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452화 (452/538)

452. 챕터57. 진군하다 (3)

다짜고짜 항복하라는 말에 한유와 부하들은 발끈하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입이 다물어지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간 겪었던 일이 떠오르기 무섭게, 장영은 직접 보기라도 한 것 마냥 입을 놀렸으니까.

“요동에 그대들이 지켜야할 가치와 명분이 있나? 이 땅에? 이런 보잘 것 없는 변경요새를 굳이? 대체 언제부터 요동이 요동이었지? 그대들은 대체 뭔가?”

장영은 그리 토해내고선 “다 알면서 왜 모른 척을 하지?”라고 말을 하듯,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

헌데 뭔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임에도... 한유와 부하들은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과거. 명이 강남에서 건국된 시기는 퍽 이르지만, 그 명나라의 힘이 요동에 미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해버렸지.

요동이 원과 동방3왕가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시절은 명이 지배하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길고... 심지어 명이 망한 후 지금까지의 세월이, 명이 요동을 잠깐 지배하던 시절보다도 길다.

당장 한유와 부하들도 명이 망한 후 태어났거나, 그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으니까.

더불어 이 땅은 한족,고려,여진,몽골의 문화가 뒤섞여, 중국본토와는 다른 문화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명이 망하면서 중국본토에 동화되는 것도 멈춰지지 않았나.

이들을 그냥 한족이 아니라, 요동인이라고 따로 부르는 이유가 있었지.

“무슨 뜻인지 알지 않나?”

“...”

장영의 속뜻은 요동은 한족에게 근본도 없는 땅인데, 이곳을 지키는 의미와 가치가 있냐는 것.

반대로 조선이야 말로 요동의 주인이었던 고려를 이어받고 여진, 몽골을 흡수했으니, 요동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다는 뜻이었지.

“명분은 둘째치고 당장 그대들의 입장을 볼까? 그대들이 이 변경요새에 부임한지 벌써 5년째 아닌가?”

“헙.”

“허...”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이어지는 장영의 말에, 한유와 부하들은 다시금 기겁하고 말았다.

한유를 아는 것도 놀라운 데, 그의 행적까지 알고 있으니 입이 쩍 벌어진다.

장영은 그런 그들을 보며 같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요동의 판세를 읊어갔다.

“근본도 없는 요양파는 북평부의 정벌을 외쳐왔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들은 그저 그걸 명분으로 정권을 차지하는데 급급했지.”

“...”

“그런 보잘 것 없는 요양파에게 밀리고 밀린 게 심양파 아닌가? 헌데 그런 심양파에서조차 입지를 굳히지 못하고, 그대들은 버린 말 취급을 당하며 이런 변경요새에서 썩고 있지 않나?”

요동의 정세와 이들의 과거를 줄줄이 읊자, 한유와 부하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마냥 머리가 얼얼해졌다.

장영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이 변경요새들은 명나라 시절에 북원잔당과 여진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놨던 요새들이다.

헌데 조선이 북방으로 진출해 여진을 흡수하고 요동북부를 차지하자, 강제적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그 세월이 벌써 십년이 가까이 흐르자, 변경요새 또한 긴장감과 치열함 보다는 나태함과 평화에 물들 수밖에 없었지.

심양파나 요양파나 “어차피 우랑카이 3위와 여진이 발호하지도 않는데, 굳이 변경요새를 힘들게 지킬 필요가 있나?”라는 게 공통적인 생각이었고, 안 그래도 먹기 살기 힘든 요동으로서는 변경요새에 대한 지원을 갈수록 줄여만 갔다.

반대로 요동 동쪽을 차지한 조선이 신도시를 만들고 무역관을 열자, 이쪽에 위치한 도시와 변경요새들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과의 무역은 천호장과 같은 요새지휘관들에게 꿀이 떨어지는 자리였으니, 요양파와 심양파 내부의 중점 인물들만 부임할 수 있는 보직이 되어버린 거지.

한마디로 한유와 부하들은 배경도 신분도 변변치 않아서, 노골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다.

단순히 이들 뿐일까.

요서 지역의 변경요새에 부임하고 있는 이들 대다수가, 어느 한쪽의 줄도 잡지 못해서 쭉정이가 되어 밀려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직은 한직인 이유가 있고, 요직은 요직인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이 좁은 요동을 놓고 그대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한치 앞을 못 보고 어리석게 움직인 건 사실.”

“...”

“그러니 다시 묻겠다. 그대들이 이 변경요새를 지켜 요양파나 심양파에게 충성을 다할 이유가 있나?”

“...”

“...”

무섭도록 날카로운 질문에, 한유와 부하들은 비수에 찔린 것마냥 숨이 가빠왔다.

대놓고 변절하라고 회유하고 있는데, 단칼에 잘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으니까.

그들은 속으로 ‘하긴 맞는 말이긴 해. 개처럼 부려먹기만 하고, 그놈들이 대체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자기도 모르게 동료의 얼굴을 살피다가, 눈이 마주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요동백성들은...”

한유는 괜히 부끄러워서 다른 핑계를 댔지만, 장영은 또 다시 피식 비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하! 그대도 그게 웃기는 소리인걸 알지 않나? 요양파와 심양파가 요동을 갉아먹는 주범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요동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게 그들 아닌가?”

“...”

이건 당장 한유와 부하들이 직접 겪은 일 아닌가.

비웃는 장영을 보며, 그들은 그들이 겪었던 과거가 불쑥불쑥 튀어 올라... 날선 대꾸는 하지 못하고 울대만 꿀꺽거렸다.

“애초에 그대들이 요동백성들을 생각했다면, 요동백성들이 대체 왜 아국으로 도망쳐 귀화했을까. 변경요새에 부임한 그대들이 더 잘 알 텐데?”

“끄응...”

또 다시 폐부를 헤집는 말에, 신음만 절로 나왔다.

심양파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과 조선과 가까이 인접한 마을에서, 요동백성들이 몰래 도망쳤다는 소식은 지겹도록 들어왔다.

헌데 대책을 수립하긴커녕, 심양파와 요양파의 지도부는 “차라리 잘 됐다. 소출도 나오지 않는 땅에서 사는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든데, 오히려 없는 게 낫지.”라는 무책임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조선에 항의를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니까 정신승리를 한 것이기도 했지만, 뭐가 됐건 이런 자세를 취한 건 분명한 사실.

“나아가 과연 요동백성들이 지금처럼 살기를 바랄까? 아니면 아국의 백성이 되는 걸 바랄까? 이건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는 문제 아닌가?”

“...”

이 또한 맞는 말.

조선이 잘 사는 나라인 건, 변경지역에 사는 백성들이 더욱더 잘 알고 있는 사실.

특히나 안 그래도 요양과 심양에게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변경지역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싸움에서 괜히 애꿎은 목숨을 걸 필요가 있나? 누가 알아준다고?”

“...”

“그리고.”

“...?”

장영은 히죽 웃던 표정을 지우고,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무서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국은 천하제일웅관이라던 거용관을 무너뜨렸다. 그대들이 머무는 저렇게 작은 요새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 같나?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

“큼...”

대놓고 자신들을 무시하며 협박을 늘어놨지만, 한유와 부하들을 발끈하지도 못하고 그저 속으로 이를 갈고 말았다.

거용관과 천호소 변경요새를 비교하는 게 말이나 되나. 할 말이 절로 없어진다.

“한시진을 주겠다. 항복할 생각이라면, 요새 밖으로 전부 나오도록.”

“...”

장영은 그렇게 최후통첩을 날리고선,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말머리를 돌려 뒤로 돌아갔다.

장영과 호위기병이 돌아오기 무섭게, 언제든 연대병을 돌진시킬 수 있게 준비해 놓던 대대장들이 다가왔다.

“어찌되셨습니까?”

“글쎄. 말이 통할 것 같긴 한데... 결정은 저들 몫이지.”

“예.”

대대장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깊게 생각할 것 있나. 회유가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무너뜨리고 가면 그만이다.

장영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재깍 명령을 내렸다.

“적 포대의 위치는 확인했지?”

“그렇습니다. 초탄을 맞출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후탄부터는 확실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회유를 하는 동안, 화기대장은 요새의 포대를 살폈는지 자신만만한 대답을 내놨다.

“야전화포로도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걱정마시지요.”

혹시나 싶어 되묻었지만, 화기대장은 가슴을 쿵쿵 때리며 확신을 줬다.

요동군의 화포와 화약은 명나라 시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조선화포와 화약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지 오래.

사거리가 월등해서, 조선화포만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었다.

물론 야전화포는 기병의 기동력을 따르기 위해서 구경口徑을 작게 해서 무게를 줄였고, 이 때문에 인마살상용 무기가 된 게 사실.

아무리 변경요새의 성벽이 낮고 얇아도, 야전화포만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포대와 포병을 상대하는 건 문제 없습니다.”

허나 성벽은 못 부셔도, 성벽 위에 올라 있는 포대는 얼마든지 박살낼 수 있지 않나. 그렇게 포대만 무력화시키면, 아군의 희생은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다.

“좋아. 방열을 하도록.”

“옙!”

“적의 지원이 오기는 힘들겠지만... 혹시 모르니 정찰소대도 뿌리고.”

“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고, 횡대로 늘어서 있던 연대는 순식간에 소대 중대별로 찢어져 변경요새를 완전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변경요새에서도 조선군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을 터. 긴장감이 점점 높아지는 와중에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이윽고 약속된 한시진이 되자.

“백기가 올랐습니다.”

“좋군!”

장영이 가볍게 박수를 치기 무섭게 삐걱. 쿵! 변경요새의 성문이 완전히 활짝 열리면서, 개미굴에서 튀어나오는 개미처럼 요동군병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호...? 확실히 능력이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항복을 하더라도 나름 기개는 지키고 싶은 모양이군요.”

“이 판국에 그걸 해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거겠지.”

장영과 대대장들은, 줄줄이 도열하고 있는 요동군병을 보며 나름 놀란 감상평을 늘어놨다.

항복하는 판국에 규율과 질서를 지킬 필요가 있나.

허나 요동군병은 나름 오와 열을 맞춰서, 분대별로 뭉쳐서 방진을 짜듯 도열하고 있었다.

요동군은 옛 명나라의 군제를 따르고 있었고, 천호,백호로 내려가지 않나. 조선군과 흡사하게 십인대, 오십인대로 나뉘어서 알아보기 쉽게 정렬했다.

“빠짐없이 전부 다 나왔습니다. 함정은 아닌 것 같군요.”

“그래 보이는군.”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의 수는, 첩보를 통해 이미 대충 알고 있는 상황. 알아보기 쉽게 정렬한 탓에, 수를 헤아리는 건 힘들지도 않았다.

“가지.”

“예.”

장영과 지휘부가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자.

“와아아!”

“진군!”

연대 전체가 포위를 풀고, 재빠르게 다시 하나로 뭉쳐 승리의 함성을 외쳐댔다.

“...”

장영과 지휘관들이 다가가자, 한유와 부하들은 백기를 들고 앞으로 나와 가볍게 무릎을 꿇었고. 이내 천호장에게 내려진 지휘봉을 내밀었다.

“좋은 선택이었네. 일어서게.”

“예.”

이미 마음을 정했는데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가질 필요가 있나. 어째 항복을 했건만, 한유는 마음고생이 끝났다는 생각에 얼굴이 활짝 펴 있었다.

“수거해라!”

“옙!”

한유를 따라 장영과 지휘관이 말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연대병들은 요동군병들의 무장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흠... 확실히 지원이 제대로 안된 게 맞는 모양입니다. 활과 노궁은 얼마 없군요.”

“갑옷도 그렇습니다.”

지휘관들은 재빠르게 요동군의 무장을 살피면서 중얼거렸고... 조선말이라서 알아들을 순 없어도, 대충 분위기로 파악한 한유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딱 봐도 자신의 실책이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헌데... 그 와중에 살짝 이상한 모습이 한유의 눈에 들어왔다.

조선군은 갑옷,창,활등의 무기는 압수해서 한곳에 모아두고 있었는데, 어째 다른 건 전혀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저건...?”

“왜? 설마 우리가 자네들을 약탈하거나 억류할 줄 알았나?”

“...!”

자신만만한 장영의 말에 한유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아무리 항복을 했어도 그렇지... 어쩌면 무기로 써먹을 수도 있는 낫이나 식칼등도 회수하지 않고, 또 자신들을 그냥 풀어놓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

“허면... 저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이제 곧 이곳을 관리하고 확인할 후발대가 올 걸세.”

“아...”

한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장영이 했던 말이 허장허세가 아닌 걸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

“착호군에게 연락을 보냈지?”

“예. 이제 곧 도착할 겁니다.”

장영의 물음에 부하 중 한명이 재깍 답을 했고,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유에게 가볍게 설명을 해줬다.

6만의 육군병력은 착호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육군이 변경요새를 함락시키고 계속 요양과 심양을 향해 진군하면 그 뒷수습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항복을 했으면 이제 간단한 치안유지와 행정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 일은 연대병보다 착호군이 더 잘하니까.

“그대는 내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군.”

“...!”

“아국은 이번 전쟁에 육,해군을 합쳐서 십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네. 이 전쟁이 오래 걸릴 것 같은가? 요양파와 심양파가 변고를 알아차릴 때쯤이면, 이미 아군이 요양과 심양을 포위하고 있을 걸세.”

“허...”

“헉!”

담담하게 말하는 장영을 보며, 한유의 부하들은 다시금 기겁하며 신음을 질러댔다.

지금까지 해온 짓을 보면 결코 허세가 아니니, 진짜로 그리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겨졌으니까.

“설마 그대들을 공성전에 밀어 넣을 거라 생각한 건가?”

“...”

장영은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한유의 부하들은 진짜로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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