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 챕터57. 진군하다 (2)
올 듯 말 듯 왔다갔다를 반복하면, “쟤들 또 저러냐?”하면서 시큰둥하게 넘기지 않겠나.
지금도 딱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선군이 진군한 걸 진작 봤으면서도, 망루 및 정찰기병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으니까.
“가지.”
“옙!”
진강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느긋하게 말을 몰아 나아갔고, 그들의 눈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요동군병이 들어왔다.
“군병인지 농부인지 모르겠군.”
“큭...”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밭 일을 하러 나왔는데 무장을 할 필요가 있나. 그냥 거적때기 한 벌에 낫을 들고 있는 게 고작.
이들은 정말로 조선군이 갑자기 기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본 모양이다.
“잘 데리고 가라.”
“옙!”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병들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는 이들을 일으켰다.
“...?”
다들 황망한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굴려대자, 고려인 출신인지 한어를 할 줄 아는 기병이 뭐라뭐라 외치자 다들 굼뜨게 몸을 움직였다.
연대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이삭을 골라내듯 둔전에 몰래 숨어 있던 요동군병들을 찾아냈다. 애초에 병력 수가 월등하니 놓칠 리가 만무.
굴비두릅마냥 줄줄이 붙들어 요새 밖에 모아뒀다.
진강 일행은 포로들을 쓱 살피며 요새 안으로 발을 디뎠는데, 안쪽도 사정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몇몇 화살대가 벽이나 지붕에 박혀 꼬리를 흔들고 있었지만, 요새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요동군은 확실히 기가 꺾였는지, 항전의 외침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싸움은 없었나 보군?”
“그런 가 봅니다.”
“저희가 빨랐던 것도 있지만, 이 요새가 허술한 점도 있었겠지요.”
대대장은 그리 말을 하고선, 저쪽 성벽 한쪽을 가리켰다.
쥐가 파먹은 것 마냥 군데군데 무너진 곳이 한가득이고, 심지어 성벽 위로 올려놓은 화포조차 없다.
올라가는 계단조차 제대로 보수가 안 되어서, 여기저기에 추가로 박혀 있는 오래된 나무계단은 비바람에 썩어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저희가 주둔한 지 한참 됐는데도 보수가 안 됐다면...”
“훈련 상태나 대비 또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거군?”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흐음...”
‘좋긴 좋은데...’
진강은 일이 쉽게 풀려서 좋긴 한데, 같은 군인으로서 한편으론 슬쩍 화도 치밀어 올랐다.
이들이 만약 아군이나 부하였다면, 이렇게 속시원하게 웃고 있을 수 있을까. 괜히 자신을 되돌아보고 말았다.
“여기로 서라!”
“똑바로 서! 움직이지 말고!”
계속해서 나아가자, 침묵 속에서 이리저리 물고기 떼처럼 몰려 다니는 요동군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고... 그래도 순번을 돌려서 야간순찰을 돌긴 하는지, 이제 막 깨어나서 눈을 비비며 잠기운을 몰아내는 이들도 보였다.
“연대장님!”
“...?”
“이거 보시지요.”
요새 중앙으로 향하는 도중에 부하 중 몇이 달려와 보고를 하는데... 그의 눈앞에 녹이 슨 창날이 달려 있는 창대 여러개가 놓였다.
“병기고에서 찾은 물건입니다.”
“이게?”
“예. 거의 반수가 이런 상태였습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되묻었건만, 부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첩자들의 말이 맞긴 맞았던 모양입니다.”
“음...”
진강은 다시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군도 얼추 조선군의 사정을 읽고 있었겠지만, 조선군은 더욱 철저히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변경 요새에서 아무리 둔전을 일군다고 한들, 생필품을 비롯한 보급이 필요한 건 당연한 말.
허나 돈은 안 되고 품만 드는 이 일을 바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요동군은 상행허가를 미끼로 민간상단에게 보급을 떠맡겼다.
아무도 모르게 조선에 회유된 요동상인들은, 이런 보급을 책임지며 변경요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조선에게 넘겨줬던 거지.
그리고 이 요새에 대한 정보는 이곳을 공략해야할 진강과 지휘관들이 당연히 알고 있었던 바.
혹시나 했던 첩보가 진짜 진실이었던 모양이다.
“...”
아니나 다를까. 계속해서 요새 중앙의 관아로 향하자, 벌써 정리를 끝마쳤는지 요새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재빠르게 쓱 훑어봤지만 시체나 핏자국도 없는 걸로 보아, 유혈충돌도 없이 모조리 사로잡은 모양새다.
“누가 천호장이냐.”
“...”
진강이 묻기 무섭게, 연대병 둘이 기창으로 툭툭 때리며 누군가를 떠 밀었다.
자다가 막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꼴을 숨기지 못했는데, 제대로 차려 입지도 못한 탓에 볼록 튀어나온 배를 자랑하는 인물이 일행 앞에 놓였다.
이건 뭐 돼지 한 마리가 따로 없다.
“흐음...”
“심양파벌은 그래도 기병장군이 대다수라고 들었는데?”
“변경 요새의 보급품을 빼먹을 정도로 부패했으면, 저런 꼴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진강은 부하들의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말았다.
저런 꼴로 말을 대체 어떻게 탈 수 있을까.
그도 문제가 많았던 북평부 출신이지만 이젠 조선인이 다 된 탓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복하겠나?”
“그... 그렇습니다!”
어째 이 질문을 하기를 기다려왔던 건 마냥, 천호장으로 보이는 이는 망설임도 없이 넙죽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나름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사방에서 연대병이 살벌하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터라, 진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며 달라붙지는 않았다.
“...”
다시금 쓱 포로들을 살피는데, 하나같이 진강의 눈빛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며 굴종을 표시했다. 누가 봐도 “우리 모두 항복합니다!”라고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쯧.”
“...”
진강이 작게 혀를 차자, 포로들을 가볍게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보며 한번 더 실망한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정리해라.”
“알겠습니다!”
“충성!”
이미 어떻게 정리를 할지, 포로를 어떻게 다룰지 또한 이미 계획이 다 짜여 진 상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연대병들은 각자 자기 할 일를 찾아, 삼삼오오 모여 요새를 수색하고 포로를 정리했다.
조선군은 모든 방면에서 요동을 향해 일제히 진군을 시작했다.
그 중 사주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 책임진 곳은, 우랑카이 3위와 북원잔당을 저지하기 위해서 요서 지역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변경요새들.
연대별로 쪼개진 2만 기병대는 각자의 목표를 잡고,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저 먼 하늘 위에서 조선군의 움직임을 본다면... 요왕부가 위치한 요서 지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가, 일제히 동쪽과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요동을 향해 진격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이렇듯 요서 지역의 모든 변경요새는 한날한시에 공격을 받았고... 진강이 함락시킨 변경요새처럼 개판인 곳이 있는 반면에, 나름 긴장을 놓지 않고 충실히 지키는 곳도 있었다.
“나름 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저기 보이십니까? 포대도 있군요.”
연대장 장영은 대대장의 손짓에, 망원경을 들고 요새 한쪽을 살펴봤다.
요동군은 제대로 된 포가도 없고, 조선군처럼 단단한 포진지를 짓는 방법을 모른다.
그저 성벽 위에 화포를 대충 올려놓고 사용했는데, 그 탓에 망원경으로 성벽 위를 쓱 살피는 것만으로도 화포의 개수와 위치를 알 수 있었지.
“4문이라... 첩보보단 많군.”
“아무리 보급품을 나르는 군상이라고 해도, 요새 안쪽까지 살피지는 못했을 겁니다. 화약의 경우에는 민간상인이 취급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을 테니까요.”
염초를 약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지만 극소수. 또한 염초와 화약은 엄연히 다르지 않나.
화약은 요동군부가 관리하는 물건인 탓에, 요동상인도 변경요새에 화약이 얼마나 보급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화포가 몇 문이 있는 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지. 그걸 캐묻는 건, 의심받기 딱 좋은 질문이기도 하고.
“어찌하시겠습니까?”
“음...”
장영은 성벽 위에 일사분란하게 정렬해 있는 요동군병들과 여기저기에서 휘날리고 있는 요동군기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는데...’
그는 소대별로 모여서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연대병들을 한번, 그리곤 시선을 돌려 굳건한 기세를 뿜어내는 요동군병을 바라봤다.
‘패배할 일은 없겠지.’
이곳 또한 천호소지만, 변경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오백 정도 될 거다.
저들 중에서 궁병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지만, 연대병은 전부 기사를 할 줄 안다. 또한 요새에 배치된 화포는 고작 4문이지만, 연대가 끌고 온 야전화포는 10문이 넘는다.
‘허나...’
그래도 화포는 화포다.
저들의 화포가 아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피해를 못 주는 건 아니지 않나. 화포가 쏟아내는 포탄 앞에선, 제 아무리 정예한 기병이라도 맞으면 죽는 거다.
‘굳이 공성전을 진행해서 피해를 볼 필요는 없겠지.’
그는 다시금 부하들을 쓱 훑어보면서, 미련을 애써 털어냈다.
연오랑이 만들어낸 군부는 이 시대를 뛰어넘는 기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조선군은 적의 수급으로 공훈을 정하지도 않고, 적장이 얼마나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전과를 확대했는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작전계획에 따라 제때 정확히 움직여 임무를 수행하는 게 중요하고, 적을 많이 죽이는 것보다 아군이 상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그게 이득이지 않나.’
상인 출신의 아버지를 둔 장영은 자기도 이런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다.
상비군, 그것도 기병인 조선군 한명의 가치는 징집된 요동군병 5,6명의 가치를 뛰어넘는다. 미래의 가치를 빼고, 정예기병을 만들기 위해 병사 개개인에게 쏟아 부은 군비만 따져도 그렇지 않을까?
작전 성과등의 문제를 빼고 순전히 병사만 따졌을 때는, 최소한 1:10의 교환비 정도는 나와야 이득을 보는 셈이지.
“그러니... 안 싸우는 게 최선이겠지.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
장영은 고민을 끝마치곤 그리 중얼거렸고, 대대장 등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히죽 웃어 보였다.
“백기를 준비해라. 이야기를 먼저 나눠봐야겠다.”
“적장이 응하겠습니까?”
“첩보가 맞다면, 바보는 아닐 테니까.”
“...”
대대장들은 장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대치상황이 오래 지속됐는데, 아직까지도 풀어지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부하들을 휘어잡고 있다는 뜻 아니겠나.
“알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연대병들이 움직였고, 준비를 끝마치자 장영과 몇몇 호위기병들은 백기를 앞세워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겁도 없이 화살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장영은, 망설임 없이 목청 높여 외쳤다.
“천호장 한유! 거기 있는 걸 안다!”
“...!”
뜬금없이 냅다 소리치자, 성벽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의 마음이 요동쳐 물결이 이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조선군과 전혀 접점이 없던 이곳 변경 요새의 지휘관 이름까지 아는 것에, 꽤나 놀란 모양이다.
“나는 39연대장 장영이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대화는 할 수 있지 않나!? 부하들을 생각한다면 나와라!”
“...!”
거침없는 그의 말에 다시금 소란이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자... 이윽고 요새 성문이 열리면서 몇몇이 백기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
“...”
‘생각보다 젊군?’
장영 본인도 사실 나이를 얼마 안 먹었건만, 그는 문뜩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천호장 한유는 눈 밑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얼굴은 피곤에 쪄들어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칼날처럼 빛나는 눈빛만큼은 숨겨지지 않았다.
“고생이 많았나 보군.”
“... 그대들 때문이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장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내뱉자, 한유는 그를 힐끔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군.”
“칼간 출신이지.”
“아...!”
장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하자. 어째 칼간이 어디 붙어 있는지 아는지, 한유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아나보군?”
“들어는 봤다. 지난날 조선이 거용관을 무너뜨릴 때, 조선에 귀화했다지?”
“...”
장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한유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허나 장영은 보지 않아도 그의 머릿속이 읽어졌다.
항장도 아닌 이민족 출신이 이렇게 조선군 장군이 되어 등장한 것에, 나름 놀란 게 분명할 거다.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만 설명을 해주자면... 요동의 모든 요새가 공격을 당하고 있을 거다. 아군의 수는 대략 6만. 그것도 기병만으로 6만이지.”
“...!”
“헉!”
"흐끅!"
자랑스럽게 말하는 장영을 보며, 한유는 격동을 애써 감추며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함께 온 부하들이 하나같이 놀라서 헛기침을 내뱉었으니까.
“거짓이 아닌 건 알고 있을 텐데?”
“...”
“육군 외에 지금쯤이면 해군도 금주를 공략하고 있겠지. 아국의 해군에 대해서 들어봤겠지?”
“...”
모를 리가 있나.
그간 조선해군이 벌인 수많은 전쟁소식은 요동군도 충분히 들어봤고, 가깝게는 산해관을 두들기러 가는 조선전함을 요동수군이 환호하며 반겼었다.
허나 자기편일 땐 그렇게 든든했던 조선해군이, 이제 적이 되어 자신을 두들겨 패러 온다고 하니... 당사자가 아님에도 한유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한유가 날선 질문을 던져보건만, 장영은 계속해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어갔다.
“항복해라. 어차피 승부는 정해져 있는데 싸워서 뭐할까.”
“무슨...!”
“아아. 다 알고 있는데 허장허세는 그만하지? 자네가 어떤 처지에 몰렸고,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우리가 모를 것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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