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챕터57. 진군하다 (4)
“아국은 요동백성들을 그대로 흡수할 걸세. 그래서 이렇게 피를 보지 않고, 원한과 원망을 쌓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거고.”
“...”
“더불어 그대들은 앞으로 전부 조선인이 돼야 하지 않겠나? 당장 그대 또한 나를 보고, 또 창주를 거쳐 간 색목인 노예들을 보면서 전부터 상상해 왔을 텐데...?”
“...”
‘후...’
“네 속을 다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장영의 심유한 눈길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한유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지난세월 평화가 찾아왔으니, 요동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질 법도 하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북방무역시장을 잃어버리고, 산동의 지원은 줄어들었으니, 요동으로선 구멍 난 재원을 어떤 식으로든 채워야 했으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곤 요동백성들을 쥐어짜는 것 밖에 없었으니... 목숨이 위협당할 일은 없어졌지만, 전보다 가혹한 세금을 내야만 했지.
백성들의 생활이 오히려 점점 힘들어졌다면, 그나마 정세를 읽을 줄 아는 무관과 관료들의 처지 또한 난감해졌다.
요동은 태생부터 자립할 수가 없는 지역이다.
그런 지역에 터 잡고 나라꼴을 이루려고 하니, 제대로 돌아가는 게 있겠나.
더욱이 합심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으면 모르겠지만, 요양파와 심양파로 쪼개져 싸우는 탓에 요동을 발전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이대로 있다가는 요동이 쇠락할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럼 남은 건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득을 챙겨서 훗날을 도모하는 게 인지상정.
이 탓에 안 그래도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요동군부는, 더욱더 인맥에 의존해 관직에 올라 한탕하려는 무관과 관료들이 늘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돈도 배경도 없는, 변경요새의 지휘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굳이 조선군이 이렇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이대로 있다가는 부귀영화는커녕 진급도 못할 텐데... 앞으로 어떻게 하나?”라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지.
헌데... 불길에 기름을 끼얹듯. 안 그래도 심란한 상황에서, 그들이 뻔히 볼 수 있는 바로 옆엔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며 발전하는 조선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과 자주 접한 만큼... 색목인 노예든, 심지어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야인여진이든 할 것 없이, 각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자리를 잡는 걸 보고 듣지 않았나.
한유처럼 나름 인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조선이라면, 내 꿈을 더 펼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안 해볼 수가 없었던 거지.
한족도 몽골인도 아닌 칼간 출신의 장영은, 한유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덩치가 작을 뿐, 칼간이나 요동이나 따지고 보면 처지는 흡사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
“그대가 보기에 요서의 변경요새 중에서, 몇이나 아군에게 항복할 것 같나?”
“음...”
한유는 히죽 웃으며 묻는 장영을 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고...
‘아무래도. 저들 뜻대로 되겠군.’
그는 자신이 아는 천호장들을 떠올려 보고서... 이런 결론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애초에 능력이 없었으면 천호장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능력은 있으나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이기엔 애매한 이들을 한직으로 몰아냈다.
그러니 다들 정세를 파악하고서, 굽히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이들 말대로, 우리가 요양파와 심양파에게 충성을 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 외에는... 쓸모없는 놈들이지.’
한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나머지 또한 결론을 내렸다.
그 외에는 능력도 없으면서, 변경요새의 천호장도 관직이랍시고 인맥과 뇌물을 통해 부임한 이들이다.
그치들은 조선군을 보고 싸울 생각도 안했을 거고, 보나마나 자기 뒷주머니를 챙기느라 대비 또한 제대로 안했을 거다.
그걸 감사해야할 윗선조차 죄다 한패거리이니, 눈감고 아웅하며 넘어갔을 거고.
“그렇군.”
“...”
생각을 털어놓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장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확인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한유는 다시금 조선과 자신들의 격차가 느껴져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는 국경지대를 순찰하는 조선군을 마주치긴 했지만, 조선군의 지휘관이 누군지, 무장과 편제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허나 조선군은 파벌의 핵심 인물도 아닌 그 자신의 신상내역을 모두 알고 있지 않나. 한유만 특별할 건 없으니, 아마도 변경요새 천호장들의 신상과 성품 쯤은 얼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허면... 이제 뭘 하면 됩니까?”
한유는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금 되물었다.
아까와 다른 점은, 살짝 기대감이 실렸다는 점. 조선군이 이렇게 모든 걸 준비해서 왔다면, 분명 자신들을 다르게 쓰지 않을까 싶어서다.
하지만... 장영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지 않았나. 우린 그대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네. 다만 당장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는 건 무리야. 후속부대가 오면 그대들의 신상을 파악하면서 행정처리에 들어갈 테니까. 두 번 일을 하지 않으려면, 여기서 처리하는 게 편하지.”
“...”
“게다가...”
장영은 턱끝으로 요새 한쪽에, 무더기로 수거해 놓은 낫 등의 농기구를 가리켰다.
“요새 밖의 밭을 그냥 버려둘 텐가? 아무리 아국이 식량을 준비해 놨어도, 이왕 키운 작물을 그냥 썩게 내버려두는 건 아깝지.”
“...!”
이 자신만만한 말에, 한유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요동군병을 요새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농부로 써먹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뒷걱정 따윈 하지 않고 이렇게 대담한 결정을 내리는 건지 모르겠다.
“대신 그대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우리와 함께 움직이지. 심양으로 가는 길에 들려야 할 마을이 몇 있을 텐데... 우리만 가는 것보다, 안면이 있는 그대들이 함께 가면 동요가 적을 테니까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이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통치를 하러 왔군.’
한유는 자신의 상상을 한참 벗어나는 조선군을 보며, 다시금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선군이 기습적으로 진군하기 며칠 전.
언제나처럼 시끌시끌하던 개원이 오늘은 유독 더 시끄러웠다. 까닭인 즉. 성문 밖으로 나가려는 마차를 막아 세운 군병들 때문.
“이렇게 갑자기 상행료를 올리는 게 말이 됩니까?”
“싫으면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허... 이렇게 준비를 다 한 걸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
청년은 뒤에 줄줄이 서서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목청을 높였건만... 군병은 못 본 척 한눈만 팔았다.
실랑이가 계속되고, 성문을 오가려는 백성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마차에 타고 있던 노인이 결국 상황을 정리했다.
“됐다. 내어 주거라.”
“아버님!”
청년은 이를 부드득 갈며 눈을 부라렸지만, 이미 결정이 났는데 뭐 어쩌겠는가.
군병은 노인이 내민 은원보를 받고 히히덕거렸고, 청년을 비롯한 마부들은 그 꼴을 보며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통과!”
성문을 막고 있던 길이 열리자 마차무리는 줄줄이 밖으로 나아갔고, 노인의 옆에 앉은 청년은 계속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해도해도 너무하는군요. 세상천지에 상행을 떠나는 상단에게 상행료를 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건을 싣고 와야 그에 맞춰 세금도 내고 그러는 거지, 물건을 사러 가는 데도 돈을 내는 게 말이 되나.
헌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었다.
“그만큼 쪼들리고 있는 거겠지.”
“후...”
청년은 노인의 냉랭한 말에,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화를 가라앉혔다.
“심양파건 요양파건, 확실히 믿을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허나 분이 풀리지 않아 청년은 한소리 내뱉었고.
“듣는 귀가 많다.”
“끄응...”
청년은 노인의 말에 이를 부드득 갈면서도, 주위를 살피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조선의 신도시와 인접한 성과 요새가 요직이라고 하지 않았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의 무역관은 관세만 내면 누구나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지만, 요동이 그 방침을 따를 필요는 없지 않나.
성주와 요새지휘관은 조선으로 가는 상단을 입맛대로 골라서 허가했고, 그 기준은 “누가 더 뇌물을 많이 바치는가?”였지.
그 중에서도 개원의 경우 요동북부 최대무역도시인 만큼, 엄청난 뒷돈이 오가는 요직 중에 요직이었다. 저렇게 하루아침에 상행료를 올려 받아도, 아무 말 못할 정도로 말이다.
“개원이 쇠락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부흥할 방법을 찾아야지... 이렇게 저희만 쪼아댄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노인도 적잖게 마음이 상하긴 했는지, 성에서 멀리 빠져나오자 청년의 말에 동의하며 한소리 하고 말았다.
원래 역사에서의 개원은 요동의 최대무역도시였다.
북으로는 우랑카이 3위와 거래하고, 동으로는 여진 및 조선과 거래하는 마시가 열리던 곳이었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명이 망하고 나서 반짝 성쇠를 누렸다가, 조선이 북방으로 진출하면서 급속하게 쇠락하고 말았다.
주요 고객이었던 여진은 없어졌고, 우랑카이 3위를 비롯한 몽골인들은 조선과 거래하는 걸 선호했으니까.
요동의 물산은 결국 중국본토에서 사온 물건인데, 그것의 경쟁품은 조선산 물건 아닌가. 아무리 중국산이 품질이 좋다한들, 조선산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지는 건 아니었으니... 가격 경쟁력은 조선이 앞서고 있었지.
더 큰 결정타는 무역관에 무역은행이 생기고, 종이돈이라 할 수 있는 무역전표가 통용되기 시작하면서였다.
요동상인은 중국본토에서도 활용되는 은원보로 거래했는데, 몽골인들이 은덩이를 가져다가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들은 비단길을 통해 내다팔 수익성 높은 상품, 아니면 자신들이 써먹을 생필품을 구입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선 조선과 직접 거래하는 게 훨씬 간편하고 쉬웠다.
이렇듯 시장을 상실하고, 경쟁력도 줄어드니 개원의 몰락은 당연한 말.
이젠 북방물산을 사서 중국에 내다 파는 것보다, 조선산 물건을 사서 요동에 파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됐지.
헌데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개원성주는 상인들의 재산을 뜯어먹을 생각밖에 없으니... 속이 답답할 수밖에.
‘생각이 짧은 걸 좋다고 해야할 지, 아니라고 해야할지 모르겠군.’
노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나저나 아버님.”
“...?”
“애써 뚫어놓은 상로가 쓸모가 없게 됐는데 아깝지 않습니까? 몽골인들과 거래하려고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닌데 말이죠.”
“창주로 가는 길이 막혔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더냐. 지금 움직이는 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지.”
“음...”
노인이 미처 말하지 않은 속뜻을 읽어내고선, 청년 또한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선의 강역으론 요동인이든 몽골인이든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다.
창주에서부터 시작된 운송로는 조선군이 시시때때로 순찰을 돌았고, 강역을 넘어오는 경우에는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으니까.
요동상인들은 이걸 교묘하게 이용해서, 조선-요왕부,복여위의 국경 경계지대를 파고들어 창주에 직접 가서 거래하곤 했는데... 그런 꼼수도 이제 끝나고 말았다.
작년부터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던 조선군이 몇 달 전부터 순찰을 훨씬 강화하면서, 아예 국경지대 일대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꽁꽁 막고 있었던 것.
게다가 그에 발맞춰 요왕부와 복여위도 군을 일으키니 마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겹치자, 개원에서 창주로 가는 발길은 뚝 끊어지고 상단은 말머리를 돌려 사주로 향했다.
이들 부자 또한 창주가 아닌 사주가 목적지였으니, 애써 창주를 드나들던 몽골인과 거래를 텄던 게 아깝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
‘전쟁은 확실히 터질 게 분명한데...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감을 못 잡겠군.’
전쟁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고, 상인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지 않나. 모든 조건은 전운이 밀려오는 걸 알리고 있는데, 도무지 언제 어떤 식으로 시작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느냐?”
“예. 다만 조선군이 갑자기 순찰을 강화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사주에 주둔하던 이들은 저희가 보든 말든 신경도 안 썼는데... 갑자기 막고 있으니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조선군이 주둔하기 전에는, 요동인들이 사주 근처를 서성거리며 구경하는 걸 전혀 막지 않았다.
실은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자 봐라. 어때? 조선이 다스리는 땅이 더 좋아보이지? 귀화해라.”라고 꼬드기고 있었던 거지.
심지어 조선군이 북상한 후에도, 사주를 가로지르는 초소태하의 수로정리작업을 훤히 구경하게 놔뒀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게 금지됐다.
“우리에게 과한 요구를 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설마 조선이 그러겠습니까.”
두 부자는 혹여나 누가 들을까 싶어서,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윽고 며칠을 나아가 목적지인 사주에 도착했다.
과연 소문은 사실이었는데... 이들은 오는 길에 순찰을 돌던 조선기병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은 친절하게 무역관까지 안내해줬다. 그게 안내인지, 딴 곳으로 새지 못하고 감시한 건지는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수하들에게 거래를 맡기고, 두 부자는 익숙하게 조선관원을 따라 무역관을 거닐다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옷을 갈아입고 무역관을 빠져나왔다.
조선의 모든 무역관이 그렇듯, 무역관은 도시와 도시를 감싸고 있는 경작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두 부자는 말에 올라타 무역관을 완전히 빠져나와, 느긋하게 경작지를 구경하며 나아갔고... 이윽고 초소태하가 보이는 강가 근처에 멈춰 섰다.
“갑작스레 창주로의 출입을 막아서 놀랐을 거요.”
“아닙니다.”
관원의 말에, 둘 모두 어색한 조선말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갑자기 왜 그러냐!”라고 진작부터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뒷감당이 가능하겠나. 그저 알고도 모르는 척, 묻어가면서 호기심을 죽이는 게 전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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