 치우는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그걸 이렇게 큰 도시 전체에서 할 수 있다는 건 놀랍군.”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겠지?”
“행정조직도 만만치 않을 거고.”
“...”
확실히 풍문으로만 듣는 것보단, 직접 경험하는 게 확실히 와 닿는 법.
다들 이런저런 품평을 하며, 자신들이 몰랐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한번 더 깨닫게 됐다.
이것 하나만 봐도, 조선이 결코 만만한 나라는 아니다. 자신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니까.
침묵 속에서 계속 이동하다가, 또 다시 낯선 풍경이 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정체를 숨기고 움직이고 있지 않나.
일행은 석회대로를 돌아다니는 행인에 파묻혀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만큼 주변을 볼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저기 보게.”
영승보는 자기도 모르게 손짓을 하며, 교차로를 가리켰다.
교차로에선 시계탑을 만드는 공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중국에도 시계탑은 없는 물건이니, 지금 만드는 물건이 시계탑이라는 걸 알았다면 화들짝 놀랐겠지만... 완성이 안된 탓에, 그저 대리석으로 올리고 있는 탑으로 밖에 안보였다.
그리고 이런 탑은 중국에도 흔하게 있는 거니, 다른 곳에 눈길이 쏠렸던 것.
“오...? 색목인이군?”
“한성에도 색목인이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뿐이겠나? 옷차림을 보게, 관원인 모양이야.”
조차지에서 지겹도록 본 게 조선관원이니, 조선관복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호오...”
‘조선이 원래 이랬던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서로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조선이 서방의 색목인 노예를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은 일찌감치 들어왔었다. 산동과 하남은 아니지만, 강남지방에 색목인 노예가 팔렸다는 소문도 들었고.
다만 그런 색목인 노예가 왕이 거주하는 수도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그런 노예가 관원이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들이 생각했던 조선하고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색목인이라...?”
“색목인도 관원이 될 정도면... 당연히 다른 민족도 관원이 될 수 있겠군?”
“확실히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그런 경향을 보이는 모양이야.”
“여진족을 흡수한 영향일 수도 있지 않겠나?”
다들 이런저런 사견을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사안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건, 이들 또한 연맹을 이끌어가면서 어떤 식으로 나라를 운영해야하는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
산동과 하남은 한족이 주류인 곳이지만, 그럼에도 소수민족은 살고 있었다.
옛 명처럼 중앙집권을 이뤘다면 이주를 시키든, 찍어 누르든 할 텐데... 지금은 이 모든 게 힘들지 않나.
어떤 식으로든 연맹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선, 소수민족에 대한 나름의 대책이 필요했지.
“강남연맹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하더군. 협의회의 자리를 이민족에 내주는 경우가 흔하다고 들었네.”
“특히나 광서와 광동의 경우에는 오히려 한족보다 이민족 호족세력이 더 크다고 하더군. 돈과 사람은 해안도시를 끼고 있는 한족파가 더 많겠지만, 영역으로 보면 이민족파가 더 크니까. 그쪽은 생각보다 통합이 잘 안 되는 모양이야.”
“그건 우리에게 나쁠 건 없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강남이 시끌시끌하면 결국 이득은 조선만 볼 것 아닌가. 남방무역마저 조선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우리는 더욱 조선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걸세.”
“...”
돈에 대해선 빠삭한 이들답게, 금세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졌다.
조선이 남주도(대만섬)와 해주도(해남도)를 지배하고 있다곤 해도, 남방무역의 핵심은 여전히 강남상인들이 쥐고 있었다.
조선이 아무리 좋은 배를 가지고 있어도, 머릿수에서 상대가 안 되니까.
다만 한족 출신이 아닌 이민족 출신 호족이 점점 늘어나면, 한족의 입지는 줄어들기 마련.
아무리 이민족이 한족화되었다곤 해도, 그들은 한족과 싸우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만들어 온 이들이다.
연맹을 만들어 통합을 했어도, 그 주도권을 놓고 더욱더 치열하게 대치할 테고... 이런 대치로 인해 무역양이 줄어들면, 그 자리를 냉큼 조선이 차지할 게 분명.
조선과 강남. 두 시장을 경쟁시켜서 이득을 취하려는 산동과 하남 입장에선, 누구 하나가 독점하는 건 결코 좋지 않은 흐름이지.
“허면...?”
“정확히는 몰라도, 강남연맹에서도 조선의 기조를 유심히 살피고 있지 않겠나?”
“풍파가 더 심해질 수도 있단 말이군?”
“우리나 그치들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다들 씁쓸한 미소가 번지고 말았다.
이들도 조선의 사상을 받아들이니 마니 하면서 난관이 많은데, 강남호족도 똑같을 것 아닌가.
아무리 외부와 교류가 많아 유학적 색채가 적은 강남이라지만... 그래도 사상과 통치의 근본이 유학인 건 변하지 않고, 유학을 버릴 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상념을 날리는 동안, 조선의 마천루라 할 수 있는 육조거리에 들어섰다.
다만 고층건물이 즐비한 대도시에 살던 중국호족들답게 놀란 건 없었고, 3층 관아를 이어주는 구름다리가 특이했을 따름.
이윽고 왕성에 도착하고 나서도, 감상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땅 넓은 중국에서 왕처럼 사는 이들이니, 이들의 장원 또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지 않나.
남경을 기억하는 이들로선, 오히려 “왕성치곤 작은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지.
다만 세종이 상상력을 마음껏 뽐내며 건설한, 다양한 형태의 궁궐이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줬다.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왕성에 도착한 이들은, 쥐 죽은 듯이 티내지 않고 조용히 한성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왕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다들 딱히 불만도 없었고, 이 기회에 한성을 해부하듯 낱낱이 살펴봤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조선서적을 구입하는 건 허가가 나지 않았지.
그렇게 며칠간 시간을 보낸 후.
모두는 부름을 받고 대회의실에 모였는데... 다들 기함을 토해내고 말았다.
혹시나 했던 몽골남부연맹의 대표가 자리에 있었고, 그 옆에는 조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아자이 일파와 제왕부의 사신이 앉아 있었기 때문.
“헉!”
“그대들이 어찌!”
여기까진 그나마 이해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상상도 못한 인물. 바로 요왕부의 사신들까지 떡하니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하암...날 한번 좋고만!”
“날이 좋으면 일을 해야지. 그렇게 놀고만 있을 건가?”
“아으...”
머리에 두건을 질끈 동여맨 두 사내는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도, 열심히 손에 쥔 낫을 놀렸다.
저 먼 북쪽. 광활한 평원에서부터 시작된 쌀쌀한 바람이 밀려왔고, 그 바람의 손길에 이끌려 허리춤 넘게 자란 작물들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음...”
뻐근한 허리를 펴고서 시선을 멀리 던져봤고, 사내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밭을 보며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자신들이 비록 군병이라지만, 태생은 농부 아닌가. 무탈하게 자란 작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힐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그와 비슷한 행색을 한 이들이 밭에 빼곡히 고개를 파묻고 추수하는 게 보였다.
“이번에 추수한 건, 우리에게 주겠지?”
“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에이. 설마... 이렇게나 오랫동안 우릴 붙잡아 놨는데, 수확물을 전부 가져갈까.”
“오랫동안 붙잡아 놨으니 더욱 그렇지 않겠어? 얼마 전에는 배식이 제대로 안 나와서 난리가 났잖아.”
“음...”
욕을 내뱉는 동료를 보며, 사내 또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요동은 군호제를 통해 병력을 유지했지만, 요동의 사정상 이들을 마냥 군병으로 유지할 수가 없었다.
순번을 돌려 군병을 소집하고선, 그들을 이용해서 둔전을 일궈 군량으로 써먹던 일이 빈번했지.
조선이 요동군병을 괜히 토관이나 토병처럼 생각했던 게 아니다.
“쓰벌... 조선이 뭐 어쩐다고 이 난리야? 쳐들어 올 거면 진작 쳐들어왔을 거 아냐?”
“입조심하게.”
“입조심은 무슨. 불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사내는 계속 툴툴거리는 동료를 만류하면서도, 속으론 동의하며 욕을 한바가지 쏟아냈다.
문제는 이렇게 둔전을 일구는 건 좋은데... 갑작스런 조선군의 북상으로 인해, 이들은 작년겨울부터 해가 지나 가을이 온 지금까지 둔전에 묶여 있었던 것.
자기 땅을 일궈도 모자랄 판에, 둔전만 일구고 있으니 불만이 안 생길 리가 있나. 아무리 순번을 나눴다지만, 몇 달 동안 관리를 못하면 자기밭이 엉망이 되는 건 뻔하다.
둔전에서 수확한 곡물을 나눠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죽게 될 판국이었다.
헌데...
“음?”
“...!?”
그렇게 툴툴거리며 낫을 휘두르던 찰나.
뭔가 이상한 게, 저 먼 평야 저편에서 아른거렸다.
“저기...?”
“뭔데?”
사내만 본 게 아닌 모양이다.
동료를 부르기 무섭게, 밭에서 일하던 모든 군병들이 고개를 들고 한 곳을 바라봤고... 이내 확실히 뭔가가 느껴졌다.
작게 흔들리는 미세한 진동.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발바닥을 타고 뼈를 쑤시는 진동이 느껴졌다.
“설마...?”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황망한 눈을 뜨는 순간.
땡땡땡! 둔전 옆에 어색하게 솟아 있던 망루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파수병이 저런 신호를 보내는 이유는 딱 하나 뿐.
“기병이다!”
“도망쳐라!”
누군가 외치기 무섭게, 너나할 것 없이 모두는 쥐고 있던 낫조차 내팽개치고 부리나케 요새로 달려갔다.
요동 백성들은 대부분 대도시 인근에 몰려 살았고, 명나라 시절에 만들어 놓은 요새들만 요양과 심양 일대를 감싸듯 포진되어 있었다.
이렇게 포진된 요새는 백호소, 천호소로 나뉘어서 군병이 주둔했고, 이런 요새를 중심으로 둔전을 일궜다.
제대로 개간 작업을 하진 못했지만, 어차피 버려놓은 땅 아닌가. 뭐라도 심는 게 이득이지.
그러니 이들은 순식간에 농부에서 군병으로 변신해서 요새를 향해 달려갔는데... 그들보다 더 빠르게 먼지구름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오... 온다!”
“조선군이다!”
“진짜 조선군이야!”
두두두. 지축을 흔들리는 굉음이 모두의 귀를 때리기 시작.
자기가 뛰어서 시야가 흔들리는 건지, 기병대에 의해 땅이 울려서 그런 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검은 땅거미가 몰려오듯, 평원 저편에서 불쑥 등장한 그림자는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파라락! 바람을 맞아 요란하게 펄럭이는 깃발소리가 사방에서 귀를 때렸고, 삐비빅! 귀를 찌르는 호각소리 또한 말발굽소리에 뒤섞여 여기저기에서 퍼져나갔다.
그리고... 쉐에엑! 어디선가 들려온 파공음이 등을 때리기 무섭게, 퍽퍽퍽! 콩줄기를 쪼개며 화살이 날아들어 도망치는 군병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헉!”
“허...!”
코앞에 떨어진 화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으나... 그게 실수일 줄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친 조선기병대는 농작물을 아랑곳하지 않고, 밭을 가로지르며 요새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 중간에 껴 있던 이들은 그저 “제발 이쪽으로 오지마라!”라고 기도하면서, 얼굴을 파묻고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콰콰쾅! 두두두! 양옆에서 터져나가는 거친 말발굽소리에, “아아악!” “허헉!” 요동군병들은 괴성과 울음을 질러댔다.
허나 그들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던 걸까? 조선기병들은 요동군병을 스치고 지나갈 따름.
“허...?”
“사... 살았나?”
한숨 돌리며 고개를 든 요동군병들의 눈에, 아직 닫히지 않은 요새 성문을 향해 빛살처럼 조선기병대가 파고드는 게 보였다.
“아...”
“흐흑...”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모든 요동군병들은, 밭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정반대편. 요새를 마주보고 선 낮은 구릉에 올라 있던 일단의 기병들.
기습을 감행한 연대의 지휘관들은, 망원경을 들고 요새를 살피고 있었다.
“대비가 전혀 안되어 있군.”
“여긴 중요한 요새도 아니지 않습니까?”
“천호소이긴 허나, 완전한 편제를 이루진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추수시기이니, 다들 밭에 신경이 쏠리지 않았겠습니까?”
“모두 맞는 말이겠지.”
연대장 진강은 대대장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작년겨울부터 진행했던 작전이, 해를 지나 요동이 추수를 시작할 때에 맞춰 이제야 시작됐다.
조선군 모두는 이날만을 기다리며 날을 갈고 있었고, 반대로 요동군은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라며 점점 힘이 빠지고 있던 상황.
더불어 조선군은 시도 때도 없이 병력을 전개하며 연대를 훈련시켰고, 동시에 요동의 반응을 무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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