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 챕터57. 진군하다 (12)
“측정완료!”
바닷물이 잔뜩 묻은 매듭을 확인하며 견사수가 목청을 높이자, 갑판장이 냉큼 달려와 확인하고선 선수루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충성. 여기 있습니다.”
갑판장은 수심과 속도를 측정한 내용을 보고했고, 두 사람. 함대장 윤득홍과 함장 장경은 이야기를 들으며 중앙 돛대에 휘날리고 있는 깃발을 살펴봤다.
“바람도 좋고.”
“물때도 좋군요.”
밀물이 밀려오는 동시에 바람 또한 내륙으로 불고 있으니, 배를 붙이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음...”
둘은 다시금 망원경을 들어, 저 멀리 점처럼 박혀 보일 듯 말듯한 항구를 굽어봤다.
이들의 목표는 과거 광녕중둔위라 불리던 곳. 광녕위의 핵심 거점이 된 광녕성 위쪽으로 지금은 연산, 미래엔 후루다오시라 불리는 곳이었다.
원래 역사에서 광녕위는 꽤 큰 지역을 관할하는 요서의 핵심지역이었다.
고대부터 북방왕조의 수도가 있던 곳이기도 했고, 이 일대는 요,금의 발원지 근방이기도 했지.
하여 요양,심양에 버금갈 정도의 입지를 자랑했고, 명 초창기에는 요동도사가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그 입지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북평부와 대립각을 세웠으니, 요서회랑을 통한 육상으로의 교류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나. 과거 명의 지원이 가장 먼저 이뤄지는 곳에서, 항상 긴장감이 감도는 최전선으로 변한 셈이었다.
더불어 요동의 힘이 약해지고 우랑카이 3위가 독립해 나가자, 광녕위 북쪽 일대의 영향력 또한 덩달아 약해졌다.
이곳은 명나라 시절에도 북원잔당과 우랑카이 3위의 영향력 하에 있던 곳이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명나라가 힘을 집중시켰던 곳 아닌가.
두 조건 모두 악화됐으니, 지금의 광녕위는 원래 역사보다 훨씬 발전이 더뎌지고 영역 또한 줄어들게 된 거지.
“하지만 그래도 연산의 항구와 포구는 발전했겠지?”
“물론입니다. 천진수군에 대비해야 했고, 광녕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해상을 통한 보급을 받는 게 더 편했을 테니까요.”
“음...”
윤득홍은 장경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선 수십년 후에 광녕위에서 서남부 지역이 영원위로 떨어져 나오고, 흥성 일대에 영원성을 지어 산해관에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은 중국본토로 들어올 수 있는 요서회랑의 입구였으니까.
요동을 통해 여진을 견제한다면, 영원성과 광녕위를 통해 몽골을 방어했던 거지.
헌데... 역사가 비틀렸는데도, 이곳은 역사의 흐름을 앞당겨 맞춰나갔다.
지형지물은 수백년 사이에 달라질 게 없고, 요충지는 언제나 요충지 아닌가. 영원성 일대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옛 성터가 남아 있었지.
이곳에 요새와 성이 세워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는데... 다른 점이라면 동쪽에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게 아니라, 서쪽 북평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광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산의 항구는 원래 역사보다 더 빠르고 크게 성장했고, 지금 두 사람이 노리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다른 건 이미 첩보를 통해 알고 있으니 상륙작전은 크게 문제가 없을 텐데... 육군이 어디까지 왔을지 의문이군.”
“변경요새가 있긴 하지만 그리 많지 않고, 그간 요왕부와도 잠잠히 지내왔으니까... 큰 문제없이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겠지.”
둘은 보이지도 않는 저 먼 북쪽을 그리며, 낙관적인 전망을 떠올렸다.
사주에서 출발한 육군은 요왕부 영역을 관통해 요서로 진출해서, 변경요새를 점령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녕위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거다.
요왕부가 길안내를 해줄뿐더러, 동원된 연대의 수가 결코 적지 않으니 광녕위 공략은 실패할 리가 없다.
‘서쪽에서 바로 치면 좋겠지만...’
윤득홍은 그런 생각을 했다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요양, 심양 서쪽에 위치한 요하와 요택의 무서움은, 십수년전 몽골원정 때 몸으로 겪어보지 않았나.
습지와 늪지가 넘쳐나는 그 땅을 건너 서쪽에서 공략하는 건 고단한 일.
과거의 몽골과 미래의 여진이 그랬던 것처럼 북쪽으로 돌아서 광녕위 해안으로 남하한 후에, 여기서부터 해안을 끼고 동쪽으로 진출하는 게 훨씬 편했다.
애초에 이러한 지형의 제약 때문에, 명과 요동이 세운 도시 또한 해안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결론은 우리가 얼마나 빨리 상륙해서 진을 구축하냐는 것이겠지.’
윤득홍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함대는 열을 맞춰 일자진을 이뤘고, 천천히 속도를 올리면서 불빛신호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상륙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뜻이리라.
“함대장님?”
깃발신호와 불빛신호를 확인한 장경이 윤득홍을 부르자.
“상륙을 시작하게.”
그는 이런저런 불안한 상념을 날려버리고, 단호히 명을 내렸다.
“옙!”
“충성!”
부우웅!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지휘기가 중앙돛대에 올라 펄럭이기 시작하자, 함대는 일제히 돛을 펼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중 나오는 군요?”
“저게?”
함장은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며,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
이제 막 허겁지겁 올라타서 열심히 노를 저어 오고 있는 게 보이는데, 어딜 봐서 저게 싸우려는 모습일까.
“에이. 배를 바로 띄우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저 정도면 나름 빠르게 정비한 편이죠.”
“흐응.”
함장은 갑판장의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한때는 천진수군과 투닥거렸던 가락이 남아 있다는 건가?’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
수평선에서 불쑥 치솟아 빠르게 다가오는 대함대는 못 알아볼 수가 없으니, 연산포구에서 정박하고 있던 군선 몇 척이 바다로 나오고 있었다.
조선해군이 산해관을 두들겨 패러 가는 걸 수차례 목격한 탓에,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듯 했는데... 함선의 수가 너무 많고, 오는 방향이 수상쩍다.
싸우진 않더라도 “대체 뭐하는 짓이냐?”라고,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않겠나.
“함장님! 신호입니다!”
망원경으로 쓱 살피고 있는 와중에, 견시병의 우렁찬 목청소리가 갑판을 휩쓸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함대 중앙에 위치한 지휘함을 바라보자, 색을 달리한 깃발이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우리보고 맡으라는 건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함에 비하면 적함은 나룻배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날파리들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그런 날파리를 상대하는 우리는 뭐고?”
“에이. 또 그러신다.”
갑판장은 긴장을 풀려는 듯 헤실헤실 웃어댔고, 함장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젖고선 목청을 높였다.
“화포장! 준비!”
“옙!”
미리 대기하고 있던 화포장은 금세 갑판 밑으로 내려갔고, 이내 곧 굳게 닫혀 있던 포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가까이 붙을까요?”
“일단 한발 쏴 보고나서 가까이 붙어야겠지.”
“예. 사수들도 준비시키겠습니다.”
병사들을 통솔하는 갑판장도 자리를 비켜줬고, 함장은 타륜을 잡은 조타수를 다그치며 속도를 점점 높여갔다.
일열 횡대로 나아가던 함대에서 쾌선 3척이 불쑥 튀어나와, 자신의 주특기를 뽐내기라도 하듯 속도를 높여 앞서 나갔다.
연산항에서 튀어나온 적함은 고작 해야 5척. 그 정도는 쾌선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중국배은 고래로부터 전투함인 누선을 사용해 왔지만, 선수와 선미가 기형적으로 거대한 탓에 강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바다에서 사용하는 전함은 따로 없어서 상선과 크게 다를 게 없었고, 중국의 상선은 형태가 다를 뿐 크기 자체는 조선이 예전에 쓰던 대맹선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 조선입장에선 쾌선이 가장 작은 배였지만, 중국입장에선 이것조차 큰 배였던 거지. 게다가 덩치에 비해 돛이 많이 달려 있는 터라, 속도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횡돛을 접어!”
“4번, 5번 돛을 접어라! 선회한다!”
“옛!” “옛!”
함장의 외침에 갑판 위에 올라 있던 선원들의 손이 바빠졌다.
어린아이 손목만한 돛줄을 사정없이 잡아당기고, 한쪽에선 돛줄이 둘둘 말린 도르래 손잡이를 돌리며 반대쪽 돛을 내렸다.
칼날처럼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던 쾌선이, 흡사 누가 머리채를 잡아 끈 것 마냥 옆으로 누워서 방향을 바꿨다.
측선을 잡기 위해 적함 또한 발버둥을 치려 하는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선수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정신이 없나보군?”
“아군을 멀리서 구경만 했지,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또 처음이지 않습니까.”
사수들을 정렬시킨 갑판장은 어느새 함장 옆으로 와서, 망원경을 들고 적함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적함 화들짝 놀라서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똑같이 사수들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아마 선창에선 노꾼들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쾌선이 갑자기 속도를 높여 옆으로 돌기 시작하자,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화포가 있긴 있군요.”
“음...”
이제 슬슬 가까이 붙은 탓에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었는데, 갑판 위에 덩그러니 올려 있는 쇳덩이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함포를 따라한 건가?”
“요동의 재정과 실력으로 함선 전용 화포를 만드는 건 힘들 거고... 아마 육상에서 쓰던 화포를 실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강남에서도 쉽게 못 봤으니까.”
“예.”
과거 명나라는 화포를 배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을 했더라도 교범을 만들어 통일화시켰다기 보단, 지휘관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편이었지.
명이 바다에서 상대할 적은 왜구.
조선이 “육지에 내리기 전에 바다로 나가서 왜구를 막겠다.”라는 전략을 세운 것에 비해, 명은 돈이 많이 드는 수군보단 차라리 지역방위 육군을 키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엄청나게 넓은 해안선을 수군으로 방어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해서 바다에서의 전투교범은 그리 많지 않았고, 자연히 함선에 화포를 동원하는 것도 제한됐지.
하지만... 요동은 조선이 전함의 함포사격을 활용해서, 천진수군을 비롯한 수많은 적을 분쇄한 걸 직접 목격하지 않았나.
되든 안 되든 당연히 따라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지금 보이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하는지 한번 볼까? 화포장! 사슬탄으로!”
“옙!”
이심전심으로 함장의 생각을 읽어냈고, 화포장은 선창 밑으로 내려가기 무섭게 화포병들을 채근했다.
쾌선은 주로 연락선으로 사용돼서 전함처럼 함포를 많이 싣고 다니진 않지만, 신형전함을 축소시킨 물건으로 얼마든지 전투에 써먹을 수 있는 바.
실제로 남방에서 활동하면서 해적을 토벌할 때. 속도가 훨씬 빠른 쾌선이 전투에 동원된 적이 빈번했었다.
그 경험을 그대로 살려서, 쾌선은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다시금 반대쪽 측면을 잡으며 적함을 향해 다가갔다.
펑펑펑! 적함이 쏜 포탄은 쾌선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한참 부족한 곳에 떨어져 애꿎은 바다만 때렸고, 쾌선은 튀어 오른 물살을 피해 바짝 달라붙었다.
허둥거리며 반전하는 적함의 옆구리가 그대로 노출되자.
“발사!”
콰콰쾅! 화포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3문의 함포가 불을 뿜었다.
쉐에엑! 유성추마냥 포탄 두 개가 사슬로 연결된 사슬탄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갔지만, 펑펑펑!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에 파묻혔다.
“다시!”
“돛대를 노린다!”
허나 초탄에 맞출 거라고 기대조차 안했는지, 포대장이나 함장이나 동요하지 않고 곧장 명령을 이어갔다.
적함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함장의 눈에 적함의 갑판에서 난장판이 벌어지는 게 훤히 들어왔다.
쾌선은 적함보다 갑판이 훨씬 높아서, 아래로 훤히 내려다보이지 않나. 쐈던 화포를 낑낑거리면서 반대쪽 현측으로 옮기는 게, 훤히 보였다.
‘흐음. 그래도...’
저게 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저렇게라도 화포를 쓰려는 모습이 나름 대단하기도 했다. 저것도 함포사용이 배제된 함선에서, 어떻게든 함포를 쏘려고 노력한 결과 아닌가.
‘애초에 양 현측에 함포를 배치했으면 됐겠지만, 전함도 아닌데 불가능 했겠지.’
당장 아까 날아왔던 포탄도 정면에서 날아오지 않았나.
함선 양측에 함포를 배치하는 건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선체가 튼튼하지 않고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 뒤집히기 딱 좋은 방법이다.
이것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함포 전용 함선을 만들어야 가능한 일인데... 지금의 요동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지.
결국 속도가 부족해서 쾌선의 측면을 잡을 수가 없으니, 저렇게 무식한 방법을 동원하는 모양이다.
‘물론 효용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함장이 적 갑판을 보며 구경을 하는 동안에도, 쾌선은 파도를 가르며 계속해서 나아갔고 옆구리를 사선으로 접근하며 다시금 포탄을 토해냈다.
콰콰쾅! 매캐한 회색연기를 헤치며 쾌선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퍼펑! 운 좋게 맞은 사슬탄이 적함의 선수루를 때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포탄이 제대로 틀어박혔는지, 나무파편이 먼지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갑자기 확 속도가 줄며,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마냥 멈춰선 적함.
“가까이 붙는다!”
“옙! 돛 전부 펴!”
“움직여라!”
함장의 명에 갑판장이 복명복창하며 목청을 높이자, 돛줄을 잡고 있던 선원들 모두가 구령을 붙이며 손을 놀렸다.
촤라락! 돛 전체가 몸을 일으키고, 조타병은 큼지막한 타륜을 붙잡고 춤을 추듯 몸을 흔들어 쾌선을 조종했다.
이윽고 적함의 화포 반대편으로 접근하자, 적함에서 발악을 하듯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타다닥. 어찌할지 몰라서 두서없이 쏜 터라 태반이 바다를 때리고 말았지만, 그 중 몇몇은 운 좋게 갑판이나 돛에 틀어박혔다. 허나 함선의 돛이 화살 몇발 맞았다고 속도가 줄을 리가 있나.
“발사!”
콰쾅! 화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었으니, 함포의 정확도는 당연히 올라갔고. 콰쾅! 또 다시 날아간 사슬탄이 빙글빙글 원형을 그리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