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챕터57. 진군하다 (13)
붕붕.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파공음이 닿기 무섭게, 적함에 날아간 사슬탄이 갑판을 휩쓸고 지나갔다.
퍼펑! 현측에 부딪친 사슬탄은 갑판벽을 부수며 파편을 연기처럼 피워냈고, 방향을 잃어버린 탓에 튕기듯 위로 튀어 올라 돛대와 돛을 세로로 길게 찢으며 날뛰었다.
“아악!” “흐헉!”
적들의 모습이 육안으로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서서 그런지, 적들의 비명소리가 귀를 찔러왔다.
함장은 망원경조차 내리고 적함을 살폈고, 사슬탄이 적함을 흔들고 지나간 탓에 적함의 화포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할까요?”
“음...”
똑같이 고개를 내밀고 있던 갑판장 또한 적함의 꼬락서니를 보며 물을 수밖에 없었고, 함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명을 내렸다.
“화포장! 위협사격을 날려라!”
“옙!”
이미 적이 약점을 훤히 드러내고 있으니 마지막 숨통을 끊어줄 법도 하지만, 함장은 아량을 베풀 듯 그런 명령을 내렸다.
허나 갑판장은 그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항복을 받는 게 낫지요?”
“그래야지 뭐. 어찌됐건 저들도 연산의 백성들이니까.”
“예.”
침공을 하는 마당에 이런 걸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이게 현실인데 어쩌겠는가.
저들은 요동군호에 속한 병사들로, 복무하지 않을 때는 고기를 잡거나 연산항구에서 일하는 일반 백성들이다.
조선은 요동정벌에 임함에 있어서 승리는 당연한 거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서로 최소한의 피해로 마무리 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지 않았나.
앞으로를 생각하면 연산을 망가뜨리지 않고 고스라니 집어삼키는 게 최선이니, 적이라고 해서 마구잡이로 잡아 죽이는 건 오히려 악수가 되는 거지.
적함은 정신을 못 차리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고, 쾌선은 놀리기라도 하듯 적함을 비스듬히 스치고 지나가더니 현측을 향해 포탄을 날렸다.
펑펑펑!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물보라가 피어올라 적함의 갑판을 강타해서, 허둥거리던 적들은 바닷물을 얻어맞고 갑판에서 나뒹굴었다.
이렇게 가깝게 붙은 상황에서 못 맞출 리가 없으니, 이건 누가 봐도 빗맞춘 걸 알아차릴 수 있지 않나.
적들의 눈동자는 황망하게 흔들렸고, 쉐에엑! 그들의 의심을 불식시키듯 쾌선에서 날아온 화살이 돛에 우르르 꽂혀 꼬리를 흔들었다.
“항복해라!”
“항복하면 살려준다!”
살짝 어색한 한어가 들려오자, 적함의 갑판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선장을 바라보는데, 이미 하나같이 활을 내리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걸로 봐서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한발 더 쏴!”
“발사!”
적들이 뭉그적거리는 꼴을 가만 놔둘 수 없었는지 함장의 명령이 다시금 떨어졌고, 화포장 또한 속내를 알아차리고 다시금 물벼락을 선사해줬다.
“항복!”
“쏘지 마시오!”
연거푸 물벼락을 얻어맞아 비 맞은 쥐 꼴로 변한 적들에게서 어설픈 조선말이 들려오자, 함장과 갑판장은 빠르게 적함을 살펴나갔다.
아예 도망칠 생각도 없나 보다.
반쯤 찢어져 있던 돛을 완전히 접고 있었고, 선창 밑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던 노도 안으로 쏙 들어갔다.
활을 비롯한 여러 백병전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도, 전부 빈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흔들어댔다.
“확실히 항복할 모양이군?”
“예. 속임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저기 노꾼들도 올라오는 군요.”
혹시나 싶어 잠시 기다리고 있자, 선창 밑에서 갑옷도 없이 허름하게 차려 입은 노꾼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충 세어보니 대략 칠십명 정도 되어보였는데, 저 정도면 저 배에 타고 있는 대부분의 선원이 갑판 위로 올라온 셈.
“가까이 붙어라!”
“옙!” “돛을 내려라!”
갑판장의 후창에 모두는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돛줄을 잡아당겼고, 쾌선은 신난 걸 표현하듯 가볍게 몸을 비틀며 적함을 향해 달라붙었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옆구리로 향하자, 두려움에 휩싸인 적들의 시선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게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 조선함대는 쾌선과 적함의 교전을 무시하고 항구로 직진하고 있는 상황. 적들은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고서, 쾌선과 함대를 번갈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불어 이들의 선택을 더욱 쉽게 해주는 사례 또한 함께 눈에 들어왔다.
쾌선과 대적한 적함 3척을 제외한 나머지 2척. 그들은 그저 무심하게 스쳐가는 신형전함의 위협사격에 바로 겁을 집어먹고서, 교전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백기를 요란하게 흔들고 있었으니까.
“항복하겠나?”
“항복하오!”
쾌선 함장이 어색한 한어로 목청을 높이자, 그에 반대로 적선의 선장은 어색한 조선말로 연거푸 대답을 던졌다.
혹여나 못 알아 들을까봐서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는데, 그 불안감이 전염됐는지 적병들도 병아리처럼 입을 맞춰 어설프게 “항복!”을 외쳐댔다.
쿠쿵... 속도를 줄인 쾌선이 완전히 적선에 달라붙었다. 쾌선이 작다고해도 적선에 비하면 훨씬 갑판이 높은 터라, 적병들은 고개를 치켜들고 위를 바라봤다.
햇빛 때문에 해군병들이 잘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거나 손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러기 무섭게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슬 퍼런 화살촉이 햇빛을 반사하며 사방에서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저 지켜만 보고 있자, 쿠쿵! 쾌선에서 갈고리가 달린 나무판자가 내려와 반쯤 부서져 있는 적선의 갑판벽에 걸렸다.
사다리로 변한 나무판자는 연거푸 떨어져 둘을 완전히 묶었고, 이내 해군병들이 미끄러지듯 나무판자를 타고 내려와 매서운 눈빛을 흘려댔다.
하나같이 빛을 집어삼키는 검은두정갑을 입고, 손에는 딱 봐도 제대로 정련된 양손검과 양손도끼를 쥐고 있으니... 적병들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살피고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한눈에 봐도 조선해군병들의 무장과 자신들의 무장이 차이나지 않나.
선원들 중에선 맨발로 있는 이들이 태반이었는데... 그들은 조선군이 신고 있는 가죽군화를 보며 괜히 부끄러워서, 오줌이 마려운 것 마냥 발을 꼬아댔다.
해군병들이 눈을 부라리며 적병들을 정리하려하자, 박도를 내려놓은 함장이 더듬거리며 앞에 나섰다.
서로 말은 안 통하지만 대충 손짓발짓으로 정리를 이어갔다.
이내 정리가 끝나자 쾌선에서 함장이 내려왔고, 적함의 함장 또한 그를 알아보고선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함장인가?”
“그렇소이다.”
“음.”
쾌선의 함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항복을 받았고, 이내 빠르게 주위를 훑어봤다.
‘다행이 죽은 사람은 없군.’
사슬탄이 옆구리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래도 함선은 함선이다.
포탄 한발 맞았다고 박살나진 않았는지 다친 이들만 구석에 누워 있었고, 적선 또한 당장 침몰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군의관! 치료해줘라.”
“알겠습니다.”
함장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두정갑을 입은 병사가 가죽배낭을 끼고 내려왔다.
“오...?”
“어.”
딱 봐도 튀는 군의관을 어째 알아본 걸까? 적병들 중에선 그를 반기면서, 연신 손짓발짓을 하며 쓰러진 동료를 가리켰다.
“군의관을 아나보군?”
“소문은 익히 들었소이다. 무역관에 가면 의술을 할 줄 아는 병사가 있다고 말이오.”
“흐응.”
함장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의관은 착호군 때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고, 활발하게 대민지원을 하며 활약하지 않았나. 조선의 군의관은 지금까지의 역사에 등장했던 군의와는 확실히 차별점이 있어서,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나 강남원정 때의 활약은 입소문을 타고 사방천지로 퍼져나갔지.
더불어 조선은 요동을 집어삼키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약을 쳐온바.
대민지원하면 빠질 수 없는 게 의료지원이었으니, 군의관은 알게 모르게 무역관에서 활동하며 그 존재감을 각인시켜 왔었다.
“치료를 받겠나?”
“물론이오.”
적선의 함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는 동안 해군병들은 갑판에 널려 있던 무기들을 빠르게 회수해나갔다.
3척의 쾌선 모두 가볍게 적선을 나포하고 있을 때. 함대는 위풍당당하게 연산항구를 향해 나아갔다.
일렬로 쭉 나아가던 함대는 항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살짝 진형을 비틀어 움직였다.
양측면에 각각 위치해 있던 전함들이 속도를 달리하며 종대로 진을 바꾸더니, 슬쩍 거리를 벌리며 항구의 변두리를 향해 뱃머리를 돌린 것.
그리곤 항구에서 살짝 솟아 있는 구릉을 발견하기 무섭게, 속도를 높여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은 아니지만 지난날 요동수군은 천진수군과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여왔었다.
북평부와 요동은 체급차가 확연히 나니, 북평부 입장에선 요동수군을 귀찮게 하는 것만으로도 요동을 말려죽일 수 있었지.
요동 또한 바보는 아닌 터라. 수군만으론 천진수군에 대항할 수 없는 걸 알고 방책을 강구했는데, 그 해답은 당연히 해안포대였다.
간척이 쉽지 않은 이 시대엔 대부분의 포구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만灣에 위치했다.
안으로 움푹 파인 형상을 한 만은 자연히 양쪽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데, 이러한 지형은 화포가 등장하기 전에도 요새와 성보가 세워져 적함이 만 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지.
화포가 등장한 후부터는 완전한 해안포대로 변모하게 됐는데, 지금 전함이 향한 곳이 바로 그 해안포대였다.
그렇게 겁도 없이 해안포대로 접근한 5척의 전함은, 깃발신호가 요란하게 오르내리기 무섭게 일제히 불을 뿜어댔다.
이미 쾌선에서 화포를 쏘면서 전쟁이 터진 걸 모두가 알아차렸지만, 이번 포격의 폭음은 연산백성들의 머릿속을 백지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들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굉음.
그야말로 하늘이 찢어져 우는 것 같은 굉음이 천지에 울려 퍼지더니, 해안포대가 비명을 지르듯 몸을 비틀며 돌먼지를 연기처럼 피워냈다.
“다시! 조준!”
화포장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기 무섭게, 선창은 바빠졌다.
동차를 지탱하는 두툼한 바퀴가 모래를 비비며 뒤로 튕겨 나왔고, 연기가 피어오르기 무섭게 화포병들은 함포 안을 마대걸레로 닦고 재장전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화포병은 동차에 달라붙어, 연신 톱니바퀴 손잡이를 돌려 포각을 수정했다.
이윽고 재장전이 끝나자 두르륵! 밧줄에 지탱해 뒤로 밀려났던 동차는 다시 앞으로 향했고, 포신 앞쪽이 삐죽 선체 밖으로 삐져나왔다.
“발사!”
“발사!”
쾅!쾅쾅쾅! 화포장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수에서부터 파도타기를 하듯 화포는 연이어 불을 뿜어내며 몸을 튕겨냈다.
“음...”
“흐음.”
휙휙. 매캐한 화약연기를 손으로 헤치며, 함대장 윤득홍과 함장 장경은 망원경으로 해안포대를 살피면서 뜻 모를 신음을 흘려댔다.
포연은 둘째 치고, 초탄이라서 제대로 맞은 것도 있고 안 맞은 것도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해안포대의 살을 움푹 파먹은 탓에, 먼지가 잔뜩 피어올라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돌이 아니라 벽돌로 지었나보군.”
“파편이 튀는 꼴로 봐선 그게 맞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천진수군 때문에 새롭게 보수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윤득홍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적들의 움직임은 크게 없군?”
“기습도 기습이거니와... 천진수군이 몰락한지 한참 지나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요동수군을 축소한 여파가 있는 모양입니다.”
천진수군이 있을 때야 먼지 한 톨 묻지 않게 박박 닦았겠지만, 그런 시절이 끝난 지 한참 지났다.
더불어 과거엔 덩치 큰 천진수군에 대응해 요동수군 또한 병력을 한자리에 모아 놨었는데, 지금은 군호가 설정되어 있는 각 항구와 요새로 재배치 시켰다.
전에도 말했듯. 병력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만으로 돈을 까먹기 마련이니, 군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선 잘게 찢어서 사방에 던져 놓는 게 이득이니까.
그 여파인지 몰라도... 확실히 적들의 움직임은 굼떴고, 포대에 진짜로 화포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첩보에 따르면 포대에 화포가 있는 걸로 아는데, 대응포격이 날아오질 않는 군.”
“포대의 위치와 병력은 알 수 있어도, 그 상태까지는 정확히 몰랐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첩자라고 한들 상인들이니, 해안포대까지 가서 살피고 올 순 없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요동군이 부패한 건 유명하지 않습니까.”
“쯧.”
윤득홍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요동군이 요양파와 심양파로 대립하면서, 자기 잇속만 챙기는 걸 누누이 봐오지 않았나. 요동수군을 해산하면서, 얼마나 남겨 먹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
“아군의 함포사격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함장 장경이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콰콰쾅! 또 다시 함포가 불을 뿜으며 전함을 흔들어댔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게, 전함 5척이면 최소로 잡아도 무려 화포 50문이 일제히 포격을 하고 있는 거다.
해안포대에 위치한 화포조차도 채 10문이 안될 텐데, 요동군의 화포보다 앞선 조선화포의 포격을 뭔 수로 버텨내겠나.
저기에 화포병이 있고 화포가 있다고 한들, 미친 듯이 얻어맞으면 반격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거다.
“...”
윤득홍은 고개를 돌려 저 먼 반대편을 바라봤고, 그곳의 해안포대 또한 전함의 포격에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걸 확인했다.
해안포대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위험은 없어보였다.
“상륙은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겠군.”
“예. 해안포대만 무력화시키면 연산성내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으니,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해안포대가 걱정됐던 건, 전함을 향해 대응포격을 하는 게 아니라 상륙하려는 아군함선을 노릴까봐 였다.
그러니 해안포대가 완전히 파괴되든 안 되든, 지금처럼 침묵하고만 있으면 작전은 성공한 셈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