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챕터57. 진군하다 (14)
“좋아.”
윤득홍은 저 앞에서 일제히 노를 저어가며 항구로 질주하고 있는 신형조운선을 보며, 제발 일이 쉽게 풀리기를 기도했다.
윤득홍의 바람처럼, 신형조운선의 선창바닥에 위치한 노꾼들은 둥둥! 심장을 울리는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힘차게 노를 젓고 있었다.
비록 전쟁터에 나왔지만, 이들 해군병은 시도 때도 없이 조선의 수로를 누비며 노를 저어왔지 않나. 이곳이 비록 바다라고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밖에 보이지 않아 두려움에 휩싸일 법도 하건만, 그저 북소리에 맞춰 기계처럼 온몸을 비틀었다.
노꾼들의 활약에 힘입어, 해풍을 받아 돛을 활짝 핀 신형조운선은 무서운 속도로 연산포구를 향해 나아갔다.
신형조운선이라곤 하지만 쌀을 실으면 조운선이고, 사람을 실으면 수송선이요, 물건을 실으면 무역선이지 않나.
해군이 내륙과 근해에서만 활용하는 신형조운선을 굳이 이곳까지 끌고 온 건, 수송선이자 상륙선으로 써먹기 위함이었다.
물론 신형무역선이나 신형전함이 병력을 더 많이 실을 순 있다지만, 상륙을 하려면 아무래도 평저선 형태가 훨씬 낫기 때문.
저들도 포구에 배를 정박하니 수심이 낮진 않겠지만, 조선전함이 오죽 큰 게 아니지 않나. 더불어 병력에 비해 전함이 부족한 탓에, 궁여지책으로 신형조운선을 활용한 까닭도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신형조운선은 우려를 불식시키듯,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연산포구에 힘차게 몸을 비볐다.
“충돌에 대비하라!”
“꽉 잡아라!”
“뭐든지 잡아!”
포구가 손에 닿을 듯 아른거리자 두둥! 우렁찬 북소리가 사방에서 터지고, 부웅! 동시에 뿔나팔 소리 또한 화음을 맞춰 울려 퍼졌다.
“돛을 거둬라!”
함장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포구를 보며 명을 내렸고, 선원들은 재깍 돛을 거둬 속도를 줄였다.
그럼에도 밀물과 함께 밀려온 신형조운선은 관성에 이끌려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쿠쿵... 포구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어선과 군선을 그대로 들이박았다.
찌지직. 나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룻배는 선수에 부딪쳐 튕겨나갔고, 퍼퍽! 덩치가 작은 군선 또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유선형의 선수를 끼고 현측으로 미끄러져 흘러갔다.
선미루의 갑판벽을 꽉 붙잡고 버티고 있는 함장의 눈에, 태풍을 맞은 것 마냥 출렁거리는 적함의 갑판이 눈에 들어왔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갑판에 올라타 있던 적병들이, 우당탕탕 제멋대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아악!” “살려...!”
미처 대비를 못했는지, 아예 갑판 밖으로 튕겨나가 바다에 빠진 적병도 있을 정도였지.
열척의 신형조운선은 그렇게 앞을 가로막는 함선을 몸으로 비비며 포구를 향해 꿰뚫고 들어갔고, 이내 노마저 멈춰 서자 서서히 속도가 줄며 관성으로 움직이기 시작.
“준비!”
“부두다! 몸을 낮춰라!”
속도를 잃고 파도의 힘만으로 부드럽게 나아가자, 쿠쿵...! 드디어 목적지였던 포구 부두에 몸을 비벼댔다.
허나 아무리 속도를 잃어도 배는 그 무게가 있지 않나. 포구에 정박해 있던 나룻배들을 사정없이 짓이기며 멈춰 서자, 우지직. 우지끈.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온 사방이 흔들렸다.
“으...”
“끄으...”
갑판 위에 올라 있던 해군병들은 거의 누운 것 마냥 몸을 바짝 낮추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음에도 눈알이 핑핑 돌며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우악스럽게 포구로 달려와 들이박은 꼴 아닌가.
이미 상륙을 준비하고 대비한 해군병들도 이럴 정도인데, 연산포구에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준비하고 있던 백성들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쿵쿵쿵! 포구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부두를 신형조운선이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고, 밀물에 맞춰 포구 앞 방파제까지 신형조운선이 선수를 비비며 멈춰선 상황.
화포의 굉음에 놀라 도망치던 이들도, 뭔 일이 났나 싶어 구경나온 이들도, 황급히 포구 양쪽에 위치한 해안포대로 향하려던 병사들도.
하나같이 넋이 나가 발이 땅에 묶였다.
조선해군의 뜬금없는 상륙작전을 보고 있자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으니까.
허나 그런 당혹도 잠시. 이들을 현실로 일깨워 광경이 곧장 눈앞에서 펼쳐졌다. 쿵쿵쿵! 성벽처럼 높게 솟은 신형조운선의 갑판벽에서 널빤지가 떨어져 내렸으니까.
“하선!”
“훈련한대로 움직여!”
널빤지가 내려오기 무섭게, 완전무장한 해군병들이 사람 키보다 큰 장창을 들고 재빨리 땅에 발을 디뎠다.
“정렬!”
“1소대!”
삐빅!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퍼지는 동시에, 검은깃발을 앞세운 소대장을 따라 해군병들이 줄줄이 내려와 정렬을 시작했다.
“대응이 약한데요?”
“이렇게 뜬금없이 밀고 들어올 줄은 몰랐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포구로 그냥 들이닥쳤으니까.”
소대장은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귓속말을 날리는 부소대장에게 친절히 답을 던져줬다.
힐끔 고개를 돌려 저편을 가리키자, 저쪽에선 아예 방파제를 타고 곧장 내려오는 해군병들이 보였다.
미래처럼 콘크리트를 활용해 네모반듯하게 부두를 다듬을 순 없지만, 이 시대에도 포구는 어느 정도 간척과 개간을 해서 방파제를 만들어 놓았다. 어찌됐건 파도가 항구 내지로 들어오는 건 막아야 하니까.
헌데 신형조운선의 덩치가 워낙 큰 탓에, 방파제가 지금은 상륙을 쉽게 도와주는 발받침이 된 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상륙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테니, 대비 또한 백지였을 거다.
보통 상륙을 하면 엄폐를 하든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든, 아니면 아예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적이 바로 공세를 퍼부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게 아니지 않나.
해군병은 소대, 중대별로 방진을 만들어, 아예 부두가를 감싸듯 정렬을 끝마쳤다.
그렇게 모든 해군병이 상륙을 완료하고 방어준비를 끝마치자, 드디어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히히힝! 우렁찬 말울음소리와 함께 기병들이 조심조심 널빤지를 타고 배에서 내려왔다.
“후...”
“상태는 괜찮나?”
아무리 짧은 항해라지만, 전마가 사방이 막혀 있는 배를 타고 움직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
부함장 중 한명이 혹시나 싶어서 묻자.
“큰 문제는 없습니다. 땀을 조금 흘리면, 금방 적응할 겁니다.”
“그건 다행이군.”
부함장의 우려를 가볍게 날려버리며, 가장 먼저 땅을 밟은 육군소속 중대장이 히죽 웃으며 가슴을 쿵쿵 때렸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철장갑과 판금갑옷 때문에 유독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고, 부함장은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오기를 부리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추리고 추려서 뽑힌 기사대 아닌가. 그 이름값의 반만 해줘도, 더할 나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기병들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동안, 다른 신형조운선에서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해군병들이 있었다.
“조심! 천천히!”
“손 조심하고! 이쪽으로 옮겨!”
재빨리 망치질을 해서 아예 널빤지를 이어 붙이고선, 밧줄로 묶은 야전화포를 힘을 합쳐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야전화포가 가볍다곤 해도 화포는 화포. 손으로 들고 옮길 수가 없는 물건 아닌가. 해군병들은 돛대를 흡사 기중기처럼 삼아서, 묘기를 부리듯 밧줄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분해된 화포를 내리고 있었다.
이내 곧 기사대 중대와 야전화포가 배에서 내리자, 상륙한 해군병들은 일부 병력만 남겨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반대로 병력을 쏟아낸 신형조운선은 다시 바다로 되돌아갔는데, 그들을 향해 해안포대를 박살낸 신형전함이 달라붙었다.
신형전함에도 병사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도 마저 상륙시켜야 하지 않나.
신형전함은 포구에 바짝 붙어서 포문을 항구로 향하고서 정렬했고, 그 옆으로 다가온 신형조운선에 해군병들은 그물사다리를 타고 줄줄이 넘어갔다.
“군가 시작!”
“하나,둘!”
쿵쿵쿵. 우렁찬 군화소리를 앞세우며 벌써부터 승리의 함성을 외치듯, 먼저 상륙한 해군병들은 군가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이동을 시작했다.
허나 그들이 향한 곳은 연산의 중심부가 아닌 성벽 쪽. 도심으로 향하는 대로에서 빗겨난 해군병들은 무심한 눈을 하고서 기계처럼 걸어 나갔다.
상리를 벗어난 이 기묘한 모습에, 연산 백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비명을 내지르며 어망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이들도 있고, 도망칠 곳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문을 꽁꽁 걸어 잠그며 집에 박힌 이도, 연산 관아를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꽤 많은 연산 백성들은 지금 보이는 모습이 꿈만 같아서, 그저 멀리서 해군병을 지켜만 봤다.
공성전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조선군이 등장했다. 헌데 그들이 살육이나 약탈은커녕, 백성들을 무시하고 행군을 시작하니 영문을 모를 따름.
이 기묘한 분위기는 금세 연산 시내로 안개처럼 퍼져나가서, 백성들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연산 수비군도 사정은 비슷했다.
갑작스런 화포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집된 이들은 중구난방으로 무기를 들고 나섰지만, 대로를 까맣게 가득 채운 해군병을 보며 절로 걸음이 멈춰줬다.
일차로 상륙한 병력만 물경 이천에 가까운데, 이건 연산의 주둔군과 엇비슷한 숫자 아닌가. 거기에 진짜배기들은 이미 배를 타고 나갔다가 항복했거나, 해안포대에 있다가 두들겨 맞은 상황.
“쏴라!”
“발사!”
허겁지겁 달려온 적병들은 조선군과 마주치기 무섭게, 쉐에엑! 일제히 허리를 비틀고 화살을 날리는 걸 보고선 냅다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해군병들이 성벽을 장악하고, 서쪽 성문을 완전히 부수고 성 밖으로 나가는 동안.
부두를 천천히 돌면서 몸을 풀고, 후속 부대가 상륙을 시작하는 걸 확인한 후에, 기병들은 질주를 시작했다.
“가자!”
부웅! 기사대 중대장의 명에 우렁찬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중대원은 곧장 편곤을 꺼내들고 달려 나갔다.
이미 연산에 대한 정보는 숙지한 상태고, 관아의 위치와 병력 수도 얼추 알고 있지 않나.
포장이 되어 있진 않지만 탁 트인 대로는 안내판이나 다름없었기에, 기사대는 머뭇거림 없이 도심으로 향했다. 물론 앞을 가로 막는 이들은 사정없이 분쇄해 들어갔지.
선발대의 목표와 달리, 기사대의 목표는 후발대가 연산 관아를 장악하고 지휘부를 사로잡는 걸 도와주는 것. 이걸 가장 쉽게 해주는 방법은 두려움을 심어주며, 빠르게 머리를 치는 것 아니겠나.
그들은 해군병과 달리 인정사정보지 않고, 말을 몰고 나갔다.
퍽! 궤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게 날아온 편곤은 어설프게 창을 들고 있던 적병의 머리를 후려 갈겼고, “끄억!” 적병은 단발마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풀썩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으억!” “컥!”
“피... 피해라!”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편곤에 맞아 마구잡이로 주저앉는 이들과 전마의 육중한 몸통에 치여 튕겨나간 이들.
두두두. 떨리는 지축과 함께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판금갑옷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이들.
그들 모두가 대로를 중심으로 제멋대로 뒤섞였고, 제대로 된 방진도 꾸리지 못한 적병을 향해 기사대는 송곳처럼 파고들어 중심부를 후벼 팠다.
캉캉! 적들이 마구잡이로 찔러대는 창은 판금갑옷에 튕겨 제멋대로 날아갔고, 중심을 잃은 적병들은 어김없이 날아온 편곤에 맞아 허물어졌다.
마갑을 입힌 전마를 때려보건만, 이렇게 다닥다닥 붙은 와중에는 창에 제대로 힘이 실릴 수가 없는 법. 오히려 전마의 화만 돋웠는지, 콧김을 쉭쉭 내뿜은 전마는 적병의 머리를 사정없이 깨물었다.
“계속 뚫어라!”
“밟고 지나가라!”
카캉! 판금갑옷의 반사각을 이용해 몸을 가볍게 비틀어 창날을 튕겨낸 중대장은, 편곤을 사방팔방 휘몰아치며 목청을 높여댔다.
전열을 돌파해 방진 안으로 들어온 이상, 물반 고기반으로 주변은 온통 적병들뿐이지 않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동료를 제외하면 전부 적이니, 딱 맞추게 좋게 위치해 있는 적병의 머리를 투구채로 우그러뜨렸다.
그렇게 쓰러진 적은 고삐를 잡아당겨, 전마의 말발굽으로 사정없이 짓밟으며 자리를 이동했다. 본래 말은 겁이 많아서 말발굽이 상하는 걸 두려워하지만, 전쟁의 광기에 심취했는지 오히려 중대장의 명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날뛸 지경.
흡사 묘기를 부리듯 엉덩이를 안장에서 떼고 몸을 비틀어대며 창날을 튕겨내는 중대장의 움직임에 맞춰, 전마 또한 잔뜩 흥분해서 입술을 들어 올리고 발길질을 날려댔다.
선두에선 최정예 소대원들의 활약을 본받아, 물밀 듯이 밀려온 후속 기사대원들 또한 그간 고된 훈련의 성과를 마음껏 쏟아냈다.
연산의 병사들이 비록 대기병방진을 익히고 기병에 대항하는 전술을 익혔다지만, 그들의 전술과 교범은 어디까지나 경기병이 주류인 몽골과 여진에 맞춰져 있었다.
물론 그들 또한 만곡도를 들고 근접전을 벌이지만... 기사대처럼, 그것도 동양에 없던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중기병은 아니지 않나.
중기병과 경기병을 상대하는 방법은, 제대간의 포진이나 방진을 꾸린 병사들 개개인의 간격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법.
경기병을 상대하듯 방진을 가볍고 유연하게 짠 이상, 망치처럼 사정없이 뚫고 들어오는 기사대의 돌진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으아악!” “도망쳐라!”
“옆... 옆으로 빠져!” “골목으로 비켜라!”
요란한 비명소리와 함께 선두에서 피바다가 만들어지며 고약한 피냄새가 퍼지기 시작하자, 아직 기사대를 만나지도 못한 후미에선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잔뜩 좁아진 시야로 보이는 거라고는 마구잡이로 하늘로 솟은 장창과 동료의 뒤통수뿐인데, 그곳에서 비명과 함께 빛이 내려와 번뜩이고 있다.
뒤에선 지휘관 또한 손을 벌벌 떨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고, 옆에 서 있는 동료는 동공이 잔뜩 팽창해서 그저 뒤에서 떠미는 힘에 의해 풀린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