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 챕터57. 진군하다 (8)
“설마...?”
중대장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부하를 바라봤고, 부하 또한 살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대... 맞지?”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둘은 전에 봤던 서방의 갑옷을 떠올리며 중얼거렸고... 잠시 기다리고 있자 상상이 현실이 되어 강림했다.
두두두. 활짝 열린 성문을 향해 일단의 기마대가 먼저 도착했고, 그들은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곧장 대로를 따라 달려 나갔다.
중기병의 돌격은 이전에도 꾸준히 있었지만, 요동군병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전신을 강철로 뒤덮어, 떠오르는 햇빛을 온 사방으로 반사하며 달려드는 빛덩어리들. 그 모습은 두려움과 기괴함을 넘어서, 뭔가 경건함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으...!?” “피해라!”
“막아! 막으라고!” “창을 들어라!”
자신들을 향해 빛 덩어리가 정면으로 달려들자, 성문을 향해 오던 개원군병들 사이에서 상반된 명령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대로에서 빠져나와 골목길로 도망치려 하고, 누군가는 자리에 멈춰 서서 장창을 들려하고, 누군가는 계속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 판국에 다들 조선기병에 대응한답시고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장창을 들고 진을 짜고 있었으니... 장창끼리 부딪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엉키고 말았다.
두두두. 멀리서 느껴지던 진동은 이제 발바닥을 넘어 무릎까지 흔들고 있었고, 앞을 쳐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빛덩이는 코앞으로 다가와 시야가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으...헉!”
“도망가라!”
“창을 들어!”
개원군병들의 선두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데, 그들을 향해 묵직한 강철덩어리가 밀려들었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튀어나와야 할 대기병장창은 비 맞은 나뭇가지처럼 머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반대로 기사대가 꼬나든 기병장창은 흔들리지 않고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20보. 10보. 5보.
시시각각 서로를 노리는 창날은 성큼성큼 다가왔고, 누가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버티는지의 싸움이 시작됐는데... 승자는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 대기병장창보다 더 긴 기병장창이었다.
콰콰쾅! 뿔처럼 길게 튀어나온 기병장창이 개원군병의 몸에 박히기 무섭게,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죄다 허공에 살짝 몸이 떠서 뒤쪽에 있던 병사들과 충돌했다.
기병장창은 부서져 나뭇조각으로 화해 먼지구름처럼 터져나갔고, 그에 섞여 찢어진 살점조각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함께 날아올랐다.
“억!” “크헉!” 아아악!“
흡사 돌덩이가 굴러와 깔리면 이런 꼴이 되지 않을까.
기사대는 갑옷을 입었던 안 입었던 가리지 않고 뭉개버렸고, 전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적병을 옆으로 밀어내며 계속 질주를 이어갔다.
한차례의 충돌로 돌파력이 약해졌지만, 반대로 그만큼 적들의 전열 또한 무너진 건 마찬가지.
서로 어깨를 바짝 붙이고, 물 셀 틈 없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어야 장창진이 완성되는데... 이래서야 제대로 막을 수나 있을까.
선두 전열의 구멍 난 빈틈으로 기사대는 계속 파고 들었고... 그들은 시체에 박혀서 뽑을 수도 없는 기병장창을 던져버리고, 손에 익어도 너무 익어버린 무기를 꺼내들었다.
지금껏 이어온 전쟁에서 언제나 효용을 발휘했던 무기.
기병용 편곤이 기사대의 손에 들렸고, 이내 곧 살풀이처럼 윙윙! 편곤자루가 돌아가는 소리가 전장을 채워나갔다.
“퍽!” “끄억!” 어디로 맞든 맞으면 무조건 전투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편곤의 공격이 이어지자, 안 그래도 찢어진 전열이 더욱더 깊게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몇몇 용기 있는 적병이 정신을 차리고 창으로 기사를 찔러봤지만, 캉캉! 그들이 들고 있던 창날은 판금갑옷을 뚫지 못하고 갑옷의 반사각을 따라 창날이 미끄러졌다.
“헉!” “이게 무슨!”
갑옷에 닿기는커녕 아예 미끄러져서 창을 놓쳐버린 적병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고, 실패에 대한 대가는 징벌로 찾아왔다.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 서방식 투구가 아닌 조선식 투구를 쓰고 있는 기사대원이 사정없이 눈을 부라리며 편곤을 휘둘렀으니까.
부웅! 어디서 날아오는 건지도 모를 편곤의 자편이 날아와, 엉거주춤하게 기사대원을 올려다보고 있던 적병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퍼퍽! 또 다시 머리가 뭉개져 적병은 쓰러졌고, 기사대원이 날뛰는 모든 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투에 돌입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개원군병은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아침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강철덩어리를 향해 계속 창날을 찔러 넣었지만...
어김없이 헛손질이 되어 캉캉! 파공음만 남기며 죄다 튕겨나갔다.
“히이익!” “괴물이다!”
그야말로 무적의 기병처럼 보일지경이니, 적들은 혼비박산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뒤엉키기 시작했다.
기사를 상대하려면 낙마를 시켜 움직임을 봉쇄한 후에 때려잡든가, 아니면 갑옷의 약점이자 빈틈이라 할 수 있는 겨드랑이와 안면을 공격해야 하는데... 개원군병은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기병을 처음 상대해 보지 않나.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적의 상대를 만난 것 같아서, 완전히 기가 꺾여 저항의지를 잃은 모습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지난날 남방원주민들이 화약무기를 보며 벼락을 부르는 무기라고 외치며 기가 꺾여버린 것처럼, 개원군병은 난생처음 보는 판금갑옷에 제대로 심리적인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이렇게 의지가 꺾여버리면, 당연히 몸도 꺾여버리기 마련.
기병장창 돌격으로 선두는 완전히 뒤로 밀려나 눌린 고깃덩어리가 됐는데, 그 뒤를 이어 최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이 편곤에 맞아 육편이 되어 쓰러졌다.
이러는 동안에도 전열을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는데, 정작 대로를 잔뜩 채운 채 진군하는 후열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저 들리는 거라곤 비명과 신음소리가 전부였으니,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가 축축해지고 두려움에 물들 수밖에.
그럼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앞에서는 깔리고 뒤에서는 미는 형국이 펼쳐지자, 중간에 껴 있던 제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압착되고 있었다.
“으으!”
“뒤로 가라!”
“제대를 유지해!”
중간에 낀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지만, 온 사방이 개판이 된 상황에서 제대로 들릴 리가 있나.
자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소리가 터지고 있었다.
그렇게 중앙에 낀 병사들은 대기병장창을 세우긴 커녕,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바짝 붙어버렸고, 전열과 제대는커녕 그저 한 덩어리로 뭉친 형국으로 변해버렸다.
“크헉.”
“으어억!”
그렇게 전후 제대가 서로를 짓누르며 앞으로 나아가자, 대로 옆 골목길로 튕겨나간 병사들이 부지기수.
그들은 뭐 해보지도 못하고 인력의 파도에 휩쓸려 깔렸고, 동료가 뭔 꼴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짓누르는 힘은 이어져갔다.
이런 모습은 대로를 가득채운 모든 제대에서 발생하고 있었으니, 정작 기사대에게 죽은 개원군병보다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찢기고 깔려서 전투능력을 상실한 군병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기사대가 전장에 먼저 도착해, 전열을 휩쓸며 시간을 버는 동안.
“와아아!” “부웅!” “삐빅!” 꽁무리를 잡고 바로 뒤따라온 기병들이 속속 성문으로 입성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요란스럽게 울리는 호각소리와 함께, 중대 깃발이 함께 휘날리며 사방을 찔러댔고.
그 신호를 용케 알아본 연대병들은 머뭇거림도 없이, 명을 따라 개원성 대로와 골목길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
“와...!”
“명불허전이군.”
성문을 열고 성루와 성벽을 장악했으면 자신들의 임무는 모두 끝난 셈.
특전대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며, 기사대의 돌파를 넋을 놓고 구경했다.
기사대가 동원된 건 알고 있었지만, 저들이 벌써 판금갑옷을 실전에 써먹을 줄은 몰랐기 때문.
이들 또한 판금갑옷을 입어봤고, 그 효용성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어찌됐건 저렇게 한자리에 왕창 모여서 돌진하는 걸 보고 있으니, 확실히 뭔가 특별함은 느껴졌다.
연오랑은 착호군을 설립하면서 특수병종을 만들었는데, 그 주인공은 훈련대, 기사대, 특전대다.
칼을 잘 쓰는 이들은 훈련대로, 말을 잘 타는 이들은 기사대로, 위력정찰 및 수색은 특전대에게 맡겼고, 이는 착호군이 군부로 전환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불어 기사대는 완전한 중기병대로 초창기부터 철판을 덧붙여 강화한 두정갑을 입고, 동방의 역사에선 한물 간 기병장창을 랜스로 부활시켜 훈련해 오지 않았나.
이건 본래 서방의 기사들의 훈련법이었으니, 기사대가 판금갑옷을 갖춰 입으면서 진짜 강철기사로 탈바꿈한 상황. 어찌 보면 어중간했던 기사대가 진짜 기사가 되어 제자리를 찾아간 셈이지.
다만... 솔직히 전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큰 차이는 없어보였지만, 심리적인 타격은 확실히 준 걸로 보였다. 적들은 생전 처음 보는 강철기사의 모습에, 혼비백산한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줬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눈이 이끌려 구경하고 있던 중대장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아...! 신호폭죽은?”
“준비가 됐습니다!”
“얼른 쏴라.”
“옙!”
피융! 퍼펑! 난장판이 된 대지에 어울리지 않게, 이제 서서히 태양빛이 삐져나오기 시작하는 하늘에서 주황색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잠시 지켜보고 있자, 저쪽 하늘에서도 퍼펑! 똑같은 모양의 주황색 꽃이 피어나는 게 보였다.
“다행이군.”
“이쪽에 가장 병력이 많았으니, 남문과 서문은 그나마 쉽지 않았겠습니까?”
“첩보가 맞다면 그렇겠지.”
히죽 웃는 부하를 보며, 중대장 또한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폭죽을 군사용으로 쓰는 나라는 조선밖에 없으니, 저 신호는 미리 준비된 신호.
그것도 특전대가 성문을 장악했다는 신호였다.
지금까진 혹여나 적들에게 들킬까봐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전투가 시작됐으면 숨길게 없지 않나.
“남문과 서문에서도 싸움이 벌어졌을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쪽이 더 쉬웠을 겁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개원성은 생각보다 더 크니까요.”
“음.”
부하의 말에 중대장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원성 병력은 외각의 변경요새가 공격받았을 때, 지원을 보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니 병력도 꽤 많아서 오천정도가 있었는데... 문제는 개원성이 커도 너무 크다는 점.
북방무역과 요동북부방어의 핵심도시였으니 당연히 클 수밖에 없고, 이렇게 큰 성은 당연히 성벽도 길어서 수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조선이 북방으로 올라온 지 몇 달이 흘렀는데, 철통같이 지키겠답시고 전 병력을 경계와 순찰 임무에 투입했다면... 알아서 지쳐 나가 떨어졌을 거다.
그랬기에 최소한의 경계병을 두고 예비대를 편성해 대기조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고, 이래서 특전대가 그나마 수월하게 성벽과 성문을 장악할 수 있었던 거지.
또한 개원성 동쪽은 초소태하가 흘러들어오고, 서쪽은 요하의 지류가 성 밖을 지나고 있고, 남쪽은 심양으로 이어지는 직통로다.
적이 가장 먼저 쳐들어올 수 있는 곳은 북쪽성문이었으니, 이곳을 수비하는 병력이 가장 많았는데... 여길 특전대가 장악했을 정도면, 다른 성문은 더 쉽게 장악했을 거다.
“저기 보시죠!”
“...?”
중대장이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부하가 망원경을 들고 저편을 가리켰다.
뭔가 싶어서 봤더니, 골목길 여기저기를 파고든 연대병이, 대로와 성 중심부에서 흘러나오는 개원군병들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파고 들어 뜯어 먹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들 잘 숙지 했나보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생각.
조선은 개원성은 물론이고, 요동의 모든 성에 대한 정보를 몇 년에 걸쳐 수집했다.
작전계획은 몰라도, 병력이 어디 주둔하고, 성내의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는 손바닥 보듯 알고 있지 않나.
연대장을 비롯해 소대장들까지 머리가 깨지도록 그 정보를 달달 외워 됐으니, 딱히 지도가 없어도 각자 목표를 찾아서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병력이 주둔하려면 당연히 건물과 부지가 크기 마련이니, 이건 못 알아보는 게 더 힘들지 않겠나. 연대병들은 적주둔지와 성주가 있는 관아를 향해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첩자상인들이 피어놓은 등롱도, 나름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고 말이야.’
헌데 부하는 다른 생각이 먼저 떠올랐나 보다.
“기습도 기습인데... 기병이라서 시가전을 택한 게 손해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쉽게 되는 것 같은데요?”
“적들도 자기 안방에서 이렇게 개판으로 싸울 줄은 몰랐을 테니까. 특히나 개원군병의 특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
“예. 그런가 봅니다.”
이미 작전을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던 배경이지만, 현실이 되고 보니 더욱 몸으로 느껴졌다.
개원성은 변경요새의 지원역할을 맡았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이들의 주적은 몽골과 여진이었으니, 그에 걸맞은 병종을 보유하고 훈련시켜왔다.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장창병과 기동력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경기병이지.
둘 모두 평원에서의 야전 혹은 성벽을 끼고 싸우는 수성전을 대비해온 병종이라서, 이런 시가전에는 불리하고 미숙하기 마련.
나아가 개원성은 명이 이 땅을 지배한 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는 핵심도시였으니... 시가전을 준비하는 건 솔직히 무리지. 이 시대엔 시가전이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훈련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조선 또한 기병이라서 이들과 딱히 다를 건 없지만... 소규모 난전이 벌어지는 시가전일수록, 개개인의 무장상태와 훈련도가 승패에 크게 작용하는 법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