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챕터57. 진군하다 (5)
그런 둘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선관원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강가 한편을 가리켰다.
강 위로 유독 큰 배가 유유히 나아가고 있었고, 그 뒤로 줄줄이 작은 나룻배들이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 수가 셀수없이 많아서,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할 정도였지.
“저기 보이십니까?”
“음.”
“아...”
둘은 지겹도록 본 물건을 보며, 작게 감탄을 흘렸다.
저걸 못 알아볼 리가 있나. 요동상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던 물건. 조선이 자랑하는 신형조운선이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창주에서 거래를 끝마치고 돌아올 때. 색목인 노예를 싣고 유유히 나아가던 걸 한두번 본 게 아니다. 그때마다 괜히 부러워서, 아랫배를 감싸야 했었지.
헌데... 특이한 건 신형조운선이 아니라, 그 뒤에 끌려가고 있는 수십척의 작은 배들이었다.
“설마...!?”
노인은 왠지 모르게 그 형태가 눈에 익어 머리를 굴리다가, 해답을 찾아내고선 눈을 번쩍 떴다.
“부교입니까?”
“맞습니다.”
“아...!”
“헙!”
부교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두 부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기함을 토해냈다.
부교는 강을 빠르게 건너기 위해 필요한 일회용에 가까운 물건.
‘게다가... 초소태하가 닿는 곳은 요하 아닌가!’
이 말인 즉. 조선군이 곧 움직일 거라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겨울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었구나.’
“이제 시작되는 겁니까?”
“...”
조선관원은 대답 대신 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창주로 가는 길을 막은 것도...?”
“아군이 요서로 진군할 준비를 하는 걸, 요동군이 몰라야 하니까요. 뭐... 사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움직임이니 모를 리는 없겠지만, 언제일지는 모르지 않겠습니까? 접근을 막은 지 벌써 몇 달이 지났으니 더욱 예측하기 힘들겠지요.”
“아...”
둘은 조선이 부린 꼼수 아닌 꼼수에 작게 감탄을 흘렸다.
이건 지금껏 전쟁을 할 것 마냥 변죽만 올리던 것과 연장선이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
‘추수를 앞두고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던가!’
요동에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은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고, 요동군이 더욱더 대비하기 어려울 거라고 추측했다.
지난날 요동을 약탈하던 여진이나 몽골이 늦가을에나 주로 출몰한 건, 당연히 추수한 곡식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빼앗을 것도 없는데 쳐들어오는 건, 그들 입장에서도 헛힘만 쓰는 손해 보는 짓이었지.
요동입장에서도 추수 때에 군을 일으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니다. 농경국가라면 대부분 마찬가지일 거다.
안 그래도 추수 때엔 일손이 많이 필요한데, 병사들을 징집해서 군대로 끌고 가면... 다 된 한해 농사를 마지막에 망치는 꼴 아닌가.
이런 상식 밖의 작전이 가능하다는 건... 조선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처럼, 병사와 농부가 완전히 구별되어 일손이 부족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
“...”
막연히 소문으로만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두 부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침묵을 지켰지만, 이내 곧 낯선 풍경에 상념이 날아가고 말았다.
이들은 무역관을 넘어 조선 강역에 들어와, 사주를 감싸고 있는 경작지까지 와본 적이 없지 않나.
대체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싶은데, 다른 게 있었다.
조선이 언제부터 이렇게 반듯한 걸 좋아했는지 모르겠다만, 눈앞에는 바둑판처럼 규칙적으로 조각나서 개간된 밭이 평원에 꽉 차있었다.
짐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밭두렁은 도로로 활용되고 있었고, 격자무늬를 그리는 도로 사이에는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깊게 파놓은 밭이 위치해 있었다.
유독 깊게 파놓은 이랑과 고랑도 독특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개원 일대에서 기르는 작물과 똑같아 보이는데도 줄기에 달린 낱알은 훨씬 풍성했던 것.
둘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밭을 구경하고 말았다.
“어떻게...?”
개원과 사주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대체 무슨 수로 조선이 일군 밭이 유독 이렇게 풍성한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거름 덕택입니다.”
“아...?”
“음. 들어 보긴 했습니다.”
거름은 농사에 필수적인 물건이니, 농업이 일찍이 발달한 중국에서도 흔히 써왔었다.
다만 인분비료를 비롯한 조선의 거름은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 관리가 되어 왔기에, 요동은 물론 중국본토의 거름보다 훨씬 나은 면이 있었지.
사실 두 부자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정확히 몰랐지만, 돈 냄새를 잘 맡는 요동상인 중에선 조선의 거름을 사다가 팔려는 자들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조선은 북방에서도 쓸게 부족하니, 거름을 수출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또 비슷해 보이지만 품종도 조금씩 다를 겁니다. 요동은 딱히 품종개량에 노력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음...”
“그럴 겁니다.”
조선의 연구는 무식하게 경험칙을 활용해서, 맨땅에 헤딩하며 노가다 반복작업을 되풀이하는 거지만... 이 시대에 이 이상 효과적인 방법이 몇이나 있겠나.
다만 이건 막대한 시간과 비용, 노력이 투자되어야 하니, 일개인이나 상단이 주도해서 할 수 없는 일. 먹고 살기 팍팍한 요동군부는 품종개량이라는 것에, 신경도 못 쓰고 있었지.
“반대로 아국은 비단길을 타고 서방에서 흘러온 여러 작물을 키우고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보이는 저 밀도, 사실 온전한 요동밀이나 조선밀은 아닐 겁니다. 뭐가 얼마나 섞였는지는 사실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말이지요.”
“오...”
“그게 그렇게 되는 거군요.”
조선관원이 자신이 아는 선에서 간략히 설명하자, 둘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나름 귀담아 들었다.
이런저런 작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곳은, 밭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풍차방앗간과 창고.
이건 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놀라진 않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미리 와 있는 사람들을 보자... 흠칫 놀라, 눈썹을 꿈틀거리고 말았다.
십여명의 사람들이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다들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
“그대도...?”
“그대도.”
누군가 피식 웃으며 묻자, 노인 또한 똑같은 말을 하며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자리에 몰래 모여 있는 이들은, 개원에 살고 있는 요동상인들이었기 때문.
정확히 말하면 조선에 회유되어, 첩자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뭔가 그런 낌새가 있긴 했는데... 이렇게 전부다 넘어갔을 줄은 몰랐군.’
노인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빈 의자에 앉아 어색한 분위기에 합류했다.
거의 반수가 넘는 개원의 요동상인들이 조선으로 넘어온 건, 여러 이유가 합쳐진 결과였다.
심양파는 북평부의 패잔병인 요양파를 굴러 들어온 이방인으로 취급했지만, 사실 심양파 또한 굴러들어 온 이방인이었다.
요동에는 원나라 시절에 끌려온 한족들이 살고 있었고, 심양파의 뿌리는 명을 따라서 중국본토에서 넘어온 이들이기 때문.
그들은 요동을 군사지역으로 만들며 권력 및 정치세력을 형성했고, 본래 요동에 살던 한족 토박이들의 머리 위에 앉아 지배했다.
변경 촌구석에 사는 요동출신은 명의 중심과 관료체제에 진출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으니, 하는 수 없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권력과 군력으로 성공할 수 없다면, 남은 건 금력 뿐. 더불어 개원은 북방무역의 중심지로 대두되지 않았나.
몽골인과 함께 살던 경험과 몽골말을 할 줄 아는 걸 무기로 삼아, 요동토박이들은 무역상인으로 변모했다.
헌데 운석핵꿀밤으로 원래 역사는 완전히 사라졌고, 결국 이들은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심양파든 요양파든... 다들 자신들의 뒷주머니를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개원 토박이 상인들을 밀어내고 자신파벌을 밀어주려 노력했으니까.
이런 차별의 세월은 명이 망한 후 지속됐고, 급기야 조선에 밀려 북방무역시장이 작아지자 불공평한 대우는 더욱 심해졌다. “더러워서 진짜 못 해먹겠네!”라고 외치며, 아예 조선에게 붙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다들 같은 심정이었나 보군.”
“말해 뭐할까. 다들 봐서 알지 않나? 우리에게만 뜯어가는 세금이 얼마며, 또 강제로 빼앗은 땅과 가축이 몇인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결국 말라 죽고 말 걸세.”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하자, 사방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흡사 변절한 자신의 정당성을 외치려는 모습처럼 비춰졌지만, 틀린 건 절대 아니다.
천호장 한유를 비롯해 끈 떨어진 장군들은 앞날이 막막한 정도였다면, 이들은 실질적으로 시시각각 가문의 재산이 쭈그러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조선에서 속하는 게, 우리에겐 더 이득이지 않나? 아무리 조선이 낯선 나라여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음...”
“옳은 말일세!”
이들은 조선과 오래 접촉해와서, 조선에 귀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앞으로의 어려움과 과거를 잃어버린다는 불안감을 감수하고서라도 조선에 붙는 게 낫다고 봤다.
그들은 돈을 쫓는 상인이었으니... 요동상인보다 조선상인이 훨씬 가치가 높고, 조선의 정책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삐걱. 창고의 문이 열리며, 낯설면서도 눈에 익은 검은두정갑을 입은 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이야기를 나눴나?”
“예.”
“그렇습니다.”
처음 보는 터라 조선군 장군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굳이 알 필요가 있나. 다들 뭔가 각오를 다진 듯, 눈을 빛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상인들의 단호한 모습을 보며 히죽 웃고선, 장군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자네들은 지금까지 개원과 심양의 정보를 아국에게 제공한 걸로 충분히 할 일을 다 했네. 앞으로의 싸움은 우리가 할 일이지, 자네들이 끼어 들 일이 아니지.”
“어. 음...”
“그런...!?”
속마음을 읽힌 것 같아, 장군의 말에 다들 할 말이 궁색해져서 입을 벙긋거렸다.
“설마 아국이 자네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할 거라고 생각했나?”
“장군...”
“...”
조선군 장군의 말에, 다들 읍을 하며 고개를 숙여댔다.
실제로 이들 중에선 상단의 사병을 동원해서라도, 개원공략에 도움을 줄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으니까.
“대신...”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보자, 상인들 앞에 낯선 물건이 착착 놓였다.
“어떤가? 이만하면 충분히 팔릴 만한 상품 아닌가?”
그들 앞에 놓인 건, 상급품으로 유명한 조선한지를 붉고, 푸른색으로 염색한 등롱燈籠이었다. 등잔대와 같은 물건으로, 들고 다니거나 벽에 걸어서 불을 밝힐 수 있게 도와주는 물건이었지.
“형태는 다르지만 저희도 쓰고 있는 물건이니...”
“색이 퍽 고르고 말끔합니다.”
상인답게 다들 매서운 눈으로 등롱을 살피고선, 만족스런 미소를 흘려댔다.
이걸로 뭘 하자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요동에 없는 물건인 만큼 진짜로 상품가치가 있었다.
“대량으로 구입해간다고 해도 의심할 물건이 아니니, 문제는 없을 걸세.”
“예.”
“그럴 것 같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입이 맞춰진다. 의심은커녕, 이걸 언제부터 팔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다들 쉽게 납득하자, 조선군 장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들 중에선 개원포구에 부두와 창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지? 돌아가서 창고와 부두를 말끔히 정리하면서, 이 등릉을 빼곡하게 달아놓게.”
“...”
“또한 그대들 집이나 상점에도 달아놓으면 좋을 거고.”
“...!”
부연설명이 끝나고 나서서야, 다들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작게 몸을 떨었다.
이 물건이 사실은 조선군을 안내할 표지판이자 등대가 될 거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부두를 언급한 건...’
다들 눈빛으로 재빠르게 의견을 나눴고, 자기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들이 알기론 개원의 요동군은 조선에 대한 방비를 힘겹게 하고는 있지만... 공성에 대비할 뿐, 수로에 대한 방비는 미흡한 걸로 알고 있었다.
개원성 방어를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돈을 뜯겼으니, “대체 뭐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살펴봤었고 분통을 터트렸던 게 한 두 번인가.
방어태세가 엉망인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긴... 부교가 될 나룻배를 대량으로 공수할 정도라면, 당연히 수송선 또한 만들어놨지 않겠나!’
노인은 오면서 봤던 광경을 떠올리며,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 아닌가.
개원과 사주는 직접적으로 강이 이어지지 않아서 배를 이용하지 못하지만, 개원은 청하강이 가로지른다.
그리고 그 청하강은 동쪽에서 발원해 흘러오니, 당연히 조선의 강역에 속해 있었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조선군은 기병이 아니라 수군을 본격적으로 동원할 생각이었어!’
그간 요동이 상대했던 우랑카이 3위와 북원잔당을 막기위해 만들어진 개원성이니, 수로에 대한 방비가 부족한 건 당연한 말.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대략 칠일 후에 아군은 개원을 공략할 걸세. 그대들은 그저 지금처럼 생활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걸세.”
“정말... 그거면 되겠습니까?”
“그러하네. 부두와 창고만 깔끔하게 치워두면 될 걸세. 핑계야 뭐 어려울 것도 없겠지. 자네들 사정이 힘들어지고 있는 건, 개원군병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창고를 채울 물건을 사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걸세.”
“...”
왠지 모르게 협박처럼 들리는 말을 끝으로, 조선군 장군은 더 깊은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비켜줬다.
시간을 되돌려, 조선군이 요서의 변경요새를 공략하기 시작했을 때.
개원에서도 서서히 전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직 여명조차 떠오르지 않아 어두컴컴한 새벽녘에, 어두운 밤 그림자와 물안개에 파묻혀 조용히 이동하는 검은 덩어리가 있었다.
허나 그 덩어리는 한 두 개가 아닌 걸까? 강줄기를 따라 고고하게 흘러가는 덩어리들은 뱀이 꼬리를 물 듯 바짝 달라붙어서 하나가 되어 남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