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 챕터57. 진군하다 (7)
“아무리 화포병이라고 해도, 이렇게 무장이 빈약할 줄은...”
“오히려 화포병이면 더욱 챙겨 입어야 할 텐데?”
“그만큼 개원성주가 뜯어먹었다는 뜻이겠지.”
중대원들은 귓속말을 하듯, 목소리를 낮춰 의견을 나눴다.
화포는 아무나 다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화포병도 나름 정예병 취급을 받아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나.
고대로부터 정예병은 무조건 창칼을 들고 앞장서서 싸우는 이들의 몫.
과거 조선도 화포병과 화약장이 중요한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실무는 노비와 신량역천인들이 담당했었지.
옛 명나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요동도 딱히 다를 건 없었을 거고, 안 그래도 돈만 잡아먹는 화포병들은 더욱더 처지가 박해졌을 거다.
“화포는 없는 걸로 봐서...”
“성벽 위에 있겠네.”
“그럴 겁니다.”
“정리하고 간다.”
“옙!”
중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대원들은 화약통 위에 요동병사들 시체를 서슴없이 올려놓고 자리를 떴다.
저대로 가만 놔두면, 어차피 피에 젖어 화약을 쓸 수가 없게 될 거다.
성벽 아래에서 수성전에 대비해서 준비해 놓았던 간이 화약고를 처리하는 동안, 성벽 위의 중대원들 또한 계속해서 발길을 옮겼다.
순찰을 도는 경계병들을 처리한 후에 잊어먹지 않고 하던 작업은, 웬 이상한 깡통처럼 생긴 물건을 성벽 밖에 설치한 것.
부두의 등롱을 얇은 철통에 담아서 가져왔는데, 철통은 꼭 화로처럼 앞쪽에 여닫을 수 있는 뚜껑이 달려 있었다.
이건 배에서 사용하는 물건이었는데, 캄캄한 밤에 앞에 달린 뚜껑을 여닫으면서 서로 신호를 보내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지.
“다 열었나?”
“예.”
야습을 하는 와중에, 이 물건을 굳이 힘들게 가져온 이유는 딱 하나.
“보이겠지?”
“보일 겁니다.”
중대장과 부하는 서서히 밝아질 듯 말 듯, 하지만 아직도 검은칠을 하고 있는 성 밖 대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쪽에선 저쪽이 보이지 않지만, 저쪽에선 점점이 박혀 있는 불빛이 훤히 보이지 않을까? 그것도 규칙적으로 간격을 맞춰서 빛나는 불빛이니, 놓치는 게 더 힘들 거다.
“그럼 움직이겠군.”
“신호를 보냈으니...”
둘은 다시금 어둠을 굽어보며, 머릿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어나 성으로 밀려오는 상상을 떠올렸다.
특전대는 단순히 강가 주변만 정리를 한 게 아니다.
사주에서 출발한 본대에 앞서서, 특전대가 선발대로 출발해 개원 인근의 모든 초소와 요동병을 정리했다.
특전대는 본래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창설 직후부터 지금까지 위력정찰대의 역할을 해오지 않았나.
전군을 정예화한 지금에 와선 연대병과 특전대원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특기라는 걸 무시할 수 없는 법.
지금도 특전대는 요서와 요동의 모든 길목을 들쑤시며, 변경요새와 요양,심양간의 연락을 차단하고 있을 거다.
‘여기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야.’
계획대로 잘 진행됐다면... 이렇게 특전대원들이 먼저 연락을 차단한 틈을 타서, 사주에서 출발한 본대는 야음을 틈타 손살 같이 달려와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특히나 불빛 신호를 보냈으니, 이제 조용히 성문으로 다가오고 있겠지.’
불빛은 생각보다 먼 거리까지 퍼지기 때문에, 가시거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본대는 성벽 위에서 보낸 신호를 확인했을 거다.
“성문까지 계속 움직인다.”
“예.”
상념을 끝마친 중대장이 명을 내리기 무섭게,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있던 중대병들이 다시 발을 놀렸다.
계속해서 달그림자를 피해 성벽을 내달리자, 성벽 위로 우뚝 솟아 있는 성루가 눈에 들어왔다.
개원도 나름 큰 성답게 3층으로 된 성루가 높게 서 있었고, 살짝 쌀쌀한 추위를 몰아내려는 건지 군데군데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아래로 향해 살피자, 어둠 군데군데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합원 구조를 가진 높은 담벼락 기와 옆으로 뭔가가 흐물흐물 움직이는 게 보이는데, 이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은 없으니 아군일 게 분명했다.
잠시 기다리며 묵묵히 아래를 지켜보자, 이윽고 불빛 신호가 피어올랐다.
오면서 수도 없이 지켜봤던 붉고 푸른 등롱이, 뜬금없이 기와 아래에서 흔들거리며 피어오르고 있다.
“왔군.”
“큰 문제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문제가 생겼으면 난리가 났어도 벌써 났겠지.”
중대장은 목소리를 죽이며 히죽 웃었고, 중대원들 또한 따라서 미소를 머금었다.
‘남은 건 성루를 정리하는 건데...’
그는 힐끔 고개를 들어 성문 바로 위에 위치한 성루를 살펴봤다.
성루는 조선에서도 흔히 있는 물건이니 구조가 딱히 어색할 것도 없고, 돌아다니는 병력 또한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문제라면 저 3층 꼭대기에는 변고를 알릴 징과 북이 있을 거라는 건데...
“그건 막을 수 없겠지?”
“아무래도... 그건 감수를 하고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건 성문을 열고, 사수하는 거니까요.”
“좋아. 준비.”
그는 밑에서 성벽 위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며, 곧장 명을 내렸다.
하나같이 전부 편전을 챙겨서 장전을 끝마치고, 중대장이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적병을 확인.
“쏴라.”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쉐쉐쉑! 안 그래도 잘 보이지도 않는 편전이 어둠에 파묻혀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끅.” “꺽...” “크헉...”
시야각에 나와 있던 적병들은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고, 활을 쏘기 무섭게 일단의 병력이 성루를 향해 달려갔다.
시야가 보이는 곳에서 서성이는 3층 병력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사각에서 쉬고 있던 병력도 분명히 있을 터... 이젠 몰래 움직이는 건 글렀으니 시간 싸움이다.
쾅쾅! 전투도끼를 든 이들이 성루로 들어가는 문을 사정없이 내리 찍었고.
“뭐야!”
“무슨 일이야!?”
“뭔...!?”
성벽 아래에서 쉬고 있던 요동군병들이 화들짝 놀라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 일인가 싶어서 초소에서 나와 성루를 살펴보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비가 쏟아졌다.
쉑쉑쉑! 미로처럼 꼬인 사합원의 담벼락과 골목에 숨어 있던 특전대가 우르르 대로로 쏟아져 나와, 성문을 지키고 있던 요동군병들에게 화살을 쏘아 보낸 것.
한쪽은 어둠에 파묻혀 있고, 한쪽은 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으니... 뭐 어떻게 대응할 틈도 없이, 요동군병의 절반이 단발마의 비명만 내지르고 쓰러졌다.
“돌격!”
“...!”
중대장의 명령에 고함을 내지를 법도 하건만, 대로에 있던 중대원들은 침묵을 유지하고서 발걸음만 힘차게 내딛었다.
어둠속에서 쿵쿵쿵. 달려오는 소리만 들려오자 요동군병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고, 그들이 그렇게 머뭇거리는 순간에도 특전대원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내 어둠이 밀려난 환한 성문 인근에 특전대원들이 등장.
“적이다!”
“적이 기습해 왔다!”
화들짝 놀란 요동군병들이 목청을 높여 외치며, 성문 옆 초소 안으로 들어가 무장을 챙겨오려는 찰나. 쉐에엑! 기다렸다는 듯이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든 파공음이 또 다시 작렬했다.
성벽 위에서 적병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특전대원들이, 성벽 아래를 향해서 화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성문 안쪽에서 한창 싸움이 벌어질 때.
성루로 가는 문을 박살낸 특전대원들 또한 한바탕 강철의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적이다!”
“막아!”
뜬금없는 소음에 놀란 적병들이 무장을 챙겨들고 불을 밝히기 무섭게. 쾅! 굉음과 함께 문이 쪼개지면서 쉐엑! 쪼개진 틈 사이로 화살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끄억.” “헙!”
비명을 내지르며 나자빠지는 적병을 보병군화로 사정없이 짓밟으며, 중대원들은 전투도끼와 짧은 양손쌍검을 들고 요동군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장병기가 단병기를 압도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장소가 협소한 곳에선 단병기가 또 우위를 차지하지 않나. 성루와 같이 좁은 곳에선 그 이점이 확실히 드러났다.
특전대원들은 서로 살짝 거리를 두고 우르르 적병을 향해 달려들었고, 적들은 검은두정갑에 놀라 손발을 허우적거리기도 전에 육편이 되어 쓰러졌다.
퍽퍽! 매섭게 내리 찍힌 전투도끼가 적병의 어깨를 깨부셨고, 그 옆에서 날아든 양손장검이 창을 쥐고 있던 적병의 손목을 아작내 놨다.
“으억!” 쓰러진 적이 비명을 지르건 말건 우악스럽게 밟고 지나갔고, 곧장 다음 적병을 향해 특전대원들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서 삼대일로 적을 몰아쳤다.
적들도 수가 그리 적은 건 아니지만, 뜬금없이 화살세례를 받은 후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칼이 날아드니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쉐엑! 피핑! 판자로 막아 놓은 틈사이로 달빛이 흘러들어오고, 그 빛을 쪼개며 시린 금속날이 빛을 뿌렸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바짝 붙고, 토해내는 숨결이 닿을 정도의 근거리에서 벌어지는 공방전.
갑옷과 살이 뭉개지는 괴음과 날과 날이 부딪치는 파열음이 이어지고... “끄억.” “켁.” 비명소리와 함께 갑자기 침묵이 찾아들었다.
승자는 검은두정갑을 껴입은 이들로, 특전대원은 우르르 쓰러진 요동군병을 내려다보며 “후...”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올라간다!”
“예!”
이젠 더 숨길 것도 없는데, 망설일 것 있나.
거침없이 3층 성루로 향하는 계단을 파고 들었다.
징징! 둥둥! 3층 성루에서 변고를 알아차리고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는 동안. 성문에서 벌어진 전투는 어느덧 끝이 나고 있었다.
부두에서 출발해 사방으로 흩어져서, 성벽 밑을 훑으며 달려온 중대만 넷.
사백에 가까운 병력이 일시에 성문초소를 박살내고, 성문 주변에 세워놓은 목책과 녹각목鹿角木등을 타넘으며 요동군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실력은 물론이고, 병력 수에서조차 밀리고, 자다가 깨서 비몽사몽인 이들이 태반인데...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3층 성루가 함락당하는 동안, 성문 또한 피로 물들었다.
“본대가 온다! 열어라!”
“3소대! 녹각목을 치워라!”
“1소대! 목책으로 옆 골목을 막아!”
성문을 점거하기 무섭게, 각 소대는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며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시체들을 챙겨 성문 옆 골목에 밀어 넣어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고, 녹각목과 목책 또한 방패로 삼아 골목길을 막았다.
성문을 아예 활짝 열고, 닫히지 않게 오히려 걸쇠를 부시고 있자... 두두두. 기다렸던 진동과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본대다!”
“와아!!”
“온다!”
모두는 지겹도록 느낀 땅의 울림을 알아차리고서, 자기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새벽동이 트기 직전에 시작된 야습이었으니, 성문을 점거했을 땐 이미 여명이 시작되어 온 세상이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이 밝아진 탓에, 3층 성루에 올라 망원경으로 성내를 살피고 있던 중대장의 눈에 예상했던 반응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난장판을 피웠는데 야습을 당했다는 걸 모를 리가 있나. 징과 북이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서, 백성들도 다 잠에서 깼을 정도다.
“오는 군요.”
“아무리 긴장이 빠졌어도, 그간 훈련한 게 있으니까.”
“그래도 이제 막 자다 깬 건, 맞는 모양입니다.”
“음.”
둘은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요동군병을 보며 중얼거렸다.
조선군이 북상한지 해가 지났으니, 개원성의 적병들도 수성훈련을 해왔을 게 분명. 다들 한자리에 모여서 취침하고 있었을 테니, 나름 빠르게 반응한 건데...
‘이미 예상한 상황이란 말이지. 차라리 시야가 확보되는 게 더 나아.’
야습의 이점을 잊어버렸음에도, 중대장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야습은 본래 정예한 병사들만이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작전이다.
아무리 전열을 짜고 군진을 이뤄도 결국 창칼이 부딪치는 난전이 되면,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되기 마련이니까.
헌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장막 속에서, 그런 난장판이 벌어진다? 얼마나 개판이 날지는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과거부터 미래까지, 역사 속에서 피아식별을 못해서 아군끼리 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그랬기에 조선군은 오히려 날이 밝을 때를 노렸다.
어차피 날이 밝을 때 싸워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굳이 야습을 해서 불필요한 변수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전에도 말했지만... 인공적인 빛이 전혀 없는, 의지할 거라고는 달빛 밖에 없는 이 시대에, 한밤중에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는 건 미친 짓이다.
그것도 허허벌판도 아닌 밭으로 일군 울퉁불퉁한 경작지를 달리는 건, 더 미친 짓이지.
해서 본대는 소풍이라도 나온 것 마냥 사푼사푼 발걸음을 조심해서, 달구경을 하며 느긋하게 개원성 근처로 다가와서 대기. 그리곤 특전대가 보낸 신호를 확인하고서 움직이고 있었다.
성에 더 빨리 달라붙기 위해선, 오히려 날이 밝는 게 더 안전했던 거지.
“저기!”
“...!”
아니나 다를까. 중대장은 부하의 외침에 성 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성 밖으로 난 대로를 따라 작게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더 빠르겠군?”
“그럴 것 같습니다.”
“모두 준비!”
“준비하라!”
중대장의 외침에 소대장들이 삐빅! 호루라기를 불어가며 특전대원들을 일깨웠고, 다들 성벽 위로 오르거나 성문 근처에 쌓아둔 목책이나 장애물, 기와지붕으로 올라갔다.
성문을 닫을 수 없게 망가뜨린 이상, 이젠 성문 근처에서 길을 막고 있는 게 더 위험하기 때문.
“와아아!”
“성문을 막아라!”
저편에서 요동군병들이 요란하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게 눈에 들어오고,
“...!”
성벽 밖에선 본대에서도 삐죽 튀어나온 선발대가 떠오르는 태양빛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성루에 올라 있는 특전대답게 유독 잘 알아볼 수 있었는데, 기병의 최선두에 서서 달리는 이들은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유독 빛이 번뜩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