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 챕터57. 진군하다 (9)
‘게다가 개원성은 가장 북쪽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 아니었나.’
조선신도시와 가까울수록 외부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으니, 이들은 근 십년 넘게 실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병사들 아닌가.
말이 십년이지, 십년이면 강산이 변할 시간이니, 병사들의 수준이 어떨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서, 조선군은 적 안방에서의 싸움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았다.
흘러가는 전황을 살피는 동안, 큼지막한 연대기를 휘날리며 연대 본대가 성문으로 입성했고 곧 익숙한 얼굴이 성루로 올라왔다.
“충성.”
“수고했네.”
환하게 웃는 연대장을 보며 중대장과 특전대원들 모두 경례를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전황은 특별한 게 있나?”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성문은 모두 장악했고, 적들을 몰고 있으니 주둔지와 관아 또한 곧 점령될 것 같습니다.”
“좋군...”
연대장은 특전중대장의 보고를 들으며, 성내에서 점점 더 늘어만 가는 검은 깃발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군이 개원성 공략에 동원한 병력만 무려 5개연대였다.
북쪽성문에만 2개 연대, 나머지 성문에 각각 하나. 그리고 혹시나 병력이 퇴주할 걸 대비해서, 개원성 남쪽을 점거한 연대가 하나 있었지.
조선군의 훈련 상태를 생각하면... 개원성 전체 병력만큼이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는데, 기습작전이 실패하면 그것 자체가 문제다.
“화포를 비롯한 수성병기의 상태는?”
“아군을 대비해서 준비를 해놨더군요. 화포는 아국의 것보다 떨어지니 문제는 없겠지만, 다른 수성병기들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음...”
일반적인 공성전으로 흘러갔으면 이렇게 손쉽게 흘러가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연대장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조선군이라고 해도, 개원성처럼 큰 성에서 공성전을 벌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짜 공성전이 진행되면, 개원군병들 뿐만 아니라 개원백성들도 수비에 동원될 테니까. 아무리 첩자를 심어놨어도, 창칼 앞에는 별 수 없는 법이니... 수적우위도 다 날아가는 거지.
‘화력의 우위가 확연하니 그렇다고 함락을 못 시키는 건 아니었겠지만, 시간이 끌렸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졌을지도.’
연대장은 대계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삼켰다.
조선군은 요동을 향해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이번 총 공격의 궁극적인 목표는 요양과 심양에서 지원을 오기 전에 포위하는 것이었다.
개원 또한 충분한 병력만 지원 오면 공략하기 꽤 까다로운 곳이니, 이렇게 기습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전투는 승리로 굳어질 것 같은데... 후속준비는 어찌되었습니까?”
“착호군이 뒤따라서 오고 있네. 못해도 내일이면 도착하겠지. 그리고...”
특전중대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연대장은 흔쾌히 답을 하고선 연대병에 섞여서 입성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를 가리켰다.
회색두정갑을 입은 이들과 회색가사를 입은 이들이 섞여서, 모르는 사람이 봐도 눈에 확 띄는 무리가 뭉쳐 있었다.
“개원 성통사의 승려들 입니까?”
“그러네. 저들이라면 나름 개원백성들에게 안심을 심어주지 않겠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예...”
‘그래야겠지... 그래야만 하고.’
특전중대장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선은 요양과 심양뿐만 아니라, 요동의 큰 도시에는 조선사찰을 세워 교류를 해왔었다.
요동이 이걸 받아들인 건, 조선과의 정치적 사정을 고려해서였지.
다만 조선불교청의 방침을 따라서 사찰을 도시 내부에 세운 것도 아니고, 도시 밖 산기슭에 세워서 조용히 지내왔으니... 딱히 문제될 만한 일은 없었다.
물론 뒤에선 첩자 회유 및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지만... 물밑에서 진행된 일이라서 일반 백성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저 요동에는 없던 정신적 지주가 있다는 것만으로 반겼었다.
허나 그렇게 잘 지내던 이들이 작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서 성통사는 을씨년스럽게 변했고, 개원의 백성들은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는 걸 몸으로 느끼고서 두려움에 떨어왔었다.
조선과 대립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조선승려들이 야반도주 하듯 자리를 비울 까닭이 없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됐는데... 쉽사리 반길까요?”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됐는데, 반기지 않으면 어쩔 텐가. 게다가 대치해온 시간이 너무 오래됐어. 개원의 백성들 입장에선 우리가 더 밉겠나, 아니면 개원성주를 비롯한 관원들이 더 밉겠나?”
일의 원흉인 조선을 당연히 더 미워해야 정상이지만... 사람이라는 게 당장 불편에 직면하면, 사정을 깊게 따지지 않고 눈앞의 것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나.
그것도 전부터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아무리 현실적으로 대처하기 힘들어도, 개원성의 방비가 예상보다도 허술했던 건 사실. 허면 그 눈먼 돈이 다 어디로 들어갔겠나?”
“...”
모멸을 숨기지 않고 비웃는 연대장의 말에, 중대장 또한 동의하고 말았다.
조선에 회유된 개원상인에게 들은 것처럼... 당장 전쟁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도 사리사욕만 채웠을 정도면, 그 이전에는 오죽했겠나.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게, 탐관오리가 따로 없었을 거다.
“말은 하지 않아서 그렇지, 어쩌면 개원백성들은 아군이 이곳을 점령한 걸 반길 수도 있겠군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특히나 머리만 빠르게 쳐버리면 일은 더욱 쉬워질 거고.”
살짝 피비린내가 나는 말투에, 특전중대장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조선에 회유되지 않은 개원상인들은 심양파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꿀을 빨던 이들.
심양파를 제거하기 위해서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든, 전비를 보충하기 위해서든, 뭐가 됐든 개원의 핵심머리이자 책임자를 처단해야만 했다.
어차피 처리할 것. 지금부터 미리미리 정리하면 민심을 다독일 수도 있을 거고, 그걸 위해서 편하게 표시까지 해놓지 않았나.
등롱을 달지 않은 집안과 가문을 뒤지면, 요동의 충성파라 할 수 있는 이들을 다 잡아 족칠 수 있을 거다.
지휘관들이 북쪽 성루를 임시 지휘소로 삼아 전황을 살피는 동안, 개원성 공략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갔다.
조선군이 시가전을 택한 또 하나의 이유가 제대로 들어 먹혔기 때문.
대병이 한눈에 볼 수 있게 한자리에 뭉쳐 있으면, 없던 자신감도 생기기 마련이다.
또한 상급지휘관이 줄줄이 함께하면, 눈치를 봐서라도 함부로 도망치거나 항복할 수가 없다.
허나 지금은 누가 어디로 갔는지 파악조차 불가하고, 그저 작은 분대별로 정신없이 쪼개져 마구잡이로 도시 내로 흩어졌다.
헌데... 온 사방에서 낯선 조선말이 메아리가 되어 퍼지고 있고, 성벽은 물론이거니와 도시 내에 눈에 보이는 높은 전각에는 전엔 볼 수 없던 검은 깃발이 꽂혀 휘날린다.
잠에서 깨기 무섭게 변란이 터진 걸 알아차린 개원 백성들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어서, 대로와 좁은 골목길에서 도망칠 곳도 없다.
대로와 골목은 미로가 되어 오히려 감옥이 되었는데, 눈앞에는 용맹무쌍하기로 소문난 검은두정갑이 파도가 되어 밀려드니... 뭐 어쩌겠는가.
눈치 볼 것도 없이 전의를 상실하고, 연대병과 마주치기 무섭게 족족 항복한 거지.
제대로 싸운 이들보다,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항복한 이들이 더 많을 정도로. 개원은 머리를 싸매고 준비한 것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조선군기가 꽂히고 말았다.
조선군이 요서의 변경요새와 개원. 그리고 동쪽의 변경요새와 도시를 공략하기 며칠 전.
남쪽에서도 전운이 일고 있었다.
조선과 요동반도는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이남의 해안가 지대는 얼마든지 육로로 이동할 수 있는 대지가 존재했다.
조선과 요동의 접경지대인 이 땅에는 백성들이 살지 않았는데, 이 땅에 정착하려고 들어온 요동인들을 조선군이 재깍 달려와서 죄다 끌고 가버렸기 때문.
해서 요동상인이 상행길로만 이용하곤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허헉!”
“저기...!?”
어느 때처럼 태평하게 마차를 끌고 나아가던 일단의 요동상단. 그들은 뜬금없이 저 멀리 일어나는 먼지구름을 보며, 화들짝 놀라 목청을 높여댔다.
조선은 무역도시로 요동상인이 오는 걸 막지 않았지만, 지금 시절이 위태위태한 건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그간 비어 있던 이 땅에 저런 먼지구름이 일어난다는 건, 조선군 그것도 대大기병대가 움직였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아...!”
“흐으...”
다들 몸을 부르르 떨며,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려는 찰나.
쉐엑! 쉬윅!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화살이 그들의 고민을 끝장내줬다. 순식간에 산그림자를 타고 달려든 일단의 기병대가 그들을 에워쌌으니까.
본대에 앞서 정찰을 나온 특전대는 이런 상황을 오면서 몇 번 겪어봤는지, 능숙하게 상단을 포위하고 압박했다.
“따라와라.”
“...”
어색한 한어로 다짜고짜 명령을 내리지만, 어찌 반항할 수 있을까.
당장이라도 쏠 것마냥 화살을 겨누고 하는 협박이니, 작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고... 상단일행은 곧장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
“정녕!”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애써 떼며 한참을 나아가기 무섭게, 그들 앞으로 성큼 다가온 기병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물결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고, 군데군데 서서 바닷바람을 맞아 휘날리는 군기 또한 셀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선군이 정예한 걸 곧장 알아차렸는데, 깃발의 간격이 어느 한곳도 어긋나지 않고 일정했기 때문.
지축을 흔들 정도로 빠르게 달려 나가는 와중에도 저럴 정도면, 다른 건 더 볼 필요도 없지 않나.
켁켁 거리며 먼지구름을 먹어가면서도, 다들 입을 쩍 벌리고 감탄하고 말았다.
마주치는 모든 요동상인을 억류해서 호주로 끌고 가는 동안, 육군 1개 사단. 오천기병은 요동반도 끝자락 금주를 향해 손살 같이 달려 나갔다.
“잘 따라오는 군요. 아닌가? 우리가 잘 따라가는 걸까요?”
“둘 다겠지.”
사단장 최윤덕은 부사단장의 농담 아닌 농담에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저 멀리 해안가를 향해 망원경을 돌렸다.
‘익히 봐왔지만, 이렇게 보니 또 놀랍군.’
절로 이런 감상이 속에서 흘러나왔다.
저기 해안가에는 임산부의 배처럼 크게 배를 불린 흰돛이, 말 그대로 수면을 가득 채워서 푸른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대충 휙휙 세어 봐도, 백 척이 넘어가는 대함대가 해안을 따라 서진하고 있었다.
그도 남방원정을 떠나는 해군을 몇 번 봐오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함선이 한 번에 움직이는 건 처음 봤다.
‘놀랍고 또 놀랍구나.’
조선이 옛 시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해지고, 강성해진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른 방향에서 돌아보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함을 못 따라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가는 모양입니다.”
“그건 아닐 거야. 저기 보게. 돛을 접은 거 보이나?”
“아... 그렇군요.”
최윤덕의 지적에 부사단장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걸 찾아내고선, 작게 머쓱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지금 조선함대를 유심히 살피면, 살짝 모양이 다른 배가 섞인 걸 찾아낼 수 있었다.
까닭인 즉. 범선인 신형전함 뿐만 아니라, 신형조운선까지 함께 가고 있었기 때문.
사실 판옥선은 미래에 만들어진 물건이지만, 이 시대에 사용하는 대맹선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형조운선은 대맹선의 확대, 개량형인 판옥선을 더욱 키워서, 용골과 대형돛대를 추가한 범선구조를 섞어서 만든 물건이었지.
해서 평저선이지만 완벽한 평저선은 아니었고, 설령 평저선이라고 해도 근해는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지 않나.
해안가를 따라 요동반도로 가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전함의 속도를 따라가는 건 힘들어서, 전함들은 돛을 접고 신형조운선과 속도를 맞춰서 함께 가고 있었다.
“그래도 조운선이 바다를 건너는 걸 보니, 뭔가 감회가 새롭군요.”
“그건 그렇지.”
연배가 비슷한 탓에 같은 감흥이 떠올랐는지, 부사단장과 최윤덕 모두 뭔가 미묘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군.’
과거에는 대맹선이 최고,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고작해야 십여년만에 그런 관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젠 신형전함으로 대표되는 범선이 진짜 함선이고, 대맹선보다도 거대한 신형조운선을 그저 내해, 강에서만 사용하는 함선으로 생각하지 않나.
이렇게 빠르게 과거가 지워질 줄은 그 스스로도 미처 몰랐으니... 보고 있으면서도 알쏭달쏭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대함대와 함께 앞서거니 두서거니 하며 요동반도 끝자락을 향해 나아갔고... 이내 첫 번째 목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기 어설프면서도 나름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그렇군요.”
“여기서부터 금주란 말이지?”
“...!”
최윤덕은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토해내듯 말했고, 부사단장 또한 그 울림이 전달되어 물끄러미 요새를 바라봤다.
저기가 바로 연오랑의 출사가 시작된 곳. 과거 대마도 원정을 감행했을 때, 대마도의 왜구가 공격했던 곳이 바로 저곳이었다.
원래 역사에선 망해과 전투라 해서 요동을 공격한 왜구를 거의 몰살시켰지만, 지금 역사에선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몰살까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명이 망하면서 요동이 혼란했으니까.
아무튼 경과는 원래 역사와 달리 지지부진했지만, 어찌됐건 승리했고... 그 승리의 주역 중 하나가 저 요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