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 챕터57. 진군하다 (10)
“십여년이 넘게 흘렀는데... 어떨 거 같나?”
최윤덕이 조용히 읊조리자, 부사단장은 그의 속내를 읽고선 히죽 웃으며 우려를 날려 보냈다.
그 시절 왜구와 지금의 조선군을 비교하면 쓰나.
나아가 적들 또한 망해과 전투를 경험했던 병사들은 다 노쇠했을 거다.
“병력도 화력도 기세도, 부족한 부분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비교하는 게 민망한 수준입니다. 사단장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말단 병사들부터 코웃음을 칠겁니다.”
“크큭. 그럴 거야.”
“예.”
최윤덕은 다 알면서도 물어보고선, 확답을 듣고 혹시나 싶은 불길함을 떨쳐 보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군은 질서정연하게 꾸준히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완전히 요동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요새 주변에 경작지와 마을이 존재했지만... 조선군이나 요동백성들이나 뭐랄까 긴장감 없이 조용히 스쳐지나갔다.
끝도 안 보이는 검은 물결이 지축을 흔들며 지나가는데, 한줌도 되지 않는 마을주민이 뭘 할 수 있을까.
대항은 꿈도 못 꾸고, 기병대 앞에서 도망친들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보자마자 직감했다.
밭에 나와 있던 마을 주민들은 발에 못이 박힌 듯, 그저 물끄러미 조선군을 보며 주저앉았고... 연대병들은 그들을 힐끔 보고선 요새를 향해 계속 나아갔다.
그리곤 정찰을 돌고 돌아온 특전대가 조용히 마을주민들을 수습하고 정리해, 일상으로 돌려보냈다.
요새는 점점 더 가까워져왔고, 망원경으로 저 먼 요새에서 부산스럽게 병사들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찌할까요?”
“음...”
최윤덕은 명을 기다리는 연대장들을 쓱 훑어보며 되물었다.
“어떨 것 같나? 항복을 청하면, 받아들이겠나?”
“요새에는 회유된 집안의 인물들이 있긴 하겠지만, 지휘관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과거 요양파의 머리였던 유강의 혈족 아닙니까?”
요동반도는 오래전부터 요양파의 권역이었고, 이 요새는 육로로 상행을 떠나는 요동상단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 당연히 콩고물이 떨어지는 꿀단지라서, 요양파 인물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요양파는 심양파와 달리 가진 것이 많으니, 목에 제대로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거다.
특히나 지금 요양파의 지도자인 유호방의 사촌쯤 되는 이라면, 더욱더 그럴 거다.
“싸우지 않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뒤이어서 올 착호군과 금주의 원활한 지배를 위해선 정리해야 할 겁니다. 어차피 병력을 남겨두고 요새를 견제할 바에는, 차라리 그 병력까지 함께 동원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적의 수도를 점령하거나 주요 목표를 처리하는 작전이라면, 빠르게 기동하는 게 더 이치에 맞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요동전역을 완벽하게 장악하려고 하지 않나.
굳이 뒤에 후환거리를 남겨두고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저 요새를 함락시켜 병사들을 포로로 삼으면, 금주를 더 빠르게 장악할 수 있을 겁니다. 어찌됐건 병사들은 금주 백성들이니까요.”
“맞습니다. 지금쯤이면 해군이 금주의 항구와 포구를 공략하고 있을 텐데, 이곳에 병력을 놔두면 변수가 될 겁니다.”
연대장들은 각자의 의견을 토해냈고, 최윤덕은 하나하나 곱씹으며 정리했다.
육군과 함께 내려온 해군은 이미 헤어진 지 오래다.
애초에 배와 기병의 이동속도는 같을 수가 없고, 밤에 숙영을 해야 하는 육군과 달리 배는 밤에도 움직이지 않나.
작전계획에 따라 해군은 요동반도 끝자락의 금주위. 요동반도 안쪽의 복주위. 발해만 안쪽 깊숙한 곳, 태자하, 혼하, 요하의 하류가 만나는 해주위. 요서회랑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광녕위 등으로 각각 이동.
시간차를 두고서, 요동의 모든 항구를 일제히 공격하고 있을 거다.
‘우리보다 더 늦게 출발을 했지만... 이동속도와 거리를 따져보면, 얼추 비슷하게 도착했겠지.’
최윤덕은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며,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봤다.
이 시대엔 통신 기술이 미흡하기 때문에, 작전계획은 굉장히 느슨하게 짤 수밖에 없다. 시간단위는 절대불가하고, 아무리 빨라도 하루 이틀 단위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법.
전령을 보내본다고 한들, 전령이 출발했을 때는 이미 이동을 하고도 남았으니 서로 못 만나는 경우도 허다하지.
하여 출병은 한날 한시에 맞춰서 했어도, 제각각 목표를 가지고 따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연오랑은 연대를 중심으로 독립작전권 비슷한 권한을 내려서,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율권을 준 군대를 만들었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해군은 반드시 공격을 하고 있을 거고... 본주(본계)와 석주(무순)에서 출병한 연대가 요양으로 향하고 있겠지.’
본주와 석주는 요양, 심양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요양, 심양에서 출발할 지원군을 막고, 반대로 변경요새에서 오는 전령을 막기 위해 포진하고 있을 터... 괜히 빠르게 금주를 치겠다고 요새를 지나치면, 대계에 변수가 생겨서 일이 꼬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당장은 금주가 해군에게 공격받고 있을 터, 이곳을 남겨두면 패잔병들끼리 합류할지도 모르니 변수가 더 커질 수도 있겠어.’
최윤덕은 그리 계산을 끝마쳤고, 명을 기다리는 연대장들에게 원하는 답을 던져줬다.
“좋아. 요새를 친다.”
“옛!”
“충성!”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우렁차게 목청을 높였고.
“해군을 부르고, 포격을 시작한다.”
“옙!”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새를 앞에 두고 잠시 멈춰 있던 연대는 벌떼처럼 부르르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적 화포의 사정거리 밖에 포진지를 열심히 만드는 동안에, 연대병들은 생나무들을 잔뜩 잘라와 거대한 모닥불을 만들었다.
그 안에 기름 등의 찌꺼기를 잔뜩 집어넣고 불을 피우자, 화르륵!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렇게 피어난 검은 연기는, 해안가 인근 바다에 둥실둥실 떠 있던 해군 전함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높게 피어올랐다.
애초에 이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나.
연대병이 방열을 끝마쳤을 때 쯤 되자, 신형전함 3척이 좌초를 걱정할 정도로 해안가에 바짝 붙어 요새로 진격.
피융! 퍼펑! 주황색 폭죽이 하늘에서 터지기 무섭게, 일렬로 늘어선 전함의 옆구리가 열리고 불길이 쏟아졌다.
쉬웅! 귀를 찌르는 파공음과 함께, 보이지도 않는 강철덩어리가 날아오고. 퍼펑! 굉음과 함께 요새 귀퉁이에 위치한 포대와 망루가 한꺼번에 박살나서, 파편이 성벽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아악!” “비켜!”
“올라와! 밑에 있다간 다 죽는다!”
“성문을 사수해라!”
지휘관들의 외침은 폭음에 파묻혀 날카롭게 삐져나왔건만, 그런 반항을 파묻어버리려는 듯 또 다시 강철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으으...”
먼지구름을 먹고 입안이 텁텁해진 것도 모르고, 신음만 계속 흘러나왔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요새의 백호장 중 한명인 이혁은 아비규한의 장이 된 요새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 한 곳도 몸을 피할 곳이 없다.
요새 내부의 막사와 관아는 바다 너머에서 날아온 포탄으로 인해 죄다 박살이 났다.
저기 눈앞에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통나무가 날아와 숙소의 벽에 처박혔고, 그 파편에 맞아 사지를 알아볼 수 없게 찢어진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쿵쿵쿵!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성벽을 보고 있자니, 몸이 떨리는 건지 땅이 떨리는 건지 모를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비록 포탄이 성벽을 무너뜨릴 순 없다지만, 사람은 돌과 흙이 아니지 않나.
성벽 위에 올라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성루와 나무로 만든 성벽구조물에 몸을 숨겨 본들,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포탄은 막을 수가 없다.
어쩜 그렇게 골고루 두들겨 팼는지... 성벽 위에는 제대로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고, 성벽 안쪽 벽을 따라서 사체조각과 피내장이 섞여서 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성벽이 이 정도로 망가졌으면 포대는 더 볼 필요도 없는 법.
조선군 화포에 대항해 몇 발 쏴보긴 했건만, 제대로 맞은 건 하나도 없었다.
조선군은 흡사 땅굴을 파서 무덤을 만들 듯이 접근했는데, 이런 방식의 공성전은 또 처음 겪어보지 않나.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포탄을 막기 위한 임시포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뿐일까. 소문만 자자하게 들었던 함포사격을 맞아보니,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넘어서 아예 날아갈 지경이다.
천진공략 이후에도 조선해군은 남방 무역로를 사수하며, 해적들을 상대로 시시콜콜한 소규모 해전을 꾸준히 해왔었다.
해군은 장군전으로 배를 깨부수는 것에 꽤나 깊은 감명을 받았고, 더 화끈하게 적 함선을 박살내기 위해 장군전의 크기를 키우려고 노력했지.
해서 화약생산을 담당한 군수부와 군비를 담당하는 재정부의 눈치를 살살 봐가면서, 함포의 구경을 야금야금 늘려왔던 것.
그 탓에 함포에서 쏴대는 장군전과 포탄은, 야전화포가 쏴대는 포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불어 신형전함 3호기 3척이면 한쪽 측면으로만 포격이 가능해도, 화포의 수는 부족해도 사단 전체의 화력보다 막강하지 않나.
어찌 보면 취약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다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요새는 말 그대로 샌드백이 되어 미친 듯이 처맞고 있었던 거지.
‘성문은...’
이혁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투구를 치켜 올리고 시선을 돌렸다.
먼지구름 너머로 성문이 보이는데... 저게 성문인지 나무쪼가리인지 모르겠다.
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야전화포는 무려 50문. 아무리 구경이 작아도 쇳덩이는 쇳덩이다. 그 위력은 어디가지 않아서, 성문은 벌집마냥 구멍이 송송 뚫려서 겨우 붙어만 있었다.
그냥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부서질 지경이고, 수성을 위해 성문 안쪽에 세워놨던 녹각목과 목책들 또한 성문을 뚫고 들어온 포탄이 이리저리 튕기면서 난장판을 만들어 놨다.
비록 다 부서지진 않았지만, 벼락처럼 이리저리 튕겨나간 포탄으로 인해 그 일대는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이건 아니야.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
그는 다시금 뜻 모를 소리를 하고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성문이 저 지경이 됐으면, 이제 곧 조선군이 밀고 들어올 거다.
이미 성문 밖에 도열한 조선군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나. 평원을 새카맣게 물들일 정도로, 죄다 검은두정갑을 입은 탓에 정말로 새카맣게 변해버린 적진지가 눈에 박힌 지 오래다.
전투가 시작된 지 고작 한시진도 지나지 않았으니, 적 기병은 생생한 걸 넘어서 팔팔할 게 분명. 성벽이 박살나는 순간, 수천기병이 밀고 들어오면 전부 죽은 목숨이다.
‘저들은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고... 나아가 우리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는 뜻 모를 소리를 내뱉고선, 이를 부드득 갈며 각오를 다졌다.
“장백호는 어디 있나!”
“...?”
힘겹게 몸을 일으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봤지만,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온 사방이 굉음으로 가득 찬 터라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병사들은 그저 성벽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선 이 난리가 끝나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제기랄.’
“따라와라!”
“예!”
그는 이 와중에도, 그의 곁에 붙어서 웅크리고 있는 일단의 병사들을 이끌고 몸을 움직였다.
겁도 없이 난장판이 된 성내를 성큼성큼 가로질러갔고.
웅웅! 포탄에 맞을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성벽에 붙어서, 덜덜 떨고 있는 병사를 후려쳤다.
“장백호! 어디 있냐고!”
“저... 저기.”
병사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고, 그쪽에는 그처럼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하늘을 보며 웅크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소홍!”
“혁!”
그가 다가가자, 장백호는 연인을 만난 것 마냥 반겨왔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는다.”
“...”
이혁은 장백호. 장소홍에게 바짝 붙어 귓속말을 날렸다. 그러자 장백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고방은 어딨지?”
“움직이자. 찾자.”
“좋아.”
뭔지 모르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자신이 이끄는 직속부하들을 이끌고 성내를 향해 계속 나아갔다.
이미 성내는 난장판이 된 터라, 그들이 성벽을 이탈해 돌아다니는 걸 보고서도 그 누구도 막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돌아다니는 걸 못 알아차릴 정도로 정신이 없다는 말이 맞을 거다.
다만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고, 요새 안쪽에서 도망치려는 병사들을 마구 두들겨 패며 밀어 넣고 있던 지휘관이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
그런데... 어째 그들이 찾던 인물이었던 걸까? 그는 흙먼지를 먹어 비렁뱅이 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마음을 먹은 건가?”
“고방. 자네도 알지 않나.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을 걸세.”
가까이 붙어 작게 귓속말을 하는 둘을 보며, 고방이라 불린 인물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판국에 아직도 희망을 갖는 건 무리 아닌가.
“시간이 없어. 조선군이 오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네.”
“우리가 이러면, 가문과 집안이 위험한 건 당연히 알 테고... 자네들은 조선이 요동을 집어 삼킬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군.”
“자네도 조선함대가 지나가는 걸 보지 않았나.”
고작 며칠 전에 벌어진 일 아닌가. 백척이 넘는 대함대가 유유히 흘러가는 걸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럼에도 딱히 신경 쓰지 않은 건, 그렇게 요동반도를 지나친 조선함선이 산해관을 두들겨 팬 게 벌써 몇 달째인가.
유독 많은 함선이 움직인 터라 따로 전령을 보내긴 했지만, 그게 전쟁의 신호인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